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Lah.Din
(31)
셰라자드가 새로운 술탄겸 칼리프로 즉위할 것을 허락한 뒤, 가장 바빠
진 것은 나와 이븐 시나였다. 불과 10여일의 시간동안 권력층의 구도는
눈부시게 변화했다. 셰라자드가 허락을 한 이상, 원로원의 동의만 얻는
다면 술탄위 계승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사피 알 딘
의 즉위식을 위해 자비단에 와 있던 원로원의 대표는 그리 말귀가 어두
운 사람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들로서는, 투르 자체가 지방귀족들에 의
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보다는 그나마 남아있는 - 비록 여자라고 하더
라도 - 왕족이 뒤를 잇는 쪽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정대신들 역
시 셰라자드의 등극에 별다른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문신(文臣)
인 그들 역시 수백년 동안 이어져내려오던 왕가의 교체라는 엄청난 사건
은 겪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정권투쟁의 기미를 보이고 있던 예니체리들이었
다. 셰라자드가 술탄위에 등극한다는 소문이퍼지자마자, 각자의 군대로
돌아갔던 예니체리들은 당장 강한 반발을 하고 나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셰라자드를 즉위시키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유약한 셰라자드를 이용하기 위해 원로원에 압력을 넣어 그
녀를 술탄으로 만들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강한 영
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내가 투르를 집어삼키려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와 얀, 그리고 이븐 시나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무력진압 하기로 결
정했다. 사실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 현재 벌어지
고 있는 상황이 이미 그 말이 정확했음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셰라자
드는 나나 이븐 시나가 진언하는 말에 반대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대
부분의 문제 - 특히 군사에 관련해서는 - 에 대한 결정은 대부분 나에게
맡기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빌미'일 뿐이다. 셰라자드의 술탄위 등극이
없었더라면 어차피 이 나라를 이리저리 갈라먹거나 새로운 술탄이 되기
위해 서로 간에 무력경쟁을 벌였을 자들이었으니까.
나는 정례회의의 결정과 셰라자드의 부탁으로 - 라고 해도 이븐 시나의
뒷공작에 의한 결과이기는 했지만 - 반란군 토벌을 위한 투르군 총사령
관의 직위를 얻게 되었다. 사피 알 딘의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벌이는 내전이니만큼, 최대한 빨리 이 내전을 종식시켜야만 했다.
예니체리인 알 무파사와 왈제부르가 사라진 덕분에, 지금 현재 투르군에
게 남아있는 것은 원래 칼리프군의 제 3, 4군단과 알 파라비에 의해 지
휘받고 있던 술탄 정규군이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사피 알 딘의 사후
즉시 연락을 넣었던 용병단 '카빌라카'에서 우리들의 쪽에 붙겠다는 긍
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는 점이었다.
나는 내정에 대해서는 우선 이븐 시나에게 맡긴 뒤, 얀과 함께 군대의
새로운 편재를 짜기 시작했다. 여전히 시반 슈미터가 중심이 될 별동대
와 우리가 수도를 비울 동안 자비단을 지킬 약간의 자경대, 그리고 병력
의 중심이 될 혼성 전차부대와 보병 부대 등. 갑자기 커다란 규모의 전
력을 조직하게 되어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용병학이나 군사학에 대
한 지식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셰라자드의 즉위식날이 다가왔다.
사실 그것은 사피 알 딘의 즉위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즉위식이었다.
오직 원로원의 몇몇 인원들과 내정대신들, 그리고 일부의 궁내사령만이
참가한 셰라자드의 즉위식 및 칼리프직 계승식은 아마도 투르 역사상
가장 초라한 왕궁행사였을 것이다.
마치 사슴같이 둥근 갈색 눈동자를 가진 셰라자드에게, 금색의 테두리가
둘러진 여술탄의 예복은 어색할 정도로 어울렸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과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비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의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즉위식과 동시에 정식으로 투르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나
는, 그날 오후에 공식적으로 지방의 군벌들을 반역자들로 규정함을 선언
했으며, 그들을 위한 토벌대가 곧 조직될 것임을 사방에 알리도록 했다.
본격적인, 그리고 아마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될 투르 내전의 시작이었다.
◈◈◈◈◈◈
밤이 늦어질 때까지 얀과 함께 회의를 하던 나는, 문득 피곤함을 느끼고
미간을 손으로 문질렀다. 회의실의 조명 때문인지 눈이 따끔거리고 아픈
느낌이었다.
검은 가면의 암살자가 입혔던 상처는 꽤나 깊은 편이었기 때문에, 무슬
림들의 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갑작
스럽게 무리한 힘을 끌어내 쓴 뒤에 입은 상처라서인지, 평소보다 회복
속도도 조금 더딘 편이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그다지 무리라고 할 수 없
는 일조차 지금은 상당히 체력을 소모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쉬는 게 낫겠군. 무리해서 좋을 건 없어."
잠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얀은 들고 있던 서류를 소리나게 털면서
말했다. 얀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네 몸이 빨리 회복되는 것도 중요해. 대장이 멀쩡하지 못하면 병사들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니까."
"알고 있어... 하지만, 내일 전체 작전회의까지 나머지 편제를 끝내두지
않으면..."
"어차피 보급부대쪽이잖아, 남은 건? 그런건 발라에게 맡겨도 충분해."
나는 회의실의 탁자에 팔꿈치를 짚어 턱을 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얀을
쳐다보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개인용병단이 아니니, 혼자서 전부 다 할 생각은 버려. 그리고 너의 부
관들은 생각보다 유능한 인간들이야. 좀 더 일을 나눠서 맡기지 그래."
"글쎄... 하긴 그럴 필요도 있겠군. 나도 나쁜 버릇이 들어버렸나..."
"지금 네가 가진 가장 나쁜 버릇은 자기 몸이 마장기인줄 안다는 거야.
제발 부탁이니 좀 쉬어. 응?"
"...주의하지."
왠지 얀의 말을 듣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어 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
는 살짝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아니... 왠지 당신 잔소리가 늘어났다는 기분이 들어서."
"너 같은 녀석을 시중들려다보니 어쩔 수 없다, 왜."
그녀는 끝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한 뒤, 탁자 위에 흩어졌던 서
류까지 모두 한군데 모아 탁탁 쳐서 들고 일어섰다. 나 역시 그런 그녀
를 보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가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은 술탄궁의 내부였다. 원래 사피 알 딘의
즉위식 전에는 4군단용 막사를 중심으로 숙식을 해결했지만, 셰라자드가
술탄이 되기로 결정된 다음 부터는 시반 슈미터들 대부분의 숙소가 술탄
궁의 경호를 중심으로 배치되게 되었다. 아무래도 내가 지휘하게될 현재
의 투르 정규군이 시반 슈미터를 중심으로 조직되다 보니, 이제 우리의
본거지는 시반 포트리스가 아니라 바로 이 술탄궁이 되는 셈이었다.
시반 포트리스에 있을 때나 행군 도중에도 원래 막사를 혼자쓰고는 했었
지만, 술탄궁에서 배치된 내 방은 정말로 혼자라는 느낌을 확실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원래는 객실 종류로 쓰였던 듯 특별한 가구 없이 침대와
탁자 등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나머지는 장식용 커튼이나 조명용 촛불걸
이 등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별 생각할 것 없이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침대에 몸이
감싸이자 긴장을 유지하느라 무리하고 있던 몸 여기저기에서 쑤시는 느
낌이 확실하게 전해졌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예니체리들이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힘없는 성녀 셰라자드를 허수아비 술탄으로 삼고,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
려는 천민출신 용병대장.
결국 이 나라를 집어삼키고 말 근본도 모를 외부인.
전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말이 궤변인 것은 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결과론적인 말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내가 무엇을 목표로 이러한 길을
셰라자드에게 강요했으며, 내가 어떠한 각오로 그녀의 빛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는지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그저... 누군가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 정권을 잡는다는 것이, 마치 예전
에 내가 겪었던 어떤 일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었다.
리처드 숙부.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어떤 생각으로 왕위를 찬탈한 걸까.
'내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던가.
그렇다면, 어째서 도와주지는 못했나.
어째서 지켜봐주지는 못했나.
그렇게나 내가 미덥지 못했던 건가.
아니면 그저 욕심때문이었나.
결국 왕도 술탄도 보통의 인간일 뿐인데....
그 최고의 위치라는 것에 대체 어떤 가치가 있었던 걸까.
나는 생각을 멈추고 눈을 콱 감았다.
그만두자.
그가 어떤 생각이었을지, 어떤 기분이었을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리처드 숙부가 저질렀던 일과는 아무
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발라..? 아니면 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부드럽지만 약간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문의 너머에서 들려왔다.
"저에요, 살라딘님."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놀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셰라자드님?"
"네.."
볼 것도 없이 잽싸게 윗도리와 터번을 걸치고 두른 나는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밝게 타고 있는 촛불 조명들 밑에 하얀 베일을 쓰고
서 있는 셰라자드의 모습이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방해가 된 건 아닌지.."
"아,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나는 문의 한 쪽으로 비켜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주었다.
넓지만 어딘지 공허한 느낌의 방 한 가운데로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둘러보고는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탁자 옆에 가서 섰다. 나는 그녀
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지금은 상당히 늦은 한밤중의 시간이다.
그리고 셰라자드는, 누구도 거느리지 않은 - 마치 사피 알 딘을 따라서
전장을 돌아다닐 때와같이 - 혼자 몸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그저 일상적인 술탄 대 일군 총사령관의 만남으로 보기엔... 어색한 시
간과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고.. 예전처럼 말씀 놓아주세요."
그녀의 머리 위에서 하얀 베일이 흘러내렸고, 그녀는 베일을 감싸 팔에
걸어 들었다.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진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
락이, 술탄의 옷이 아닌 보통의 평상복 위로 부드럽게 늘어뜨려져 있었
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이미, 어째서 이곳을 찾아왔는지를 말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때에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제는 대 투르제국의 술탄이시자 앙그라의 칼리프이십니
다. 전과 같이 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언제부터... 내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던가.
언제부터 내가 그녀에게 말을 놓게 되었던가.
왠지 모든 것이 너무도 오랜 옛날의 일 같이 생각이 되었다.
스스로의 집착에 갖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그때의 나와, 같은 잘못
을 반복하고 이제와서야 뒤늦은 행동으로 벌어진 상처를 벌충하려는 나
는 과연 어떤 점에서 얼마나 변해 있는 것일까.
결국은, 아무 것도 변해있는 건 없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결국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또다시 저지르고 있
는 것은 아닐까.
나의 대답에, 셰라자드는 살짝 속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저는, 살라딘님만을 믿고... 이 자리를 맡은 거에요."
심장 한 구석을 마치 누군가가 쥐어오듯한 감각이 가슴에 퍼졌다.
각오는 했었다.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고.
모든 것을 나의 죄로 돌리기로.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검을 들고 싸우는 거라면, 할 수 있을 텐데.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게 승리하는 거라면.. 할 수 있을 텐데.
그녀의 그 '마음'이 나에겐 부담이었다.
그녀가 바라고 있는 그 '무언가'를, 나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가슴이 죄어와야 할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서, 나는 그녀마저도 책임져야 할 것을 생각하
지 못했던 걸까.
아니, 분명히 그러려고 생각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녀만은 지키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만을 믿고 있을,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많은 투르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만큼은 절대로 지켜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내 앞에 있다.
나를 바라보면서, 나만을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어떠한 뜻인지 모를만큼 바보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이븐 시나가 말한 대로.
아니, 그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어쩌면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듯이.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녀를 지켜야 한다.
지켜야 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제가 아니라, 돌아가신 오라버님을 생각하셔야죠."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창백해진 얼굴.
너무나....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말이 어떠한 뜻인지 알고.
내가 그녀에게, 지금 무엇을 했는지 알고.
울지 않는다.
그녀는 울지 않는다.
그녀가 우는 것을 나는 세 번 보았다.
한 번은 어머니를 찾으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흘린 눈물.
한 번은 나에게 화내며, 억제하지 못하고 터뜨려버린 눈물.
그리고 한 번은, 사피 알 딘의 시신을 앞에 두고 멈출래야 멈출 수 없이
흐느끼던 눈물.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인생 중에 남겨진 몇 번 되지 않
는 눈물들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마치 울 것 같은... 만약 그녀에게 자각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와 하얀 뺨을 적시고 내려올 것 같은.. 그런 표정.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쥔 하얀 베일을 더욱 꼭 감싸쥐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서...."
그것은, 내가 들어주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닌 것처럼, 너무 작고 너무 낮
아서 쉽게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혼자서는..."
셰라자드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너무.. 무거워서... 이 짐이... 혼자서는... 혼자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대로 손을 내밀면, 그대로 내 품안에 들어와 버릴 것 같은 거리에서.
그녀는 홀로 서서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나는 그녀를 만질 수 없다.
그녀를 안아줄 수도 없다.
나는 그녀를 이용했다.
언제나 그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거짓으로 그녀를 대하고, 거짓으로 그녀를 속이고.
그저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그녀를 사용하고.
그녀가 나의 가식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그녀를 내쳐버리고.
그러면서도 그녀가 필요해졌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그녀를
내 좋을 대로 이용하고.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아무리 그녀가 내 앞에서, 저 작은 어깨를 떨며 흘리지도 못할 눈물을
삼키고 있어도.
아무리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오직 나만을 믿는다 말하며 내밀어 줄 따
듯한 손을 찾고 있어도.
나는... 지켜야 했다.
지키기로 맹세했다.
결코, 그녀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이 세상의 모든 해악한 것으로부터.
그녀의 빛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 이기적인 예니체리들로부터,
지금 그녀의 눈 앞에 서서, 그녀가 여태까지 받아왔던 어떠한 상처보다
도 큰 상처를 계속해서 주고 있는 '나'까지.
"참아..내셔야 합니다."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한밤중의 고요함, 서늘할 정도의 외로움을 담고 있는 지금의 나의 방에
서는,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어떤 소리던 전부 들릴 것만 같은
그런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 마치 내 마음의 소리도 들려버릴 것 같이.
내가 지금 대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마치 그녀에게 들려버
릴 것만 같이.
가리기 위해서 말해야 했다.
숨기기 위해서 말해야 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여행을 다닐 수도
없다.
아픈 사람을 위해 간호할 수도 없고, 병든 사람을 위해 치료해 줄 수도
없다.
그녀는 이제 개인의 몸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에게 던져진 것은, 이제 개인이 아닌, 국가라고 하는 짐이기 때문에.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두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참아내시고, 이겨내셔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임입
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임....
마치 그것이 옳은 것인 양, 그녀에게 강요하기 위한 윤리적인 변명.
교본에라도 나올 것 같은, 너무나 당연하고 이성적인 이야기.
그리고, 그와 함께 드러내는 나의.. 거부.
그녀의, 셰라자드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햐안 색의 베일을 손에 꼭 쥔 채.
마치 언젠가, 아니 언제나 보아왔듯이,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가슴께에
들어올린 주먹을 베일에 감싸 꼭 쥔 채.
"살라딘님...."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내가 상상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조용했다.
"저를... 안아주세요."
------------------------------------------------------------------
로제님,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자주
접속하시겠죠....? :) (그런데 새롭게 어느 분이 퍼가주시는 거죠?;)
일이 머리 위에 쌓여서 뭉개져가는 기분이란 이런 겁니다. 흠....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쓰고 있어서 조심스러워지는군요.
하지만 그래봤자 팬픽... 이런 생각을 하는 법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여 주세요. :)
실은 엇그제 아주 충격적인 소리를 하나 들어서 패닉하고 있었습니다..
살라딘이 벌써 분량이.... 책 하나를 내고도 남을 정도라는.... -_-;;
(우째 이런 일이~~~! 오리지널 소설도 못쓰고 있는데~~~~!!!;;)
땅을 파면서 자신에 대해 좌절하고 있는 작가후보생(여신후보생이 아니
라...?)이었습니다....
베라모드.
----------------
....유구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