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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암 숙소 → 수원성지 → 손골성지 → 수리산 성지
44.4Km 10.7Km 29.5Km
3일차 여정은 성지 8곳을 방문하고 250Km를 이동해야 하기에
곤지암 숙소에서 6시에 출발했다.
먼저 수원성지를 7시쯤 방문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서 철문앞에
차를 정차시키고 성지앞에 붙어있는 관리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난감해 하다가 철창사이로 손을 넣어
빗장을 옆으로 살살 움직이자 문이 열렸다.
중학교 다닐 때 셔터가 내려진 집에 조그만 틈만 있어도
신문을 밀어넣던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15. 수원성지 (북수동 성당)
수원지역 순교자들의 증거터
수원 성지가 위치한 수원 화성(華城 : 아름다운 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
다산 정약용(요한) 선생이 설계, 시공한 성으로
1794년(정조 18년) 1월 착공하여 2년 9개월 뒤인 1796년(정조 20년) 9월에 완성된
둘레 총길이 5.743km, 직경 평균 1.8km의 성곽이다.
그런데 수원 화성은 정조 대왕이 승하하고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피를 흘려 주님을 증거한 거룩한 순교지가 되었다.
수원 화성은 다산 선생의 천주 신앙을 뿌리로 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성벽은 외측만 쌓고 내측은 자연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운 축성술로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룬 수작으로써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0년 대희년에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에 의해
북수동 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수원 성지로 선포되었다.
■ 순교자
◆ 순교자 78위
수원 화성은 현재까지 78명의 순교자 명단이 기록에 의해 전해지고,
이름 없이 죽어간 천주교 신자들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천 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주님 나라 건설을 위해 박해를 당하고 처형된 곳이다.
수원 지방의 순교자들은 뮈델 주교의 《치명일기》에 의하면 33명 이상이고,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나오는 순교자만 해도 64명이다.
이들 중 중복되지 않고 순수하게 기록에 남은 병인박해 순교자가 77명,
그리고 1817년 샘골의 순교자 이용빈을 합쳐서 최대 78명이다.
순교 형태도 옥사, 장하치명, 백지사, 참수, 교수형 등 다양하다.
현재까지 신앙의 증거지로 밝혀진 곳은
‘화성행궁’, ‘화청관 이아’, ‘중영’, ‘동남각루’,
‘남암문’, ‘형옥’, ‘팔달문 밖 장터’와 ‘장안문 밖 장터’이며
그 외에도 ‘종로 사거리’,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사형터’,
‘동장대’도 순교지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다산 선생이 수원 8경 중의 하나인 화홍문과
그 위쪽에 방화수류정을 세웠는데
화홍문은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란 뜻으로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은 구약의 계약을 상징하고,
화홍문을 떠받치고 있는 7개의 수문은 예수님께서 인간과 맺은
신약의 계약인 7성사를 상징하고 있다 할 수 있다.
16. 손골성지
손골성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光橋山, 582m) 기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번지에 있다.
원래 손골성지에는 교우촌(敎友村)이 있었다.
손골 교우촌은 현재 ‘손골성지’라고 불리는데
이곳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로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도리(Dorie, 金, 헨리코) 성인과 오매트르(Aumaitre, 吳, 베드로) 성인을 기념한다.
아울러 박해시대 손골 교우촌에서 살았던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손골[孫谷里]은 신자들의 부락 ‘성교촌’이라 불리어 오는데
특히 이 요한,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가 손골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 때 피신하여 신미년 1871년 3월 16일에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수원시 북쪽에 솟아 있는 광교산 동쪽 깊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손골 성지는
옛 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했던 곳이다.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곡(蓀谷)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으로
병인박해(1866년) 때에는 10여 호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손골 교우촌의 형성
우리나라에 교우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신해박해(1791) 때부터였다.
하지만 손골에 교우촌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단지 교회사의 흐름에 따라 기해박해(1839) 이전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초기 교회 가장 큰 박해였던 신유박해(1801) 이후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나 충청도 등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서도 박해가 일어나
이번에는 지방에 살던 신자들도 이주해야 했다.
어떤 신자들은 서울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상도나 전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지만
어떤 신자들은 서울 가까이로 이동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도 하였다.
서울 가까이 가서 살아야 신자들 상호간 연락도 되고
서로 도우며 신앙생활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서울 가까이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의 가족들이 충청도 솔뫼를 떠나
경기도 양지의 골배마실 교우촌으로 이주한 것이나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 가족들이 충청도 청양을 떠나
경기도 안양 수리산 뒷듬이(담배촌) 교우촌으로 이주한 것이 좋은 사례이다.
손골에도 이즈음에 교우촌이 생긴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이전에 이미
손골 교우촌은 안정적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아니라면 기해박해 직후에 생긴 것 같다.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서울 근교에는 교우촌이 많이 형성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연스레 서울 중심으로 사목을 하게 되자
신부들 가까이 있어야 성사나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서울 근교에 교우촌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 박해시기 손골 교우촌의 규모
병인박해 때 손골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도리 신부가 손골에 체류할 당시 손골에는
신자들만 살고 있었고 모두 12가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박해가 끝난 다음 1900년 하우현에 본당이 생겼을 때
그 소속 공소(公所)로 편입된 손골 교우촌의 신자가 47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손골에는 적어도 45-50명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것 같다.
도리 신부의 말에 따르면,
손골의 교우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고,
논이 조금 있기는 하였지만 홍수로 폐허가 되어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다.
◆ 손골 교우촌의 중요성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면 안전한 곳에서
우리나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혀야 했고 조선에 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머물면서 이러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이런 교우촌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그곳에 사는 신자들이 열심하고 믿을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손골 교우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다.
박해시기인 1857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5명의 선교사가
손골에 묵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적응기간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신자들을 방문하며 사목하는 것을 잠시 쉬는 여름철이 되면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견고하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손골 교우촌은 신자들을 사목하는데도 중요한 장소였다.
손골 교우촌이 박해시대 신자 사목의 중요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그 예는 오매트르 신부의 사목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오매트르 신부는 1863년 7월말 손골에 와서 다른 선교사들처럼
언어를 배우며 적응기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언어와 풍습을 익힌 오매트르 신부는
다음해인 1864년 성령강림대축일에 당시 조선교구장(대목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오매트르 신부에게
“손골과 가까운 고을” 네 곳을 사목하라고 인사발령을 하였다.
발령을 받은 오매트르 신부는 손골로 돌아와
1864년 10월 말까지 머물며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이때 손골 인근의 묘루니 교우촌이나 신봉리 교우촌 등
아주 가까운 곳의 신자들도 사목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에
다른 고을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 손골을 떠났다.
그 후 오매트르 신부의 편지를 통해 확인되는
오매트르 신부의 방문지는 미리내, 무량골, 소내실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오매트르 신부에게 사목하라고 맡긴 손골과 가까운 네 고을은
손골과 아주 가까운 곳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경기도 일원인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병인박해가 처음 일어났을 때 오매트르 신부가
수원 지방 새암골에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도 가능하다.
이렇듯 손골은 경기도 지역을 사목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축이었다.
손골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을 사목하다가 자리를 옮겨
미리내를 중심으로 사목하고
또다시 자리를 옮겨 옮겨간 곳을 중심으로
신자들을 찾아보며 사목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 선교사들의 손골에서의 생활
도리 신부의 편지를 보면, 도리 신부는
손골에 먼저 왔던 다른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바로 그 집에 묵었다.
더욱이 그 집에서 다른 선교사들을 모셨던
이군옥(李君玉, 요셉)의 가족들이 또다시 도리 신부를 돌보았다.
그런데 다른 선교사들이 그 집을 찾아와 함께 자면서 쉬어갔다는 사실을 보면,
이군옥은 다른 선교사들이 편안히 쉬다 갈 수 있도록
그 뒷바라지까지도 성실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군옥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는 스승 역할까지 하였다.
도리 신부는 자신도 이군옥에게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이군옥이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손골의 교우인 이군옥과 그의 가족은
지적 수준도 상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심이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며,
선교사들을 최선을 다해 모시려고 노력한
충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손골 교우들은 물론 선교사들에게서 큰 신뢰를 받아
계속해서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던 것 같다.
이군옥이 음식과 풍습이 다른 선교사들을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은
그가 도리 신부를 위해 서툰 솜씨로
빵을 만들어 대접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귀한 개고기를 마련하여
도리 신부에게 대접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도리 신부 등 선교사들은 손골에 머무는 동안 하루 종일
작고 좁은 방에서 조선의 말과 풍습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도리 신부는 신자들이 만들어준 집 앞의 작은 산책길을
어쩌다 잠시 거니는 일도 있었지만
행여나 비신자들의 눈에 뜨일까봐
얼른 방으로 되돌아가곤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도리 신부는 이런 생활을 답답하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활을 마음의 평정과
하느님과의 만남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활용하였다.
손골에서 생활하는 선교사들에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방이 곧 경당이었다.
그 방에 널빤지로 제대를 만들어 흙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매일 이곳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도리 신부의 편지를 보면
도리 신부는 손골과 가까운 묘루니 교우촌에 머물던
친구 볼리외(Beaulieu, 徐, 루도비코) 신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또 볼리외 신부가 도리 신부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모처럼 만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이들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침묵과 단식을 하며 함께 피정을 하기도 하였다.
◆ 손골 교우촌의 순교자들
손골 교우촌과 관계있는 순교자로는
우선 도리 신부와 오매트르 신부가 있다.
도리 신부는 1866년 2월 27일 오후 1시경 체포되어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오매트르 신부는 도리 신부 순교한 후인 3월 11일
충남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두 순교자 모두 103위 성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두 성인 신부들 말고도 손골 교우촌에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던 신자들 중에도
순교한 이들이 여럿 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도리 신부는 손골 교우촌에 함께 있던 신자들을
모두 손골에서 떠나게 한 뒤 홀로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손골 교우촌 신자들은 도리 신부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골을 떠나지만
다른 곳에 가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많이 순교하였다.
그 중에서 다음의 삼대(三代)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요한,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3대가
경기 손골에서 병인(1866) 첫 군난에 쫓기어 용인 남성골로 내려와
베드로가 용인 포졸에게 9인이 함께 잡혀
일곱 사람이 배교하고 다 나오고
베드로하고 다른 사람하고 둘만 걷혔더니,
포졸 행수(行首)가 원(員) 모르게 놓아 또 그곳에 살더니,
정묘(1867) 10월에 또 삼 대가 잡혔더니,
그 포교 하는 말이 “다 누구냐?” 하되
베드로 말이 “다 내 식구라” 하니
그 포교 말이 “지금 영(令)은 엄하나, 그럴 수 없으니 하나만 가자” 하니
베드로 말이 “가자” 하니
베드로의 부친 요한의 말이 “하나만 갈테면 내가 가겠다”고
부자 다투니, 그 포교 익히 생각하다가
다 놓고 간 후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쇠재 가서 살더니,
경오년(1870) 2월 23일 야경에 서울 좌변(左邊) 포교와
본골 장교하고 와서 잡으며 묻는 말이 “성교(聖敎)하느냐?” 한 즉
“물을 것 없다. 성교 아니 하면 내가 너에게 잡힐 것 없다” 하고
그 길로 본읍(本邑)에 들어가 하루 묵고
본골 장교하고 요한, 베드로, 프란치스코 3대가 함께
서울 좌포도청으로 들어가서 문목(問目)할 때 대답이 한결같다 하더라.
이렇듯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잡혀가겠다고 하였던
할아버지 이 요한과 아들 이 베드로, 손자 이 프란치스코는
1871년 3월 19일(음) 좌포청(左捕廳)에서 다 함께 순교하였다.
◆ 순례지가 된 손골
손골이 순례지가 된 데에는 참으로 재미있는 역사가 있다.
한국에서가 아니라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주도하여 순례지가 된 것이다.
도리 신부는 프랑스 방데(Vendee) 지방의
쌩 틸래드 드 딸몽(Saint-Hilaire de Talmont) 본당 출신이다.
죠셉 그럴레(Joseph Grelet)라는 신부가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이 본당의 주임으로 있었는데
도리 신부를 비롯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럴레 신부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66년 이전에
도리 신부 등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시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교황청 시성성(諡聖省)을 비롯하여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
한국 주재 교황대사, 프랑스 주교회의, 한국 주교회의 등에 편지를 보내
시복을 속히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렇게 노력하던 그럴레 신부는
1963년경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손골을 순례하였다.
당시는 비행장이 서울 여의도에 있던 시절이었고
지금처럼 한불간의 교류가 많은 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손골을 찾아와
손골과 도리 신부 고향 딸몽을 연결하였던 것이다.
프랑스로 돌아간 그럴레 신부는 1964년
“조선, 순교자들의 땅(La Coree, Terre de Martyrs)”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럴레 신부의 노력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도리 신부가 살았던 한국 용인의 광교산 산속의 손골과
도리 신부의 고향 프랑스 방데 지방의 딸몽을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연결하였다.
그럴레 신부는 농부였던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화강암(granit)으로 된 맷돌에서
똑같이 생긴 십자가를 두 개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하나는 고향에 두고 다른 하나는 한국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도리 신부가 탄생하였던 곳과 도리 신부가 선교하러 와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곳을 연결하고 싶어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돌 십자가 하나는 1966년 3월 8일
(원래 순교일은 3월 7일인데 프랑스에서는 8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도리 신부 순교기념일에 도리 신부 생가 벽에 모셨다.
그리고 한국에 보내온 다른 돌 십자가는 당시 손골 공소(公所)를 사목하던
수원 북수동 본당 주임 류봉구(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받았다.
류봉구 신부는 그 돌 십자가를 근거로
손골에 도리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비(碑)를 세웠다.
한국산 화강암으로 큰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을 쌓아 탑 모양의 현양비를 세웠던 것이다.
이 비의 맨 꼭대기에는 딸몽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올려놓았고
이 비는 1966년 10월 24일 축복되었다.
이렇게 현양비를 만들면서 손골 순례가 시작되었고
손골에서 도리 신부를 적극적으로 기념하게 되었다.
도리 신부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직접 손골을 순례하기까지 한 프랑스인 그럴레 신부의 수고가
이런 좋은 결과를 낸 것이다.
◆ 손골의 도리 신부 현양비
손골에는 도리 신부 현양비가 지금도 있지만
처음에 만든 현양비는 아니다.
그러나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그 돌 십자가는
손골에 그대로 잘 있다.
처음 현양비는 벽돌을 사방으로 10개씩 쌓아 만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10층짜리 현양비였다.
그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그러다가 1968년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되자
새로운 도리 신부 현양비를 만들었다.
기존의 현양비에다 벽돌을 사방으로 8개씩 더 쌓아
18층짜리 현양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맨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1990년에 손골에 경당(經堂)을 지으면서 이 현양비가 철거되었다.
그러다 1991년 경당을 준공하면서 새 현양비를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그 맨 뒤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처음으로 만든 현양비 머릿돌에는
“김 베드루 신부 순교 기념”이라고 쓰여 있었다.
도리 신부를 “김 베드로” 신부로 소개한 것이다.
도리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김”이라는 성(姓)을 택하였다.
요동에 있을 때는 성을 두(杜)로 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성이 낯설기 때문에 고쳤을 것이다.
도리 신부가 우리나라에서 김씨 성을 택하였으니
김 신부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도리 신부의 세례명을 “헨리코”가 아닌 “베드로”라 한 것이다.
실제로 도리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사용한 것 같다.
도리 신부를 심문한 문초기록에서도
도리 신부가 “김 베드루”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도리 신부는 “김 베드로” 신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1968년 10월 6일 시복식이 있은 후 만들어진
24위 복자전 등 책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도리 신부의 부친은 삐에르 도리(Pierre Dorie)이고
모친은 즈느비에브 비뇬노(Genevieve Bignonneau)이다.
도리 신부의 부친은 아들이 내어나자 헨리코(Henri)이름을 붙여주면서
자기와 같은 삐에르라는 이름도 하나 더 붙였다.
그래서 도리 신부의 이름을 전체로 적으면
삐에르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이다.
삐에르는 베드로를 프랑스식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도리 신부에게는 삐에르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으니
“김 베드로” 신부로 불렀다고 해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리 신부는 편지를 쓰면서
언제나 도리 헨리코(Henri Dorie)라는 이름으로 서명하였다.
그러니까 도리 신부의 이름을 전체로 쓸 때는
도리 베드로-헨리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부를 때는 도리 헨리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어떻든 이런 이유로 인해 지금 손골에 있는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에도
비록 작은 글씨이기는 하지만 ‘김 베드로 신부’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즉 “성 도리 헨리꼬 김 베드로 신부 순교비”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 성 도리 기념관
손골에는 도리 신부 기념관이 있다.
비록 임시 건물이고 또 작지만 소장품에는 귀한 것들이 많다.
먼저 도리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이 3통 있다.
특히 도리 신부가 1865년 10월 16일 손골에서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원본이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친필 편지 원본들은
2007년 10월 17일 도리 신부가 소속되었던 뤼쏭(Lucon) 교구에서
손골을 순례하면서 손골성지에 기증하였다.
도리 신부가 신학생 때 집에서 쓰던 침대보가 있다.
이 침대보는 도리 신부의 누이이며 대모(代母)인
뽈린느 도리(Pauline Dorie)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 뤼쏭교구 순례단과 함께 손골에 왔을 때 기증한 것이다.
후손들은 침대보 조각에
방데 지방의 표지(mart)를 손수 수놓아 기증하였다.
또한 기념관에는 도리 신부가 신학생 때 쓰던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은 도리 신부 생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인데
손골 도리 신부 기념관으로 기증한 것이다.
아울러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의 머릿돌들이 있다.
처음으로 만든 10층짜리 현양비 머릿돌과 1
8층짜리 현양비 머릿돌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
[출처 : 손골성지 홈페이지]
이 순교비 위에는 1966년 성인의 고향 본당에서
성인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맷돌을 이용하여 돌십자가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성인의 생가 벽에,
나머지 하나는 도리 신부의 순교기념비 위에 얹었다.
손골성지에서 바오로 안젤라 부부에게 전화를 했다.
서울에서 같은 성당,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을 때 친하게 지냈다.
지금은 수지에서 살고 계시기에 미리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시며
손골성지에서 가까운 신봉동 성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신봉동 성당이 스테인드 그라스가 아름답기에 둘러보고
차 한잔하면서 잠시 대화를 하기로 했다.
제주에 오셨을 때 우리집에 방문도 하셨지만 만난지 5년정도 된 것 같다.
이른 시간에 문을 연 곳이 없어 몇 군데를 거쳐 차를 마시며
1시간 반 정도 안부를 주고 받고 수리산 성지로 향했다.
17. 수리산성지
행정 구역으로 분명히 안양시 안양 9동,
시 중심가에서 불과 몇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적한 첩첩 산중이 나선다.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산의 이름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의 섭리로 갈고 닦았던 곳이라는 뜻인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 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 선정, 우정, 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씨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배교의 죄를 지을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현재 담배골 부근은 도시화의 영향으로 옛 마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성지 입구에는 순례자 성당과 피정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50여 미터만 올라가면
최경환 성인의 고택이 2008년 복원되어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고,
고택 왼편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면 최경환 성인의 묘역이 나온다.
성인 묘역까지 오르는 길에는 1987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14처가 있고
묘역에는 동굴 성모상과 야외미사터가 마련되어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
첫댓글
세잎 클로버 님 덕분에
팔도의 성지는 다 잘 봅니다
늘 행복 허시고 건강 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