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는 행복하다
박해성
아내가 돌아왔다,
가출한지 삼년 만에
백일쯤 된 아이를 안고
왔다,
반가워서 울었다
아기 냄새가 말랑해서 울었다
나는 딸이 좋은데 아이는
아들이라,
그래도
상관없다
부러워 마라,
우리는 남자끼리 목욕탕에
갈거다
언놈 자식이냐,
이웃들이 수군거린다
내 아내가 낳았으니 분명 그녀의 아들이다
그녀의 아이는 곧 내
자식이다,
요즘 사람들은
촌수를 제대로 따질 줄
몰라…
안타깝다
그녀와 나는 캠퍼스 커플이다
미대를 수석 졸업한 나는 수석이나 주우러
다녔고
무용을 전공한 그녀는 보험외판계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미안해’
밥상 위에 쪽지를 두고
아내가 떠난 후
나는 이 세상 모든 안해에게
미안해했다
요사이 나는 절집 천정에 천룡 그리는 작업을
한다
제석천 운해 속에 용틀임하는 그분의 비늘 한 점
터럭 한 올도 기도하듯 붓질한다 심우도나
지장보살
만다라를 그릴 때도 노래처럼 웅얼웅얼 소원을
빌었으니
-
아내가 십리도 못 가
발병 나게 하소서 옴마니반메훔
봐라,
그녀가
돌아왔다!
오자마자 사흘째 잠만
잔다
잠든 아내 얼굴이 부처를
닮았다,
나는 절로 손을
모은다
아이가 칭얼댄다 기저귀를
갈아야겠다,
랄라
----박해성 시집,
{우주로 가는
포차}(근간)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는 자유인의 이야기이며,
자유인의 존재 근거를
잃어버리고,
그 쓸쓸한 인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년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돌아다녔던 좀머 씨,
비가 오고 우박이 내리던
어느 날 그것을 보지 못하고 차에 태워주겠다고 하자,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단 한 마디로 거절했던 좀머
씨,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그의 출신성분은
물론,
그가 무엇으로 밥을 먹고
사는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좀머 씨----.
이러한 좀머 씨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밀실공포증 때문이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들은 밖으로
돌아다닐 때만 괜찮아 지는 온몸의 경련증 때문이라고 말했다.
좀머 씨는 과연 이
세상의 도덕과 관습과 미풍양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이 되고 싶어했던 것일까?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자기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질병 때문에
사회적 부적응자가 되었던 것일까?
진정한 자유인은 선악을
넘어서 행동하고,
기존의 도덕과 관습과
미풍양속을 살해하게 되는 반면,
신체적,
정신적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그 질병의 한계 때문에 사회적 부적응자가 된다.
자유인은 만인들의 분노와
따돌림의 대상이 되고,
사회적 약자인 환자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된다.
좀머 씨는 그의 초라한
모습과 그 행동 때문에 사회적 약자인 환자로 낙인을 찍히게 되지만,
그러나 그 어떤 도움도
거절하는 그의 정신에는 이 땅의 어중이 떠중이들이 범접 못할 자유인의 냄새가 배어 있다.“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적
약자,
즉,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깎아내리려는 이 땅의 어중이 떠중이들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표시임과 동시에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좀머
씨이고,
좀머 씨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이자 전인류의 최초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처럼 장중하고 웅장한
기개가 그 설 땅을 잃어버리고 비극적인 자살로 그 생애를 마감해야만 했던 좀머 씨는 오히려,
거꾸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좀머 씨’가 비극적인 인물이라면 박해성
시인의‘좀머 씨’는 희극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고귀하고 위대한 꿈을
추구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비극적인 인물들이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의 뜻과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다가 그 뜻과 신념을 관철해낸 사람들은 희극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영웅들의 생애가
비극적이고,
이 땅의 세속적인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생애가 희극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박해성 시인의 [좀머 씨는 행복하다]에 따르면,
나와 아내는 캠퍼스
커플이었고,
나는 미대를 수석
졸업했지만,
그러나
수석壽石이나 주우러 다녔다.
때때로 수석도 돈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수석은
경제적 도움은커녕 호사취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미대를 수석
졸업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낙제생(부적응자)이 되어 헤맬 때,
무용을 전공한 아내는
예술을 포기한 대신 보험외판계의 프리마돈나가 되었다.
무용을 전공했으니 그
미모는 만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곧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주연배우(프리마돈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낙제생인
좀머 씨와 자본주의 사회의 프리마돈나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짝이었고,
그
결과,
아내는‘미안해’라는 쪽지를 남기고 새로운 환상을 찾아
떠났다.
자본주의 사회의 낙제생인 좀머
씨는“이 세상 모든 안해에게
미안”했고,
이때의‘안해’는 남편을 버리고 환상을 쫓아 떠난 아내를
뜻한다.
아내는‘안방의 해’를 뜻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안해’는‘싫다,
안
하다’의 부정적인 의사표시를
뜻한다.
아내가 떠나가고 좀머
씨는“절집 천정에 천룡 그리는
작업을”맡아하게 되었다.
“제석천 운해 속에
용틀임하는 그분의 비늘 한 점/
터럭 한 올도 기도하듯
붓질한다 심우도나 지장보살/
만다라를 그릴 때도
노래처럼 웅얼웅얼 소원을 빌었으니/
아내가 십리도 못 가
발병 나게 하소서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시구처럼,
오직,
자나깨나 가출한 아내의
되돌아 옴만을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옴마니반메훔,
좀머 씨의 간절한 기도는
하늘을 감동시켰고,
그
결과,“가출한지 삼년 만에/
백일쯤 된 아이를
안고”아내가 돌아왔던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의 원동력은
사랑이며,
사랑은 진실이 없으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은
진실이며,
진실은 나를 버리고
타인을 끌어안는 이타적인 희생정신이다.
나를 버리고 떠나간
아내를 더 크게 사랑함으로써 좀머 씨는 즉심시불卽心是佛,
즉,
마음이 부처인 자기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천룡이 부처가
되고,
부처가 심우도의 주인공이
되고,
심우도의 주인공이
지장보살이 된다.
지장보살이 만다라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라의 주인공이 아내가
되고,
그의 아내가 좀머 씨가
된 기적이 박해성 시인의 [좀머 씨는 행복하다]라는 시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아내가 돌아왔다,
가출한지 삼년
만에/
백일쯤 된 아이를 안고
왔다”의 기적,
“반가워서
울었다/
아기 냄새가 말랑해서
울었다”의 기적,
“나는 딸이 좋은데
아이는 아들이라,
그래도
상관없다/
부러워
마라,
우리는 남자끼리 목욕탕에
갈거다”의 기적,
“언놈
자식이냐,
이웃들이
수군거린다/
내 아내가 낳았으니 분명
그녀의 아들이다/
그녀의 아이는 곧 내
자식이다”의 기적,“봐라,
그녀가
돌아왔다!
오자마자 사흘째 잠만
잔다/
잠든 아내 얼굴이 부처를
닮았다,
나는 절로 손을
모은다”의 기적,
“아이가 칭얼댄다
기저귀를 갈아야겠다,
랄라”의 기적----.
사랑은 천의 얼굴을 가진
부처이며,
모든 기적의
연출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낙제생인
좀머 씨를 위해서 입신출가했고,
그
결과,
사랑하는 아들을 안겨준
아내,
이 부처와 부처 사이에
그 어떤 질투가 끼어 들 수 있겠으며,
이 사랑의 고귀함과
위대함 속에 그 어떤 씨족과 가문의 전통과 사회적 관습 따위가 끼어 들 여지가 있겠는가?
사랑은
기적이고,
모든
씨족,
혈연주의,
상하의
관계,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 등의
사회적 관습을 초월한다.
아내와 좀머 씨는
일심동체이고,‘아내의 자식은 내 자식이다’라는 삼단논법의 진리가 [좀머 씨는 행복하다]에 각인되어 있고,
또한,
그 시를 통해서
옴마니반메훔,
그 지극정성의
소원으로,
천룡,
심우도,
지장보살,
만다라를
그리며,
그 그림의 주인공인 새
부처,
즉,
좀머 씨의 프리마돈나를
창출해내게 된 것이다.
인생은 예술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이라는‘예술작품’을 남기고 죽는다.
어느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간에,
자기 자신의 인생을
후회없이,
더없이 착하고 성실하게
살다 갔다면 그의 예술작품은 대성공이며,
행복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가 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을 것이고,
그의 삶의 길은 참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시인의 길이 될 것이고,
그의 삶의 철학은 이
세상의 진리학교의 기본교과서가 될 것이다.
문체는 시인의
생명이고,
대동맥이며,
실핏줄과도
같다.
박해성 시인의 문체에는
반어와 삼단논법,
직유와
은유,
풍자와
해학,
큰 상징과 작은
상징,
말놀이와
기지,
불교철학과 실존철학이
배어있고,
너무나도 거침이 없고
자유자재롭다.
크고 작은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것은 오랜 절차탁마의
결과이고,
그
결과,
그의‘사상의 꽃’인‘좀머 씨의 행복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희극배우인 좀머 씨가 그 어릿광대의 탈을 벗어버리고,
그 모든 반목과 편견과
적대감정들을 대청소해버리고 새로운 문화적 영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낙제생의 탈을 벗어버린 좀머
씨 부처,
영원한 프리마돈나인 아내
부처,
새로운 미래의 부처인
어린 아들----,
이‘삼불상三佛像’은 박해성 시인의 시적 승리이자 영원한 행복의
초상이 될 것이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자유인 좀머
씨,
자유인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러나 이 자유인의
길에는 영원한 행복이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