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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매일신문 기획특집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④소설가 이문열 2007-03-02 07:33:16 "애비는 남로당…" 늘 아버지 그늘에 살아
분단은 상처의 제조 공장이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내상을 입혔다. 이데올로기로 인한 가족의 해체와 그에 따르는 고통은 마치 짐승 잡는 올무 같은 것이었다. 몸부림을 쳐도 제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불가항력, 그것이다. ‘애비는 남로당이었다.’ 이 시대의 대표작가 이문열(59). 그는 분단이라는 처절한 상처의 붕대를 감고 살아왔다.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이나 눈길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아버지의 어두운 ‘그늘’만 어깨 짐 지고 살아왔다. 그의 상처는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준 ‘그늘’이었다. 잔설이 녹지 않은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 서재의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따스했다. “랭보의 말대로 상처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나이 60줄에 상처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네.” 예순을 앞둔 그에게 이제 ‘그늘’마저 산화된 느낌이다. 그의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은 월북한 지식인이다.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로 서울 휘문고보 졸업 후 일본 유학시절 좌익에 경도됐다. 해방이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박헌영·이현상 같은 남로당 인사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 정도였다. 6.25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수원농대 책임자를 맡았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다. 당시 서른셋의 어머니는 만삭이었고, 이문열은 두 살이었다. 아버지가 월북하자 외가인 경북 영천에 잠시 머물다가 1951년 조상 대대로 고향인 경북 영양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후 남은 5남매와 어머니의 삶은 그야 말로 상처투성이였다. '월북자 가족'이란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이문열과 여동생은 보육원에 맡겨지기도 했다. “그걸 알고 싶었어. 온 가족을 흙구덩이에 던져놓고 떠나야 했던 그 이유를...” 작가는 10대에 공산주의의 원형을 알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금서. “비판서의 역주를 통해 사상을 가늠하기도 하고, 역사서를 훑어보며 사상적으로 재구성해보기도 했지.” 연좌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하는 일마다 형사들이 와서 들쑤셔 놓았다. “가정교사 하는데 형사가 들락거리면 좋아할 학부모가 어디 있겠어.” 직장도 오래 다니지를 못했다. 서울대 사범대를 다녔지만, 그에게 교사의 길은 요원한 것이었다.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등단하고, 매일신문사에 입사했다. “이제 노하우가 생기더라고. 틀림없이 대공과 형사가 신문사에 찾아와 동태를 조사할 것 같아 아예 쳐들어갔지.” 담당 형사를 만나 “내 동태를 내가 미리 보고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들에게 끊임없는 재난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이 값이 저쪽에서는 제값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쪽 가족이 고통 받는 대신 아버지는 북쪽에서 이상을 펼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도 똑 같이 죽을 지경이라...” 일본에서 유학까지 한 농업경제학자인 아버지는 1954년 북한 함경도 종성의 한 협동농장의 평 농장원이었다. “아오지 탄광의 광부와 똑 같아.” 15년 뼈 빠지게 고생해서 농업지도원으로 승격돼 내려온 곳이 경성. “다시 15년을 더 고생했는데 청진까지도 못 오고 어랑군이라는 곳에서 정착했어요.” 더 환장할 노릇은 북쪽의 가족도 똑같이 고통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북쪽에서 재혼해 5남매를 두었다. “남쪽에서 온 아버지 성분 때문에 대학입학 허가가 안 나왔어요.” 17세에 군대 입대해 서른이 돼서야 겨우 당성을 인정받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젊은 아내와 가족을 버리고, 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찾아간 북한의 인민공화국. “역연좌제를 그곳은 그곳대로 치렀지. 내가 당하는 것 보다 더 화가 났어. 억울해. 이건 용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 이문열이 보수논객을 ‘선언’하게 된 계기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적으로 용서가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아 1999년 아버지를 만나러 갔지만, 결국 죽음만 확인하고 두만강변에서 망제를 지내면서 이문열은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그의 가족사는 분단이 낳은 비극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상처는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 대표작이 대하소설 ‘변경’이다. 공산주의자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를 둔 4남매와 어머니의 인생역정을 다루고 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이리저리 떠돌고, 결국 고아원까지 가는 주인공은 바로 작가의 삶이 투영된 것이다. 중편 ‘아우와의 만남’ 속에는 북한의 이복 아우와 화해하고 망제를 지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대표작 ‘영웅시대’도 6.25를 전후한 민족의 격동기에 이념으로 인해 고통 받는 지식인과 그의 가족들이 겪어가는 시련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통과의례의 성장통(痛)인 ‘부성살해’(오디푸스적인 아버지 부정)마저 힘겹게 만들었다. 원망과 그리움, 그리고 안타까움의 대상이 된 아버지의 삶은 통한의 눈물로도 씻을 수 없는 비극의 원형이다. 그러나 이문열은 “나의 상처는 매일신문사에 입사해 형사를 찾아갈 때 이미 극복된 것”이라고 했다. 또 “불행은 긴장이면서 한편으로 감정과 경험의 폭을 넓혀주는 계기”라고 말했다. 이 상처가 없었다면 이문열은 어떤 인물이 됐을까. 아마 한국은 걸출한 한 작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1948년 서울 출생. 경북 영양 등에서 성장. 서울대 국어교육과 중퇴,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등단. 소설집 '사람의 아들'(1979), '젊은 날의 초상'(1982). 장편 '영웅시대'(198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 대하소설 '변경'(1998) 등. 94년~97년 세종대 국문과 교수. 현재 부악문원 대표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⑫소설가 김원우 2007-07-20 07:01:24 머릿속에 수 놓았던 '또 다른 삶' 열망
“아버지 원망 많이 했지. 가족이야 죽든 살든. 미친 짓 아냐?” 예순을 넘긴 소설가의 입에서 모진 말이 나왔다. 술자리의 취기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떠난 후 겪은 모진 고초의 잔가지들이 울컥 치밀어 오른 때문이기도 했다. 소설가 김원우(61). 그의 아버지(金鍾杓)는 1950년 광란의 전쟁에서 북을 선택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3남매와 아내를 남겨둔 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떠난 것이다. "아버지는 남로당 조직책으로 꽤 유명했지. 경남도당 부책까지 했으니까. 해방 전에도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어." 아버지는 빈자리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 가슴을 보면 시커먼 흉터가 있어. 인두로 지진 흔적 같아. 고문도 많이 당했을 거야." 그 흉터는 빨갱이 가족의 낙인이면서, 아버지 없는 아들, 과부 아닌 과부의 화인(火印) 같은 것이었다. 고향 김해시 진영읍을 떠나 대구에 온 것도 화기(火氣)를 조금이라도 피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경찰에 안 불려 다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었지." 이후 이들 가족의 궁핍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기적같이 살았다.”고 표현했다. 아버지가 떠날 때 그는 겨우 네 살이었다. “형은 아버지를 기억하지만, 난 얼굴도 생각 안 나.” 그의 형은 ‘마당 깊은 집’의 소설가 김원일(66)이다. 대구의 삶은 참으로 비루했다. 어머니는 기생들 한복 바느질로 겨우 가족들 입에 풀칠을 했다. 도시락도 못 싸 가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배회하며 허기진 배를 달래곤 했다. 아버지의 공백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족들에게 주었다.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과부는 매질로 아들을 키웠다. “형이 많이 맞았지.” 한번 씩 팰 때마다 오줌이 질금질금 나도록 때렸다. ‘인간이 되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무책임한 남편에 대한 원망과 고단한 삶의 피로감이 회초리에 실렸다. “일종의 화풀이기도 했어. 과부의 히스테리지.” 어머니는 억척스러웠다. 바느질감이 없으면, 마산에서 함석통에 든 멸치젓을 떼와 염매시장 등에서 팔았다. “책 없이 공부한 상처도 혹독했지.” 셋집을 전전하면서 겨우 밥을 먹는 형편에 책 사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그 바람에 결손가정의 차남으로서 남들과 경쟁할 수 없다는 낙오자의 상처도 입었다. 자연히 공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세상에 돈 없이 되는 일이 잘 있나? 그런데 소설은 볼펜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 이런 궁핍하고, 절박한 상황이 이들 형제를 ‘이야기꾼’으로 만들었다. 소설가로, 머릿속 가상을 원고지에 채우면서 살도록 했다. 소설은 냉혹한 현실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슬퍼해도 소용없었어. 소설에 내 얘기를 꾸며보자는 생각이 들었지.” 원우는 그의 필명이다. 본명은 원수(源守)이다. 자꾸 놀림감이 되니까 ‘수’를 ‘우'로 바꾸었다. “성까지 바꿨어야 했는데···”라는 말에서 아버지의 이름마저 거부하고픈 심정도 담겨있는 듯 했다. 월북한 아버지는 남로당 숙청에서도 용케 살아났으나, 가족을 버린 결연함과 다른 남루한 삶을 살았다. 북에서 황해도 여자와 결혼해 아이도 둘을 가졌다. 김원우는 무기력한 개인의 삶과 타락한 중산층의 허위의식 등 우리 시대의 초상을 선 굵은 필치로 그려오고 있다. 슬픈 가족사를 많이 다룬 형과 달리 그의 작품은 반항아적인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안 그래도 형이 그래. 원우한테 미안하다. 소설가로 쓸거리를 혼자 다 써 먹어서.” 그는 작가로서 형의 ‘그늘’을 피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동의 반복도 철저히 피했다. 그래서 그럴까. 그의 초기 작품에는 아버지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형과 달리 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 알코올 중독자든, 몽둥이를 든 폭력 아버지든, 아버지의 상(像)이 없었으니까, 그릴 수도 없었지.” 아버지의 부재와 그로 인한 상처는 자생적인 치유력을 가지게 된다. 바로 세월이다. 이제 아버지의 모습도 작품에 등장한다. 이번 달 문학지에 게재되는 단편 ‘미치도록 살아간다’에는 최 원장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북에서 월남한 ‘삼팔 따라지’(38도선을 넘어온 사람이란 뜻) 부모의 둘째 아들이 썩을 대로 썩은 세속화 과정에서 자기반성에 빠지는 이야기다. 또 이 작품에는 최 원장의 고교 동기인 소설가 교수가 나온다. 2년 전 쓴 단편 ‘달리는 풍속도’와 곧 발표될 700장의 중편 ‘참을만한 생존의 가지 끝에서’와 함께 연작 3부작에는 과묵하고 생활력 강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린 김원우의 아버지가 아니라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한 그런 아버지들이다. 그가 비비고 싶은 그런 '언덕'들이다. 흑백사진 속에만 있는 유령 같은 아버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 체온을 감지하려는 소설가의 연민이 퇴색된 인화지처럼 아련해 보인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1947년 4월 11일 경남 김해시 진양읍에서 출생. 경북대 사대 부속고를 거쳐 1973년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 1977년 중편 '임지'로 등단. 1980년 '죽어가는 시인', 1981년 '무기질 청년' 발표. '인생 공부'(1983), '장애물 경주'(1986), '세 자매 이야기'(1988), '아득한 나날'(1991) 등 창작집 출간. 대표작으로 1983년 한국창작문학상을 받은 '불면 수심', 1970년대 말의 서울을 배경으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를 파헤친 장편 '짐승의 시간', 매일신문에 연재된 역사소설 '우국의 바다', 1991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중편 '방황하는 내국인'등이 있으며 1999년 중편 '반풍토설초'로 오영수문학상, 2002년 '객수산록'으로 대산문학상 수상. 현재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③화가 권기철 2007-02-16 07:25:06 사람의 기억은 믿을 수 없다. 마치 저격수처럼 잠복하다가 스스로 변형하고 왜곡시킨다. 어떤 경우 통째 없애버리기도 한다. 화가 권기철(45)의 상처가 그렇다. 다섯살 때 작두에 오른손이 잘렸다. 그러나 그 전후 다른 일들은 기억하는데, 이날의 기억은 없다.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공포가 그 기억을 뇌세포에서 제거했을 것이다. 그도 “철들어서 그걸 기억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기억이 안난다. 그게 희한하다.”고 했다. 겨우 이어붙인 그 손으로 붓을 잡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왼손은 파워, 오른손은 완충역할을 한다.”며 “아주 섬세한 작업은 오른손으로 한다.”고 했다. 작두의 시퍼런 날이 지나간 그 손을 그는 “나의 보배”라고 했다. 권기철은 가시관을 쓰고, 가시나무를 한 짐 지고 가시밭길을 걷는 사나이다. 고통과 절망, 연민과 열정이 요절한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1960~1988)의 낙서작품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삶이다. 그의 상처 얘기를 듣는 것마저 고통이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취(大醉)해 버렸다. 취재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고통스런 어린 날의 기억은 수성구의 한 막걸리 집에서,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 둥지 튼 가창의 작업실에서 들었다. 그의 부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9남매 중 배다른 형 둘은 맹인과 꼽추가 됐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운데 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출해 신문배달을 하며 혼자 힘으로 중.고교를 다녔다. 그리고 이혼까지... . 대학 1년이던 1983년 어머니가 있던 영주에 갔다. 호미로 밭을 갈던 어머니는 “잘 되재?”라고 물었다. 그는 “멀었어. 화가란 것이 가난해. 나이 마흔 넘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을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1주일 후 어머니는 연탄불을 피워놓고 삶을 버렸다. “그때 ‘잘 될거야. 조금만 기다려봐’라고 했더라면... .” 가난은 그의 가장 큰 절망이었다. 어려서 그림을 그리고, 붓글씨를 썼지만 한 번도 붓을 사 본적이 없다. 모두 얻거나 주워 쓴 것이었다. “미웠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 나중에 커서 생각하니까 측은해. 아버지도 아홉 살에 고아가 됐거든.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으니까, 사랑을 하는 법도 몰랐을거야. 그래도 엄마가 더 처절하지. 아버지는 농약 마셨어.” 초등학교 6년 동안 가출을 꿈꿨다. “집에서 뒹굴고 떼를 써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 6년 동안 꼬박 신문배달하며 중.고교를 다녔다. 형제 중 유일하게 중졸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다. 모든 고통을 감내하게 한 것은 ‘화가의 꿈’ 때문이었다. 신문 배급소에서 매를 맞아가며 끼니를 해결하고,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였던 어린 시절의 상처, 그보다 더 컸던 것이 “그놈의 꿈”이었다. “살아 있는 기분이 들어. 펄펄 뛰지. 첫사랑을 만나는 설렘과 두근거림. 그런거야.”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느낌이 드느냐고 묻자 그가 한 말이다. 붓을 들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틀어놓고 캔버스와 대결한다. “그 대결에서 내가 그 놈을 제압해야 그 속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어. 그 대치하는 순간이 짜릿하지.” 상처는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 피같이 빨간 손, 철조망 가시가 휘감은 손, 잘려나간 손... . “물감을 손에 칠해 캔버스를 문지르는 순간 내 상처가 반영되는 거지. 나의 상처, 나의 정체성이 그림 안에 콕콕 박히는거야.” 뼈를 바꾸고 태를 빼내는 것(換骨奪胎)만큼 고통스런 것이 있을까. 그는 그 길을 자청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전복하고, 진화의 꿈을 꾼다. 7~8년 전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뼈를 바꾸었다. “구상은 껍데기를 재현하는 것이야. 비구상은 시간과 공간, 시각적 비주얼을 표현하는 것이지. 재미있지.” 그는 지금 자신의 에너지를 20~30%만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10년 동안 개인전을 20번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무감에서 나온 강박이었다. “잘못 왔다. 그거 깨닫는데 10년 걸렸어. 이제 다른 방식으로 갈거야.”그 화두가 바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없애고, 나를 태워버려야지.” 마치 흙이 흙으로 남으면 도자기가 안 되듯이, 그는 자신을 1천800도 가마 불에 태우려고 하고 있다. 무아(無我), 무위(無爲).... “상처는 긁고, 드러내고, 해체시켜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사라진다.” 그가 취재수첩을 덮는 기자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1963년 경북 안동출생. 영주 중.고 졸업. 경북대와 영남대대학원에서 한국화 전공. 서울·대구·부산에서 20회의 개인전. ‘미술로 보는 스포츠와 놀이전’ ‘서울 국제아트페어’ ‘새로운 세기의 징후전’ ‘광주비엔날레 음식기행전’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출강.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②한대수 2007-02-02 07:58:13 "예술가의 상처는 예술로만 치유되죠"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풀어 헝클어진 머리, 바짝 마른 입술, 먼지 풀썩이는 사막 위에서 그 남자는 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굵은 남저음 목청으로 목마름을 노래했다. ‘한국 모던 록의 창시자’ 한대수(59). 통기타를 후려치며 목구멍 깊숙이 시대를 변주했던 20대의 그 사나이는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이거 완전히 나를 위한 시리즈네!”라고 반겼다. 그만큼 그는 ‘상처의 화신’이다. 추운 겨울날. 서울 신촌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다. 신발 하나 벗어놓기 민망한 7평짜리 공간. 그가 임신 5개월의 아내 옥산나와 함께 거처하는 곳이다. 큼직한 기타 케이스와 카메라, ‘문명의 방랑자’처럼 떠다니며 모은 기념품이 그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호치민과 징기즈칸의 초상 아래에서 그를 만났다. “나의 상처는 빈터”라고 입을 뗐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라진 ‘빈터’의 고독이다. 그는 부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한영교)는 신학자로 백낙준 박사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고, 미군정 때 경남도지사를 지냈다. 대구 경북고와 서울대 공대를 나온 아버지(한창석)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리나라에 핵물리학자가 필요하다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7세 때 홀연 실종된다. 훗날 아버지가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 에드워드 텔러 박사의 수제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핵 제조 기술을 한국으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CIA가 제거했다는 설도 있었다. 20대의 어머니(박정자)마저 새 인생을 찾아 떠나면서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10대에 이미 한의 정서를 노래할 수 있었던 한대수의 슬픈 가족사다. “‘엄마’라고 부를 사람도 없었고, 같이 놀아 줄 친구도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독히 외로웠다는 기억뿐이었다.” 외로운 소년이 아버지를 만난 것은 17세 때. FBI가 마침내 아버지를 찾은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 아버지를 대면했다. 그러나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아버지가 던진 첫 말. “You're a big boy already. Do you smoke?"(벌써 많이 컸네. 담배 피울 줄 알아?) 그리고 부자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제일 처음 함께 한 일이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첫 대면은 기가 막히게 낯설어 슬프기까지 하다. 그 길로 그는 기타를 잡았다. 그리고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행복의 나라’도 그때 쓴 것이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가벼운 풀밭 길을 걸으며, 비와 천둥소리도 이겨내고 행복하고 싶다는 절규가 절절한 가사다. 그는 “고통이 너무 커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모든 예술의 아티스트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음악은 그에게 영혼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이다. “곡을 쓰면 뱀이 껍질을 벗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마치 주술사가 귀신을 쫓는 것과 같은, “엑소사이즈(exorcise)한 느낌이다.”고 덧붙였다. 예술가의 상처는 예술로 치유된다. 그는 “나의 상처가 대중의 상처와 만나, 공명할 때 치유를 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공명은 감동이고 눈물이다. 그는 “눈물은 정신적 섹스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웃었다. 그러나 ‘멀고 먼 길’·‘고무신’·‘행복의 나라’ 등 그의 음악은 한때 불온한 음악으로 낙인 찍혔다. 심지어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묘사했다고 금지곡이 됐다. 당시 상처를 입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땐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김민기·신중현도 다 당한 것 아니냐.”며 “별로 상처가 안 됐다.”고 했다. 그는 대중에게 포섭되지 않는 가수다. “나는 대중을 생각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무시한다. 작품이 좋으냐 나쁘냐가 문제지, 대중이 좋아하느냐 안하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모차르트·베토벤·바그너가 그렇듯, 비틀즈가 그렇듯, 그리고 김현식과 김광석이 그렇듯 “죽고 나서 음악이 산다.”는 생각이다. “대중적인 스타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며 “10년,20년 후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대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포섭되지 않는 이단아’로 지금도 걷고 있다. 과거의 향수에만 집착하는 70,80 가수와 달리 그는 여전히 아들뻘 연주자를 이끌고 음반을 만든다. 19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을 낸 후 지금까지 12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특히 2002년 9집 ‘고민’, 2004년 10집 ‘상처’, 2006년 12집 ‘욕망’은 자신의 관념과 성찰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베트남 공산혁명의 영웅 ‘호치민’에 대한 경외심도 담고, ‘조지 부시 같은 폭군은 안돼요. 김정일 선생 여기 앉아요. 우리 같이 소주 한 잔 합시다. 랄랄라~’(‘대통령’)와 같은 해학적인 은유도 담았다. 그럼에도 ‘고민’·‘상처’·‘욕망’과 같은 앨범이름에서 보듯 고통은 아직도 그를 옥죄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행복의 나라’를 꿈꾸었지만, 그는 “나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다 생각했던 적도 한 번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시를 쓰고, 사진을 찍고, 음악을 하면서도, 그리고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유와 사랑에 목말라 하며 사막 같은 이 시대를 살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와 가수는 부둥켜안았다. 상처없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다시 한대수를 떠올렸다. 그는 정녕 바다를 도모하면서도 정작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이스터섬의 거대한 모아이 석상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1948년 부산에서 출생. 1966년 미국 뉴 햄프셔 대학에서 수의학 전공. 1967년 뉴욕 Institute of Photography에서 사진 전공. 1968년 한국에서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 1970년 대한민국 국전 사진부문 수상. 1974년 1집 ‘멀고 먼 길’ 발표, 코리아 헤럴드 기자. 1977년 뉴욕서 록밴드 징기즈칸 결성. 1992년 사진집 ‘맨하탄 빛의 광장’ 출간. 1997년 일본 후쿠오카서 카르멘 마키와 조인트 공연, 시집 ‘대지의 새벽’ 출간. 1998년 자서전 출간. 2006년 12집 ‘욕망’ 발표.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⑪화가 이정웅 2007-06-29 07:18:35 섬 촌놈·가난·색약…"하지만 붓은 내 운명"
일찍 온 대구 더위가 겨드랑이에 주룩주룩 흐르던 날이다. 햇살이 뜨거운 오후 3시. 대구 달서구 성당동을 헤맸다. 소위 가장 ‘잘 나간다’는 화가 이정웅(44)의 화실을 찾는 길이었다. 호당 70만 원을 호가하는 ‘붓’ 작가. 국제 아트페어에 출품하기 무섭게 팔린다는 그다. 올 3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20호 작품이 4만 2천 달러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다. 그래서 그의 화실은 그의 명성만큼 ‘거창’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아무리 골목을 헤매도 ‘이정웅’이란 이름은 고사하고, 화실이 있을 만한 건물조차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2층 창에 ‘OO미술학원’이라고 쓰인 낡은 건물. 그 좁은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거기에 이정웅이 있었다. 20평 남짓한 화실. 거대한 붓 그림이 천장을 치받고, 몸 하나 겨우 돌릴 그 좁은 공간에 장발에 허우대 큰 그가 ‘점 찍혀’ 있었다. 미술평론가 이진숙 씨는 “‘귀신 같은 재주’로 사물을 재현하는 작가 이정웅”이라고 했다. 큰 캔버스에 먹을 잔뜩 먹인 붓을 척 찍어 놓은 그림들. 먹 번짐의 연탁(連濁)과 농담(濃談), 그걸 듬직하게 누르고 있는 한모(翰毛), 그리고 붓대. 이 씨의 말대로 확대경이라도 대보고 싶을 정도로 툭 튀어나와 잡힐 듯하다. 그는 ‘붓’ 그림으로 아시아를 떠나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다. 그는 동해의 ‘한 점’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집 목수고, 할아버지는 배 목수였다. 자식 없는 집에 그의 어머니는 후실로 들어가 4남 1녀를 낳았고, 그는 그 집의 막내로 태어났다. 싸워 ‘조지고’, 팔아 ‘조지고’, 신세 ‘조진다’는 ‘육(六)조지’의 섬 울릉도. 당시 그의 집도 째지게 가난했다. 거기에 형제들이 모두 아파 형과 누나는 열아홉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도 죽을병에 걸렸다. “병원에서 그랬어요. 살코기와 쌀밥을 먹여라.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어느날 워낙 배가 고파 부엌을 뒤지다가 숭늉그릇을 발견했다. 그걸 벌컥벌컥 마셨다. 먹고 나니 비릿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빨랫비누 조각을 모아놓은 그릇이었다. “희한해요. 그걸 먹고 나서 씻은 듯이 나은 것 있죠. 그 이후로 아파본 적이 없습니다.” 가난은 화가 지망생에게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다. 방위생활을 마치고 오징어 팔아 8만 원을 들고 울릉도를 빠져나왔다. 대구에 왔을 때 그의 수중에는 3만 원이 남았다. “그 3만 원으로 이제까지 살고 있는 셈이죠.” 선배 화실에 얹혀 살면서 라면 3개로 일주일을 버틴 적도 있다. “라면 하나를 네 조각을 내 물에 멀겋게 풀어 끓여 먹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하루는 100호짜리 그림을 가지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차가 출발하니까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빈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버스 기둥에 얼굴을 대고 어지럼증을 참았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림을 놓지는 않았다. 서문시장 포목점에 가서 얻은 광목 조각을 가장자리에 이어 붙여 공모전에 출품했다. 그것이 대한민국 미술대전이었고, 그는 그해 특선을 했다. 그는 대구의 몇 안 되는 ‘전업작가’다. 그림 이외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없으면 굶고, 그림이 팔리면 입에 ‘풀칠’을 했다. 그림은 그에게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난 이외 또 하나의 상처가 있다면, 그건 색약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가 색을 판별하지 못하는 이상이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천형’이었다. 대학 진학도 불가능했다. “나는 대학도 못 가는데, 외국에 유학 갔다 온 친구가 거들먹거리면 사실 배알이 꼴렸습니다.” 자격지심에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입학규정 때문에 번번이 낙방했지만, 그래도 원서를 안 내본 대학이 없을 정도다. 그러던 그가 2002년에 대학(계명대)에 입학했다. ‘색약 규정’이 풀렸기 때문. “시험을 치니까, 전교 차석이지 뭡니까.” 4년간 등록금 공짜에 어학연수도 보내주고, 6개월마다 120만 원의 지원금도 나왔다. 뒤늦었지만, 그에게 잘 된 일인지 모른다. “입학하고 싶었을 때는 어차피 가난해서 등록금 낼 돈도 없었거든요.” 그는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 99%”라며 “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은 1%로도 안 된다.”고 했다. 또 “색약이라고 색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상인보다 선명도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치명적인 상처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글쎄요. 어릴 때 사주를 봤는데, 제 사주풀이 옆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붓하고 백지였어요.” 그는 이를 운명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건 그의 미래고, 그의 꿈이고, 그의 전부다. 그는 천성적으로 낙천적이다. 상처를 물어도 남의 일처럼 심드렁하게 “그냥…그랬지요….”라고 해 인터뷰를 하는데 애를 먹었다. 절망은 그의 사전에는 없어 보였다. 지금도 하루 14시간씩 작업하면서 '머리를 짓누르는' 것이 있다. 정말 ‘큰 획’을 그어보는 것이다. ‘붓 작업’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는 어떤 작업이다. 그는 동양적인 추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그 속에서도 그는 여백을 꿈꾸고 있었다. 다 보여주지 않고도, 무한(無限)을 담은 그림의 선(禪) 세계일지 모른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1963년 경북 울릉 출생. 중앙중, 배영고 졸업. 2006년 계명대 미술대학 서양학과 졸업. 1992, 1993, 199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신라미술대전 특선 2회. 살롱 도톤느 입선. 2003년 상하이 아트페어, 2004년 싱가포르 아트페어, 2007년 한국국제아트페어 출품. 20여 회 개인전.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 심상회,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⑨ 한국화가 남학호 2007-05-25 07:00:10 아내 사고 후 밝아진 그림 ‘고통의 위장’
新 LOVE STORY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서른 일곱에 세상을 떠난 그녀를… 웃으며 여행가방을 싸더니 시신으로 돌아온 그녀를… 7년째 미국과 소송 중인 의문의 교통사고 주인공 그녀를… 돌과 나비와 그림과 그리고 나를 사랑했던 그녀를… 2000년 8월 5일 오전 2시. 한 통의 국제전화는 한 남자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게 돼서…."라고 시작된 송신자의 목소리는 아내의 죽음을 알렸다. 비몽사몽, 황망하게 받은 전화. 남자는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밝은 얼굴로 여행 가방을 챙기던 아내였다. "무슨 소리하십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보세요. 그럴 리가…."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한국화가 남학호(48)는 "상처는 자기 몫이다. 안에서, 깊은 속에서 덧날 뿐이다."라고 했다. 그는 "치유가 안 된다. 치유를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절망했다. '조약돌 화가' 남학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큰 수족관이 있다. 종개·떡납줄갱이·자가사리 등 우리 민물고기를 기르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명체가 있다. 바로 나비다. 한쪽 벽면을 채운 작품 속 나비들이다. 구형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마치 화실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그는 인터뷰 도중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복받치는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어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고, 슬퍼하며 아내의 빈자리에 고통스러워했다. 아내의 사인은 사고사였다. 당시 미 국방부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도착 1시간여 만에 숙소를 향해 달리던 택시에서 떨어져 숨졌다. 시속 115㎞로 달리는 택시에서 몸무게 45㎏의 여자가 혼자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당초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던 경찰은 유족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재수사를 벌였으나, 사건 발생 9개월 만에 자살도 타살도 아닌 사고사로 결론 내렸다. 의문을 파헤치기 위해 택시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런데 사건을 맡은 미국 변호사가 돈을 돌려줘요. 너무 힘들다는 것이죠" 이제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적어도 세인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아직도 투쟁 중"이라고 했다. 그의 옷장에는 아직 영정사진이 있다. 애들이 볼까봐 깊숙이 숨겨놓은 것이다. 화실 옆 빈 방에는 아내의 짐을 모두 옮겨놓았다. 책과 화장품, 심지어 속옷까지 그대로 있다. 화실에 하루 종일 왕왕거리는 구형 라디오도 아내가 아끼던 것이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잊어요. 기억 속에서 없어질까봐 두렵습니다. 좀 더 살갑게 대했더라면…." 차라리 병으로 죽었다면, 의문 없는 죽음이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이 더 화려해졌다. "그 일 이후 그림이 밝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전에는 단색에 어두운 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돌이며, 물이며, 나비의 색깔이며 모두 화사해졌다. 일종의 반작용이다. "주변의 동정도 길어지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말대로 그는 '위장'하고 있었다. "술을 마셔도 급하게 마시는 버릇이 생겼어요" 어설프게 마셔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폭주로 잊자는 생각이다. 작품 속에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 나비다. 예전에는 그림 속에 여럿 등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만 나온다. "사람들이 물어요. 왜 나비가 나오느냐고. 이제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제 아내입니다." 그러고 보니 돌에 앉은 나비의 눈을 가만히 보면 여간 황망하지 않아 보인다. 중국 그림에서 나비는 80세를 뜻하는 질수(질壽)로 읽는다. 작품 속에서나마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다. 서른일곱 나이에 비명에 간 아름다운 사람, 그래서 두 마리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사이트(www.koreacolor.com)에 '나비의 꿈'이라는 글이 있다. '나비는 날아갔다. 이승의 인연은 흔적 없이 그야말로 조용히 사라졌다. 나비는 생명이다. 돌과 나비는 이원(二元)이 아닌 불이(不二)이다. 오늘도 나비를 찾아 피안의 세계를 기웃거린다'. 마치 지하세계에 간 프시케(나비)를 구하려는 에로스 같다. 불로불사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먹고 에로스와 결합하는 지순지고한 신화 속 사랑을 꿈꾸는 것일까. 그는 몇 년 전 '돌 시리즈' 100개 연작을 시작했다. 그림을 모두 이으면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2년 전 54개에서 멈추고 있다. 내면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때다. 취재 이튿날 그는 기자에게 메일을 한통 보냈다. '헤어지고 난 후 오후 내내 붓을 잡지 못했다. 안으로 파고드는 상처를 밀어내려고 노력하겠다. 남은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새로운 나의 역사를 쓸까 한다.'고 적었다. 상처를 보듬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뼛속까지 저며드는 모진 상처를 스스로 꿰매고 어루만져야 하는 그 고통을….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1959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대 미술대 및 동대학원 졸업. 수묵풍경화 등 5번의 개인전 개최.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심사위원 역임. 경북미술대전, 대구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삼성현미술대전 등에서 초대작가로 활동. 현재 대구예술대, 대구대 평생교육원, 문화센터 한국화반에 출강. http://www.koreacolor.com 멋진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