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2.대림 제3주 일요일(자선 주일)>
<루카3,10-18>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10 물었다.“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14,12)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신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을 우리 안에서 계속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종으로서가 아닌 동반자로서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시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15,14)
그리고 기도를 청하기 전에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가 행위가 아닌 존재로서 그분 앞에 서기를 원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사랑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 자체가 되고, 선 자체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닌 존재의 본성 변화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행위로 잡고 있습니다.
완전함의 행위를,
사랑의 행위를,
전능의 행위를,
특별함의 행위를,
전지의 행위를,
성실의 행위를,
기쁨의 행위를,
권능의 행위를,
평화의 행위를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바벨탑과 같아서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욕망과 함께 일그러져 있습니다.
완전함은 분노를,
사랑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집착을,
전능은 세상적 성공에 집착함으로 인해 거짓을,
특별함은 고독과 슬픔을,
전지는 자신의 정보에 대한 인색함을,
성실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모호함으로 불안과 불신을,
기쁨은 세상적 쾌락을,
권능은 본능적 욕구인 음욕과 탐식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나’라는 영spirit”이 “하느님의 영Spirit”을 향하지 않고,
나를, 즉 “혼soul”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만이 들어오게 되어,
교만을 통해 모든 죄악이 들어옵니다.
소화데레사 성녀께서는 하느님의 조건없는 사랑을 위해서 자신이 붙들고 있던 이기적인 사랑을 비워냅니다. 수녀원 안에서 친언니들과도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했습니다.
예수성심께 순간순간 모든 것을 봉헌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봉헌하면 무아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으며,
행위가 아닌 존재로 가야합니다.
즉,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어,
그리스도를 머리로하여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을 입고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미사성제를 통해서,
우리의 ‘영spirit-혼soul-육body’을 제단에 봉헌 예물과 함께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spirit-혼soul-육body’을 당신의 몸으로 바꾸어서 당신 몸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십니다.
음식을 먹으면 우리의 살과 피가 되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영성체를 통해 우리 몸은 그분의 살과 피가 됩니다.
사랑 자체 선 자체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30초가 넘지 않게
내 몸(‘영spirit-혼soul-육body’)을 순간순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Luke3,10-18>
10 And the crowds asked him, "What then should we do?"
11 He said to them in reply, "Whoever has two cloaks should share with the person who has none. And whoever has food should do likewise."
12 Even tax collectors came to be baptized and they said to him, "Teacher, what should we do?"
13 He answered them, "Stop collecting more than what is prescribed."
14 Soldiers also asked him, "And what is it that we should do?" He told them, "Do not practice extortion, do not falsely accuse anyone, and be satisfied with your wages."
15 Now the people were filled with expectation, and all were asking in their hearts whether John might be the Messiah.
16 John answered them all, saying, "I am baptizing you with water, but one mightier than I is coming. I am not worthy to loosen the thongs of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17 His winnowing fan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the chaff he will burn with unquenchable fire."
18 Exhorting them in many other ways, he preached good news to th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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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Part05
불황에도 끄덕없는
‘창재’로 거듭나라
창재는 위기 대처 능력이 탁월하다.
이들이 본격적인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은 회사가 위기 상황에 빠질 때다.
기막힌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해 낸다.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스타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이들의 능력이 타고난 게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24)
천재보다 환영받는 이름,
창재
천재의 기준은 한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이다. 선천적이며 독창성이 있다.
창재의 기준은 사회적으로 창조적이면서 성공한, 유능한 사람들을 말하며, 후천적이며 문제해결 능력이 탁월하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27-229)
창조력은
생존의 문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알게 모르게 창조적 학습이 진행 중이다. ‘학교 공부 무용론’ 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도 나오고 있지만 가르치는 입장에선 언제나 창조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 대입 논술 고사가 그 좋은 예다. 단순 암기만으로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을 키울 수도 없다. 논술 고사의 도입에는 폭넓은 지식을 활용하도록 학생들을 자극하겠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수업도 물론이지만 시험에도 어떻게든 창조성을 자극하려는 문제가 출제된다. 같은 수업을 들어도 창조적으로 공부한 학생의 성적이 우수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문을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적으면 그 답안지는 채점자 눈에 확 들어온다. 성적이 좋게 나올 수밖에 없다. 특히 모의시험이나 입시에선 창조성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공부도 창조의 과정이다.
창조성이 받쳐만 준다면 평소 학교 성적은 별로여도 입시에서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 요즈음 입시 문제는 수학, 과학, 사회 등이 뒤엉켜 있어 어느 과목의 문제인지도 알 수 없다. 학생의 종합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틀에 박힌 학교 교과서만 달달 외운 학생은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낼 응용력이 없다.
학교만이 아니다. 회사 입사 시험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입시와 승진도 창조성이 좌우한다. 입사 동기 중 누군 임원도 못 되었는데 사장으로 발탁되는 사람도 있다. 그건 능력의 차이, 즉 창조성의 차이다. 회사도 새로운 변신과 발전을 도모하지 못하면 서서히 기울어 가는 것이 현실이다.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지 않고 잘나가는 명품에만 의존했다가 문을 닫은 기업이 어디 한둘이던가.
길거리에 나가 보면 번뜩이는 창조서엥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간판부터 실내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쳐흐른다. 음식점들은 계속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손님들이 먹어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끔 만든다. 이탈리아의 한 요리 전문 기자는 한국의 퓨전 음식에 감탄을 연발하며 세계에 이만큼 다양하고 맛깔스러운 음식은 없다고 격착했다.
한국인의 우수한 창조성은 사회 각 분야에서 무섭게 발현되고 있다. 탁월한 창조성으로 성공했다 해도 사실 대단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창조성 교육을 따로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재나 영재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주인 의식, 변/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창조의 계기가 되고, 바탕이 되었다.
천재와 수재는 선천적인 면이 강하지만, 창재는 후천적 능력이 만든다. 미래는 이런 창재들의 무대가 될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낡은 것에 쉽게 식상해하는 습성이 있다. 새것에 대한 거의 병적 강박증이다.
이제 창조는 생존의 전략이다. 문제는 창조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 다시 강조하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 해도 넓게, 깊게,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빨리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창조는 시간 싸움이다. 한발만 늦어도 허탕이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23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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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십계명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결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 언제 어디서나 유효하고 변함없는 인간의 기본 의무들을 담고 있습니다.[2070-2072](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80)/
십계명(Decalogue, 그리스어로 ’10, 열 개’를 뜻하는 ‘데카deka’와 ‘말, 말씀’를 듯하는 ‘로고스logos’가 합쳐진 말에서 유래)
‘십계명’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간 행위에 관한 기본 법규들의 핵심적인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다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이 기본적인 계명을 따르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의 구속력 있는 계시의 한 부분이란 점에서 이성의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근본적인 구속력을 지니므로, 아무도 그것을 지켜야하는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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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과 자연법
->2070 십계명은 하느님의 계시에 속한다. 동시에 십계명은 우리에게 참다운 인간성도 가르쳐 준다. 십계명은 기본적인 의무들을 명확하게 밝혀 줌으로써, 간접적으로는, 인간 본성에 속하는 기본 권리들도 명확하게 밝혀 준다. 십계명은 ‘자연법’ 의 탁월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자연법의 법규들이 뿌리내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었습니다.-이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그리고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4, 15, 1: SC 100, 548(PG 7, 1012)
->2071 이성만으로도 알 수는 있으나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계시해 주셨다. 죄 많은 인류가 자연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고 명확하게 알려면, 이러한 계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죄의 상태에서는 이성의 빛이 흐려지고 의지가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십계명을 완전하게 제시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성 보나벤투라, ‘제4명제집’, 3, 37, 1, 3: Opera omnia, 3권(클라라아쿠아 1887), 819~820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시와 도덕적 양심의 목소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인식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56)/
십계명의 의무
->2072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그 기본 내용들에서 중대한 의무를 계시해 준다. 그 계명들은 본질적으로 불변하며, 언제 어디서나 지킬 의무가 있다. 아무도 이 의무를 명제해 줄 수 없다.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 주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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