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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십자가(눅 23:33-43)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일 먼저 십자가와 예수님의 모습에 눈이 가게 됩니다. 그 다음 십자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쳐다볼 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무서운 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지막으로 그림 맨 가장자리에 눈길이 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그늘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날 렘브란트에게 한 사람이 그 십자가 그림을 보면서 "당신의 그림마다 한쪽 구석에 서서 그늘에 가려진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램브란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 처형을 거들었던 바로 저입니다.” 우리도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십자가의 현장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현장에 없었지만 그 십자가의 장본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면서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 전 여러분과 함께 오늘 본문에 나타난 네 가지 십자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본질 문제입니다. 그저 고난주간에 한번 생각하고 그칠 그런 피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본질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이고 신앙생활의 실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하고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네 종류의 십자가가 나옵니다. 하나는 골고다 언덕 가운데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두번째는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 세번째는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한 강도의 십자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1.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은 구원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갈보리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가 섰는데 그 가운데 우뚝 세워진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의 죄가 아니라 남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을 당하신 중보자 십자가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십자가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보여주는 공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영원한 싸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외쳤습니다.
호주에는 양을 많이 키우는데 가끔 독수리가 와서 새끼 양을 잡아 채 날아간다고 합니다. 어느 날 큰 독수리가 와서 양을 채 가려는 것을 목동이 달려가 쫓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어미 양이 독수리에게 두 눈이 파 먹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는데 죽을 뻔한 새끼양은 어미의 네 다리 사이에서 살아 있었습니다. 이 어미양의 희생으로 새끼양은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므로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그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죄값으로 멸망당하는 것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전서 3:18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관리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35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36,37절을 보면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죄인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죄악의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영생을 주시는 구원의 통로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가로막혔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처럼 대속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피로 인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통로가 되신 것입니다.
2. 자기의 죄값으로 멸망한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 두 행악자를 마태복음에서는 강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강도라면 물건을 탈취하기 위해 사람까지 죽인 행악자였습니다. 그는 마땅히 죄값을 치루기 위해 사형언도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흉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하였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죄의 포로가 되어 깨닫지 못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화인맞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환경이 문제고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편기자는 시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세상에 사로잡힌 사람의 특징은 존귀에 처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습니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더 열심히 영혼의 갈망인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와야 하는데 그렇치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하는 짐승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떤 위치에 있다할지라도 깨닫고 돌이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채서 먼 나라로 도망치듯 떠나서 거기서 허랑방탕합니다.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가 그를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것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금방 한계에 부닥칩니다. 물질의 한계에 부닥쳤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부닥쳤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남의 집이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겨질 때 비로소 아버지 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눅 15:17-19)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탕자는 마침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데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그를 아들로 받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기 이 강도는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돌이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령이 강퍅해졌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어느 성도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하늘나라에서 사탄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사단이 "하나님, 여기 천당에 온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용서하시고 천당으로 오게 하시면서 나는 몇 번 밖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용서하지 않으십니까?"하고 따지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단아, 네가 언제 나에게 용서를 빈 일이 있느냐?" 하시면서 호되게 책망을 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강도는 영원히 꺼지지 않은 지옥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 자신을 보십시다. 아직도 내 죄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누구 때문이라고 핑계하고 있다면 이 사람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십자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그 큰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가장 큰 신앙의 깨우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기회가 지금 이 순간임을 깨닫고 하나님앞에 철저하게 회개해서 조그만한 죄도 남기지 않고 다 회개함으로 정결함을 얻고 구원의 은혜가운데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회개하고 돌이켜서 구원받은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회개한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비로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남을 죽이거나 피를 흘리게 한 흉악무도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내려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강도들은 처음에는 한결같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깨닫고 뉘우칩니다.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뵈면서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걸음마다 자욱마다 다 죄뿐이었습니다.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다른 강도를 꾸짖습니다.
41-42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다는 말은 회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죄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죄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단지 깨달은 죄인과 깨닫지 못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9:13)"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강도는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42절에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때에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는 회개하는 강도에게 나타내신 구원의 응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수양이나, 노력이나, 선행에 의한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음을 믿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엡 2:8,9절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강도에게서 배울 수 있는 진리는 분명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지 반드시 죽음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강도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 낙원은 기쁨의 장소입니다. 영어로 파라다이스라고 부릅니다. 낙원은 우리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영혼이 주님의 재림 때까지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를 받아들인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비록 죄인중의 괴수였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고 고백하자 구원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인됨을 인정하고 십자가가앞에 내 모든 죄를 내려놓고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저와 여러분이 져야 할 네번째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나의 십자가입니다. (눅 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에게 십자가는 예수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이전에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면 끝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십자가에서 내가 함께 달려있는 모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갈 2:20)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부활의 나의 부활이 되어 새생명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속에서 나의 십자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때 몇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1)나의 죄를 발견한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고통을 느끼고 가슴을 치며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2)거기서 나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도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세례받을 때 단순하게 물로 씻음받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함께 죽지 않으면 죄의 몸이 살아 있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려면 반드시 죄의 몸이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죄의 몸이 죽어야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내 십자가가 있음을 보십니까? 죄의 몸이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음을 믿습니까? 이 옛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새사람이 나타납니다.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옛사람과 죄의 몸이 죽는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하면 죄의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사실 교만의 문제, 욕심의 문제, 탐심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잔가지에 불과합니다. 옛사람이라는 근원적인 죄의 문제에서 계속 잔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죄의 문제, 이 옛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완악한 마귀의 종노릇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6:8을 한번 찾아서 읽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과 죄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우리가운데 죄성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죄성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죄의 몸이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옛사람이 죽지 않고서는 예수와 함께 부활의 새생명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사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고는 매일매일 세상의 유혹앞에 무력하게 쓰러집니다. 누군가 나를 조금만 상하게 해도 분노가 내 마음속에 들끓습니다. 누군가 나를 어쩌지 못하리라.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맹렬한 자아 중심의 본능이 살아 있습니다.
죄는 나의 옛사람의 문제입니다. 이 죄의 몸과 나의 옛사람을 예수 십자가에 함께 못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 혼자 죽는 십자가만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십자가에 못박힐 때 나의 옛사람도 함께 죽는 것을 믿습니다. 나의 죄의 몸도 같이 못박히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 혼자 죽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도 같이 죽는 십자가로 믿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내안에 들어오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닫. 이 시간 (갈 2:20)을 함께 읽으면서 나의 고백을 하나님앞에서 선언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마지막으로 그 십자가는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나를 위해서 진 십자가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나의 십자가, 그리고 이어서 복음을 위한 십자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명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본질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대속하신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한 강도의 십자가는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옛사람에게 사로잡힌 멸망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여 구원받은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십자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옛사람, 죄의 몸이 죽고 예수의 몸으로 거듭나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고백하고,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영광, 부활의 새생명을 얻어 이제 복음을 위한, 이웃을 위한 사명의 십자가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날마다 따라갈 때 부활의 능력과 권세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