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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평화 운동가들(성원스님이 영어로 쓴 것 번역)
문찬주(성원스님) 영어로 쓰고, 한창호 번역함
이 논문에서 나는 전세계에 걸쳐, 현대의 저명한 불교 평화 운동가들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해당 인물들로는 인도 및 스리랑카 불교, 티벳불교, 버마불교, 태국불교, 베트남 불교, 캄보디아 불교, 중국 및 대만 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미국불교 전통 출신의 개인들이다. 이런 각국의 불교 전통에 입각한 한 분이나 여러 저명한 평화 운동가를 소개하겠다.
인도 및 스리랑카 불교 평화 운동가들
아나가리카 달마팔라(1864-1933)는 불교가 자취를 감춰버린 인도에서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달마팔라는 아시아, 북아메리카, 유럽의 3개 대륙을 다니면서 각 대륙에서 불교를 가르쳤다. 달마팔라는 불교를 위해 독신으로 전업적 활동을 하는 일꾼인 ‘아나가리카’(anagarika) 란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태어난 달마팔라는, 영국 제국주의 지배 아래 크리스천 대학과 콜롬보 아카데미를 다녔다.
한편, 1875년에 블라바츠키 여사와 올콧 대령이 뉴욕에 ‘신지학회’神智學會; Theosophical Society)를 설립했다. 1880년에 두 사람은 실론에 도착해 공식적으로 불교도가 되었다. 올콧 대령은 300개 이상의 불교 미션스쿨을 설립했다. 올콧 대령은 또한 블라바츠키 여사의 제안에 따라 팔리어를 공부했다. 1891년, 올콧 대령은 인도 보디가야에 있는 마하보리 사원으로 순례여행을 떠났다. 회교 군사력 탓에 사원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올콧이 보디가야에 머물렀을 때, 마하보리 사원은 타밀의 시바를 숭배하는 힌두교 성직자 관할 아래 있었다. 그래서 1891년에 올콧은 마하보리 사원에 대한 불교도의 지배권을 회복하고자 스리랑카 콜롬보에 ‘마하보리협회’Mahabodhi Society)를 창설했다. 1892년, 올콧은 협회 사무실을 캘커타로 옮겼다. 이때 앞서 말한 달마팔라가 마하보리 사원의 관할권을 되찾고자 법률 소송을 제기했다. 1949년, 마하보리협회가 사원에 대한 부분적인 관리권을 되찾았다.
1893년에 올콧은 시카고 ‘세계종교의회’에서 불교도 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수십 년 동안 올콧은 지속적으로 여행을 다니며 불교 강연을 했고, 스리랑카에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으며, 인도에 사찰과 사원을 건립했을 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불교 사찰을 건립했다. 올콧은 붓다가 최초로 설법했던 사르나트에도 사찰 하나를 건립했다. 1933년에 비구계를 수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올콧은 69세를 일기로 사르나트에서 서거했다.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1891-1956)는 인도 중부 마디야 프라데쉬 주의 모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도 사회에서 가장 낮은 카스트 계급, 즉 불가촉 천민인 달리트에 속했고, 그가 속한 카스트는 가장 낮은 마하르였다. 암베드카르는 오늘날 인도 신불교 운동이라 불리는 것을 통해, 인도에서 불교 부흥을 도왔다.
1908년, 암베드카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불가촉천민이었다. 1912년, 암베드카르는 봄베이 대학에서 정치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1913-1916년 3년 동안 뉴욕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 인류학, 정치학을 공부했다. 1915년, 암베카르는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16년 박사학위를 받고 뉴욕을 떠나 런던으로 가서 런던 정치경제학 대학원과 그레이즈 인에서 연구를 심화시켰다. 1
917년, 인도로 되돌아왔다가, 1920년에 다시 런던으로 가 자신의 연구를 재개했다. 암베드카르는 1920-1923년 3년 동안 런던대학에서 연구했고,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와 동시에 법학 역시 공부해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1927년에서 1932년까지 다시 인도로 돌아온 암베드카르는 나시크 소재 카라람 사원으로 들어가 마하드의 초우다르 탱크로부터 물을 길을 수 있을, 불가촉천민들의 권리를 얻기 위해 일련의 비폭력 운동을 조직했다. 하층 카스트 행동주의자들은 고대 힌두 법전인 마누법전을 불태웠다. 암베드카르는 마누법전이 불가촉천민에 대한 잔인한 대접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정통 힌두교도는 암베드카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싫어했다.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별개의 유권자 설정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했다. 마하트마 간디와 그가 이끄는 국민의회파는 암베드카르의 주장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간디로서는 대영제국이 카스트에 기반한 힌두교도를 정치적으로 분할시키지 않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1932년에 대영제국은 불가촉천민들을 별개의 유권자로 승인했고, 간디는 이 조치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나중에 간디와 그의 지지자들이 불가촉천민들을 더욱 잘 대변하게 되면서, 암베드카르와 그의 지지자들은 별개의 유권자 자격과 할당몫을 포기했다.
1937년, 암베드카르는 봄베이 입법의회 일원이 되어, 그곳에서 농업노예를 철폐하고자 노력했고,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할 권리를 보호했으며, 산아제한 광고를 옹호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암베드카르는 나치 독일에 반대해 인도 국민이 대영제국 정부를 지지하도록 촉구했다. 1941년, 암베드카르는 ‘방어자문위원회’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42-1946년 4년 동안 노동위원으로서 총독의 집행위원회에 참여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자, 초대 수상인 자와할랄 네루는 암베드카르를 내각의 법무장관에 임명했다. 의회는 헌법 초안을 만들고자 위원회를 설립했고, 위원회는 암베드카르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1948년, 암베드카르는 헌법을 완성해 제헌의회에 회부했다.
1949년, 제헌의회는 극히 약간의 수정만을 거친 뒤 위원회의 헌법안을 채택했다. 암베드카르는 통상 ‘인도 헌법의 아버지’라 불린다. 1951년, 암베드카르는 내각에서 물러나, 1952년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1952년부터 계속해 자신의 주요 관심사를 정치로부터 불교로 옮겼다.
1950년, 암베드카르는 ‘청년불교도협회’Young Men's Buddhist Assoication) 초대로 스리랑카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참석했다. 1954년, 버마를 두 차례 방문했고, 세 번째로 열리는 WFB 대회에 두 번째로 참석했다. 1955년, 암베드카르는 ‘인도불교도협회’Buddhist Society of India)를 창설했고, 푸네 근처 한 사찰에 불상을 봉안했다.
당시 암베드카르는 수천 명의 불가촉천민들에게 인도에서 불교를 포교하는 데 헌신하겠노라 선언했다. 1956년, 암베드카르는 나그푸르에서 전통 의례에 따라 한 불교 승려로부터 정식으로 3귀의(三歸依)와 5계(五戒)를 받았다. 뒤이어 암베드카르는 38만 명의 남녀노소를 불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나크루프와 찬다에서 계속해 개종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암베드카르는 WFB 4차 대회에 참석하러 네팔의 카투만두로 갔는데, 대회에서 “붓다와 칼 마르크스”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델리로 돌아오는 길에, 암베드카르는 베나레스에서 두 차례 연설했고, 붓다가 열반에 든 쿠시나가라를 방문했다. 델리에서 암베드카르는 다양한 불교활동에 참여했으며, 자신의 저서 <<붓다와 칼 마르크스(The Buddha and Karl Marx)>>를 완성했다.
암베드카르는 1956년 12월 6일 서거했다. 공식적으로 보면 불과 7주 동안의 불교도였음에도, 암베드카르의 영향력으로 75만 명의 불가촉천민들이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했다. 그가 사망한 뒤 몇 달 만에 수십만 명이 개종 행렬에 동참했다. 1957년, ‘민중교육협회’People's Education Society)는 암베드카르가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집필했던 걸작 <<붓다와 불법(The Buddha and His Dhamma>>을 출간했다.
A. T. 아리야라트네 (b. 1931)는 스리랑카의 평신도로서 1958년에 사로보다야 쉬라마다나 운동조직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NGO다. 아리야라트네는 날란다 칼리지 전직 고등학교 교사로, 필리핀 에밀로 아귀날도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스리랑카 스리 자야와르덴나푸라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리랑카 비디요다야 대학교에서 경제, 신할라, 교육 학사 학위를 받았다.
아리야라트네는 수백만의 가난한 스리랑카 마을 사람들을 위한 평화행진과 명상을 이끌었다. 아리야라트네는 불교적 관점에 입각한 간디적 접근방식을 채택해, 스리랑카 마을 사람들이 자기네 방식에 따라 평화로운 마을을 조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전개한 운동을 통해, 스리랑카 전역에 걸쳐 1500명의 활동가들이 34개 구역에서 1만 5,000여 마을을 도왔다.
아리야라트네는 불교의 지혜를 스리랑카의 특수한 사정에 맞게 마을 발전에 적용한다. 이 운동은 마을 사람들이 집, 학교, 벽, 지역 보건소, 도서관, 가내공업 등의 건설을 지원한다. 이 운동은 또한 인권을 수호하고, 대체 에너지원과 식량 생산기반을 개발하며, 종교적 관용과 협력을 고취하기 위해 전개된다. 이 운동을 통해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결속되며, 그들 간의 우정이 진작된다. 아리야라트네 박사는 많은 유명한 상을 받았다.
평화 조성과 마을 개발에 대한 공로를 기려 1996년에 간디평화상, 1992년에 니와노 평화상, 1982년에 킹보도인상, 1969년에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한 그밖의 상이 아리야라트네에게 주어졌다. 2004년에 아리야라트네는 국제평화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300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명상 행사를 인도했다. 그의 평화조성 업적, 헤쳐온 난관, 지도력 등에 관한 사항은, 다음 2권의 전기에서 자세히 다루어졌다.
1998년에 구나다사 리야나게가 쓴 <<빵나무 열매 아래서의 혁명(Revolution under the Breadfruit Tree): 사르보다야 쉬라마다나 운동과 발기자 A. T. 아리야라트네 박사(The Story of the Sarvodaya Shramadana Movement and Its Founder Dr A. T. Ariyaratne)>>와 1997년에 프레밀 라트나야카가 쓴 <<평화의 사도(Apostle of Peace)>>가 그것이다.
티벳 불교 평화운동가
제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가쵸 (b. 1935) 성하(聖下)는 티벳 북동부에서 태어났다. 달라이 라마는 이전 달라이 라마 툽텐 가쵸(1876-1933)에 뒤이어 자비로운 신성(神聖)의 대명사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2살 때, 텐진 가쵸는 고인이 된 13대 달라이 라마의 후신으로 인정 받았다.
1939년, 달라이 라마는 라사로 보내졌고, 1940년에 왕위에 올랐다. 달라이 라마는 수석 가정교사인 링 린포체와 차석 가정교사인 트리장 린포체 지도 아래 포탈라궁과 노르부린카 궁에서 교육 받았다. 1954년, 달라이 라마는 모택동의 초대를 받아 중국을 방문했다.
1959년, 중국 정부에 대항하는 시민 봉기가 일어난 지 7일째 되는 날, 달라이 라마는 티벳을 떠나 인도로 갔다. 그때 이래로 제 14대 달라이 라마는 티벳 종교와 국가 지도자로서 인도에서 망명 티벳정부를 이끌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벳 피난민들이 해외에서 정착해 티벳 문화를 보존할 수 있게 도왔다. 달라이 라마는 티벳이 중국으로부터 평화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운동을 전개했다.
여러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달라이 라마가 고통많은 세상에 불교의 지혜를 소개하고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불교 서적을 출간했기 때문이고, 국제적 갈등을 해소하며, 민주주의와 인권 및 정의를 확산시키고,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며, 세계평화 구축에 공헌했기 때문이고, 그밖의 인류애적 문제에 적극 관여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198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버마 불교 평화운동가들
우 탄트(1909-1974)는 버마의 불교도 외교관으로,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제 3대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친한 친구 우 누가 새로이 독립한 버마 정부 초대 수상이 되자, 우 탄트는 1948년에 방송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49년에 정보부장으로 승진했다.
우 탄트는 1951년에서 1957년까지 우 누 수상의 비서실장으로도 재직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유엔 주재 버마 상주대표였다. 196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한 스웨덴 외교관 닥 함마슐트(1905-1961)의 못다 채운 임기 동안 유엔 사무총장으로 역할하게 되었다.
우 탄트는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쿠바 미사일 위기와 콩고 내전을 해결했다. 이어 연임하여 1966년부터 1971년까지 또 한번 유엔 사무총장으로 봉직했다. 우 탄트는 두 번째 임기 동안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강력히 반대했고, 유엔 산하에 많은 개발부서와 환경부서 및 기금과 프로그램을 설립했다.
우 탄트는 또한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고자 애쓰기도 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아랍 나라들과 이스라엘 간의 6일 전쟁, 자유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과 뒤이은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1971년의 인도-파키스탄 전쟁과 뒤이은 방글라데시의 건국을 감시 감독했다. 1972년 새해 벽두, 오스트리아의 쿠르트 발트하임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우 탄트의 뒤를 이었다.
1974년에 우 탄트는 뉴욕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1962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당시 버마 독재자 네 윈 대통령은, 우 탄트를 싫어해 버마에서 어떠한 공식적인 의례나 장례식도 허용치 않았다. 이에 버마의 진보적 학생들은 가두 시위를 조직해 정부의 우 탄트에 대한 적대조치들에 항의했고 버마 내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버마 정부는 학생들을 강경하게 탄압했다.
아웅 산 수 치(b. 1945)는 버마 불교 평신도로, 현재 미얀마로 이름이 바뀐 버마의 민주화 운동가다. 여사는 1991년 군사독재 정부 하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활동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여사의 아버지 보족(대원수) 아웅 산은 버마의 민족적 영웅으로, 1948년 독립된 버마의 창건자로 알려졌다.
보족 아웅 산은 영국과 독립협상을 벌였고, 다양한 종족집단 간 화해를 옹호했다. 1948년 1월 4일의 독립을 앞두고, 1947년에 보족 아웅 산에 반감을 품은 버마 정치가 우 소는 여사의 아버지와 그의 각료 대부분을 암살했다. 여사는 인도와 영국에서 공부했고, 정치와 경제 및 철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여사는 또한 뉴욕 소재 유엔 사무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2년, 여사는 중미와 티벳 및 부탄 관련 유명한 학자인 마이클 벨랑쿠르 아리스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1985년과 1986년 사이 마이클 벨랑쿠르 아리스는 일본 쿄토 대학교 남동 아시아 연구센터에서 연구했고, 1987년에 수치 여사는 심라와 인도 관련 고등학술 연구소 연구원이었다.
1988년, 수치 여사는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버마로 귀국했다. 수치 여사가 1988년에 버마에 있는 동안, 사회주의 여당의 장기 집권자 네윈 장군이 실각했다. 버마인들이 민주화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지만, 폭력적으로 진압당했다. 1988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정치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수치 여사는 민주주의 국민동맹(NLD)이라 불리는 야당 지도자가 되어, 군부가 주도하는 ‘국법과 질서회복 평의회’SLORC)에 반대했다.
1989년, 수치 여사는 가택에 연금되었다. 1990년, 수치 여사가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사가 이끄는 야당은 입법부 의석의 80%를 얻었다. 그러나 군부는 수치 여사와 그녀가 이끄는 정당에 정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여사는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두 아들이 그녀를 대신해 상을 받았다.
유엔과 수많은 국가 단체 및 국제 단체 들은 버마 군부정권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여사를 석방하도록 촉구했다. 노벨 평화상 이외, 여사는 또한 1991년에 유럽의회가 수여하는 ‘사상의 자유를 위한 사하로프상’ 1992년에 유네스코가 수여하는 ‘국제 시몬 볼리바르상’도 받았다. 1995년, 여사는 가택연금에서 풀려났다. 2000년, 군부정권은 다시 여사를 가택연금시켰고 2002년에 풀어주었다.
2003년에 군부정권은 다시 한번 여사를 연금시켰다. 현재, 여사는 가택연금 중이며 여전히 버마 민주주의를 위해 애쓰고 있다(그 뒤 2010년 11월 13일,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여사는 현재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활약 중이다-옮긴이)
태국 불교 평화운동가들
붓다다사 스님(1906-1993)은 문자 그대로 “붓다의 하인”을 뜻하는데, 태국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불교 활동가였다. 1906년, 스님은 태국 남부에서 태어났다. 1927년, 스님은 와트 우본에서 비구계를 수지했고, 방콕의 와트 파툼 콩카에서 더욱 깊이있게 불교를 연구했다.
스님은 방콕의 타락한 불교에 실망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려진 절에서 불교 수행을 시작했다. 1932년, 스님은 태국 남부에 소재한 숲속 절인 와트 수안 모카바라라마('수안 모크'라 불리기도 함)를 설립했고 비파사나(통찰) 명상 수련을 했다.
1993년, 열반에 들기 전, 스님은 절에 ‘국제불법명상센터’International Dharma Hermitage Center)를 설립해 외국 불자들에게 불교를 포교했다. 명상센터는 각국 학생과 방문객 들에게 교수 커리큘럼과 전세계 종교 지도자들의 회동장소를 제공한다.
스님의 뒤를 이은 이들이 스님 사후에 포교원으로 ‘던 키암 모네스테리’Dawn Kiam Monastery)를 설립해 스님 사업을 떠맡았는데, 이 포교원은 다른 나라에서 온 스님들을 훈련시킬 수 있었다. 스님은 1932년에 혁명 지도자 프리디 파노명을 비롯한 급진적 인물들과, 태국에서 1960년대에 화가이자 시인으로 활약한 K. 케마난다와 같은 급진적 사회 활동가와 예술가 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붓다다사는 초교파적 견해를 지녔으므로 어느 종파의 승려가 되기를 거부했다. 붓다다사는 모든 종교가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종파를 초월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붓다다사는 태국불교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니, 태국불교가 개인이 세상에서 이득을 볼 수 있도록 종교적 의례와 의식에 전념한 나머지 진정한 종교적 실천을 등한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붓다다사는 태국불교에서 이루어지는 국내정치 활동을 회피했다. 붓다다사는 아비달마 철학의 여러 범주를 암기하는 것을 비판했는데, 그러한 암기가 진정한 종교수행과 이해로부터 일탈된 것이라는 근거에서였다. 붓다다사는 암기식이 아니라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태국 토착어로 복잡한 불교철학을 설명했다.
술락 시바락사(b. 1933)는 태국 평신도 불교 평화 활동가로, 태국의 사티라코세스-나가프라데파 재단(Sathirakoses Nagapradeepa Foundation) 창립자다. 술락 시바락사는 영국에서 교육받고 1960년에 귀국했다. 출라롱콘 대학과 탐마삿 대학 두 곳에서 가르쳤다.
1963년에서 1969년까지, 명망있는 <사회과학리뷰> 지 편집자였다. 술락 시바락사는 태국 학생들이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사회활동에 참여하도록 촉구했고, 이에 학생들은 1973년에 군부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술락 시바락사가 강하게 영향을 받은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저명한 태국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프리디 파노명, 교수이자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과학기술 전문가 푸에이 우나팍콘,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화 운동가 마하트마 간디, 진보적 태국 불교 개혁가 붓다다사 스님, 저명한 베트남 참여 불교 승려 틱 낫 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E. F. 슈마허, 그리고 쾌이커 교도들이 그들이다.
술락 시바락사는 독재 하의 비민주적 태국 사회를 민주화하기 위해 행사와 단체 들을 조직했다. 환경보호주의를 강력하게 주창해, 특히 마을 경제에 필수적인 지역 숲을 보존하고자 그룹들을 조직했다. 불교도는 사회정의와 평화를 개선하기 위해 내면의 평화를 소흘히 해서는 안된다는 굳은 믿음을 지녔으므로, 술락 시바락사는 태국 민중들이 알아차림, 만족, 연민을 배양할 세미나를 자주 개최했다.
군부 쿠데타로 1976-1978년 2년 동안 강제추방을 당해, 캐나다와 미국 및 유럽을 여행하며 학구적 청중을 상대로 강연했다. 태국 정부는 국왕에 대한 비판과 선동적 견해 표명을 이유로 그를 체포, 기소, 추방했다. 1987년, 달라이 라마 성하, 틱 낫 한과 그밖의 불교 평화 운동가들과 더불어 태국에 ‘국제 참여 불교도 네트워크’International Network of Engaged Buddhists)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평화, 정의, 인권, 성(gender)문제, 초교파적 대화, 민주주의, 환경보호주의 등에 집중한다. 1995년, 술락 시바락사는 자신에게 씌어진 혐의에서 벗어나 사면을 받았다. 1993년과 1994년에 술락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1995년, 술락은 저명한 ‘정명상’正命賞 Right Livelihood Award)을 수상했다.
수마나리 담마난다 비구니 스님은 보통 찻수마른 키빌싱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태국 나컨파톰에 소재한 문자 그대로 “불법을 수지한 여성들의 절”을 뜻하는 송담마칼리아니사(寺)의 주지다. 이 절은 그녀의 어머니 보라마이 카빌싱 비구니 스님이 1960년에 설립했는데, 수마나리 담마난다 스님이 어머니로부터 주지직을 이어받았다.
담마난다 비구니 스님은 인도와 캐나다에서 교육받았고, 저명한 탐마삿 대학교 철학 및 종교학과에서 32년간 가르쳤다. 2001년에 대만 고웅의 보광산 선원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2001년, 스리랑카에서 R. 사다 수마나 비구 스님과 T. 담마로카 비구 스님에게서 사미니계를 받았다.
2003년 스리랑카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태국불교에서 최초로 구족계를 받은 비구니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비구니 서품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도모하고자 애썼고, 불교를 대중들에게 가르치려 노력했다. 태국 정부가 여지껏 비구니 스님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님의 절이 정식으로 등록되지는 못했지만, 부다사피카 재단의 보호 아래 합법적으로 활동한다.
부다사피카 재단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지닌다. “1) 혜택을 못받는 성인 여성과 소녀 들이 더 나은 삶의 질을 향유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2) 여성이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도록 지식과 훈련을 제공하기, (3) 문화적 향상을 진작시키기, (4) 사회의 안녕을 위해 일하고 정부 단체 및 비정부 단체와 협력하기, (5) 정치활동 하지 않기.”이 재단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주요한 사업이 있다. (1) 국제적 여성 불교도 활동을 알리기 위한 <야소달마(Yasodharma)>라는 제목의 분기별 소식지 발간, (2) 붓다사비카라는 이름의 여성 불교도를 위한 단기 훈련사업, (3) 혜택받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불우한 소녀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평화와 사랑의 집”이라 불리는 사업.매 체 산사네 스티라수타는 태국의 비구니 스님으로, 1987년에 방콕 소재 사티라-담마사단 센터를 설립했다.
비구니 스님이 된 지 처음 7년 동안, 스승의 지도 아래 명상 수련을 했다. 센터를 설립한 이후, 매 체 산사네 스님은 어려움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명상과 불법 교육과 같은 주요한 종교적 활동과 음악회, 미술 전람회, 마사지 요법 등과 같은 대중 활동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 제공을 통해서였다. 스님이 전개한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우선 1990년 이래로, 결혼하지 않은 어머니들과 가정폭력으로 고통받았던 여성들을 위한 ‘사이 삼판 하우스’Sai Samphan House)를 운영했다. 둘째로 감옥을 방문하고 수감 중인 임신한 여성들한테 특별한 주목을 기울였다. 셋째로, 사이 삼판 하우스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불우한 아이와 장애 아동 들을 수용했던 지역 유치원을 도왔다. 넷째로, 결혼한 부부가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돌보도록 격려하고 그들에게 요가, 걷기명상, 불법 토론, 마사지와 미술을 가르치는 새로운 프로그램인 ‘지트르 프라파트손 프로젝트’를 확립했다. 다섯째로, 태국 남부지역의 쓰나미 피해자들을 돕는 ‘지혜의 선물’이라 불리는, 지난 15년 동안 지속되었던 사업을 시작했다.
태국 정부는 지역 사회에서 폭력의 악순환을 끝장내려는 매 체 산사네의 탁월한 가르침과 인도주의적 노력에 주목하여 그녀를 여러 직위에 임명했다. 탁월한 업적 탓에, 다른 나라들의 많은 단체들이 매 체 산사네 스님을 자국으로 초대했다. 스님은 세계평화를 위한 초교파적 대화를 나누는 조직인 ‘세계평화 여성계획’Global Peace Initiative of Women)의 공동의장이다.
베트남 불교 평화 운동가들
베트남 연합 불교도 교회(UBCV) 종정(宗正)인 틱 후옌 쾅(b. 1919)은 베트남 빈 딘 지역에서 태어났다. 또 다른 저명한 평화 활동가 틱 쾅 도와 함께, 틱 후옌 쾅은 베트남의 인권과 종교의 자유 및 정의를 위한 UBCV의 비폭력 운동을 이끌었다. 틱 후옌 쾅은 13살에 불교 승려가 되었다.
베트남이 공산국가로 된 지 2년 지난 1977년, UBCV의 2번째 고위 지도자로서 틱 후옌 쾅은 공산정부가 UBCV를 탄압한 85가지 사례를 열거한 편지를 판 반 동 수상에게 보냈다. 1977년, 베트남 정부는 편지를 구실로 그를 체포해, 정부 정책 반대 혐의로 기소했다.
1978년, 법원은 그에게 2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1982년, 베트남 정부는 그를 체포해 쾅가이 지역 소재 호이 푸옥 파고다로 추방했다. 그 해, 2명의 노벨 수상자가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했다. 1982년 이래로 국내 추방을 당하면서 틱 후옌 쾅은 일련의 성명서를 발송했고, 공산당 정부가 통치 방식을 개혁하도록 충고했다.
1992년, 틱 후옌 쾅은 고인이 된 틱 돈 하우 큰스님의 뒤를 이어 UBCV 종정이 되었다. 1994년, 베트남 정부는 호이 푸옥 파고다에 있는 UBCV의 모든 공식 서류와 인장을 몰수했고, 틱 후옌 쾅을 격리된 장소로 보냈다. 틱 후옌 쾅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평화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베트남 불교 승려인 틱 쾅 도(b. 1928)는 베트남의 타이 빈 지역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베트남이 공산국가로 되었을 때, 틱 쾅 도는 UBCV의 고위 지도자였다. 그 때 이래로, 틱 쾅 도는 공산당 정부의 종교자유에 대한 압제조치와 UBCV 재산 몰수에 항거했다.
1977년, 정부는 종교문제에 관한 정부 정책을 방해한다는 혐의로 그와 5명의 UBCV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1981년 정부는 베트남 불교를 엄격한 통제 아래 두기 위한 시도로 ‘베트남 불교도 교회’라 불리는 친정부 단체를 만들었다.
정부는 UBCV를 비합법이라 선포하고, 2명의 저명한 UBCV 지도자인 틱 쾅 도와 틱 후옌 쾅을 체포했고, 그들을 따로 떨어진 지역으로 추방했다. 1992년, 틱 쾅 도는 국내 추방된 상태에서 10년도 더 지난 뒤에야 사이공으로 귀환했다.
1994년, 틱 쾅 도는 공산당 총비서 두 무오이에게 44페이지짜리 문건을 발송했다. 그 문건에서 틱 쾅 도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게 된 이래로 UBCV한테 가해진 박해를 자세히 밝혔다. 1995년, 정부는 그를 체포해 작성한 문건이 비합법적이라는 혐의를 들씌었다.
1995년 후반, 호치민시 인민법정은 “정부 정책을 방해하고 국가 이익을 침해했다는”죄목으로 틱 쾅 도에게 유죄 평결을 내려, 5년 징역형에 처했다. 1998년, 틱 쾅 도가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2000년,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벨기에의 200명 국회의원들이 그를 2000년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했다.
2001년, 틱 쾅 도는 “베트남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호소”방안을 주창했고, 이에 사이공의 탄 민 선원에 가택연금되었다. 2006년, 틱 쾅 도는 노르웨이에서 토로프 라프토 기념상을 받았다. 틱 쾅 도는 현재 UBCV 의장이다.
베트남의 불교승려 틱 낫 한(b. 1926)은 베트남 중부에서 태어났다. 베트남에 있는 동안, 틱 낫 한은 반 한 불교대학 교수였고, 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전쟁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에 진료소를 건설하는 불교도 평화일꾼 조직인 ‘사회봉사를 위한 청년학교’SYSS)를 설립했다.
틱 낫 한은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불교를 가르쳤고, 저명한 미국 시민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설득해 공개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도록 했다. 1969년, 틱 낫 한은 프랑스에 ‘통일 불교도 교회’Unified Buddhist Church)를 설립했다.
1975년, 통일 불교도 교회는 ‘고구마 공동체’Sweet Potatoes Community)를 설립했고, 1982년에 ‘자두마을’Plum Village)을, 1988년에 법운사(法雲寺; Dharma Cloud Temple)와 법즙사(法汁寺; Dharma Juice Temple)를, 1995년에 자애장식사(慈愛裝飾寺; Adornment of Loving Kindness Temple)를 설립했다.
대략 150명의 비구 스님, 비구니 스님, 평신도가 자두마을에서 영구 거주한다. 1994년 이래로 통일불교교회는 활동기반을 미국으로까지 넓혔다. 통일불교교회는 버몬트 우드스탁에 단풍숲 선원(Maple Forest Monastery), 버몬트 하틀랜드-포-코너스의 푸른 산 수행센터(Green Mountain Dharma Center), 버몬트 퀴치의 알아차림 수행센터(Mindfulness Practice Center),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카운티 에스콘디도 소재 사슴공원 선원(Deer Park Monastery)을 설립했다.
틱 낫 한은 수많은 책을 출간했고, 개인적 수준에서와 사회적 수준에서 공히 평화를 진작시키기 위한 많은 세미나를 열었다. 틱 낫 한은 파리평화 회담에서 불교 대표단을 이끌었고, 나중에 프랑스에 자두마을 선원을 설립했다.
2005년, 틱 낫 한은 수천 명의 열성적 지지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로스엔젤레스에서 평화를 위한 걷기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틱 낫 한은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들처럼 공세에 시달리는 집단을 위한 수련회를 후원해, 그들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라고 촉구했다. 대중 강연과 저작물을 통해, 틱 낫 한은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는 나라들이 싸우지 말고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여지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베트남 불교 비구니 스님인 찬 콩(b. 1938)은 베트남 메콩 델타의 중심부에서 태어났다. 1958년, 찬 콩은 사이공 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해, 학생 지도자로서 시내의 가난한 지역에 사는 궁핍하고 병든 사람들을 도왔다.
1959년, 찬 콩은 처음 틱 낫 한을 만났고, 1963-1964년 동안 파리에서 생물학 공부를 했다. 1964년에 찬 콩은 틱 낫 한이 반 한 불교대학과 SYSS를 설립할 수 있게 도왔다. 한때, SYSS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젊은 자원봉사 평화일꾼들을 1만 명 이상 조직해냈다.
틱 낫 한이 베트남을 떠나 미국으로 갔을 때, 찬 콩은 SYSS 조직 운영을 맡았다. 1966년, 틱 낫 한이 접현종(接現宗; Order of Interbeing)을 창설했을 때, 찬 콩은 종단의 최초 6명의 성원 중 한 명으로 서품을 받았다.
1969년과 1972년 사이에 찬 콩은 틱 낫 한과 더불어 파리에서 불교도 평화 대표단을 조직해 베트남 평화 운동을 전개했다. 찬 콩은 틱 낫 한이 1982년에 자두마을 승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찬 콩은 계속해 틱 낫 한이 자두마을을 운영하도록 돕고 있고, 베트남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을 조직하고 있다.
캄보디아 불교 평화운동가
캄보디아 승려 마하 고사난다 큰스님(1929-2007)은 크메르 루주 시기와 공산주의 후기 이행기 동안 캄보디아 불교 종정이었다. 큰스님은 1929년에 태어나 14살에 사미계를 받았다. 큰스님은 일본 승려 니치다츠 푸지와 캄보디아 종정 섬다잇 쁘레아 상가라자 쭈언 낫으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1965년, 큰스님은 태국 남부 왓차이나(숲) 사원에서 아짠 담마다로의 지도 아래 명상 수련을 시작했다.
1969년, 큰스님이 태국에 있는 동안, 미국은 남동 아시아에서 벌이고 있던 전쟁의 일환으로 캄보디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는 내전을 벌이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의 야수적 통치 기간 동안(1975-1979), 승려들은 강제로 승려복을 벗어야만 했다.
1978년, 마하 고사난다 큰스님은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으로 서서히 몰려들었던 학대당한 피난민들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큰스님은 나라의 재건과 캄보디아 내 불교 부흥을 도왔다. 독재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1979년에 붕괴되었을 때, 1976-1979년 간의 야수적 시기를 거치며 6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 불교 승려 가운데 단지 3,000명만이 살아남았다.
1980년, 마하 고사난다는 미국 내 망명 캄보디아 정부 대표로 활동했으며, 1988년에 3000명의 살아남은 캄보디아 승려들에 의해 캄보디아 불교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1992년, 마하 고사난다는 최초의 전국적 평화행진을 이끌기 시작했고, 뒤이어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수많은 평화걷기 운동을 이끌었다.
큰스님은 4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불교평화협회’Buddhist Peace Fellowship) 고문으로 활약했다. 1992년에 라프토 상을, 1998년에 니와노평화상을, 같은 해에 양심의 용기상을 수상했다. 2007년 매사추세츠 노샘프턴에서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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