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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시편 23:1~6절
제 목 : 떠나간 양들이 되돌아올 수 있는 우리를 만들라.
이스라엘은 조상적부터 목초지를 찾아 한곳에 정착하지 아니하고 소나 양을 키우며 생활하는 유목민들이었습니다(창 47:3). 그들은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유목민으로 또는 반유목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양은 그들에게 있어서 주 소득원이었고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 떼에게 있어 목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렸을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23편의 저자 다윗도 한때 아버지 이새의 양 떼를 치는 목자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을 알고 이 시편을 읽는다면, 한 편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목가적이고 아름답고, 평온한 장면을 연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시는 양의 우리를 떠난 양 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양 떼를 맡은 목자들이라면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왜 그들이 교회를 떠났는지, 또한 어떻게 하면 떠나간 양들을 되돌아 올 수 있게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의 결론절인 6절에서 시인은 “나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나는 여호와의 집을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집은 좁게는 성소나 성전, 오늘날 교회를 가리킬 수 있고, 넓게는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 현실은 어떻습니까? 2023년을 기준으로 개신교 6개 교단만을 통계로 했을 때 10년 동안 무려 200만 명이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전라남도 인구가 180만인데, 그 인구보다도 많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교인들이 왜 자기가 있던 양우리를 떠났을까요? 왜 양들이 우리를 떠나 흩어졌을까요? 교회를 떠났을까요?
여기에 대해 여러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원인을 본문 시편 23편 말씀에서 찾고자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깨닫는 지혜와 은혜를 부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로, 인도할 목자가 없어서입니다. 양들은 인도할 목자가 없으면 흩어집니다(본문 1절). 시인은 자신을 양에 비유하고 있고, 여호와를 목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왜 시인은 자신을 이렇게 비유한 것일까요? 양은 목자 없이는 혼자서 목초지를 찾아서 갈 수도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양은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대신에 청력은 발달해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인도받습니다. 따라서 양이 생존하려면, 새끼를 낳고 번성하려면 오직 목자에 음성에, 목자의 인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그가 죽기 전 요셉에게 축복한 유언에서, 하나님을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라고 하였습니다(창 49장:24). 이와 같은 축복의 말씀은 자신도 한때 양 떼를 인도한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두 딸을 위하여 14년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6년을 목자로 일했습니다(31:4). 그는 눈붙일 겨를도 없이 열심히 일했고 성실하게 양 떼를 돌보았습니다. 그렇게 정직하고 성실하게 양 떼를 쳤더니 자기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창 30:30).
야곱의 양 떼는 참으로 자기를 인도할 목자를 잘 만난 것입니다. 이처럼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양들이 궁핍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한 목자라 불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직하지 않고, 게으르며, 신실하지 못한 목자를 양이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목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가 아니라 악한 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 곧 백성을 인도하고 다스리는 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자가 없으므로 양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양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들짐승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양을 잘 인도하라고 그들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곧 지도자로 세워주셨는데,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며 포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습니다(겔 34:21).
양 떼를 오직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인도하려고 목자로 세워 주웠더니, 종교지도자들 또한 같이 우상숭배와 불의와 불법을 일삼으며 거룩한 성전과 예배를 죄로 더럽혔습니다. 그러니 목자들은 있지만 양 떼를 인도할 목자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가 아니라 악한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1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양 떼의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그분이 기르시는 양들은 부족함이 없고 풍족합니다. 양 떼들은 목자이신 여호와로 말미암아 만족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 안의 양 떼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목양지는 어떻습니까? 양들이 목양지에서 만족함이 있고, 풍족하고 행복해 하고 있습니까?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를 선한 목자라고 여기고 있을까요?
양 떼를 치는 목자들이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의 양을 먹이고 치라고 위탁받은 종들입니다. 양들의 주인은 자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목자들이 정말 선한 목자라면,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목자들이 아닙니다. 일부 힘있는 세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시고 그가 목자들의 장이시며, 목자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 중심의 교회가 돼야 합니다. 양들은 설교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모든 사역의 중심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목자의 모습을 보고 자기들을 인도할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은 그런 목자들을 보고 실망합니다. 목회자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양들을 섬기라고 주님이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양들의 주인행세를 합니다. 마치 자기만의 나라,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양들은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가 독재자처럼 생각될 때 그의 모습에서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주님을 닮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때, 선한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흩어집니다. 교회를 떠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담임하는 목자들은 양무리의 본이 되는 삶을 통해서 양 떼의 목자이신, 목자장이신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양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니 흩어지는 것입니다(2-3절) 양은 풀을 뜯어 먹는 종에 속합니다. 양은 들판에서 자라는 짧고 부드러운 목초지를 좋아합니다. 목자의 역할은 이러한 목초지로 양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2절의 푸른 풀밭은 싱싱하고 상쾌한 풀, 깨끗한 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쉴만한 물가는 급류와 같이 거세게 내려치는 물이 아니라 잔잔한 물이 있는 시냇가를 뜻합니다.
시인이 이처럼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지쳐 있는 마음과 몸을 쉬게 하는 시인의 안식처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양을 맡은 목자들도 교인들에게 항상 푸른 풀, 싱싱한 풀을 먹여야 합니다. 재탕 삼탕, 쉰내 나는 것으로 먹일 것이 아니라 남의 설교를 표절해서 먹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연구하고 기도해서 준비한 말씀으로 양들을 먹여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복음을 먹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교회에서 설교자로부터 복음을 듣지 못하면 갈증을 느낍니다. 갈증을 느끼다 못해서 자기의 목마름을 해갈해 줄 선한 목자를 찾아서 흩어집니다. 배회합니다. 목자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교인들은 설교자가 전하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서,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고 싶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때도 있지만, 죄에게, 마귀에게 졌을 때 무력함에 뼈져 힘을 잃은 자기의 영혼을, 본문 3절 말씀처럼 다시 말씀을 통해서 소생받고 싶어서, 회복하고 싶어서 설교를 듣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에 와보니 설교 시간에 설교자 자기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거나 정치나 사상 이야기로 내용을 채우고 있다면, 그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소생함을 얻겠습니까? 죄와의 싸움에서 다시 이길 수 있는 새 힘과 새 능력을 얻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말씀을 통해서 양들의 영혼을 소생시키라고 했더니 양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본문 3절 하 반절에서 양들의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시편 1편 1, 2절을 연상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양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목자들은 이 세상에서 교회 건물을 확장하고, 예배당을 건축하고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을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새롭게 교인이 사업을 시작하면 목회자가 하는 설교 내용이나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백성답게, 자녀답게 저울을 속이지 아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장사를 할 것인지, 수단 방법이 아닌 성경적인 사업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기업을 운영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업이 잘되고 번창하는 내용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양 떼를 죄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양들의 영혼이 소생하겠습니까? 그 말씀을 듣고 양들이 죄를 이길 새 힘과 새 능력을 공급받겠습니까? 양 떼는 목자가 바르게 인도하면 그러한 것은 의의 길을 걷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별되어 살게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분별하며 살게 할 것인지,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삶을 자기가 인도하는 양 떼의 삶에서 나타나도록 고민하며 기도하며 말씀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목자가 바로 선한 목자입니다. 그러한 목자가 주님의 양무리를 잘 치는 목자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양떼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양들은 그런 목자의 인도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목자나 양들에게 복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니 흩어집니다(4-5). 시인이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는 고백은 시인이 양 떼를 인도하는 목자로 있을 때 자신이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16세 소년쯤 되었을 때 거인 골리앗과의 싸우기 위해 나서려고 했을 때 사울과 장수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다윗을 만류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 35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풀어가면 35절,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잡아먹으려는 들짐승을 보고 양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지언정 양을 들짐승의 노략 거리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장 되시고 선한 목자의 본이 되시는 주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1-14).
시인은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죽이려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 왕을 번뇌케 하고 그의 정신을 사로잡을 때 들고 있던 창을 던져 벽에 박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강력한 적이 사방에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양을 잡아서 먹으려는 사자와 곰과 이리처럼 다윗은 죽음의 골짜기를 수도 없이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한 것은 주님이 그와 함께 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양 떼의 원수를 두고서도 도망가지 아니했던 것처럼, 자기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각오로 싸운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양인 다윗을 결코 죽음의 골짜기에서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기 시인이 말한 지팡이는 뒤 쳐진 양을 모는데 사용합니다. 이 지팡이로 시력이 나쁜 양을 인도할 때 땅을 치며 인도합니다.
그리고 막대기는 양 떼를 훔쳐가려는 도둑을 쫓거나 양 떼를 공격하고 물어가는 들짐승을 쫓아내고 싸우는데 사용하는 쇠로 된 무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자기 양 떼를 이렇게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양이 순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양은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입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를 난폭하게 들이받아 양치기가 죽는 일도 있습니다. 이러한 양들의 특성을 우리 사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53장 6절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다고 한 것입니다.
그릇된 길로 빠진 양이 갈데가 어디 있습니까? 의의 길로 가지 못하고 죄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막대기 곧 인생 채찍을 들어서 징계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양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맡아 치는 목자들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잘 먹지 못해서 병든 양은 없는지, 상처받아서 시험에 든 양은 없는지, 양무리에 들지 못하고 겉도는 양은 없는지, 보살펴야 합니다. 힘세고 공격성이 강한 양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양 떼의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함에도, 양을 보살피고 보호해 주어야 함에도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양을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습니다. 이단에 빠진 교인을 가슴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사례비를 더 많이 주는 교회를 찾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목자들도 있습니다. 그때 양들이 느끼는 감정은 자신이 목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또한 목회자가 교회 중직자와 싸우거나 자기가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일을 해서 자기의 입지가 불리해지다 싶으면, 두 가지 방향을 취합니다. 보따리 싸고 다른 임지를 구해서 나가거나 아니면, 반대파를 내쫒아냅니다. 이렇게 상처입은 영혼들이 예배당에 앉아서 자기를 인도하는 목회자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교회가 안식처라고, 교회가 자기의 피난처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환멸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무리를 떠난 교인들이 200 만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상 어디에도 안식할 곳이 없어도 아버지 집은 안식처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자기의 피난처가 없지만, 아버지 집은 피난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는 교회가 안식처가 아니고 자기의 피난처가 아니고 교회가도 기쁨이 없기 때문에 양들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내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에게 잔치상을 차려 주신다고 하십니다. 에살핫돈 통치 시대의 앗수르 문헌에는 왕이 왕실 연회에 참석한 하객의 이마를 최고급 기름으로 흠뻑 적시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름은 중동 지방의 무더운 기후에서 피부를 보호해 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잔치에 초대된 손님에게 이마에 기름을 발라서 잔치의 흥이 돋구어지는 것처럼, 기쁨의 잔이 넘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가도 기쁨이 없고 목자의 말과 행위에서나 교회가도 선함과 인자함이 없다면, 어느 누가 그곳을 아버지 집이라고, 주님이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라고 여기겠습니까?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고 하겠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본 시편 23편은 목가적이고 그림 같은 환상의 장면이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이 양 떼를 인도하는 목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앞으로 닥쳐올 교회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알려주시는 지혜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를 안 나가는 가나안 성도가 200 만 명이 넘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양떼를 치는 목자에게는 목회의 위기요, 교회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목회의 위기를 가져온 것은 강단의 위기가 원인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는 양 떼들이 찾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하는 것을 가르친다면, 더는 교회 갈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아름다운 교제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진정한 이웃사랑이 없다면 더는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보여주었던 교회의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을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코로나를 감기처럼 앓지만, 기저질환자가 감염되면 목숨을 잀습니다. 남이야 죽던지 말던지 자기는 예배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습니까?
선함과 인자함이 따르지 않는 교회, 막말과 폭력으로 세상을 향해 저항하는 교회, 예수님이 없는 교회, 목회자나 특정 힘 있는 자들의 교회에 누가 안식하러, 피난처라고 생각해서 찾아오겠습니까? 예수님의 향기가 아니라 가는 곳마다 썩는 냄새를 풍기고 사망의 냄새를 풍긴다면, 세상은 더욱더 타락해갈 것입니다. 그런 교인을 더는 성도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책임은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한, 복음의 진리를 따라 의롭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지 아니한 양 떼를 인도하는 목회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들이 더는 교회를 떠나는 일이 없게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편 23편을 다시 읽고 우리를 떠난 양들이 되돌아오는 은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떠나간 양들이 되돌아올 수 있는 우리를 만들라(시 23:1-6). 해운대숨쉬는교회 5월5일 주일강단|작성자 삶에서 쪄낸 아침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