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 교향곡 제4번 사장조
Gustav Mahler 1860~1911
III. Ruhevoll (Poco Adagio) - Ⅰ - Ⅱ - 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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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Mahler: Symphony No. 4 in G Major Audio CD (November 9, 2004) SPARS Code: DDD Number of Discs: 1 Format: Super Audio CD - SACD Hybrid Label: San Francisco Symphony Recording Time 1:2 Copyright: 2004 San Francisco Symphony Total Length: 1:02:23
Mahler: Symphony No. 4 in G major (61:43) Common Name Symphony No. 4 Composer Gustav Mahler (1860 - 1911) Conductor Michael Tilson Thomas Performer Laura Claycomb (soprano) Robert Ward (Horn) Alexander Barantschik (Violin) William Bennett (Oboe & English Horn) Ben Freimuth (Bass Clarinet) Robin McKee (Flute) Stephen Paulson (Bassoon) Julie Ann Giacobassi (English horn) Orchestra San Francisco Symphony Orchestra Genre Romantic Period / Symphony Date Written 1899-1900 Period Romantic Country Austria Venue Notes Davies Symphony Hall, San Francisco, CA (09/24/2003-09/28/2003) |
I. Bedächtig. Nicht eilen. Recht gemächlich II. In gemächlicher Bewugung. Ohne Hast III. Ruhevoll (Poco Adagio) IV. Sehr behaglich |
17:34 09:51 25:23 09:26 |
천상을 노래하다. 말러 교향곡 4번
1901년 뮌헨에서 말러 자신의 지휘로 4번 교향곡의 초연이 이루어진 후, 이 곡을 찬양한 비평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이 곡에 대해 당혹해하며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초연 시에 에른스트 오토 노드나겔은 "현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것이지만, 미래는 말러의 것" 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 비평가는 이렇게 평했다. "2번 교향곡에서 여기 저기 눈에 띄던 나쁜 씨앗들이, 이 곡의 거대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 또 다른 통렬한 비평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형식이 없는 스타일리스틱한 괴물이, 상상 가능한 모든 관현악적 농담을 장신구로 단 채, 정교한 디테일의 무게에 눌려 주저앉고 말았다." 한 세기가 지나고 말러의 시대가 왔다. 많은 청중들이 말러의 '나쁜 씨앗'이 지닌 개성적인 아름다움과, '상상 가능한 모든 관현악적 농담이라는 장신구'의 다채로움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과거는 슈트라우스의 것이지만, 현재는 말러의 것'이 되었다. 4번 교향곡은 길이가 짧고 관현악 편성 역시 간소하여, 트롬본과 튜바가 빠진, 말러의 유일한 교향곡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곡은 말러의 교향곡 중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밝고 경쾌한 곡이다.
교향곡 제4번 '천상의 삶'은 1899-1900년에 작곡되어, 그 다음해인 1901년에 말러에 의해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말러 교향곡 중 가장 밝고 간결한 곡으로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주 시간은 약 50분 정도이다. 어머니가 음식을 구하러 나간 사이 굶주림으로 죽어간 소년이 가난, 질병, 굶주림이 없는 천상의 세계에서 보고 느끼는 절대적 평온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말러는 '천상세계는 절대적 평온이 지배한다. 나는 어린이의 눈을 통해 천상의 생활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어린아이는 방금 천상 세계를 경험하고 우리에게 그곳이 어떤 곳인지 꾸밈없이 들려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작품 해설 & 구성
말러 교향곡 제4번. 1번과 아울러 도저히 CD 한 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이것도 만약에 첼리비다케가 연주를 했다면 장담 못하겠지만) 연주시간 50여분 정도 되는 무척(?) 짧은 곡. 비엔나 고전파적인 우아함으로 말러의 새로운 면모를 과시한 곡이다. 물론 스케르쵸 악장에서는 여전히엽기적인 죽음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지만. 3악장은 3번의 마지막 악장에 이어지는 말러표 느린 악장인데, 영화 '가면속의 아리아'에서 주로무척 애틋한 장면에 자주 쓰였다. 특히 선생님으로 나오는 바리톤 호세 반 담과 아주 이뿐 여주인공이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시골길에서키스하는 장면에서 이 곡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악장에서 또성악이 등장한다. 소프라노 한사람만 나오는데, 말러 특유의 등골 오싹해지는 익살스러움이 군데군데 들어가지만 매우 순수무구하고 아름다운 곡이다.
거의 고전교향곡에 가까운 작품이어서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말러의 교향곡 가운데 2, 4, 8, '대지의 노래'가 성악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말러 자신의 가곡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제4번은 3, 4번과 더불어 3부작을 이루는 교향곡으로 이들 3 작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간결하고 밝고 명랑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자신 정신적으로 매우 안정적이었던 1890년에서 1900년 사이, 즉 40대의 나이에 이 작품을 썼다.
원래 제3번의 제7악장으로 계획했던 '어린이가 나에게 말한 것'이라는 표제음악(가곡)을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서 이 작품의 제4악장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말러는 의도적으로 제4악장에 모든 음악적 구심점을 설정하고 나머지 악장은 제4악장과 주제적으로 연결짓는 방법을 사용했다. 특히 제1악장이 그러한 경향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에 유의하면서 감상하면 재미있는 감상이 된다. 결과적으로 제1악장부터 제3악장까지는 제4악장을 예비하는 일종의 전주곡이나 서곡같은 역할이 주어진 것으로 보면 된다.
초연은 1901년 11월 23일,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뮌헨에서 행해졌다. 연주시간은 약 52분 내외.
작품 구성
제1악장 사장조 4/4박자. Bedächtig. Nicht eilen. Recht gemächlich
'얼마간 억제되어서, 참으,로 즐겁게'라는 악상기호가 붙어있다. 제1주제는 방울을 중심한 이국적인 음악인데 분위기가 가벼고도 감상적인 것이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악장이다. 제2주제는 가요적이고 명랑한 분위기를 갖고있다.
제2악장 다단조. 3/8박자. In gemächlicher Bewugung. Ohne Hast
'가벼운 운동으로, 급하지 않게'라는 악상기호가 있다. 말러는 이 악장에 "친우 하인은 음악으로 권유하다"라고 썼다. 친우 하인이란 죽음의 신을 이르는 것인데, 여기서 그려지는 죽음의 신은 타계를 권유하는 친절한 안내자의 인상이 강하다. 결코 무섭거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때로는 기묘하고 다소 어두운 악상이 흐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가벼고 환상적인 칼라로 느껴진다.
제3악장 사장조. 4/4박자. Ruhevoll: Poco Adagio
'고요함에 차서'. 변주곡 형식. 제1주제는 비교적 스마트한 인상을 주고, 제2주제는 이와 대조적으로 동경에 차 있는 느낌을 준다.
독일어로 "평온하게"라고 지시되어 변주곡 형식을 취하나 그 속에 소나타 형식의 원리도 응용되어 있다. 너무나 순수하게 정화된 아름다운 악장이다. 우선 첼로가 아름다운 제1주제를 풍부한 표정으로 노래한다. 거기에 바이올린 대위 선율이 덧붙여진다. 이 제1주제에 대비된 제2주제는 오보에로 시작되고 바이올린이 이어받는 절망적인 탄식의 노래가 있다.
한때 흥분한 뒤에 다시 조용해져 제1변주가 시작된다. 이 변주는 속도를 빠르게 한 우아한 것으로써 대위법적이기는 하지만 주제를 다루는 점에서는 슈베르트풍이며, 먼저 클라리넷과 첼로가 얽혀 나간다. 이어서 제2변주는 안단테로 첼로가 우아한 춤곡풍으로 시작한다. 돌연 알레그레토로 되어 기분은 한결 흥겨워진다. 거기에는 제2주제의 변주가 이어진다. 높이 떠올려져 속도는 늦춰지고 포코 아다지오의 제3변주로 된다. 제4변주에서는 장대한 클라이맥스가 구축되고 계속해서 호른은 다음 악장의 첫머리의 서주를 제시하고 목관도 다음 악장의 소재를 암시한다. 그 후 부드럽고 친밀한 기분이 되고 속도를 늦춰 저음현과 하프의 움직임 속에 신비적인 조용한 분위기를 빚어낸다. 그리고 사라지듯이 조용하게 되어 이 악장을 마친다.
제4악장 사장조. 4/4박자. Sehr behaglich
"Wir geniessen die himmlischen Freuden." Sehr behahlich
'대단히 쾌활하게'. 소프라노 독창이 삽입된 악장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텍스트는 말러의 가곡집 '어린이의 마술의 뿔피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저명한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이 작품을 "낭만주의자의 구름위의 철새의 고향"이라는 말로 묘사했는데 가사의 내용은 천상의 즐거움에 관한 것이다. 4부 구성으로 짜여져 있는데 제1부는 전주와 노래부분, 제2부와 3부는 제1악장에서 들려준 주제가 등장하는 부분이며, 제4부는 제1부를 반복하는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아주 행복하고 즐거움이 충만한 악곡이다.
부천 필과 에디트 마티스의 말러 교향곡 4번
임헌정과 부천 필의 야심적인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는 분명히 한국 음악사의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이다. 이전 두 번의 연주가 기대이상의 성과를 가져왔고 비록 협연자인 에디트 마티스의 일정 때문에 뒷 순서인 4번이 먼저 연주되었지만, (결코 짧지 않은 56분의 대작이지만) 말러 교향곡 중 짧은 편에 속하고(또한 결코 해석상으로 만만한 작품이 아니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가장 높은 4번을 먼저 듣게 된 것은 일반 청중들에게는 행운일지도 모를 일이다.
에디트 마티스는 잘 알려진 대로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인 스위스의 루체른 태생의 세계적인 소프라노이다. 요즘 '쇼생크 탈출'에 삽입된 야노비츠와의 '피가로의 결혼'의 아름다운 '편지의 이중창' 때문에 무척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있고, 과거 두 번의 유명한 말러 4번 녹음(한번은 헤르베르토 폰 카라얀과 또 한 번은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녹음)으로 이미 4번의 독창에 관한 한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 특히 높은 관심을 자아냈다고 보겠다. 마티스는 원래 젊었을 적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라던가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 '마탄의 사수'의 엔헨과 같은 수브레토(주로 하인역이나 보조역인 리릭 소프라노)로서 성가를 높이다가 나이가 들수록 조금 더 중후해지는 목소리로 가곡 분야에 일가를 이룬 성악가이다.
제1부에 나온 마티스는 젊었을 때 오페라 가수로서는 드문 아름다운 자태와 날씬한 몸매를 가진 소프라노였지만 지금은 연륜이 느껴지는 곱게 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모차르트의 모테트 '엑슬타테, 유빌라테 KV. 165(기뻐하라, 춤추라 행복한 영혼이여)'는 원래 거세 소프라노인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한 곡인데, 종교적인 텍스트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밝고 활기찬 곡이다. 마티스는 무리 없이 이 곡을 소화해냈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인 말러 4번은 부천 필의 잘 조련된 합주력을 발휘한 연주였다. 부천 필은 여성 단원과 젊은 단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악단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활기차고 싱싱한 사운드를 보여주지만 원숙미라든가 중후함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유머러스하지만 산만해지기 쉬운 1, 2악장에서의 집중도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몇몇 아름다운 패시지는 그야말로 꿈결처럼 흘러가는 느낌을 받았다.
제3악장의 서주부는 필자에게는 언제나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제3악장을 연상케 한다. 아마 정신적 깊이랄까 초월적 명상이라는 점에서 말러 4번 3악장은 위의 곡에 비견 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3악장이 말러 4번의 백미라고 여겨진다. 부천 필의 합주력은 '천상의 삶'으로 이어지는 3악장의 정신적 세계를 큰 아쉬움 없이 표현해냈다. 4악장 '천상의 삶'은 불우하게 죽은 소년이 분 천국의 모습, 그리고 지상의 모습이라고 해석된다. 이 곡을 부르기 위해서는 티 없이 맑고 꾸밈없는 소년의 소리를 표현해 내야 하는데, 과거 젊고 전성기 시절의 마티스의 목소리는 이 곡에 잘 어울렸었다. 이미 환갑을 훨씬 넘긴 그녀는 소년의 목소리를 내기에는 약간 무리였지만 특유의 깨끗한 음성으로 노련하게 이 곡을 소화해냈다. 아마도 이 곡을 수십 번도 더 부른 경험의 소산이리라.
이 연주회에서 또한 특기할 점은 청중들의 높은 관람수준이었다. 흔히 울리는 핸드폰 소리와 악장간 박수도 없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런데 또 한번 느끼는 점이지만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은 성악을 소화하기에는 약간 크고 홀의 음향상태가 최적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성악 전문 음악당의 건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강규형. CD 가이드)
말러의 르네상스
말러 시대의 작곡가이자 평론가였던 에른스 오토 노트나젤은 선언하였다. 'R. Strauss는 이 시대를 지배하지만 미래는 말러에게 속한다.'
1910년 라이프찌히의 지휘자 게오르크 괼러는 평가하였다. '말러는 진정한 현대 작곡가, 이 시대의 작곡가는 아니다. 그의 음악은 이 세대의 취향이나 유행과 어떤 타협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대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지만 미래에 보다 많은 것을 제공할 것이다. 그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말러는 1904년 한 편지에서 이야기했다. '도대체 대중이 우리가 살아있으면 하고 바라기 전에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가?'
주변인도 본인도 분명 그의 음악이 미래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자신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 못한다고 느낀 모든 작곡가들은 이와 비슷한 말을 한 마디씩 남겼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고 늘 미래는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말러의 경우는 오래지않아 실현되었고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만들어 놓았다. 잘 아는 바대로 그의 음악이 부쩍 연주되고 녹음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시대를 <말러의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몰이해로 상처받았던 그의 음악은 바야흐로 중흥을 맞이하여 그 위대함이 인정되고 진정한 미래의 작곡가로서 정당한 환대와 대접을 받기 시작한 듯이 보였다. 많은 지휘자와 세계의 오케스트라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말러의 교향곡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저작권, 혹은 지적 재산소유권 관련 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1961년부터 그의 음악이 더욱 쉽게 그리고 저렴하게 연주되거나 녹음될 수 있었던 것이 단순한 시기적 우연의 일치로 등장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이 의뢰된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바로 그 즈음에 '스테레오'라는 신기한 기술도구가 마련되어 음반 프로듀서들이 거대한 음악 담기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또한 스테레오 이후에는 디지털 시대가 되고 CD라는 매체가 등장하고 20비트 녹음의 시대가 되고..... 이 모든 신기술들은 늘 거대한 편성의 음향으로 그 효과를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DG가 그들의 자랑거리 4D 녹음방식으로 처음 녹음한 것은 말러의 5번 교향곡이었다.(비록 첫 발매는 다른 곡이 되었지만) 과연 이 시대는 그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미 출반 된 말러의 전집물만 해도 엄청난 양에 이르며, 대부분의 메이저 음반사는 여전히 한 두 개의 전집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단순히 이 중흥이 순수한 음악적 탁월함만으로 이루여 졌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인 것 같다.
필자는 한국의 말러 인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 지 사실 모른다. 도대체 그것만큼 추정하기 어려운 것도 없어서 때로는 엄청나게 많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때로는 거의 누구도 말러의 이름을 모르는 듯이 보인다. 수치적으로 살펴본다면 무척 잘 팔린 말러 음반 가운데 하나였던 Boulez의 말러 앨범이 전국적으로 겨우 700 여장 정도 판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을 좀 듣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러를 모른다면 간첩취급을 받는 것을 피부로 분명 느끼게 되는 엄연한 이 현상은 어떻게 된 것인지. 오늘날 말러라는 작곡가는 조금 평가 절상되고 있는 작곡가라고 말했다가는 테헤란로에서 '휴가철을 맞이하여 유흥비 마련을 위해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일'이라는 가면을 쓴 테러를 당할 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오늘날처럼 자아가 중심이 되는 시대에서 말러의 음악이 시선을 끄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말러의 음악이 어떻던가? 그의 음악은 언제나 자아가 중심에 자리한다. 나, 나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바라본다. 나, 나는 사랑을 이렇게 한다. 나는 이렇게 고통을 느낀다. 나는 삶을 이렇게 겪는다. 나는 죽음을 이런 식으로 받아 들여야겠다. 나, 나, 나, 끝없는 나. 그 자신이다. 자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작가의 감정이 송두리째 담겨있는, 패배에 괴로워하고 이해해 주지 못하는 세계에 분노하며, 게다가 매우 선율적인 말러의 음악은 이 시대의 대안 없는 요구인 모양이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말러가 늘 세상에 대해 조금 억울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같다 이런 점이 듣는 이를 매혹시킨다 끓어오르는 이 감정들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자신이 이 모든 부조리의 세계에 동참하는 것 같지 않은지. 혹은 이 모든 것을 모아서 옛날 옛적에 세계와 인간 사이에 놓여진 간극을 설파하고 다닌 사람이 있었더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한 편 쓸 수 있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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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간극은 말러를 듣는 이들 사이에도 있다. 말러를 사랑하기에 가장 손쉬운 것을 당연히 영화 음악 같은 그의 느린 악장들, 브람스도 베를리오즈도 모르는 사람이 말러의 '아다지에토(5번 교향곡 4악장)'는 알고 있다. 이렇게 시작해 말러의 느린 악장 시리즈만 계속 들어온 사람이라면 '아하, 말러는 하이틴 로맨스의 작가들 같은 거구나!'라는 평가를 할 법도 하다. 한편 우연히도 5번 교향곡의 장송 팡파르의 황량한 고통으로부터 시작하여, '폭풍 같은' 2악장의 분노로 이어지면서 처음 말러를 우연히 듣게 되었던 사람들에게(입은 벌어지고 손은 머리로 가며, '이런, 이런, 이렇게 어두운.....'이라고 중얼거릴 수 있었던)느린 악장만으로 말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면 아마 그 반응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과연 말러의 느린 악장들은 아름답지만, 그것만을 듣는 것은 '돼지바'('돼지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를 먹으면서 겉을 둘러 싼 초콜릿만 먹고 정작 그 안의 아이스크림은 먹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보다는 더 많은 것이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균형 있는 정보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기획은 말러의 음악이 얼마나 위대하고 감동적인지 설파하려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말러의 음악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편견 없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이 들이 의미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한 곡 한 곡의 내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려고 한다. 독자들이 이 글들에서 몇 가지나마 알고 싶었던 정보를 겨질 수 있다면 그저 필자는 만족할 것이다.
글/이일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