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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은 종종 책읽기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하면서 평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부상(浮上)'을 읽는다고 했다. 루스벨트가 1912년 대선에서 의료보험 개혁을 공약했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파울로 코엘료 소설을 쌓아놓고 읽고 싶다"고 했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얼룩진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영혼 치유로 유명한 작가를 내세웠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뒤 반미(反美)에 앞장선 프랑스를 의식했다. 프랑스 작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여름휴가 때 읽겠다고 했다. 언론에선 '그 어려운 소설을 부시가 이해하겠나'라며 비아냥거렸다. 결국 그는 나중에 방송 인터뷰에서 "읽다가 그만뒀다"고 털어놓았다. 대신 수해 지역을 방문해 "수해 대응책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지금 휴가 중인 이명박 대통령은 전자책 단말기를 갖고 갔다고 한다. 책 목록은 밝히지 않았다. 지난해 이 대통령이 읽었다는 '넛지'는 곧 베스트셀러가 됐다. 남자 소변기에 파리를 그려넣었더니 남자들이 파리를 조준한 덕분에 주변에 소변을 흘리지 않았다는 외국 사례 등을 담은 책이다. '팔꿈치로 쿡쿡 찌르기' 방식으로 대중의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겠다는 대통령의 의지 표명이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역사소설 '열국지(列國志)'와 역사서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를 여름 휴가철에 읽을 책으로 추천했다. 박 전 대표가 지난 1일 트위터에서 권한 '열국지'는 중국 주나라 때부터 진나라 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550년 동안 전개된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다. '열국지'는 한국 문단에서도 오랫동안 '삼국지' '수호지' 등과 함께 동양 역사소설의 고전으로 꼽혀왔다. 김구용(1922~2001) 시인이 8년에 걸쳐 완역한 '동주(東周) 열국지'(12권)가 문인들 사이에서 주로 읽혔다.
'열국지'는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질 군웅할거(群雄割據)를 떠올리게 한다. 대선이 지금의 후보 지지율 조사대로 갈지 아닐지는 모르는 일이다. 예상 후보들이 앞으로 '열국지' 못지않게 어떤 '기변백출(奇變百出)'을 빚어낼지 알 수 없다. '열국지'에선 '삼국지'의 의형제 결의나 '수호지'의 의로운 도둑 같은 '대의명분'이 중요하지 않다. 책사(策士)를 잘못 쓰거나 민심을 잃은 군주는 더 강한 군주에게 먹힌다는 '현실 정치' 가르침이 앞선다. 권선징악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이야기다. 물론 '열국지'는 승리한 진나라가 폭정(暴政)을 일삼다가 망한 과정까지 다루면서 역사의 교훈도 일러준다. '힘은 이긴다. 그러나 자고로 오래간 예가 없다. 힘보다 강한 것은 덕(德)이다.'
'열국지'는 춘추전국시대의 겉면만 보여준다. 그 시대 사람들은 권력투쟁만 한 게 아니다. '열국지'를 번역한 김구용 시인은 "춘추전국시대엔 공자·맹자·노자·장자·묵자·순자를 비롯해 법가·병가 등 제자백가가 쏟아져 나와 동양 사상의 황금시대를 열었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2012년 한국판 '열국지'에 출연할 대권 주자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대화에 뿌리를 둔 인문학을 존중하는 정치 지도자라면 소통도 잘한다. 공자는 "정치란 백성들 잘 먹이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이 정부를 믿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