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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2일 주일(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 이사 42,1-4.6-7
제2독서 : 사도 10,34-38
복 음 : 루카 3,15-16.21-22
그때에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21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 하느님께서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사건이라면,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으로서,
죄로 말미암은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우리 마음 더 깊은 곳으로 더 다가오시어
내 편과 내 짝이 되어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에 앞서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며
서른 해 동안 당신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한 우리 인간의 이웃으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넨 인간 삶의 곡절과 파란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의 처지에 대한 공감과, 그러한 처지에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비로써
주님께서는 우리들 틈에 끼시어 ‘죄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시기를 마다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참사람으로서, 인간이 겪는
죄의 상처와 분열의 근본 원인을 밝히시고 없애시려 하십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아픔과 타락의 바탕에는 늘 자신을 드러내고,
형제를 내리누르는 교묘한 형태의 폭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질받는 죄인들 틈에 끼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모든 주도권을 건네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겸손하게 걸어가는 길, 여기에 인류 구원의 핵심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우리 인류에게 희망이 찾아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머리 위로 홀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며 하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한 성부와 성령의 화답이요 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힘으로 당신의 남은 사명, 곧 공생활의 여정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잡초는 해로울까요? 해롭지 않을까요?
농사짓는 분들은 이 잡초 때문에 힘들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잡초를 뽑고 나면 분명 그 자리는 깨끗해지지만,
뒤돌아서면 전에 뽑았었던 자리에서 또 잡초가 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력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곡식과 농작물의 생산력 증대에는 해로워 보이지만,
땅을 보호하는 큰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 텍사스의 한 과수원에서는 잡초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렸습니다.
(참고로 미국의 과수원은 우리나라 과수원과 크기가 남다르지요).
그러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극심한 토양 침식과 모래바람이 일어나 몇 년 치의 농사를 망쳐버린 것입니다.
잡초가 사라지자, 토양이 황폐화 된 것입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잡초도 너무 소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나에게 해로워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세상 전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이도 해롭다면서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결코 허투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만을 위해 창조물을 만드신 것이 아니기에,
그 어떤 창조물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세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인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범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세례이기에,
주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면서 우리 모두 세례를 받아야 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뜻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철저히 주님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의 일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서 제거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러나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 세례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모든 이를 포용하시려는 주님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갈라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살면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예수님의 두 번째 탄생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서의 육적 탄생인 첫 번째 탄일이 그의 어머니께서 성령을 입은 날이라면,
이제 이 두 번째 탄일은 예수님께서 직접 성령을 입은 날입니다.
곧 오늘이 예수님의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일인 셈입니다.
우리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는 부모에게 축복이 내린 것이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축복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탄생’이요, ‘신적 생명’으로의 탄생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첫 번째 주님의 종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종을
“내 마음에 드는 이,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을 공정하게 펴리라.”(이사 42,1)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주신 일을 선포합니다(사도 10,38).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탄생일인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세례와 함께 새롭게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다시 탄생하는 이 두 번째 탄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세례 현장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 현장에서는 ‘두 가지’ 신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루카 3,22)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첫 번째 탄생 때는 주님의 천사만 나타났을 뿐인데,
이제 두 번째 탄생 때는 ‘성령’이 나타나시고, 아버지께서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창조의 장면과 같습니다.
창조 때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휘돌아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셨던 것과 같이,
이제 똑같은 ‘성령’께서 요르단강물 위로 내리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린 ‘성령’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고 은총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죄 사함이 열리고 구원의 때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탄생인 ‘세례’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가리킵니다(로마 6,4).
그리고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2코린 5,17; 로마 8,9).
곧 ‘성령’ 안에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써,
새롭게 창조된 ‘새로운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살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 놀라운 일인가요!
이는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까닭입니다(1코린 12,13).
그리하여 우리도 그리스도의 힘과 성령의 개입으로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디도 3,4-5).
이로써 우리는 주님을 옷 입듯이 입고서(갈라 3,27),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사시게 되셨습니다.
참으로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십니다.
그러니 세례받은 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곧 ‘죽음과 부활’이 새롭게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콜로 2,12)
세례 현장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선포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아버지로부터 선포된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비추어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2편에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르는 왕에게 적용한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 선언은 예수님을 ‘왕’으로 축성하시는 장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세우시는 당신 나라의 ‘왕’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이로써 당신의 아드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음이 선포된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또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온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님 스스로 이토록 아름다운 구절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고, 당신의 생명을 입었습니다.
성령의 선물로 거룩해지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의로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다고 스스로 설명하셨지만,
사실은 세례와 함께 우리 죄인과 같이 된 사건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 죄인이 되신 사건입니다.
바로 ‘의로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처럼, 자신을 낮추시어
“반역자의 하나처럼,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이사 53,11-12)
죄인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저희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바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 ‘생일’이요, ‘의롭게 된 날’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주님!
제가 당신 마음 안에서 탄생 되었으니. 당신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마음 안에서 당신의 향기 품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입었으니,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입었으니,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에 감사를 드리는 가운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태중교우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하느님도 잊고 지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하시니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사실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세례의 의미를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세상에 태어났음이 큰 기쁨이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남은 영원한 생명, 구원의 초대이기에
더더욱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여러분, 본인의 생일을 기억하시죠? 세례받은 날은 언제인가요?
이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례성사 때 한 약속을 감사와 확신을 가지고 쇄신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실현하기 위해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인 군중의 틈에 끼여서 죄 외에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시며,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은총과 자비가 충만한 그분이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없애주시기 위해
우리의 비참,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을 취하시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로 씻는다’, ‘물에 잠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욕망에 죽는 것입니다.
포기와 버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이미 죽음입니다.
그러나 물에 잠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잠겼다가 씻고 다시 나옵니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고, 다시 나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깨끗이 정화해 주시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 삶을 시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서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사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은
하늘에 나의 이름이 기록된 날이요, 내 인생을 천상의 삶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기념해야 합니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으신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2).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께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태어난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는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를 들어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며
마음을 양육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성사 때 받았던 아버지의 사랑이 더욱 충만해 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느님 자녀의 표징으로 새 이름,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이름을 자주, 불러야 하고 새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쓰리고를 아십니까?
1. 불러주고(세례명)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당신은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세례명을 불러주십시오.
2. 보아주고, 불렀으면 그 사람을 봐줘야!
얼굴을 보면,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3. 잡아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쓰리고” 하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육적인 것 에만 마음을 씁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모이겠어요?
노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유유상종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의 매력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와 미사참례를 즐겨하고
전교를 기뻐하며 성경 공부를 그리워하는 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휴대전화 보는 시간을 줄이고 성경 말씀에 집중해 보십시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의 영양을 섭취하는 기도와 미사를 소홀히 한다면
신앙의 맛을 느낄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밥맛이 없어도 기운을 차리려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기도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양분을 얻는 시간입니다.
기도 해야 그 무미건조함을 극복할 수 있고 더 큰 은총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약속했습니다.
“마귀와 마귀의 모든 행실과 마귀의 모든 유혹을 끊어 버립니까?”
“끊어 버립니다!”
세상의 논리, 인간의 계획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방식에 따라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는 삶을 약속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받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고 늘 푸른 생명력으로 살아있는 것은
그 안에 3%의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든 소금 역할을 하는 3%의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세례성사 때의 약속을 일깨우는 은총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와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바른 일을 했다고 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티도3,4-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124위 복자를 시복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저는 당시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에서 ‘영성 신심 분과’ 위원으로 일했습니다.
제가 하였던 일은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고, 순교자 영성에 대한 자료집을 만들고,
순교자 영성과 의미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교황님 방한을 준비했던 시간이 제게는 큰 기쁨과 영광이었습니다.
시복식이 이루어졌던 광화문 광장에는 교황님이 미사를 봉헌했다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를 박해하던 장소, 많은 교우가 순교했던 장소가
이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교황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던 장소가 되었습니다.
박해와 죽음의 장소가 천상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들이 머물던 장소로 변했습니다.
교황님은 켈리 주교님을 타일러 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 착한 목자의 마음을 지닌 분을 선택하셨음을 인정하며,
켈리 주교님께서 타일러 교구의 하느님 백성을 훌륭히 섬기실 것이라 믿습니다.
켈리 주교님은 2025년 2월 24일 월요일에
타일러 교구의 다섯 번째 교구장 주교로 착좌하실 예정입니다.
새로운 교구장으로 켈리 주교님을 모시는 타일러 교구에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정화의 표징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세례는 ‘성사(聖事)’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례는 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 또한 거룩한 성사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들 또한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가브리엘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본명(本名)이 생깁니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도 있지만 세례를 받으면서 하
느님의 자녀가 되는 이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르신들이 ‘본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시면
저는 ‘가브리엘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제1독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참아내라고 합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았으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례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필요조건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공정이란 무엇일까요? 햇빛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을 골고루 비추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모두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서, 죄인이라서, 배우지 못해서, 여자라서, 난민이라서,
이주노동자라서, 장애인이라서 차별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공정의 세상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교회로 가져왔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고아나 과부가 풍족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공정의 세상을 박해 시대의 교우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우들은 함께 기도하였고, 가진 것을 나누었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세상이 공정의 세상입니다.
매주 친교를 나누는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공정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주님의 공현 대축일에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그분께 엎드려 경배하였던(마태 2,11)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세례를 통하여 다시 한번 공적으로 선포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은 그래서 제2의 공현 축일이며 이제는 예수님 세례의 사명이 시작되는 날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말씀은 야훼의 종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오늘 이사야서의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이사 42,1)로서
야훼의 종에 관한 예언으로 예수님에게서 이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통받는 종으로서 메시아시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메시아는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염려와 배려, 희생과 자신을 내어놓는다.
메시아는 자신의 사명 앞에 놀라지도 않는다.
꺼져가는 심지를 살리기보다 꺼버리기 쉽고
부러진 가지를 쉽게 자르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더라도 말이다.
결국은 가난하고 순진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신성을 강조하지만,
그분은 야훼의 고통받는 종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6절).
여기서 성령은 메시아가 부어주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하며,
불이라는 것은 정화작용만이 아니라, 선악을 결정적으로 구분시켜 주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루카 3,17).
예수님의 세례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하느님이시지만
우리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세례를 받으신다.
여기서부터 당신의 메시아로서의 사명,
즉 세상을 구원하는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사명이 시작된다.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낮추어 봉사하는
겸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님의 세례는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제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고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고 해방하는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마태 26,28)
십자가의 죽음에로의 긴 여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세례를 수난과 죽음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이것이 바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22절)로 입증되고 있다.
이사야에서 본 내용이 그렇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확장해 준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한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인간을 더욱더 사랑하게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사실, 즉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은
예수께서 “기도를 하시는데”(21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루카 복음에서 기도에 관한 주제들이(예: 루카 3,16; 6,12;9,28-29; 22,41)
성령과 연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신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강림절에 성령을 기다림과 기도가 연결되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4,31 참조).
성령은 바로 겸손과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것은
“성령과 불로”(16절) 이루어져야 할 우리의 세례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또 나 자신이 죽기까지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하느님의 종이 되도록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변화로서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례의 사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헌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신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속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며,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참된 종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종으로 변화가 먼저 된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와 희생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은
또한 기도와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또한 기도에 항구할 수 있어야 한다.
늘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셨던 하향성의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보여준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던 처신이
전 세계적인 주목과 각광을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1935~) 전 대통령의 스토리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던 대통령의 월급 가운데 90%를 기부하고 100만 원만 가지고 생활했습니다.
그는 초호화판 대통령궁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경작지가 딸린 허름한 농가에서 출퇴근했는데,
폐차 직전의 털털거리는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며 다녔습니다.
공무가 없을 때는 능수능란하게 트랙터를 운전하며 밭일을 직접 하였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특별대우를 항상 거절했습니다.
그가 일반 병원 환자 대기실에서 다른 환자들 사이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남긴 말들은 불멸의 어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농부입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예처럼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좋습니다.”
특혜를 거부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의 모습도 크게 돋보입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셨습니다.
특별대우를 받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외아들로서
이 세상 모든 관습이나 율법의 통제나 지배를 받지 않으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특혜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한 평범한 일원으로서 당시 인간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측면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정결례를 받으셨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관한 범국민적 세례 갱신 운동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세례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이셨기에,
세례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르단강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예수님의 자기 낮춤이요, 경탄할 만한 겸손의 덕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에 드셨던지,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하늘이 활짝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
이윽고 들려오는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오늘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항상 자신을 극도로 낮추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어떤 특혜나 예외를 거부하고 늘 아래로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셨던
하향성의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세례의 본질: 아버지 때문에 두려움 없이 살겠다는 결단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세례의 필요성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께서 친히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의 핵심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시듯
‘하늘 아버지의 인정’입니다. 아버지는 무엇 하는 분입니까?
자녀가 사회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시는 기둥과 같은 분입니다.
세례는 하늘에 그러한 분이 계심을 믿겠다는 결심이고 인정받는 시간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세례를 받은 사람일까요?
그는 성공회 주일학교는 다녔지만, 실제적인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육체적인 아버지와는 절연했지만,
그는 한 달에 30달러로 살아보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살면서 해야 할 사명을 깨닫고 그 길로만 나아갑니다.
이것이 세례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세례받지 못하면 아버지가 없으니, 실패가 두렵습니다.
히스 레저는 영화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로 미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는 이 연기를 위해 6주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고 캐릭터 노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기를 하고는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28세란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우울증 등으로 복용한 약물 부작용 때문이었습니다.
히스 레저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습니다.
다만 본인만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실패가 두려웠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가장 연기를 잘해놓고도
두려움과 우울함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아직은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튜브 파인딩 스타 채널에 ‘군인 아빠의 묘비를 껴안은 소년’이 나옵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지만,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마일스는 식당 주차장에서 20달러를 주워 게임팩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한 공군 중령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아버지도 군인인데 이 20달러를 군인을 위해 쓰고 싶다고 주었습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무덤을 찾았고
묘비를 껴안고 있는 그의 사진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하늘에 ‘살아계십니다’. 그의 행동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인정해 주고 응원해 주고 계십니다.
마일즈 눈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믿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이 그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이것이 세례받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오로지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리오넬 메시가 하늘에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는 믿음 때문에 이뤄낸 결과를 보십시오.
믿음이 그를 하이에나에서 사자로 만들었습니다.
월드컵 우승까지 시켜가며 나라에 큰 영광을 심어주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라이언은 사자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밀러 대위와 동료들이
죽지 않고 하늘에 살아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효과입니다.
우리에겐 하늘에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람은 하이에나로 살 수 있고 사자로도 살 수 있습니다.
하이에나는 먹고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열심히 살지만, 힘이 듭니다.
또 상처라도 입으면 다른 하이에나들은 그를 버립니다.
그러니 약해 보이면 안 됩니다.
하이에나는 하늘 아버지가 없는 세례 받지 못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안토니오 사지 신부의 『치유의 순간』이란 책에 이와 같은 예화가 나옵니다.
하이에나와 같은 삶을 살며 힘겹게 살던 한 사람이 현자를 찾아왔습니다.
현자는 이 하이에나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다 어떤 사자가 심하게 다친 하이에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 겸손한 하이에나가 되라고 하는구나!’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처음에 겸손해진 그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변한 게 없어졌습니다. 그는 다시 외로워졌고 사는 게 힘들어졌습니다.
현자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 현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집에 가서 하이에나처럼 살지 말고 사자처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사자 아버지가 있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