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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 히브 1,1-6
복 음 : 마르 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곧 충만한 계시의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결정적인 자기 계시’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말씀과 일거수일투족, 그 행동과 삶을 통하여
왜 그분께서 구세주 하느님이신지,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
하느님 눈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그분의 아들딸인 우리는
진정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연중 시기는 바로 그러한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와 그 신비를 차례차례 배워 가며 그분을 만나고 친밀해지는 시간이지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공생활은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다른 모든 공적 활동에 앞섭니다.
공동체 형성이 하느님 나라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홀로’가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며,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합니다.
주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우리말 번역도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 잡는 어부’라고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잡는 것’과 ‘낚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은 낚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낚는다는 것은, 낚시로 한 마리 또는 몇 마리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잡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더욱 친밀하고 인격적인 환대의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2년 정신과 입원 환자 중 22%가 1020세대라고 합니다.
1만 3,000여 명이었던 환자는 5년 만에 1만 7,000명으로 상승했고,
이는 전 연령대 중 가장 가파른 상승 폭이었습니다.
여기에 자살 시도 역시 5년 전에 비해 50% 증가했습니다.
이 기사의 말미에는 ‘경쟁’ 때문이라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미친 경쟁이라고 하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보았던 아이가 생각납니다.
성당 카페에서 학습지를 푸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당에 와서 책도 보고 공부도 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기에, 아주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이가 너무 어려 보이는 것입니다.
물어보니, 아이의 나이는 만 3살. 이렇게 어린데 덧셈과 뺄셈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물어보니, 다른 아이는 지금 구구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천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도 떼지 못했는데,
한글을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2~3년에 했던 구구단까지
만 3살의 나이에 하고 있다니 천재가 분명합니다. 이런 천재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3살에 뺄셈, 구구단을 못 한다고 해서 수학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요?
앞서도 말했듯이, 늦게 한글을 익힌 저였지만,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제 또래보다 훨씬 앞서있다고 생각합니다.
책도 10권 출판했고, 현재 또 한 권의 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금도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경쟁보다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고,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도 부르십니다.
어부인 이 제자들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 잡는 것뿐인데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면서 부르십니다.
복음 선포하는 일에 그물을 내려 고기 잡는 능력이 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부르셨을까요?
오히려 당시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같이
하느님 말씀에 훨씬 가까운 사람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굳이 제자들을 선발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즉,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도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라는 틀에서 벗어나,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뜻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히브리서>를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각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그 복음서의 특색을 잘 나타내줍니다.
예컨대,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인데,
이는 마태오복음이 하느님의 의로움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루카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인데,
이는 루카복음이 하느님을 찾는 순례 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임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첫 발설은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요한 1,38-39)입니다.
이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인 바람인
영원한 생명을 찾아야 하는 바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은 이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네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때'(카이로스)임을 밝혀줍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온’ 나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온 나라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은
'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카 11,20 참조).
그래서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놀랍게도 그 어떤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모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마저도 버리고,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잘못된 것, 좋지 않은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 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으로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으로 동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자기 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중심에 사랑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분은 부르시고 나는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드라마를 보고 운동을 하고, 쇼핑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아니, 얻었기 때문에 버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982년입니다. 어느덧 42년이 지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 입구에는 교가를 돌에 새겨놓은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교가의 내용은 비장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진세(塵世)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타스(VERITAS)”
저의 사제 성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정의 분위기입니다.
5대를 이어오는 천주교 집안이기에 삶의 중심에는 늘 ‘성당’이 있었습니다.
태어나면 당연히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안 갈 수 있어도, 주일 미사는 빠지면 엄하게 혼났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배워야 했고, 기도문을 다 외워야 했습니다.
부활과 성탄 때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찬 성당에서 미사 참례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일학교 친구들입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저도 친구들과 함께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같은 본당 출신 3명이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의 길을 함께 가고 있습니다.
교가에 나오는 대로 진세를 버리고, 이 몸마저 버리고,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치지는 않았지만,
큰 과오 없이 여기까지 온 것만도 하느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오늘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저는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 곁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길은 나의 거짓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낡은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과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듯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장소의 개념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단의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3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3차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손해 보는 것 같고,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가치 있고, 소중하며, 참된 행복을 주는 그런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분명 빛이 나는 자리는 아니었고, 물질적인 이익이 보장되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그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2025년의 1월도 많이 지났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첫 제자들을 부르심
조욱현 토마 신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 활짝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하신다.
그분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시려 그들을 부르신다.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장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쓰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다음, 그분은 그들 안에 하느님의 능력을 불어넣으셨고,
힘과 용기를 채워주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이 가르치셨고,
그들을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영혼을 쫓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거룩한 일꾼이며 교사로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셨고,
그들을 당신 가르침의 선포자라 선언하셨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
즉 방해되는 것은 곧바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께 부름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렸고(19-20절),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 가운데 어떤 핑계를 대는 사람은 없었다.
주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나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사도들이 했을까?
사도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것은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되찾은 것이다.
그분의 얼굴에는 그분을 뵙고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집착을 버려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배대오도 버리고 그들의 생계가 달린 배마저 버렸다(20절)
마태오와 바오로 사도를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 무엇에도 집착이나 애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선구자 요한이 무대를 잘 꾸며놓고 구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일종의 바톤 터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 집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4-15)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첫 협조자인 초기 사도단을 부르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이지 전격적이고 뜻밖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잘 배운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열심히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물을 손질하여 내리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시고,
자신들을 눈여겨보시며, 이윽고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제자들의 성소 출발점을 묵상하니, 어찌 그리 제 성소 여정과 판박이인지 놀랄 지경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하루 온 종일 설계실에 앉아 도면을 바라보고, 도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는 갑작스레 제 뒷덜미를 잡고 낚아채셨습니다.
정말이지 얼마나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당시 저는 수도 생활에 대해서는 단1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많이 아플 때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데,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도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엄청났습니다.
사실 제 학창 시절 내내 생활 기록부에는 늘 이런 표현이 반복되었습니다.
‘지극히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임.’ ‘남 앞에 나서기를 힘들어하니 발표력을 키울 필요가 있음.’
어딜 가면 늘 구석 자리를 찾았고, 주변 사람들과 교류도 잘 하지 않고,
하루 온 종일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제 안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런 저를 부르시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저를 단련시키셨습니다.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저를 집어넣으셔서 재창조하시고 당신 말씀의 봉사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완벽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저처럼 한없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탄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구차스럽고 죄투성이인
우리 한명 한명의 인생 여정 안에도 분명히 육화강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깊은 상처 사이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따분하고 한심한 우리 각자의 하루하루 그 안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너무 스치스러워 얼굴을 들기조차 힘든 죄스럽고
남루한 우리 삶 속에 탄생하시고 현존하십니다.
'이미', '아직', '즉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때가 찼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제게 두 가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어떤 때가 찼는가?
나한테도 때가 찼는가?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물론 대박이 날 때가 아닙니다.
로또를 사고 주식을 하는 사람은 그 대박의 때를 기다리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뒤에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는 것을 볼 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올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심과 함께 하느님 나라는 왔는데,
그 도래를 기다리던 이에겐 성탄으로 그때가 찼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제 당신이 어른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심으로써
그때가 꽉 찼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니
하느님 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음을 알라는 말씀인데
그런데 아직 때가 차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건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우리 사이에는
‘이미’와 ‘아직’의 간격과 긴장이 있고,
그래서 주님의 복음 선포가 필요하고,
주님을 이어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마르코복음은 주님의 공생활 시작 얘기와
첫 제자가 부르심 받는 얘기를 동시에 전하는데
첫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곧바로’, ‘즉시’의 사람들입니다.
‘아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믿고 ‘곧바로’ ‘즉시’ 따른 사람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 전에 하시는데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복음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회개가 필요 없고 그것을 ‘아직’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생각합니다.
‘이미’와 ‘즉시’와 ‘아직’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에게는 그 ‘때’가 ‘이미’ 꽉 찼는가? ‘아직’ 덜 찼는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