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맛을 알게 된 김대중은 일본이 패망한 후 일본인 소유였던 상선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한국사회에서 불경기를 모르는 기업,
가장 확실한 돈벌이는 권력을 쥐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김대중은 재빨리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야당의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가신그룹을 만들고 그를 통해 엄청난 정치자금,
선거자금을 염출해 냈다.
그 가신그룹의 핵심멤버들은
김상현,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남궁진, 최재승, 장재식, 박태영 등 재력가,
모략가, 사기협잡배들이다.
사조직을 통해서도 수많은 돈을 뜯어냈다.
대표적인 사조직으로는 「민주연합청년회」,「민주헌정동지회」,「한국정치문화연구소」등이다.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직접 조직운영한 「민주연합청년회」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전위대로,
비자금조성의 별동대로 기능해왔다.
김대중의 보증만 받으면
국회의원 당선은 땅 짚고 헤염치기라고 하는 호남권에서 공천후보자들로부터의
자금 염출은 말 그대로 수탈행위였다.
지난13대총선때 전북 남원지구에서 지역구후보 첫 내정자는 이형배였다.
그런데 조찬형에게서4억원의 뇌물을 받아먹은
김대중이 이형배를 전국구의 당선 불가능한 순위로 돌려놓고
그 대신 조찬형을 내세운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13대총선때 김대중이 호남권 후보자들로부터 받아먹은 사례금만도 1백억원이 넘는다.
김대중의 돈 그러모으기는 14대총선때 더욱 노골화되었다.
김대중은 후보선정에서 공천헌금상납액수를 후보선정기준으로 삼고
민주당의 전국구당선권으로 보는24번까지에 전 주택은행장 장재식, 무등산관광호텔사장 김옥천,
삼양실업사장 강희찬, 미주산업회장 박은태, 대림필름사장 국종남, 예식장경영자 김충현,
전 뉴욕한인회회장 박지원 등 재력가들을 넣었다.
50억원을 헌납하면 당선이 확실한 후보순위에 들고 40억원을 내면 밀려났다.
대선 때마다 집권 후에 이권을 보장한다며
재벌들과 기업인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내 비자금을 조성했다.
지난71년7대 대선 때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럭키재벌 총수 구자경에게 집권 후 제2정유공장건설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그로부터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던 내화5억원을 긁어냈고
한일합섬회장 김한수에게는 마산한영섬유확장허가를 담보로 1억원을,
삼양그룹총수 김연수에게는 전라도 토착 기업으로 내세워주겠다면서
2억원을 뜯어낸 것을 비롯해서 재벌들과 대기업주들로부터 무려1백여억원의 자금을 뜯어냈다.
김대중의 비자금 뜯어내기는
92년의 14대,
97년의 15대 대선때 절정에 이르렀다.
『14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 송천영 등 심복들에게
「대선자금 조성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재벌들을 잘 구슬려야 한다」면서 권노갑에게는 삼성, 김옥두에게는 대우,
. 이런 식으로 분담까지 해 재벌들과 대기업인들로부터 막대한 선거자금을 뜯어냈다.』
지난 91년과
92년 대선직전까지2년기간에만도 집권후 특혜보장을 담보로 삼성과 대우,
진로 등 재벌들과 주식회사 한창, 대호건설, 벽산개발, 풍성전기 등10개 회사로부터만도
1백34억원 상당의 대선자금을 뜯어낸 것을 비롯해서 근 8백억원의 대선자금을 긁어모았다.
특히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감행한 정치자금염출 행위는 말 그대로 광적이었다.
97년 15대 대선에 출마하면서
김대중은 이번 대선 싸움은 생사를 가름하는 마지막 전쟁이라며
장남 김홍일과 처조카 이형택, 핵심측근인 김원길, 김한길, 재력가들인 김봉호, 김인곤,
경제통으로 알려진 장재식, 박태영으로 대선자금 모금팀을 구성하고
사조직과 지구당조직은 물론 폭력조직배들까지 총 발동해 대선자금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1982년 김대중은 미국망명 때 전두환에게 미국에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 대가로30만 달러의 돈을 받아먹은바 있다.
92년 대선 직전 그는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
전 평민당 창당자금으로3백억원을 받았고
6공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에게 그것을 유보한다는 담보를 주고서도 그에게서
5백억원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노태우로부터 모두1천2백여억원을 받았다.
60년대말 업자로부터 엄청난 뇌물을 받아먹고 코카콜라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그것이 문제시되자
재빨리 국회에서 업자를 비판해 이에 분격한 업자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뺨을 얻어맞은바 있다.
미국에 망명했을 때
김대중은 미국교포들이 광주학살희생자 유족들에게 전해달라고
기탁한 15만 달러와 한국민주화운동에 써달라고 모금해준 수백만 달러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호화판생활을 해 미국교포사회의 지탄을 받은 적도 있다.
김대중이 87년부터 청와대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 조성하여
친인척명의로 관리해온 비자금은8천여억원에 달한다.
청렴결백을 좌우명으로 삼는다며 권좌를 차지한 김영삼이 집권1년 만에 한국7대 갑부로,
집권 3년만에는 일약 최대갑부로 둔갑해 도둑왕초의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김대중은 도둑왕초로 악명 떨친 김영삼을 아연케 할 정도이다.
집권하자마자 국제통화기금과의 합의사항 이행이란 명분으로
「개혁」의 구호를 들고 재벌들과 기업주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냈다.
「재벌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서 재벌들은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저마다 돈뭉치를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30대재벌그룹에 속한H그룹회장은
『재벌구조조정은 경제회생차원이 아니라 재벌들의 목을 비틀어 정치자금을 뺏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김대중은 재벌개혁이란 올가미를 걸어놓고 재벌들로부터 엄청난 돈을 뜯어내고 있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1백50억원을 청와대에 상납하였다』고 실토했다.
기업주들로부터 챙긴 검은 돈만도5천억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구조조정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체들과 은행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매각하면서
또한 큰 돈벌이를 하고 있다.
김대중은 미국의 에이에스회사가 한국화학의 발전사업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5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았고 한국의 유망 기간산업의 주식을 헐값으로 팔아 넘기기로 하고
또한 막대한 사례금을 받았다.
김대중은 국제금융투기수괴로 국제사회에 악명 떨치고 있는 소로스에게 단기채권시장을 내주고
서울증권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그로부터 4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외국투자가들에게 온갖 이권을 보장해준 대가로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은 2천억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외세에 기업을 팔고 시장을 팔다 못해 우리 영해와 영토까지 팔아 엄청난 돈을 챙기고 있다.
김대중은 지난해10월 일본상전을 찾아가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황금어장을 팔아 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일간의 어업협정을 발효시키기로 한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먹었다.
일본의 재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재경부의 한 고위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한일어업협정의 체결로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된 일본의 재계는 어업협정이 정식 발표된 즉시에
김대중의 해외은행 구좌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사례금을 넣어주었다 한다.
김대중은 집권후에도 광주살인마,
비자금도둑왕초전두환, 노태우를 잘 보살펴주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뜯어내고 있다.
김대중은 전두환, 노태우의 비자금문제와 추징금징수를 무마시켜주기로 하고는
그들로부터 각각 2천억원씩의 사례금을 받았고
정치활동재개를 보장해주고 또한 엄청난 돈을 받아먹었다.
김대중은 지난1월 추징금도 내지 않고 또 금고이상의 형을 받아
「전대통령의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된 특등범죄자 전두환에게 외교관여권을 주어
방일행각을 하도록 한 대가로5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아먹었다.
심지어 김대중역도는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금모금운동」이라는 것을 벌여놓고 거기서도 막대한 돈을 착복하였다.
김대중은 국민들로부터 수집한 금붙이들 가운데 일반적인 금붙이는 금괴로 만들어 팔고
값비싼 금패물들은 그대로 외국의 보석상들에게 넘겨 돈벌이를 했는데
그 금액은 대략2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예상된다.
인사는 곧 돈줄이었다.
역대집권자들에 의해 행해진 인사권을 이용한 돈벌이는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하에서 더욱 번창해지고 있다.
김대중의 인사를 통한 돈 사냥은 주로 장남 김홍일을 통해 벌어지고 있다.
김홍일은 애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권은 물론 군과 검찰,
경찰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여 돈벌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장성별 한 개의 공정가격이1억원이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김대중 부자가 군과 경찰인사를 통해서만 착복한 돈이 6백억원은 넘는다.
김대중은 친족은 물론 처가 족속들까지 발동하여 검은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김대중의 여섯째 처남 이성호는 해외여행 알선업체인 「평화관광」을 경영하면서
김대중을 등대고 해외 특혜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걷어들이는 한편
유학시절 미국 에리모 대학과 조지 워싱턴대학원에서 친교를 맺었던 인맥들과 짜고
미국현지에 진출한 한국재벌업체들에게 이권을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 김대중의 금고를 채워주고 있다.
김대중은 이형택과 이세작 등 처조카들까지 발동해 막대한 비자금을 긁어들이고 있다.
김대중의 처조카인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 이형택은 금융계에 손을 뻗쳐
신탁통치로 인해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은행들과 종금사들을 살려주겠다는
담보로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걷어들였다.
김대중의 둘째 처남 이경호의 차남인 이세작은 변호사의 간판을 걸고 각종 비리에 걸려든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을 살려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였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소유한 재산이 9억4천만원인 것으로 신고했고
대선 후의 재산공개 시에는8억8천만원으로6억6천 만원이 줄어든 것으로 공개했지만
지금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알려진 것만 해도1조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뜯어낸 돈을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비롯한 외국은행들에 있는
자기의 비밀구좌에 입금시켜 놓았는데 그 규모는10여억 달러에 달한다.
부정부패의 왕초 김대중 역도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 정치적 안정과 경제와 민생안정도 이룩할 수 있고 깨끗한 정치도 실현할 수 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선전국 주체88(1999)년7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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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서야 한다]에서
저들이 노략질해간 부채를 우리가 떠 안았습니다.
자자손손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160조의 공적자금,
또 다른200여조의 국가채무,
100여조의 연기금을 마구 풀어헤쳐 놓고 그 돈을 노략질했습니다.
우리는 이 노략질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저들은 돈을 풀어 가장 먼저 금융기관을 국유화했습니다.
은행에 빚을 진600여 개의 대기업, 중견기업들을 국유화했습니다.
기존의 공기업이405개입니다.
이1,000여 개의 대형 기업들이 한 순간에 정부 소유가 됐습니다.
이미 이 나라는 국영공화국이요 사회주의 국가로 변신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정치꾼들이 나가 연봉을 170%까지 올리고,
수당을 얼리고,
판공비를 수백 프로씩 올리고,
하청업체 및 조폭들과 야합히여 돈을 털어 갔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공자금을 넣어야 기업이 산다며 떼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금을 통제하는 부서도 없습니다.
풀어헤친 공자금은 그의 추종세력에게, 알아서 챙겨가라고 내놓은 돈입니다.
이걸 우리더러 갚으라 강요합니다,
세금을 올리고, 세무행패를 강화하고, 공공요금을 올리고, 거리마다 무인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우리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데 혈안이 돼 있는 것입니다.
전기료를 단 한번에 2배나 올렸습니다.
농촌 심야전기 시설비를 40만원에서 170만원으로 대폭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북한에 전기를 준다 합니다.
기업들이 은행에 담보로 잡혔던 토지와 건물도 정부가 차지했습니다.
정부는 자산관리공사라는 대형 브로커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1,600명이나 됩니다.
이 브로커 기구가 토지와 건물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급매물로 외국에 내놓았습니다.
골드만삭스, 론스타. 리만브라더스, 싱가포르투자청 등 해외 브로커 업체들에
고물가격으로 마구 팔아치웠습니다.
그들은 웬 떡이냐 싶어 이들을 사서 곧바로 다른 외국기업들에 되팔았습니다.
더러는 3배,
더러는5배의 가격으로 횡재를 했다 합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외국 브로커 업체들이 자기 돈은10-30%만 대고,
나머지는 국내 은행에서 빌려 가지고 샀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빌려줘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폭리를 준 꼴입니다.
왜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정권에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여의도의60배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땅이 외국인 소유가 됐습니다.
2000년12월27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웬만한 빌딩 치고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보도했습니다.
이면계약의 존재에 대해서도 밝혔습니다.
강남에서 가장 큰 건물인 "현대I-타워", 서울시청 옆에 있는 "파이낸셜센터",
"벽산빌딩", "아시아나항공", "힐튼호텔", SK 증권, 동양증권, 쌍용증권, 고려증권, 대우증권,
여의도 KTB 빌딩, 은석빌딩, 한효빌딩, 대한방적 빌딩, 금호그룹 신사옥, 광주은행 사옥,
"시티타워", "현대중공업빌딩" 등, 서울에서 가장 큰 건물들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팔아 넘긴 돈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공식계약서에 표시된 돈은 은행으로 들어갔고,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돈은 저들의 주머니로 갔을 것입니다.
공식계약서에 잡힌 돈은 외환보유고로 잡혔습니다.
정부는 툭하면 외환보유고가 늘어났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잘난 외환보유고는 바로 이렇게 헐값에 팔아 넘긴 잔돈이었습니다.
이면계약서에 쓰여진 검은 돈이 더욱 클 수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도륙질 했습니다.
빅딜이라는 생소한 낱말로 국민을 혼란시키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마음에 드는 기업에 합쳐 주었습니다.
워크아웃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빼앗았습니다.
빼앗은 기업은 식솔들에 나누어주었습니다.
기업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가면서 겁을 주었습니다.
기업의 운명을 거머쥔 실세들에, 알아서 돈을 바치라는 신호였습니다.
기업은 앞을 다투며 저들에게 상납을 했습니다.
저들과 선이 닿는 연줄을 찾아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습니다.
벤처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이용해 사기도 쳤습니다.
청와대 식솔, 동교동 가신, 국정원, 조폭들이 총 동원되어
어린 벤처사장들과 사기 친 돈을 나눠 갖았습니다.
그야말로 난장판 놀이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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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씨의 아버지는 좌익에게 피살되고,
孫씨는 金大中씨를 돕는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다. 金大中씨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조사는 엉뚱한 비밀을 드러내었고, 그는 金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末年은 「출생의 비밀」이란 그늘 속에서 스러져 갔다.
死因은 심장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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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朝鮮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생전의 孫昌植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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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11월25일 오후1시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남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死因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시20분. 亡者의 이름은 孫昌植(손창식·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 前 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亡者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金大中 前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家臣」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1988년부터 10년간 金大中 前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몰래 추적해
그 실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이뤄지던 그의 추적 작업은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 한길소식지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당시 한길연구회 간사장이었던 그는 金大中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징역1년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孫昌植씨를 만났다.
10년 동안,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探査(탐사)작업을 하고,
그 후1년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孫씨는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좀 더 허름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살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추적작업은 계속되었다.
그의 추적작업을 검증하기 위해 기자는 2001년 여름,
그와 함께 金大中 前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50代 후반의 나이에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추적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孫씨의 숙원이었다.
한 인간의 家系(가계)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家系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가 10년의 세월을 바쳐 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客死했다.
다음의 글은 기자가 생전의 孫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金大中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려고 시작했다』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추적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 朴正熙 대통령이 충복 金載圭(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逝去(서거)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바람이 거세게 일던,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저는,
제가 존경하는 金大中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10일자 신문을 보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날짜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 등 3개 신문의 정치면에
「金大中씨는 金海 金氏가 아니라 尹씨라는 주장이 김해 김씨 문중 제사에서 거론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金海 金氏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尹씨」라니요.
선생님에게 대통령이 될 찬스가 오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음해를 다 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명을 바쳐서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孫씨는 문제의 기사를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金庾信(김유신) 장군을 위한 제사인 金山祭가
1980년 5월9일 경주 인근인 興武王陵(흥무왕릉·김유신 장군묘)에서 열렸다.
金鍾泌 공화당 총재는 初獻官(초헌관: 제사에서 첫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금빛 모자에 남빛 도포의 朝服冠帶(조복관대) 차림이었으며,
金大中씨는 일반 祭官(제관)으로서 검은색의 제복을 입었다.(중략) 이날 아침 大祭가 열린 興武王陵 앞에는 「金大中」 아닌 「尹大中」이라는
플랭카드가 내걸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좌익들에게 맞아 죽은 아버지 기사를 읽고 나자 孫씨는 이렇게 말했다 『 제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입니다.
金大中 선생의 고향인 하의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恨서린 전라도 사람으로서,
또 같은 섬마을 출신으로서
선생님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일이야말로 저의 숙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권해서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흔적은 고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녔던 학교,
어릴 적 친구,
동네 어른들이 다 증인입니다.
저는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녹음해서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孫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姓氏 문제는 金大中 선생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입니다.
자기 姓氏와 관련된 더러운 모함이 제기되면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金大中 선생은 너무나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적게 얻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그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는 사안이었습니다.
본인이 못한다면 그를 대신하여 그의 政敵들에게 모함의 추잡스런 실체를
밝혀 줘야겠다는 것이 제 탐사 작업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제 어머니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6·25 사변 중에 빨갱이들 손에 죽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저 하나를 보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金大中씨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던 저에게
「사상도 온전하지 않은 金大中이를 따라다니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격이니
제발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金大中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모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 孫昌植씨는 누나만 일곱인 집안의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孫貴峰)는 일제 시대 때 일본에 건너갔다가
광복 직후에 귀국해서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
孫씨 아버지는 孫씨가 태어난 지2년 후,
6·25 혼란기에 마흔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지방 빨갱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집안의 代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孫씨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본에서 鐵공장에 다니며 고물상을 했다고 합니다.
돈도 꽤 벌어 일본에 온, 완도 출신들에게 학비를 지원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도움받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귀국 후엔 면장, 군수 등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를 살리기 위해
주민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 6·25 동란 때 저는 세 살이었기 때문에 사연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중학 2학년에 다닐 때,
하루는 만취한 외삼촌이 잠자는 저를 깨워 바닷가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삼촌은 완도군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 지국장을 했던 분입니다.
외삼촌은 저를 보고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가 너한테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 중학교 2학년 때니까 저로서는 세상물정을 모를 때였죠.
궁금해서 호적을 살펴보았습니다.
호적에는 아버지가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으면 한숨만 쉬면서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이 그 당시 제 가슴속에 늘 맴돌았습니다.
대학 입학 후,
누님으로부터 비참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범인들을 처형하면 더 많은 원수가 생긴다』 6·25 전쟁 중에 완도군을 점령한 지방 좌익들이 시골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孫씨의 아버지를 잡아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죽창,
몽둥이 등으로 타살했다는 내용이었다.
孫씨 외삼촌 두 사람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한다.
끔찍한 이 사건이 있은 지3일 후,
완도는 해방되었고,
孫씨 아버지 살해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27명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어머니의 恨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완도 경찰서장이 어머니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까지 지낸 분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를 업고 완도경찰서로 찾아가
그분에게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사정을 했답니다.
그것은 저 하나만은 꼭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완도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호소했다고 누님이 말해 줍디다.
내 아들은 원수가27명이다.
나라에서 이놈들을 전부 사형시키면 이들의 자식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어린 새끼 하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놈들을 전부 죽이면 내 아들은 저들에게 딸린 수십 명의 자식들한테 원수가 된다.
이 아들 키우면서 절대 敵을 만들지 않고 살 테니 저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말아 달라」
어머니의 이 호소로 동네 사람27명은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제가 일곱 살 때의 일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의 조그만 외길을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수염을 길게 기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저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 어린 저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저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도,
외삼촌이 어린 저를 붙들고 울었던 것도 다 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려 있는
곡식부터 걷어 주고 자기 집 일은 나중에 할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윗사람 노릇하기보다는 항상 아랫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후배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며 사는 것이 편하지,
가진 자의 것을 뺏거나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1971년 大選 때 金大中 후보를 돕다
완도중학을 졸업한 孫씨는
완도 수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光州로 나가 숭의실업고교로 전학했다.
孫씨는 1968년 조선大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누이를 통해 들은 것이
대학 입학 후였다.
대학생인 그는 실의에 잠겼다.
못 배운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이 죄가 되고,
6·25 전쟁 중에 좌익 손에 죽은 아버지를
「1949년에 病死」한 것으로
허위 기록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공부가 싫었고,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이 미웠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半건달 생활을 1년간 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고향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4H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완도군 4H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70년엔 가정을 꾸리고,
완도 특산물인 해태(김)를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이듬해 그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孫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金善太(김선태)씨가
농촌의 젊은 지도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완도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金善太씨는 야당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당선을 위해 뛰고 있었다.
金善太씨는 전남 보성·장흥·강진·해남 지역의 유세 독찰반 책임자였다.
스물세 살이었던 孫씨는 사업을 잠시 접고,
신민당 완도군당 선전부장 겸 金善太씨 보좌역이 되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金大中씨는 공화당의 朴正熙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가 家産을 온통 쏟아 부은 해태 사업도 망해 버렸다.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그는 친지 소개로 대구에 있는 신성무역이라는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1972년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大邱에 있는 공장에 공원 겸 견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신성무역은 對日 「홀치기」 무역회사였다.
홀치기는 얇은 비단에 각종 문양을 새긴 후 염색한 옷과 의복을 말하는데,
손으로 한 바늘씩 정성스럽게 짠 우리나라 제품은 일본 상류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 무렵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벙커C油를 구하기 위해 全직원들이
외지에 출장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油公 대구출장소장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 소장님, 신성무역은 좌절한 제 인생을 구해 준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 저는 꼭 報恩(보은)을 하고 싶습니다.
말단 사원인 제가 사장님과 간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번만 도와 주십시오』 油公 대구 소장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봉투 한 장을 주었다.
『봉투 속에는 기름 한 차를 살 수 있는 주유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름 한 차를 몰고 회사 정문에 들어가니
간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장간 직원들이 1.8ℓ짜리 기름 한 통을 겨우 구해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회사의 인정을 받았죠.
다음날엔 입사 후 처음으로 회사의 최고 어른인 사장님도 뵈었습니다.
당시 郡守 월급이 1만5000원인데 저는 3만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大邱 계명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적을 두고 못 다한 대학 공부도 마쳤고요.
1974년부터는 대구 친구들의 도움으로 밤마다 기름장사를 하면서
巨金 500만원을 벌었습니다.
날려버린 家産을 거의 보충했죠.
아버지 제사 지내러 고향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신성무역 일본 교토 지점장을 지내고 나서 정치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6년 정도 회사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
그는 金善太씨 권유로 정치판에 복귀했다.
金善太씨가 梁一東씨와 함께 통일당을 만든 때였다.
그는 인권 부국장을 맡았다.
金相賢씨가 만든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부장을 맡아 「동교동」과도 인연을 맺었다.
金大中씨가 金씨가 아니고 尹씨라는 말에 분노해 출생 내막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본격적인 야당 당료 생활을 시작하던 이 무렵이었다. 李姬鎬 여사가 선물한 벙어리 장갑 결심은 했지만 孫씨는 바로 金大中씨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갈 수 없었다.
光州사태와 관련해 불법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1980년5월 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보도 통제가 되었던 光州의 참상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배 李京植씨 등
동지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신촌·청량리·잠실·영등포 일대의
전화부스와 건물 옥상에 뿌렸는데,
저는 신촌 일대를 맡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징역1년6월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金弘一·韓和甲·金玉斗·咸允植씨 등이 수감돼 있었다.
孫씨는 정통 동교동맨은 아니었지만
光州사태 관련자여서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金大中씨는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지만
李姬鎬 여사가 아들 金弘一씨 옥바라지를 위해
대전교도소에 자주 면회를 왔습니다.
李姬鎬 여사는 저에게도 光州사태로 고생한다며 겨울철엔 귀마개하고
벙어리 장갑을 넣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워서 고맙다는 편지를 써보냈더니 李여사가 자필로 답장도 보내 주었습니다.
金弘一씨는 저와 동갑(1948년생)이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홍일씨는 마른 오징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뚱뚱한 사람이 운동은 안 하고 오징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일본인 시바다 기자를 만나다 출소 후 그는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양복 재단사인 매형과 합자하여
서울 종로에 양복점을 냈다고 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그는 서울 관악구에 있던 미원 대리점을 인수했다.
전국270개 대리점 중에서 판매율이 꼴찌에 가깝던 이 대리점을 그는 인수
1년 만에 전국 10위권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강남과 과천 일대를 발로 뛰며 시장을 개척한 결과였다.
그의 활약상은 미원 社報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판매 교육 강사로 강연도 다녔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정치판에도 열심히 나갔다.
번 돈으로 돈 없는 야당 의원들을 지원하기도 하고,
야당에서 하는 일을 위해 돈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시절 그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을 맡았고,
1985년 民推協 발족 때는 인권국장에 기용됐다.
데모하다 구속된 학생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이 인권국장의 일이다.
쫓기고 숨어 지내는 야당 시절이었지만 별도 사업체를 갖고 있던 그는
항상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잘 나가던 그는1987년 후반,
몇억원 어치의 물건을 팔면서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졸지에 망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집도 내놓았다.
그가 평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때였다.
부도 수습을 위해 정치는 뒷전이었다.
겨우 빚을 수습한 孫씨는 휴식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 그동안 미뤄 왔던
하의도行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의도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맨 먼저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한국 특파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를 찾아갔다.
시바다 기자는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에서 金大中씨의 실제 아버지는
尹모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孫씨는 시바다 기자를 통해 제보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시바다 미노루 기자의 사무실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다.
孫씨는 사전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돼먹지 않은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오』
孫씨의 흥분한 모습에 놀란 시바다 기자는 유창한 한국말로
『진정하시고 찾아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 孫昌植이란 사람이오.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출마한 야당 지도자 金大中 선생의 출생이 의혹스럽다며
新군부 구미에 맞는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글을 쓴 것을 보면
당신은 全斗煥 소장의 1등 첩자임에 틀림없소.
당신을 국제법에 의하여 제소하겠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당신에게 이따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가르쳐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동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겠소』 『취재원은 알려 줄 수 없고, 金大中씨 호적 초본은 드릴 수 있소』 더 따져보았자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건네주는
호적초본을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고 한다.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쓴 「金大中의 좌절」이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金大中씨 家系와 만나야 할 사람들의 윤곽을 파악하는 한편,
하의도 출신의 金海 金씨로 金大中씨와 같은 집안인 金敬仁(김경인)
前 의원을 수시로 찾아갔다고 한다.
『金敬仁 前 의원은 金大中씨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어리고,
초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木浦에서8대,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의 근황과 하의도 사정에 밝았습니다』
대충의 윤곽을 파악한 孫씨는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上衣(상의) 윗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준비를 마친 孫씨는 1988년 4월,
난생 처음으로 하의도를 찾아갔다. 세 개의 녹음기를 준비하다 ―어떤 방식으로 탐사를 하였습니까.
『낚시꾼 차림으로 변복하여 金大中씨 출생지인 전남 신안군 하의島와
그 인근 섬인 상태도·하태도·장병도·옥도 등지를 찾아가
그곳에 사는 村老들의 말을 녹음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쉽게 입을 열었습니까.
『보통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기 몇 년 전에 젊은 사람 하나가 면사무소에 찾아와 金大中씨 호적을 떼려다
뺨까지 맞았고,
객지 사람들에게는 金大中씨 얘기를 하지 말자는 동네 회의까지 있었다고 합디다.
金大中씨 호적서류를 떼기 위해 하의면사무소 직원을 인근 다방으로 불러내어
차 한잔을 사주고 부탁하다가 저 역시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하의도에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은
金大中씨의 하의보통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는 金大中씨의 어릴 적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했고,
제가 「그 윤성만이가 오늘날 그 유명한 金大中 선생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그때부터 입을 다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노인을 통해 알게 된 다른 동창생을 찾아갔더니
金大中씨와 관련된 질문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고 『당신, 中情(중앙정보부) 사람 아니냐』고 따지 듯이 묻다가,
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느 신문사 기자냐』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을 통해 얻은 유일한 수확은 金大中씨가 1923년생 돼지띠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탐사작업은 동네 사람들의 경계심으로 소득 없이 끝났지만,
木浦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만난 장사꾼들로부터
하의도 일대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의도 인근 섬에서부터 서서히 시작해
실체에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녹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소형 녹음기 한 개로는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부터는 녹음기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또 하나는 소형 라디오 속에 숨기고 나머지 한 개는 舊形(구형) 핸드폰처럼 개조했어요.
시험을 해보니 한두 개는 항상 녹음이 되었습니다』 金大中 생모의 첫 남편은 제갈성조 ―출생의 내막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金大中 대통령의
생모는 張鹵島(장노도·나중에 장수금으로 개명)라는
분인데,
1893년 전남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에서
張之淑의 장녀로 태어나
197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호적에 따르면 그분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11년에 하의면 大里(대리)에 살던
諸葛成祚(제갈성조)라는 사람과 혼인을 하는데,
이 남편이 요절하였습니다. 문제는 金大中 대통령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諸葛成祚의 호적 서류가
법원과 면사무소 양쪽에서
모두 폐기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를 기록하는
호적 서류는 그 중요성 때문에 행정부
(본적지 관할 面사무소)와 사법부(본적지 관할 법원)
양쪽에서
영구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張鹵島가 諸葛成祚와 혼인했다는 사실은
하의면 사무소에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제적부에 남아 있습니다.
호적은 맨 첫 장에 호주 이름이 나오고
이어서 출생순서에 따른 자식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諸葛成祚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諸葛成祚 부친 호적에는 諸葛成祚 형과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만,
묘하게도 諸葛成祚 부분만 毁棄(훼기 : 특정 페이지가 사라지고 없음)돼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諸葛成祚 부분만 찢어 버린 것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張鹵島가 諸葛成祚의 妻고,
諸葛成祚가 죽은 뒤 張鹵島가 그의 부친 張之淑 호적에 再입적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오른쪽 사진 참조).
이를 근거로 하여 저는 하의면을 관할하는 光州지방법원 木浦지원에서 보관 중인
諸葛成祚 부친의 호적 원부 및 除籍(제적) 원부에 대해 「인증 등본」을 신청하였습니다.
「인증 등본」은 법원에 보관 중인 서류가 官에서 인증하는 절차를 거쳐
발급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신청에 대해 光州지법 木浦지원은 諸葛成祚에 대한
서류가 폐기되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의 경우,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호적서류가 법원에서는 폐기해 버렸고,
면사무소에는 부친 제적부에 일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결혼과 함께 부모 호적에서 제적된 張鹵島가
1925년에 아버지 張之淑 호적에 再입적되었다는 점입니다.
1925년이라면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과 맞물립니다.
金大中 대통령의 호적에 의하면,
그는 외할아버지 張之淑에 의해 檀紀(단기) 4257년(서기 1924년)
출생신고가 되었습니다.
출생신고를 외할아버지가 했다는 것은
부친의 존재가 호적에 이름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은 생모 張鹵島가 1960년에 金云式과 혼인하면서 金云式의
「嫡出子(적출자)」가 되었습니다.
1960년이라면 張鹵島의 나이 쉰일곱일 때의 일입니다. 스물여덟 명의 증언을 비밀 녹음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諸葛成祚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여자는 出嫁外人(출가외인)이라 하여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의 귀신이 되는 게 옛날 풍습입니다.
金대통령의 어머니도 남편 사망 후 계속 시댁에서 살았는데,
시숙(남편의 형)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시숙이 울타리 하나를 담장으로 하여
제수와 나란히 살면서 홀몸이 된 제수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諸葛成祚 사망 후에서 시작해 張鹵島가 친정 호적에 재입적되는
1925년까지가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을 둘러싼 미궁의 세월입니다.
金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金대통령 문중 사람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돼지띠(1923년생)라고 합니다.
金대통령 본인도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朴正熙 후보를 잡아먹을 수 있다」며 돼지띠라고 말했습니다. 金대통령 호적을 보면 알겠지만,
기재 내용을 정정하는 도장이 무려 아홉 개나 찍혀 있는데,
이것만 봐도 출생 내막이 복잡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왼쪽 사진 참조).
하의도 일대 村老들에 따르면 金대통령이 출생하기 얼마 전에
張鹵島는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에서 소금장사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차렸답니다.
이 주막집에서 金대통령이 출생했습니다.
하의도에 지어 놓은 金대통령의 生家가 이 주막집입니다.
주막집 시절에 金 前 대통령의 어머니는 尹모씨와 상당 기간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金대통령의 어릴 때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金대통령 어머니는 尹모씨와 살 때,
주막집에 드나들던 하의도 부자 金云式을 알게 되었고,
金云式이 마련해 준 집에서 살다가 1960년에 金云式과 정식 혼인신고를 합니다.
金云式은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입니다. 金云式에게는 본처가 있었습니다.
본처와의 사이에1남3녀를 두었는데 장남 大本
(호적상 이름은 大本인데, 비석에는 大奉이라 적혀 있고 동네에서도 대봉이라고 불렀음)씨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신고된 사실을 알고,
金大中씨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동네가 시끄러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출생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저는 金대통령의 생모 張鹵島 집안 사람과 張鹵島의 「호적상 첫 남편」
諸葛成祚네 사람들,
그리고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金云式 문중 사람들과
張鹵島와 일시 동거했던 尹모씨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1950년, 60년대에 하의도 面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던 직원들도 접촉했습니다.
이 가운데 스물여덟 명의 말을 비밀 녹음했습니다』 金大中을 죽이려한 그의 이복 형 ―金대통령의 생모와 일시 동거했던
尹모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가정적으로 참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妻복도 없고,
아들복도 없었습니다.
아내를 얻기만 하면 딸만 낳고 죽어 버려
세 번 결혼에 딸이 여섯이나 되었답니다.
그런 형편이었던 터라 주막집 여주인
張鹵島가 아들을 낳자,
尹성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겁니다』 ―金대통령 호적에는 尹모씨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요. 『친척분 말은,
그때 尹모씨에게는 장성한 딸들이 있었답니다.
딸들은 바람기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 아들이 과연 아버지 자식이 맞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는 거지요.
또 하나 이유는 尹모씨의 벌이가 시원찮아 주막집 아낙 張씨와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던 중
金云式 영감이 나타난 것입니다. 尹모씨 딸들은,
자기 아버지가 金大中씨를 호적에도 못 올려 주고
학교에도 못 보내 준 게 두고두고 죄라고 합니다.
그 바람에 尹씨니, 金씨니, 諸葛씨니 하며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金云式씨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큰아들 大本씨와 친구라는 사람에 의하면,
돈 많고 술 좋아하고 노래 잘하고 잘 놀았던 멋쟁이라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주막집을 드나들면서 尹모씨가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金云式 어른이 매일 주막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 먹고,
자고 가기도 하니까 누가 술집에 옵니까.
그래서 張씨는 술집을 그만두고 金云式 어른이 차려준 세 칸짜리 집에서
金大中씨 형제들을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金大中씨 어머니를 위해 木浦에 여인숙을 차려준 분이 金云式 어른입니다』 ―金云式씨 부인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을 텐데요. 『남편이 저지른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았답니다』 ―金云式씨의 큰아들과 金대통령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어릴 때는 나쁘고 좋고 할 게 없었는데,
金云式 노인이 1960년에 본처와 이혼하고 張鹵島와 혼인신고한 사실을
面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전해듣고는 그때부터 金大中씨를 죽이려고 했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고함치면서 자기 아버지까지 때려,
동네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난리였답니다. 大本씨는 식칼을 들고 몇 차례나 木浦에 있던 金大中씨를 쫓아갔답니다.
그럴 때마다 金大中씨는 목포 선창가에 지프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형을 술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사주었답니다.
大本씨는 목포 여관에서 며칠씩 머물다
동생이 돈을 듬뿍 주면 그제서야 하의도에 내려가,
낮부터 저녁까지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답니다.
그러니 그 집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몇 해 못 가서 大本씨는 술병이 나서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 ―金云式의 말년은 편했습니까. 『1974년에 돌아가셨는데 늙어서 설움을 많이 받고
살았답니다.
金大中씨 어머니한테 천덕꾸러기 대접받으며
서울 동교동 집을 다녔다고 합니다.
영감(金云式)이 동교동에 가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
張鹵島는 「뭐 한다고 여기까지 왔소.
당신이 대중이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또 찾아오냐」며
무안을 주었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李姬鎬 여사)가 봉투에다 몇만원을
넣어서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걸 들고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랬다는 겁니다』 ―金대통령은 어머니가 金云式과 살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尹씨가 맞겠네요. 『尹씨 친척 분을 만났더니, 尹씨 생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金大中이는 자기하고 살기 전에 주막집 아낙이 밴 아기인데 자기하고 살면서 낳았고,
그(金大中)의 동생은 자기하고 살면서 생겼으니까 자기 아들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金대통령이 諸葛씨라는 근거가 그것입니까.
『하의면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어른들은 다 諸葛씨라고 했고,
金海 金씨 문중 어른들도 諸葛씨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諸葛成祚란 사람의 집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형과 동생이 나란히 살았는데,
동생 諸葛成祚가 요절한 뒤 시댁에 살고 있던 제수를 시숙이 돌본다고 하면서
제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숙이 제수를 위해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뻘이섬 또는 봉도라고도 하는
鹽田(염전) 옆 부둣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시숙 친구가 되는 尹모씨가 살게 되었는데,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애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애가 金大中씨라는 것이 金海 金씨 문중 어른의 말입니다.
아들이 귀한 尹모씨가 자기의 성을 따서
윤성만이란 이름을 지어 주긴 했지만 실제로는 諸葛씨라는 것이지요』 ―諸葛씨 쪽에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까. 『70세 후반의 諸葛 家(가) 할머니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열 살 때,
시숙이 제수씨 방에서 나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몇 번 된다고 하였습니다.
열 살 때 일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느냐고 저도 추궁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말은,
그 때 열 살이면 밥도 하고,
애도 보는 나이였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열 살쯤 더 먹은 언니도 시숙이 제수씨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고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張鹵島는 시댁을 떠나 뻘이섬에 주막을 차렸답니다.
그 할머니가 클 때는,
여자들끼리 모이면 諸葛成祚의 형이 金大中씨 아버지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諸葛씨 사람들은 지금도 하의도에 살고 있습니까.
『諸葛成祚의 형은1958년에 고향을 떠나 내륙 모처로 이사갔습니다.
제가 그곳까지 찾아가 그분 후손들을 만났지만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증언자들은 모두 생존해 있습니까. 『1999년 정초에 네 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金弘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다 孫씨는 「金大中 출생비밀」의 탐사작업을 기록한 녹취록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녹취록에는 孫씨가 만났던 사람들이A노인,
B씨 등 익명으로 기록돼 있고,
그 옆에는
성별,
나이,
만난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방대한 기록이었다. 『 이 녹취록은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제가 3회에 걸쳐 다시 듣고
확인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말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이 공개될 경우,
행여 불이익이나 탄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급적 실명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사는 동네 정도는 표기하고자 하였으나 하의도 일대가 워낙 작은
동네이다 보니 금방 소문날 것 같았습니다.
사투리는 가능한 살렸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취재원 보호를 위하여 옮기지 않았고요.
녹취록 원부는 CD(콤팩트 디스크)에 수록해 놓았고,
녹음 테이프는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의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돼 있습니다. 저는 1심 재판에서는 이 녹취록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 대통령 측에서 제가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송을 취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저도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항소심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는데 증거 채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거로 채택되면 재판기록에 첨부돼 영구 보존되고 열람이 가능합니다.
아마 재판부로서는 이 점을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金大中 출생비밀」에 대한 탐사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동교동에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작업의 결과를 혼자만의 비밀로 영원히 간직할 것인지,
아니면 金대통령에게 直言하여 뒤늦게라도 진실을 밝히도록 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목포에 거주하던 하의도 출신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金海 金씨 문중 사람 중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중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가 金大中씨는 諸葛씨라고 하는 말에 격분해
그 친구와 대판 싸움을 벌였고,
그 뒤 동네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알고 어른들께 사실대로 바로잡자고 건의했다가
야단맞은 일도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이 문제는 본인과 무관한 부모 책임이다.
따라서 金大中씨 스스로,
우리 어머니는 참 불행했고 나도 불행했다라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어쩌면 귀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당신이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실체에 접근할수록
본 궤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해답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답을 안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냥 돌아갈 뿐 멈출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갈등 끝에 저는 金대통령의 큰아들 金弘一씨를 만났습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金大中씨가 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난 이후입니다.
동갑이고,
대전형무소 감방 동기였던 그에게 제가 조사한 얘기,
들었던 얘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金大中 선생은 대통령이 되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어머니는 불행한 분이다.
때문에 나의 소년기도 외로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야망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정도는 밝히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저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담이었습니다.
동교동 측근들을 만날 수 없었고,
다시는 동교동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동교동의 장벽은 참으로 높았습니다』 金大中만이 풀 수 있는 새끼 꼬기
당시의 심정을 孫씨는 녹취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도는 金大中씨와 관련된 해괴망측한 소리들의 진원지가
하의도였다니.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 왔던 金大中 선생의 실체가 하나씩 들춰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참담했다. 全斗煥, 金鍾泌 등 金大中 선생의 政敵들에게
『당신들은 거짓말쟁이오』라고 외치고 싶었던 내 생각들이
점점 스스로 자멸하고 있는 게 아닌지 나는 두려웠다. 『 역사를 밝히고,
올바른 人物史 추적을 위하여 소리 없는 투쟁가처럼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내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 낸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더 이상 추적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 답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갖고 있을 것이다.
金大中 선생이 答을 한다고 해서,
아니 答을 안 한다 하더라도 어쩌란 말인가.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호적 정리를 하는 것이다.
호적정리를 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 각인돼 있는
「金大中」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
누가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金大中 선생 본인만이 풀 수 있는 「새끼꼬기」가 아닌가. 이 탐사작업을 하면서 때로는 봉변도 당했고,
기관원들이 눈치를 챌까 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였다.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몇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은 일에 매달린
家長으로서의 책임도 나를 고달프게 했다.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집사람 볼 낯도 없었고,
점차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金大中 선생에 대한 나의 애정을 식혀 버렸다> 이 탐사작업을 통해 孫씨는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인생 후반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金씨가 아니고 諸葛씨란 사실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길소식지에 실렸습니다.
그 기사는 직접 쓴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썼어요.
한길연구회 간사장 겸 한길소식지 편집인이었던 저도 원고를 보지 못했습니다』 ―검찰 조사를 몇 번이나 받았습니까. 『7개월 동안 열여덟 번 검찰에 불려 나갔습니다.
조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야간에 출두하라고 했어요.
담당 검사가 金海 金씨였는데,
제가 조사한 金大中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소상히 이야기하니까 놀라더군요.
담당 검사는 출생의 실체를 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제 진술을 듣기만 할 뿐 조서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저보고 「조사만 하지 기소하지는 않겠다」고 하더니 기소 만기일인
1998년6월18일에 저를 기소했습니다』 1심 첫 재판은 1998년 7월14일 오후4시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밤8시에 열렸다.
다른 재판이 다 끝난 뒤였다.
서울형사지법319호 법정의 방청객은 孫씨의 친구인 李京植씨와 趙福衡씨가 유일했다.
이날 재판에서 孫씨는 冒頭(모두) 발언을 통해 재판장과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재판은 누구를 위한 재판입니까.
이 재판이 대통령의 통치에 보탬이 됩니까.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운 현직 대통령의 출생과 관련된 재판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不敬스럽기 때문에 재판을 취소해 주십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金弘一 의원의 측근이며 孫씨도 잘 아는 현역
국민회의 의원이 孫씨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돈과 자리를 제의하며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해외 대사관에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국내를 떠나라고 해요.
돈도 10억인가20억을 준다고 했어요.
제가 그랬어요.
명예훼손 사건이니까 訴부터 취하해 달라고요.
세 번인가 찾아왔는데 訴 취하를 안 하니까 계속 재판을 한 겁니다』 혼자서 재판 준비 ―재판을 받는 심정이 어땠습니까.
『첫 재판 기일을 통고받은 뒤,
이틀인가 사흘일인가를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어요.
변호사도 없이 재판하는 놈이 잠만 자니까 친구들은
저를 속이 없는 사람으로 봤을 거에요.
그러나 저는 원칙대로 살아왔으니까 꿀릴 게 없었어요』 ―변호사는 누구였습니까. 『세상 인심이라는 것이 참 웃기더라고요.
25년을 야당생활하면서 제가 주로 맡은 분야가 인권입니다.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야당 당원들의 변호사 선임이 인권국장인 저의 일이었으니까
세칭 인권 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많이 압니다.
그분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맡지 않았으면 하는 낌새더라고요.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이니까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수임료를 못 받을 것 같아서 거절한 것 아니겠습니까.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피하는 거예요.
무지하게 서럽더라고요.
혼자서 재판 준비를 했습니다.
法大 출신인 李京植 선배로부터 법률적인 도움을 받았고,
남산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았습니다』 ―법정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오후4시에 시작한다고 하고는 밤10시에 개정하는 재판은 처음 보았습니다.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법정에서 기다렸지요.
오후7시나 8시쯤 재판이 시작돼 끝나고 나오면 컴컴했어요.
텅 빈 법정에서 재판부하고 검사하고 나하고 셋이서 재판을 했으니까요』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기는 계기』 ―증인 신청도 했습니까. 『金鍾泌씨와 全斗煥 前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지요.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붙었던 金海 金씨 문중 제사에서
초헌관이 金鍾泌씨였기 때문이고,
全斗煥씨는 金大中씨에 대해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姓氏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재판부가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심 재판장이 대구 분이었어요.
대구는 신성무역 다닐 때 살았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뎁니다.
재판장한테 호의를 가졌고,
재판장도 저한테 호의적이었습니다.
1심 때는 金弘一 측 사람이 저를 찾아오고 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정을 재판장에게 얘기했더니 만나보고 나서 재판하자며
재판 날짜를 계속 연기해 주었습니다.
재판장도 화해를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재판을 하는데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장 얼굴이 상기돼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선고를 하는 겁니다.
그 후 재판장은 법복을 벗었습니다』 ―항소심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1심과 똑같았습니다.
제가 신청한 증인들과 제가 제출한 증거들을 재판부는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審理(심리) 미진과 採證(채증) 법칙 위반 등을 이유로 상고했는데,
대법원에서 역시 기각했습니다.
제 사건은 1999년 10월26일 종결되었습니다』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金大中 정부가 왜 저를 기소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겨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제 친구나 친척,
심지어 제 아내에게도 金大中씨 출생 비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金大中씨 본인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제가 들었던 얘기들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을 했습니다. 제 녹음 테이프가 공개될 경우,
증언자들에게 미칠 金大中씨 측의 협박,
공갈도 두려웠지만 제 질문에 순수하게 대답해 준
하의도 주민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투박하게 응해 준 그들의 눈망울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증언자들뿐 아니라 하의도에서 터를 박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2세나 3세, 4세에
미칠 파장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판으로 인해,
제가 했던 일은 제 뜻과 다르게 공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숨길 게 없습니다.
저에게 유죄를 선고한 이 재판은 제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金大中 대통령에게도 불행입니다』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갔습니까. 『金泳三 정부 시절에 광주사태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던 저도 몇 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살았습니다』 하의도를 찾아가다
2001년 여름,
기자는 孫昌植씨의 탐사 작업을 검증하기 그와 함께
하의도를 찾은 적이 있다.
金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金云式이 살았던 집은 대리마을에 그대로 있었다.
金云式은 문중의 종손이었지만 처가 두 사람인 관계로 문중 묘소에 묻히지 못하고
집 뒤의 산에 묻혔다.
金云式 묘를 바라보고 왼쪽에 그의 본부인 金順禮 묘가 있고,
그 오른쪽에 張鹵島의 假墓가 있었다. 金云式-金順禮 묘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으나
金云式-張鹵島 묘 사이는 그보다 훨씬 간격이 넓었다.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다 죽으면 첩의 경우엔 본부인보다
묘 사이의 간격을 더 두는 게 옛날 풍습이다.
金云式 묘는 破墓(파묘)가 되어 봉분은 있지만 유골은 없었다.
유골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1년 앞두고 경기도 龍仁으로 옮겼다.
金대통령은 용인 묘소에 金云式-張鹵島만 合葬(합장)하고,
金云式의 본처 金順禮 묘는 고향에 그대로 두었다. 金云式 묘소 바로 위에 金대통령의 배다른 형 金大本 묘가 홀로 있었다.
묘 앞에는 비가 서 있는데 앞에는
「金海 金公 大奉之墓」(김해 김공 대봉 지묘)라 쓰여 있고,
뒤에는 「弟 大中 追慕 奉立」(제 대중 추모 봉립)이라 새겨져 있다.
동생이 형을 추모해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묘 곁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을 때
孫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출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의 입을 막고,
호적서류 일부를 없애고,
관련자들을 핍박했으니 정치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지혜롭거나,
요령 있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하는 식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사는 방식이 서툴렀는지는 몰라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孫昌植씨는 光州 5·18 묘역에 묻혔다.
기자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그의 碑文을 썼다. <30대의 그는 기업인이었고, 40대의 그는 민주화 투사였다.
그는 富貴와 榮華 대신에 신념을 위해 살았다.
故人의 진지한 삶에 대하여 많은 민주화 동지들은 경의를 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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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기록이 김대중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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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은 김정일에 충성하는 골수 좌익입니다
(1980. 5월, 김대중 자필 진술조서)
김대중은80년5월 17일 체포되어 수사 받는 과정에서
5월 20일과 5월25일2차례에 걸쳐 자술서를 썼습니다.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1945년9월경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했음. 3..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좌익 백남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았음. 4. 해방 당시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형편이었으므로,
좌익분자와 도 같이 일하게 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
5. 1949년 친구의 형이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었음. 6. 6.25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박동련이라는 선장집에
숨어있다가2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7. 정치보위부에서는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
"이 이새끼가 아직도 반성못했다",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배신자라고 협박했으나
그 이상의 조사 없이8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 갔음. 8. 본인은 신병치료차 1972년 10월 11일 일본 도쿄(東京)에 갔다 거기서
유신선포를 맞이했음. 9. 그 후 미.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기자회견,
강연, 양국 정치인의 접촉, 한민통의 결성 하고,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활동을 전개하다1973년8월 8일의 납치사건으로 귀국하게 되었음. 10. 1973년 6월부터 해외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에 한민통 임시 총본부를 두고 그 산하에 미국지부, 일본지부,
캐나다지부를 두고자 모색했으며,
본부의장에는 본인이 앉고 미국지부 의장은 안병국 목사,
일본지부 의장에는 김재화, 캐나다지부 의장에는 이상 목사를 내심 지목하고 있었음.
(1980. 7, 국가보안법 위반행위 및 내란음모죄 : 사형) 1980.7. 31일, 검찰은 김대중의 성장 환경, 해방 후의 좌익활동, 한민통의 조직 및 좌익 활동, 폭력시위, 광주사태 선동 및 배후조정에 관해 단죄했습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민통을 결성하여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가면서 좌익활동을 했습니다.
한민통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약자입니다.
지금의 민주당도 "국민회의"였습니다.
"한민통"은 좌익들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고 사살한 문세광이가 한민통 조직의 일원입니다.
그 직후에 들어왔다가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 조직의 일원입니다.
이로 인해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을 했습니다"
(1988년 11월 18일국회 광주 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신경식 의원)
조총련이 한민통에 매월 1000만 엔 내지 2000만 엔씩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한민통은 좌익인 광동희가 발행하는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공산당 선전지였습니다.
김대중에 적용된 법조문은
1)형법 제90조 제1항, 제2항, 제 87조
2)계엄법 제15조,
제 13조,계엄포고령 제1조 제1항
3)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4)반공법 제5조 제1항
5)외국환 관리법 제35조, 제17조 제1항
6)형법 제37조, 제 38조였습니다.
그의 좌익행각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1. 8·15해방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분자였다.
이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했다. 2. 6·25가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행위를 관리했다. 3.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 5월 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핵심죄목 1: 내란음모죄: 15년)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했고,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저지른 것이다(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하면서10·26 사태로
인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 비를 뿌리며 반정부 조직을 강화했다.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 프, 녹음 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 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시켰다. (핵심죄목 2: 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1조제1호: 1980년 9월 11일 사형구형) 8. 1981년1월 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3일 징역 20년형으로 또 감형했습니다
(1988년 11월 30일 국회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
(김대중의말). 2.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의로 구속되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5.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 청원서에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는 대목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북에서 받은 돈) 1, 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물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수백만엥씩 받았다는 수사기록은 있으나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사자간에 주고받는 돈은 누구도 알수 없습니다. 2. 1997년,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 1971년 20만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에는 "DJ가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
요지의 글이 있습니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 4. 일반에게 노출된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입니다.
이것 말고도 김대중은61억엔을 받았다 는 설을 포함해 많은 말들이 돌고 있지만 아직은 이를 수사할 조직이 없습니다.
이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이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북한에 퍼다주는 것은
이 빚을 10배 이상으로 갚으라는 김정일의 요구라고들 하지만
이 역시 심증만 가지 확증은 없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그 개연성이 있는 한 공론화돼야 한다는 것이 2002년도의 대법원 판결입니다.
첫째, 김대중은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자금도 사용했을 것입니다.
많은 신세도 졌을 것입니다.
그 중에 북한 돈이 없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가 북한으로부터20만 달러를 받았다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당시의20만 달러라면 지금의 수백억원에 해당합니다.
셋째,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빚을 졌고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정일로부터 노출됐습니다.
넷째,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북한에 퍼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산 관광객이 가거나 안 가거니 무조건 1년에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고
1인당 300달러씩 정산해주는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몰래 준 돈도 수십억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미 국이 공식적으로 밝혀 준 것은 아직4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이 네 가지는 그를 의심할 수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김일성과 좌익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자금을 받았는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가 좌익으로 정치 일생을 출발했고,
좌익들과 조직을 만들었으며, 좌익들과 꾸준히 연대해왔고,
지금도 좌익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적장인 김정일 찬양) 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라고 평가했습니다. (2000년)
1)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2)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2. 2000년, 제3차 ASSEM회의를 김정일 외교장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통령의 직분을 망각하고 김정일 영업부장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북한과 수교하라고 종용했습니다. 3. 많은 돈을 뿌리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으면
로버트 김을 석방해달라는 말을 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김정일 식견있는 지도자입니다.
국제금융을 동원하여 북한을 도와줍시다"하다가
THIS MAN의 경멸적인 호칭을 얻고 힘이 빠져 돌아왔습니다.
(적장과의 내통행위) 1. 김대중은 김정일로부터 동지적 사랑도 받고 깊은 은혜도 입었다 합니다. 일본잡지 문예춘추 2000년 12월호에 실린 김정일의 육성녹음입니다.
중요한 것만 발췌합니다. "지금 정권을 쥐고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사회주의·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태양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1999.2월).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저버리고 악랄한
친미·친일의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1999.11월).
2. 김정일의 추가적인 폭로가 무서워서인지
김대중은 2000.3월에 베를린 선언을 기획하여
김정일에 접선해 줄 것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2000년 6.13 및 6.15일 90분간의 단 둘이 차 속에서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일생동안 색깔로 의심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었으면 대북 관계에서 만이라도 투명해야 했습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단 둘이 갈 때에 40분 올 때에 50분간
일행을 이탈해 따로 밀담을 갖는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합니다.
남북한 관계의 특성과 그의 색깔론에 비추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 국민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안에 합의 서명했습니다.
초법행위요 가보안법 위반입니다. 3. "김정일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4. 북한의 사상 최대의 전력증강과 훈련 사실을 국민에게 속이려 했습니다.
"2000년의 전력증강은 과거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해의 훈련은 10년이래 최대 규모였다"는 연합사령관의 보고내용은 쉬쉬하고 감췄습니다.
한국군의 군사훈련을 모두 축소 생략했습니다.
2001년에 대대적으로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한6.25행사도 못하게 했습니다. 5. 북한의 적화통일 행사에 많은 이적단체들을 여러 차례 보내 김정일에 충성을 보였고,
저들의 적화통일에 동조한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6. 2001. 2월, 미국방문 전,DJ는 평화선언을 획책했다가 부시에게 저지당했습니다.
1973년월맹의 레둑토와 키신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맞고 노벨상을 탔습니다.
2년후인 1975년 월맹은 순식간에 월남을 삼켜버렸습니다.
800 - 1,200 만이 재교육 캠프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7. 지난 2월 김정일 방문이 임박하다며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를 삭감시키라고 했습니다. 반DJ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반공전선 와해) 1. 국가통수권자로 전쟁은 없다고 선포한 것은
군.민의 안보정신을 허무는 이적행위였습니다. 2. 적을 의심해야할 위치에 있는 군 최고 통수권자가 적을 의심하지 않으면
내통자로 의심받아야 합니다. 3.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 감싸야 할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스스로 주한미군 지위변경, 보안법 개정 또는 철폐를 주장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던 좌익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공공연히 활동하도록 격려했습니다. 5. 임동원, 한완상, 이태복 등을 포함한 좌익용공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습니다. 6. 46개 언론사 사장단을 북에 보내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홀리도록 하고
그 언론사 사장들이 국내에서 김정일 찬양론을 펴게 했습니다. 7. 국정원으로하여금 사회단체를 초청해
김정일 초호화판 생일잔치 비디오를 보여주고
김정일이 식견있는 지도자이며 매우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선전하게 했습니다. 8. 국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및 사회단체 간부를 데려다가 전쟁은 없다고 교육했습니다.
"110만 대군은 남침용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붙들어 둔 것이다".
"서부전선에 콘크리트 장애물과 지뢰를 설치한 것은 옛날 장군이 바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로는 방어하는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는 식의 교육을 했습니다.
모두를 뒤집어서 교육했습니다.
많은 언론사 간부들이 교육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9. 초등학교 교과서에 김정일 사진을 실었습니다.
학생의대부분, 초등학생의90% 이상이
김정일을 멋있는 장군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0. 전교조의 좌익 용공 교육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남침 통로 열기) 1. 2000년12월까지 지뢰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열흘 묵던 나그네 하루가 급한 식으로 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타당성 분석과정 없이 경의선을 환상의 실크로드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침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남측 길만 열어주었습니다.
북으로 가는 통로는 지금도 막혀 있습니다. 3. 2001.6월, 북한에 제주해협 통항권을 주자고 있고,
NLL도 개방하며,NLL일부를 북한에 떼어내 줄 것을 시사했습니다. 4. 연천의 제5땅굴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천연동굴"이라고 못박았습니다.
(한국군의 손발 묶기) 1. 현장지휘관에게 부여된 "UNC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먼저 쏘지 마라",
"청와대에 먼저 보고하라"며 군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적장에 군자금 대주기) 1. 러시아에서 받은 돈14억7천만 달러를 안 받을 테니 그 대신
러시아가 북한에서 받을 돈50억 달러를 받지 말라는 거래를 했습니다. 2. 알게 준 돈은 5조 규모입니다. 3. 모르게 준 돈은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미국이 그 일부를 폭로해 주었습니다.
2000년도 해에 4억 달러를 김정일에게 비밀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미의회 조사국(CRS)은 2002.2. 25, 의회에 한.미 관계 보고서’에서
미CIA와 주한미군 사령부가 파악하고 있는 내용을 혔습니다.
"정부는 1999년과 2000년 어느 날까지 현대를 통해
"비밀리"에4억달러를 북한에 주었다.
관광대금 4억 달러도 주었다.
총8억 달러가 갔다.
그 중 4억 달러를 무기 구입 사용했다"는 요지였습니다.
CIA는 2001년1월 이 내용을 한국정부에 경고했지만
한국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러주기를 강행했다 합니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2002. 3. 27 일간지들) 4. 업체들에게 북한 투자 및 지원을 강요하고,
대북지원에 나서는 업체에 세무조사를 면제해 었습니다. 5.2년전에 환했던 평양시내가 지금은 깜깜하답니다.
전기가 무기제조 및 땅굴 굴착에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은 북한에 경수로 용량과 맞먹는
50만KW의 전기를 공급하려다 미국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6.. 금강산 사업으로 퍼준 돈, 비밀리에 상납한 돈, 앞으로 임동원이 북한에 약속할 돈
이외에도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에 지원한 돈은 쌀, 비료, 투자비 등이2조4천억입니다. 필자의 조사로는 현 정부에 들어 이제까지 북한에 퍼 준 돈이 다음과 같이 집계됐습니다.
1) 2000.9.28: 60만 톤(3,120억원) 2) 6회에 걸쳐104만톤(4,660억원) 3)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 1조864억원 4) 1999년 한해 동안 대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 업체 당 평균 745억 원. 이는 기업들이 부담한 국세의1.2배이며 지방세의20배 규모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5) 99년10월6일 현대가20인치 칼라 TV 3만대를 북송(445만 달러: 58억원) 6) 99년8월16일 대한제당이 연간2만톤(60만 달러)씩 북한에 제공(31억원) 7) 99년11월27일 삼성이172만 달러를 투자(22억원) 8) 2000년1월25일 현대아산이190만 달러 상당의 기와공장 설비 반출(25억원) 9) 2000년2월8,863평 짜리 평양실내 체육관 준공(450억원) 10) 평화자동차 공장에 금강산 국제그룹이 3억 달러 투입(4,000억원) 11) 2000년 3월7일 삼성전자가 평양체육관용 전광판 시스템에 400만 달러를 투자(52억원). 12)2000년3월22일 삼성이 조선컴퓨터 소프트웨어 지원에 73만 달러를 부담(10억원) 13) 내복 1,000만벌(600억원) 14) 2000년 3월6일 축협에서 계란1천만 개, 새마을운동에서 곡물 1,660톤을 보냈다. 15) 2000년 4.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 총계 2조3,892억 원이다.
7. 앞으로 더 가는 돈: 1) 5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공사를 시작해
10월 이전에 연결을 완료하고,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한다 합니다.
군사분계선-개성12㎞ 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를 북측에 지원하겠다 합니다(2002,4.23 국일보). 2)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127km)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해 2009 년께 완공한다 합니다(한겨레, 문화일보 2002. 4. 22). 3)4월말에 비료 20만 톤을 보낸다 합니다(한겨레 2002.04.12) 4)6월부터3개월에 걸쳐 북에 쌀50만톤을 수송한다 합니다(세계일보 2002.4.24). (반공 역사 말살하기) 1. 2000년10월1일, 이어서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으로 정의했습니다. 2. 어이없게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베트남 대통령에게
한국군 파병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본 것입니다.
2001. 8. 23일, DJ가 천득렁 베트남 주석 환영만찬에서
“우리가 불행한 베트남전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 고통을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를 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한겨레 21의
"아! 몸서리 처지는 주월한국군의
양민학살"론과 맥을 같이 하는 색깔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한겨레21. 강정구, 한홍구 같은 사람들은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월맹군을 민족해방군,
미군/한국군을 반역군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국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 김대중이 가세한 것입니다. 3. 여수-순천, 4.3 반란사건을 일으켜 방화 살인한 좌익들을
통일의 역군으로 둔갑시켰습니다. 4. 13년전,7명의 경관을 죽이고 11명의 전경에게 주상을 입힌
동의대 좌익 데모학생을 민주화투사로 명예회복시켰습니다. 5.13년전, 과격한 불법노동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전교조 교사 1,139명에을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켰습니다. 6. 좌익 대모를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켜 최고 2억까지 보상합니다.
반면 국가의 부름을 받고 가 싸운 고엽제 환자들과
전상자들은 약값조차 제대로 대주지 않고 있습니다. 6. 법원이 반국가단체로 판결한 한총련에까지 명예회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7. 과거의 사법부 재판의 권위를 몇 명의 수상한 무명인물들이
"민주화명예회복 및 보상위원회"를 만들어 짓밟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법부가 현재의 "민간심의위원회"보다 못한 것입니다.
과거의 정통성을 모조리 부정하고 공산주의 통일정권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9. 애써 잡은 63명 간첩은 영웅 취급해서 보내주고,
국군포로, 강제 납북자는 쥐어박고 입을 막습니다. 10.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극진히 대접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115명의 유족은 홀대하고 학대합니다. 11. 국군 포로를 이산가족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12. 좌경 데모는 보호하고, 보수 데모는 차단합니다. 13. 국정원, 기무사, 경찰의 간첩 잡는 활동을 은밀히 차단합니다.
(언론의 입막기) 1. 46개 언론사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명예를 손상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합의케 했습니다 2. 언론사들에게 "햇볕정책"에 악영향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합의케 했습니다. 3. 언론사 죽이기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과 동아를 죽이려 했습니다.
국세청800명 인력의 半인400명을 풀어 60-90일간 세무조사를 폈습니다.
서울방송에51명, 조선일보에 50명, 동아일보에 35명, 중앙일보에 24명이었습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도 가담했습니다.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들어 언론을 잠재우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국가가 둑을 맞아도 짖는 개가 한 마리도 없게 만들려 한 것입니다.
(기막힌 거짓말) 1)"이 김대중은 돈을 돌보듯 합니다"(1967)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백히 해둡니다" (1967년 6월 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행한 DJ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2)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1997) "저희는 이번에도 저희자식들 재산까지 다 공개했는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자식뿐 아니라 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내 자식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돈은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영등포의 땅과 경기도 수원의 땅은 장애인을 위해 내놓았고요
저희 집 현재 살고 있는 것도 가족회의에서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3) "국민 여러분, 이 김대중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족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2002.6)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성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드렸으나 결국 저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2002.6.21 일간지 일동)
4)2002.07.10, “국민 여러분께 한없는 죄송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2002.7) 김대중씨가 박선숙 대변인을 통해 차남 홍업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알선수재,
조세포탈 및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홍업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가 발표된데 대해 한 말입니다.
검찰은 홍업씨가 기업들로부터 48억을 받았다고 공소했습니다.
현대에서16억,
삼성에서도5억을 받았고,
이2개 업체들로부터 매달5천만원을 받았다 합니다.
임동원한테서도 때때로2,500만원,
신건 한테서도 1,000만원씩의 상납을 받았다 합니다(2002.7.11 조선, 중앙).
홍업씨는 10억원을 아파트 베란다 창고 안에 숨겨 놓고
그 앞에 가구를 쌓아 놓고 지냈다 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부정한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이런 사실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홍업이가 검찰에 숨긴 사실,
검찰이 또 점수 따려고 감싸준 사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더구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서
송정호 법무장관에게 수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는데도
이 정도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6.11일 오전,
국무회의가 끝난 직후 이한동 총리가 법무장관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합니다.
"어른이 매우 섭섭해하십니다.
어떻게 한 집안에서 두 자식을 구속할 수 있느냐고 하시더군요.
불구속 수사는 도저히 안 되는 건가요?"
5) "이 김대중은 일생동안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적 없습니다"(1997).
"저는 일생에 거짓말한 일이 없습니다.
(청중들 폭소)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 고는 다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6)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가 국정을 농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1997).
"하나 첨부하면 제가 집권하게 되면 청와대 비서실을 대폭 축소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비서실로 만들고 모든 국정은 국무위원들과 협의해서 하겠습니다.
지금 보면 이 나라에서는청와대 비서관 회의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국무회의라는 것은 있으나마나 해요.
청와대에서 국민이나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안지는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장관에게 전화 한 통 하면 쩔쩔매고 그대로 따라가야 해요.
이건 이 나라 헌법 질서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런 점도 앞으로 시정할 것이기 때문에
비서들 자신들이 정치를 농단하는 일은 저희 집권하에서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말씀드리겠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7) "이 김대중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상금을 국가에 내놓겠습니다"(2000),
"노벨평화상은 한국국민 모두의 업적으로 받은 상이니 만큼
저는 상금(11억2,222만원)을 벨상 취지에 맞게 사용하겠습니다".
(중앙일보 2000.12.11)
8) "노벨평화상 상금은 이 김대중의 것입니다"(2001)
"노벨 평화상 상금은 아태재단에 넣어두었다". (2001. 12.10 조선일보).
9) "노벨평화상금을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2002).
"노벨상금과 그 이자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기탁할 것이다.
그들은6.15 기념관을 지을 것이다". (2002.5.20 중알일보, 세계일보, 신동아 2002.6월호)
10) "김정일은 나쁜 놈입니다"(1997).
"저는 김정일을 대단히 위험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호전적인 사람,
어렸을 때부터 안하무인으로 컸고 71년부터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 왔고
그래서 대단히 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위험한 사람을 다루는 있어서 정말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저는 김정일에 대해서 조금도 방심하지 않습니다".
(1997.10.8 관훈클럽)
1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2000년)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12) "김정일과 담판하여 노동당 규약을 개정시키겠습니다"(1997).
"저는 집권하면 북한에 대해서 분명히 따질 것 따지고 짚을 것 짚고
그래가지고 필요하다고 각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하겠습니다.
그 가장 전제조건이 노동당 규약을 개정해서 그러한 자세를 우리가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노동당 규약은 한에 있어서 헌법 이상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13) "김정일에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2002).
그는 김정일에 알게 모르게 현금과 쌀로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
5조원 규모입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김정일이 입을 열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일은 그가 물러나기 전에 그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입니다.
노벨상을 받으면서도 그는 김정일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김정일과 함께 상을 받지 못해 를 지은 기분이리고 말했습니다.
14) 1980.3.26일 김대중의YWCA 초청 연설문입니다.
그의 사기성이 잘 나타나 나는 연설문입니다.
나는 내 일생의 교훈으로써,
「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배반하지 말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 도 국민의 편에 서라」는 것,
이것이 내 인생과 정치의 신조입니다.
우리 집 가훈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첫째가「하느님과 국민에게 충실하라」입니다.
둘째는「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된다」이며,
셋째는「절대로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입니다(박수, 옳소! 환호).
나는 내 자식들에게 말하기를「돈과 하느님은 같이 섬길 수가 없고,
돈과 양심을 같이 섬길 수가 없다. 돈은 먹고사는 데 부족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부를 가지게 되면 부의 노예가 되고,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국민으로부터 격리되고,
그리고 교만해지고 타락한다. 따라서 만일 너희들이 경제계에 나가서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는 등등 경영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만일 부자가 되면 아버지와 너희들과는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나는 얘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정치인으로서의 최대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셋째입니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내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내 양심에 충실하다가 기회가 있어서 대통령을 맡게 되면 봉사할 것입니다(박수, 환호).
그러나 국민과 양심을 버리고「무슨 수단을 쓰든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이것은 내가 으면 죽었지 추구할 수 없는 길입니다.(옳소! 박수)
여러분에게 솔직히 얘기한다면,
나는 다음 정권,
그렇게 대단한 매력이 없습니다.
왜?
첫째, 제만 보더라도 박정희씨가 아주 망쳐 놓았습니다(박수. 옳소! 환호).
이것을 맡아 놓고 수습한다는 것은 마치 다 파먹은 김칫 독에다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옳소! 박수).
4년 동안 뒷치닥거리나 하고 나면,
그것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뒷치닥거리를 하고나면4년은 끝나는 것입니다(웃음, 박수).
남북문제, 노동문제, 청년·학생문제, 군대를 통솔하는 문제 등등
다음 대통령의 짐이 여간무겁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생각을 하면,
「누가 한4년쯤 해서 실컷 고생하고 뒤 그때쯤 내가 맡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박수, 환호)
여러분!
나는 아직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여기서 공개할 수 없는,
그 동안 많은 치욕과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나를 바닷 속에 상어밥이 되게 던지려고 할때도,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국민은 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법정에 섰을 때도 판사를 향해, 검사를 향해,
『당신들이 나를 지금 재판하지만 역사와 국민은 내편』이라는 것을 얘기했습니다(옳소! 박수).
누구에게 천대를 받건,
누구에게 멸시를 받건,
누구에게 박해를 받건,
아니 오늘 생명을 잃건,
내 국민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국민만 나와 같이 있고,
내가 내 국민을 위해서 봉사할 있는 한은,
김대중에겐 불행이 없고 김대중에겐 슬픔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박수, 옳소!)
따라서,
나는 지금 게딱지같은 국민주택에 살고 있지만(웃음),
국민을 배반하면서 부를 얻는 것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국민을 택했습니다.
국민을 배반하면서 안전을 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 신념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박수).
여러분!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는 내 스승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형님입니다.
나는 그의 제자이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나의 스승 예수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와 행복을 위해 싸운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박수).
북한은 한쪽으로는 대화를 하면서도 간첩선을 내려보냅니다.
폭력과 무력을 통해서 남한을 집어엎겠다는 소위「남조선 해방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국가의 안보와 반공의 태세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강조합니다(박수, 옳소!).
나는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넘치는 자유와 정의와 안정을 줌으로써
국민들이 이 땅에 정을 붙이고,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이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공산당 침투의 여지가 없는 반공과 안보를 주장하는 것이 나의 정책이요
박정희 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박수).
국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이 있는 곳에, 김대중이가 있습니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데 김대중이는 있습니다.
김대중이는 천 번 죽어도 국민을 떠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필요로하면, 우리 민족의 혼이 내게 명령하면,
나는 다시 열 번 납치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 번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 번 연금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할 것을 다짐합니다!(옳소! 환호, 박수) (연설 끝)
(경향신문이 보도한 김대중) 1980.5.18일자 경향신문도
이날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 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란 제목을 단 특집기사로
김대중을 비난했다.
아래는 경향신문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김대중의 이력서) 1959년 6월 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때 김대중의 전처 차용수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져 음독 자살했다.
김대중은 그후 62년 10월 현재의 부인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1945년 8·15해방 후 근무하던 일본인 해운회사를 인수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소유의 회사, 토지, 주택 등
여러 형태의 재산은 적산(敵産)이라 하여 미군정청이 인수했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국유재산이 되었다.
이른바 '적산불하' 로 출발한 한국의 기업은 많았다.
김대중이 어떠한 과정으로 일본인 기업을 인수했고 정계에 입문하면서 처분했는지,
김대중은 1980년 계엄사에 제출한 자술서에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자료집 참조).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취재한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기자는 김대중의 회사 처분에 대해
위 경향신문의 기사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래는 시바다 미노루,
『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1982) 기사다.
"김대중씨가 급히 강원도로 피신을 하게 된 것은 해운회사의 부사장 나상수가
김대중씨를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는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긴 것이다.
당시,
군통제지역에서 행정지구로 막 편입됐을 뿐인
강원도 인제 지구는 김대중씨가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다.
김대중씨가 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떨어진다".
"김대중씨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
그 직후에 카톨릭 세례를 받은 것,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56년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하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도,
횡령도 태연하게 한다는,
김대중씨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59년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제 지구에 출마,
낙선한 직후 새로운 횡령사건이 발각된 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했다.
민주당 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조의금을 보내게 되었다".
"당 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18만원을 착복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난 듯하다"
"61년 7월부터 김대중씨는 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
그런데 선전부장 시절에도 횡령 사건이 있었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3천7백만원 중7백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대중의 모략행위) 1960년7월29일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7명의 후보가 난립,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김대중은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었다. 드디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씨는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씨의 당선은 보장됐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61년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이밖에 김대중이 각종선거전에서 저지른 폭력 및 흑색선거운동을 보면-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으며
▲목포시 만호동 상가주택을 철거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자기선거운동원을 측량기사로 위장, 주민의 불안감과 반감을 유발케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했다.
1971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그는 단순한 자동차사고를 여당 측의
암살음모라고 떠들 어대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운전사의 운전부주의로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전복된 것이 조사결과 밝혀져 자동차 사고의 암살음모 주장은
결국 김대중이 조작한 혐의가 짙다는 것으로 끝났다.
*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의 집 앞에 폭발물을 장치,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조사결과 이 폭발물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용 딱총 화약을 은박종이에 싸서 배터리 전지로 폭발할 수 있게 만든 조잡한 것이었다.
김대중 암살용 폭발물이었다면 이같이 조잡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김대중이 조카를 시켜 저지른 조작극으로 밝혀졌었다.
(김대중의 사기 행위) 김대중은 현재(1980)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4억원,
동산 1억원 등5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2월 29일(1980) 복권 후에는 자신이 집권할 경우 경제적 이권,
정부 요직 등을 미끼로 각계인사로부터 무려12억 원 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은 대부분 파렴치한 수법에 의한 것들이었다.
▲우선 1959년6월 인제 지구 재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그의 선거참관인 중
문수룡이 참관도 중 급사하자 민주당에서 조위금으로 보내온 30만원 중 18만원을 횡령 착복했고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 경영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1억5천만원을 횡령,
도주했다.
▲또 60년 4월~61년 4월까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공작구실로
조달한 3천7백만원중 7백70만원을 횡령,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7대의원 당시에는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5백만원,
김세종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다.
그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1972년 10월 김대중이 일본에 머물고 있을 때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됐다.
그러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
1973년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를 조직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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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23살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한민통 사건 등을 통해 이미 북한을 위해 싸우는 북한의 전사로 판명 났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저지른 반역행위들은 너무도 많이 있고,
본 홈페이지에도 매우 게시돼 있다.
국민 몰래 적장에 핵자금을 대주고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진다’는 등의
말로 간첩 이상의 행동을 했고,
죽기 전까지도 광화문 촛불 폭동을 부추기며 북에 충성하다가 죽었다.
그에 대해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있으며 어떤 폭로들이 있었는지
아래에 간단히 정리한다.
내년에는 이희호 재판이 본격화될 것이다.
이희호와 검찰은 필자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추출한 아래 4호에 있는
6개의 글들을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행위가 허위사실의 적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희호와 검찰은 그 내용들이 허위사실이라고 판단할만한 근거가 없다.
과연 아래 4호에 있는 6개의 탈북자 증언들이 허위사실일까?
내년의 재판에서는 이희호와 검찰의 얼굴들이 뜨거워 질 모양이다.
1. 대남사업의 중심, 통전부 간부의 말(2005): ‘김대중은 수령님의 전사’다.
월간조선 2005년 01월호에는 제3국 체류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요원
장혜영의 폭로를 실었다.
“386 주사파는 통전부의 정규군이고,
우리는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
“통전부-친북단체-남한 정권이 김정일 지령하에 3위1체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대북지원금은 대남공작비로 돌아간다”
“김일성은 김대중 집권의 길을 열어 주려고 박정희 암살 명령을 내렸고,
결국은 육영수를 죽게 했다.”
“김정일과 남한 386주사파는 공동 운명체다.
김정일 붕괴는 386주사파의 붕괴다.
386주사파가 국보법을 폐지하려는 것은 자신들이 국보법 처벌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과거를 캐자는 것은 그들의 현재를 감추기 위한 것이고,
그들이 친일을 캐려는 것은 그들의 친북을 감추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성동격서 전략인 것이다.”
“김정일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지시했다.
‘김대중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안기부를 해체적으로 개편한 것과 강인덕 장관을 해임시킨 것은 통전부 작품이었다.”
“북한의 적화통일 노선이 얼마나 집요한가 하는 것은
현재 노동당 안에 대남공작부서만 해도 4개(작전부, 대외연락부, 35호실, 통전부),
그것도 모자라 인민군 무력부 안에
정찰국이라는 것을 또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인원을 다 합치면 무려 3만여 명에 이른다.”
“한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사건」,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폭파」,
1987년 11월29일 「KAL-858기 폭파」,
1992년 10월6일 「남조선 노동당 사건」,
1996년 9월15일 「강릉해안 잠수함 침투」,
1998년 12월17일 「여수해안 간첩선 침투」,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해상 교전」,
2002년 「서해교전」 등이 반민족·반통일의 원흉 김정일이 저지른 사건이다.
이 모든 것들을 발기하고 총지휘한 악한의 직접 지휘체계下에 움직이는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핵심부서로서 오늘까지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밀집된
중앙당 청사들과는 별도로 모란봉구역 전승동 본래의 3호청사에서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대남공작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공작 차원에서 「수령님의 전사」로 체계적으로 길러낸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 「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김정일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술자리에서 임동욱은 취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남북 頂上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두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김대중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정상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김대중을 「수령님의 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적국의 괴수를 「수령님의 전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1999년 1월 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2. 안기부 해체는 사실이었다.
(남한에서의 사실)
김대중은 정권쟁취 33일 만인 1998년 4월 1일, 이종찬-이강래를 국정원에 배치하여,
오랜 동안에 걸쳐 양성된간첩잡는 전문인력 581명을 일거에 '학살(해고)'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대공전선이 와해됐다.
이와 더불어
기무사(600명),
경찰(2,500명),
검찰(40명)에 설치된 대공전선이 모두 와해됐다.
(북한 상류층 정보)
북한 최고급 간부들의 사정을 잘 아는 위치에 있었던 상좌 출신 필명 다윗에 의하면
김대중은 1998년 10월에 박정희 시대로부터 북한 군부에 심어놓은
우리측 애국자들 300여명에 대한 명단을
김정일에 보내 이들 300여명 모두를 하루아침에 숙청케 했다.
우리 정보기관은 김신조 소대의 방차대 출신 2명을 전향시켜
북에 가서 출세하여 대한민국에 충성하라,
북으로 보냈는데 1998년 10월까지,
림태영은 3성장군,
우명훈은 2성장군으로 승진해 중요직책들(총참모부 2전투훈련국장 등)을 맡고 있었다.
1998년 10월,
갑자기 300명(반은 장군, 반은 대령)이 숙청되었는데
이들 숙청된 장군들 틈에 남한에 충성을 맹세했던 림태영(3성)과 우명훈(2성)이 있었고,
우명훈의 처남 리상일(저격여단장)도 끼어있었다한다.
이들 300명 정도의 고급간부들은 남한에 협조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김대중 시대에 숙청된 것은 남한의
김대중이 이들의 명단을 북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라는
소문들이 고위직 사회에 파다했다한다.
3. 북한 상좌출신의 말 : ‘김대중은 1948년부터 김일성이 기른 북한 간첩이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대규모 팀을 이끌고 2001년 6월 어느 날 하나원으로 그를 만나러 왔다.
하나원 원장인 김중태가 다윗에 와
“청와대 홍보수석 등 40여 명이 증인과의 인터뷰를 원하니 응하겠느냐”며
의사를 타진해 왔고,
그는 이에 응하겠다 한 것이다.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북한에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 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나는 북한의 중상류층에서 인식하고 있는
김대중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데 그걸 그대로 말해도 되겠는가” 확인했고,
홍보수석은 “알고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 했다.
이에 다윗은 거침 없이
“김대중 대통령은 1948년부터 김일성이 고용한 북한 간첩”이라는
북한 중상류층의 인식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4. 탈북자들의 진술(2009) : 김대중은 북한을 위해 싸우는 혁명가이고,
5.18은 김대중과 김일성의 합작품이다.
아래는 2009년에 발간된 탈북자들의 5.18 증언록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발취한 내용들이다.
1)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줄)
2)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165쪽 10줄-166쪽 2줄)
3)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224쪽6-12줄)
4)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8-16줄)
5)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257쪽 하1줄-258쪽 11줄)
6)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421쪽 하3줄-422쪽 1줄)
김대중은 간첩
1998년 김대중이 남한의 대북전문가 4,000명을 숙청했다는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2011.12.25자 중앙선데이는
김대중 정부가 98년,
이종찬 국정원장-이강래 기획조정실장의 주도로
남한의 대공전문가 4,000여명
(국정원 581여명, 경찰 2,500여명, 기무사 600여명, 검찰 40여명)을
일거에 숙청했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사실임을 확인했다.
해직자 중 송영인 국사모 대표가 이끄는 20여명이
이에 저항하여 행정소송을 냈고,
법원은 2003년 9월 “불법 면직이기 때문에 집단해직은 무효”라는 판결을 냈지만
당시 좌익정권은 이 판결을 철저히 무시했다.
중요한 결론은 국정원의 집단해직이 불법이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이 국정원-기무사-경찰-검찰에 훈련돼 있는
대공전문가 4,000여명을 일거에 불법 숙청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김대중은 북한의 통전부 출신, 인민무력부 출신, 일반주민들이
같은 목소리로 증언하는“김대중은 김일성수령의 전사”라는 것을
확신케 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역적이라는 사실을 인지케 한다.
김유송은?
여기에서 우리가 김대중의 역적행위에 대해 하나 더 보태고자 하는 것은
김유송의 증언이다.
김유송은 북한군 상좌출신 탈북자이자
500만야전군 조직기획국장이며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황제버섯을 재배하면서
많은 탈북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의 대표이며
시스템클럽에는 다윗이라는 필명으로 좋은 글을 많이 쓰고 있다.
중앙선데이는 2011.12.25자 발행본에서
우리가 30여년에 걸쳐 북한에 공들여 심어놓은
300명 정도의 우리측 협조자들이 일거에 처형됐다는 김유송의 증언을 소개했다.
이번 2월 5일자 중앙선데이는 이 사실에 대해 집중 조사-취재했다.
김유송의 증언 요지
“북한에 우리가 심어놓은 우리 측 간첩 300명 정도가 1998년 10월에 일거에 처형됐으며,
이들 중에는 3성장군인 임태영과 2성장군인 우명훈이 있다.
이들이 바로 박대통령 시절에 우리가 북에 심어놓은 간첩이며
이들은 처형되기 전까지 만 30년 동안 들키지 않고 출세를 잘했다.
그런데 김대중이 남한에서 4,000여명의 대북전문가를 대량학살한 후부터
갑자기 체포되어 9월말부터 조사를 받고 10월에 모두 처형됐다.
이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이 명단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유송은 “총참모부 국제연합무역회사 함경북도 무역관리 소장”으로
일본-중국-러시아와 무역을 하여 높은 사람들은 물론
그 지역을 관할하는 보위부(우리의 국정원) 간부들에게
달러와 신기한 고급 상품들을 선물로 주면서 넓은 인맥을 유지해왔었다.
98년 9월 말, 김유송은 평양에 있는 여러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평양시 인민무력부사택단지(아파트단지)를 찾았다.
그때 김유송은 그와 절친하게 지낸
인민무력부 검찰부 5처 처장(수사처 대좌)으로부터 음산한 말을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몇 사람씩 없어진다.
지금은 초비상사태다.”
김유송은 총참모부 보위사령부 책임지도원 모 상좌로부터
대강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김유송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안피득 상장 : 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김유송과 매우 가까운 사람)
임태경 상장 : 인민무력부 경보병지도총국장(사령관): 김유송과 가까운 사람
우명훈 중장(2성) : 인민군 총참모부 2전투훈련국장(게릴라훈련국장)
이상일 소장(1성) : 64해상저격여단장(우명훈의 처남)
성명불상의 소장: 금강산발전소 건설여단 참모장
성명불상의 소장: 2군단 정치부장
이런 인물들을 포함해
장성급 100여 명,
대령급 50명,
사회안전부ㆍ당의 고위급 150여 명이
체포돼 간첩 혐의로 거의 다 처형 됐다고 했다.
300명 중 150명 정도는 총참모부 보위부에서 조사했고,
나머지 150명은 국가보위부에서 조사했다고도 했다.
임태영과 우명훈은 총참모부 보위부의 관할이었다.
이 두 사람은 김유송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가끔 달러도 주고 가족도 돌봐 주었기에 이들 장군들은 김유송을 매우 좋아했다.
그 조사관은 김유송에게 아래와 같은 취지의 말을 해주었다.
“1968년 1.21 청와대 침투사건에 투입된 조원은 33명이다.
‘방차대’(후미담당) 요원이 3명이었는데 이들은 아파트 옥상에 있다 다 잡혔다.
조장과 (조장의 이름은 들었으나 김유송이 잊어버렸음)
림태영과 우명훈이 집힌 것이다.
남조선 보안사가 이들 3명에 귀순하기를 강요했다.
가장 먼저 조장에게 귀순하기를 강요했더니
그 조장은 죽어도 못한다고 버티었다.
그래서 날이 시퍼런 작두를 가져와
이 작두에 목이 잘려 죽겠느냐고 했더니 스스로 작두에 목을 얹었다.
그의 목과 몸은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
작두의 양쪽에서 한동안 뛰었다.
이를 본 두 사람은 기가 질려 얼굴이 노래졌다.
그리고 귀순 및 충성서약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남조선 정보기관은
최고의 자리로 출세해서 남조선에 충성하라며 이들을 북으로 보냈다.
(임태영과 우명훈) 처형은 했지만 사실 안됐더라,
작두에 목이 잘려 피가 솟구치고 머리와 몸이 펄펄 튀는 것을 보고
누군들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있갔는가?”
김유송과 보위부 상좌와의 대화는 이러했다.
김유송 : “30년 동안 모르던 사실을 어찌 지금에서야 알았으며
어떻게 300명이나 되는 간부들이 단번에 집단으로 숙청될 수 있는가?”
보위부 상좌 : “김일성의 전사 김대중이 남조선 대통령이 됐는데 그가 못할 게 뭐 있는가?”
김유송은 이와 같은 말을 인민군 보위사령부(국정원) 9군단 담당 책임지도원인
김선우 상좌와 나전-선봉 담당 책임지도원 선우영호 상좌
그리고 보위부 2국 고려호텔책임지도원 김상욱 등으로터 계속 들었다.
김유송 자신도 이들과 가까이 지냈고,
이들에게 달러를 제공한 혐의(정부전복음모조직에 정치자금 조달죄)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 중 지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해 2001년 한국에 왔다.
김유송의 증언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나?
과연 이 경천동지할 증언이 사실인가?
중앙선데이는 김유송의 신뢰성에 대해 추적해 들어갔다.
300명 집단처형의 핵심을 풀 열쇠는
작두에 놀라 전향한 임태영과 우명훈이다.
과연 그들의 이름은 북한에 존재하는가?
124군 부대에 근무했던 사람은 김유송말고도 또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박모씨다.
그가 어디에서 탈북했고,
언제 왔는지는 신변보호 문제상 밝힐 수 없지만
중앙선데이는 2012년 2월 3일,
박모씨를 김유송과 함께 만났다.
박모씨는 임태영과 우명훈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이 1.21 청와대침투사건에 투입됐다가
영웅적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을 내용으로 하는 정신교육을 받았던 사실,
1.21사건에 투입된 사람은 31명이 아니라 33명이라는 사실도 증언했다.
청와대 침투조가 31명이 아니라 33명이었다는 것은
김유송이 늘 주장해 왔던 이야기이며
중앙선데이는 이번의 제2차 추적에 31명이냐, 33명이냐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다.
김유송은 중앙선데이 기자들과 함께 파주에 묻혀 있는 그들의 묘지를 찾았다.
모두 28명에 해당하는 묘가 있었다.
상위2명, 중위 2명, 그리고 나머지는 다 소위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팀장으로 보도된 인민군 김종웅 대위의 묘가 없다.
김종웅 팀장은 분명 잡혔고,
그가 팀장인 것이 다 확인되었는데 그의 묘가 여기 파주에 없는 것이다.
그의 묘는 다른 곳에 있든지 그냥 유실시켰는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확인된 사살자는 29명이 된다.
여기에 김신조를 합치면 30명이고,
임태영과 우명훈을 합치면 32명이 된다.
중앙선데이는 당시 68년 당시 김신조 조사 책임자였던 백동림씨
(당시 대위, 10·26사태 때는 보안사 1국장으로 사건을 조사했다)로부터
침투조가 33명이었음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청와대 침투조가 33명이었다는 것까지 증명이 된 셈이다.
해명되지 않는 숫자는 33명 중 오직 1명뿐이다.
작두 이야기
당시의 보안사가 작두로 방차대 3인조 조장의 머리를 과연 잘랐는가?
중앙선데이는 국립기록원에 가서 사진을 찾아냈다.
그리고 머리와 목 잘린 몸뚱이의 존재를 확인했다.
다른 시체들은 모두 총을 맞고 사살된 시체인데
오직 하나의 시체만 목이 잘린 것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작두에 목을 잘랐다고 하면
상부터 찡그리고 그럴 수 있겠느냐 반문한다.
그러나 실제 목과 몸이 두 동강 난 사진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1968년 당시에는 그 누구도 목 잘린 시체에 대해
아무런 궁금증을 나타내지 않았다.
여기까지를 다시 정리해 보자.
1) 실제로 목이 잘린 시체는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이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다.
2) 김유송이 와서 목이 잘린 시체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목이 어떻게 해서 잘렸는지에 대한 북한 최고 보위부 상좌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남한사회에 전했다.
3) 청왜대 침투조로 왔다가 사경을 극복하고 북으로 돌아간
임태영과 우명훈은 영웅으로 칭송되어 그 무용담이 북한 특수군
장병들에 교육되었다는 사실은 김유송(124군부대 8대대)도 증언했고,
김유송의 후배로 124군부대 7대대에 있다가
86년 소좌로 예편하여 4-5년 전에 탈북한 박모씨도 중앙선데이에 증언했다.
4) 하지만 박모씨는 86년에 소좌(소령)으로 예편하여 사회로 나갔기 때문에
임태영과 우명훈이 처형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1) 98년에 공화국영웅 임태영과 우명훈이 처형된 사실,
2) 그들이 처형되었을 때 남한이 키운 300명의 우리간첩들이 처형된 사실,
3) 그리고 임태영과 우명훈이 작두를 피해 전향을 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오직 김유송만이 알고 있는 정보다.
그러면 김유송이 증언한 위 세 개의 내용은 아직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할 것인가?
김유송의 애국적 증언, 80%는 증명됐고 20%가 남았다.
김유송은 본명을 밝히기로 작정했다.
자기 시간,
자기 돈을 소비하면서 500만 야전군 활동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중앙선데이의 취재 조사에 적극 응했다.
그는 오랜 동안 정보사에 협력했다.
2006년 10월 9일 북이 핵실험을 했다.
그런데 김유송은 그 후 20일이 채 못 되는 시점에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 장소에서
4km 떨어진 지점의 물과 흙을 채취해 정보사 박 중령에게 제공했다.
북극성 간첩사건에서 흑금성은 1명의 대령과 2명의 중령이 북에 갔다가 왔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북에 갔다 온 장교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풍계리 핵실험장소 부근의
물과 흙을 가져온 공로가 있어 처벌하지 않았다고 답변한 것으로 기억한다.
바로 그 흙을 김유송이 가져다 준 것이다.
필자는 김유송의 증언을 100% 믿는다. 왜?
북한에 2개 사단(서부지구 2집단군 예하에 2004년 제22 및 제23사단)이
추가로 창설됐다는 사실도 그가 증명해 주었고,
실제로 그는 그의 조직을 가동하여 GPS(위치추적장비)를 휴대케 하고
북으로 보내 이 사실을 증명해주었다한다.
그리고 휴전선 전체에 800개의 벙커를 지은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 중 240개는 진짜이고 나머지는 우리를 속이기 위한 위장진지라는 사실,
그리고 그 용도와 구조에 대해서도 그 공사를 진행한 현장 장교를 중국에 불러
정보사에 확인시켜주기까지 했다.
그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정보사도 인정할 것이다.
김유송은 북한 최고의 정보기관인 보위부간부는 물론
군의 장성들을 두루 사귀고 지내왔다.
이런 사귐을 바탕으로 그는 김정일이 죽자 가장 먼저 앞으로 북한은
장성택이 이끌어 갈 것이며 장성택은 중국식 개방을 할 사람이라고 예언했다.
아직은 그의 예언이 잘 적중 돼가고 있다,
그는 살아있는 김신조에 의해 우리사회에 자리 잡고 있는
“31명의 침투조”를 부정하고 33명임을 자신 있게 증언했고,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김유송은 한 사람의 목이 작두에 잘렸다고 했다.
중앙선데이는 이것이 사실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44년이 지난 지금 국립기록원에 가서 목 잘린 시체를 확인했다.
김유송은 남한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임태영과 우명훈의 존재를 우리에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존재는 전 124군 부대 7대대에 있었던
박모씨로부터2012,2,3.에 확인했다.
김유송은 김대중이 김일성이 심은 고정간첩이라증언했다.
그런데 김유송과 같은 증언을 한 사람은
통전부 전간부 장혜영(김대중은 김일성수령의 전사)을 비롯해
탈북자들이 쓴 5.18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도 6명 더 있다.
대통령은1998년의 정보기관을 조사하라, 특명내려야!
1998년 김대중은 대한민국 대북전문가4,000명을 한 번에 숙청했고,
김정일에 핵자금을 대주면서도 “북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도없고 능력도 없다.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며
북의 핵개발과 전력증강을 적극 도왔다,
이런 자라면 능히 북에 우리가 키운 간첩자료를 모두 넘겨주고도 남을 인간이다.
김대중은 김정일이 통전부에 내린 지령대로 남조선의 정보능력과
정보망을 쑥대밭으로 만든 역적이다.
그리고 필자는 김유송의 증언을 100% 사실로 믿는다.
국정원을 포함한 1998년의 주요 정보기관들은 1998년에
우리가 키우는 간첩들의 명단을 북으로 보냈는지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이를 위해 특별명령을 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