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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난 名문장, 필요한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인생이란 ‘나’에게서 시작되어 ‘우리’로 가는 긴 여정”
―존 펜버티 ‘인생’ 중
이 책의 원제 ‘To Bee or Not to Bee’에서는 고뇌하는 햄릿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꿀통이 넘치도록 꿀을 채우려고 애쓰는 일벌 버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일벌들의 일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누군가에게 인생을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버즈는 삶의 지루함에 사로잡힌다.
그래도 그의 곁에는 “행복은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선물 같은 것”, “가장 위대한 선물은 오늘” 같은 조언을 들려주는 스승 버트가 있어 일에 몰두할 수 있다. 사실 버트와 버즈가 나누는 대화에서 주어인 ‘벌’을 ‘인간’으로 바꾸면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버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버즈는 벌집을 떠나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날아오른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신념을 지니고 높이 날아올랐던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의 주인공 조나단처럼. 그러나 조나단과는 달리 버즈는 새로운 세계를 보고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다른 동료 일벌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인생에 대한 접근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며, 그들과 자신의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터득한다.
자신의 두려움과 약점을 넘어서는 힘이 조금씩 쌓이면,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도록 하는 힘이 된다. 바위를 뚫는 물방울의 저력은 강한 힘이 아닌 지속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버즈의 노력으로 일벌들의 세계는 변화해 간다. “지성의 힘은 서로 다른 점을 지각하는 데서 오고, 감성의 힘은 서로 닮은 점을 인식하는 데서 온다”고 버즈는 말했다. 버즈의 여정을 지켜보며 버트가 들려주었던 “외부로 가는 유일한 길은 내면에 있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 본다.
✺ 인생[To Bee or Not To Bee] - 위기를 극복하고 꿈을 실현해가는 꿀벌 버즈의 감동 스토리[존 펜버티 지음/ 신현준 옮김/ 맥스미디어/ 2005년 11월 10일]
✵ 책소개
동물에게서 삶의 지혜를 얻는 경우가 있다. 아울러 그런 주제를 다루는 도서들 역시 많이 있다. 동물에게서 힌트를 얻어 처세나 경영방식을 제시하는 책들이 그런 것이다. 10년 장기 불황의 늪을 벗어난 일본을 거북이형 전략의 성공이라는 평가처럼 코끼리, 펭귄 등에서 배우는 처세술이 봇물을 이룬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처세보다는 인생살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방식의 설명이 있는 책은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여러 상황을 벌의 시선을 빌어 은은하게 표현하고 있다. 꿀벌의 삶 역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희로애락을 느끼고 삶의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때로는 위기를 맞이한다. 물론 이를 극복하여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는 것처럼 벌과 인간의 공통된 인생살이를 꿀벌 버즈의 시선을 빌어 인간사를 설명하고 있다.
✵ 저자 : 존펜버티 John Penberthy
존 펜버티는 어려서부터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그가 지닌 인생과 정신세계에 대한 열정 역시 그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의 플로리다 남부에서 자랐으며, MBA 획득 후 부동산 상담고문으로 12년간 활동했다. 그 후 인도네시아의 헬렌 켈러 인터내셔널에서 일했으며, 미국의 일리노이 남부에서 자연보호활동을 했다. [To Bee or Not to Bee]를 쓰면서 그는 세상 모든 것의 신성함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현재 콜로라도의 보울더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 목차
1부 인생/2부 혼돈/3부 선택
✵ 인생[To Bee or Not To Bee] - 위기를 극복하고 꿈을 실현해가는 꿀벌 버즈의 감동 스토리
따사로운 햇볕, 진동하는 장미향, 간간이 불어오는 상큼한 바람, 그리고 나른한 오후.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함께 떠오르는 영상이 있습니다. 벌, 나비가 꽃술에 앉아 자그마한 날개를 휙휙, 왱 하면서 꽃과 입맞춤하는 모습이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벌통에서 꽃으로 지칠 줄 모르고 바삐 움직이는, 풍요로움과 부지런함의 상징인 벌들.
만약 이들이 어느 날 나뭇가지에 앉아 “To Bee or Not to Bee”를 외치며 신세 한탄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지구에 있는 수 많은 식물들의 절반 이상이 멸종하게 될 것이고, 곧 이어 생태계의 먹이 사슬이 깨지는 바람에 거의 모든 생물이 사라지게 되겠죠. 우리 집 정원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저의 일상적인 생활은 아침 5시 30분 기상, 이빨 닦고 샤워하고 주섬주섬 옷 갈아입고 지하철타면 대략 6시에서 6시 반. 회사 도착하면 7시 반에서 8시. 금연빌딩이라 별도로 마련된 휴게실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담배 2대를 스트레이트로 빨아 댄 후, 곧 이어 간단한 글쓰기나 원격교육 청취, 그리고 다이어리에 하루 일과를 정리하면서 오늘 지시할 사항과 보고할 사항에 대한 간단한 메모. 8시 40분쯤 되면 한 명 두 명 사무실로 팀원들 입장. 곧 시끌버끌, 하하호호, 웅성웅성, 쿵, 바스락, 철꺽, 아~함 등등 현실세상의 소리가 들려오면서 업무시작. 회의와 미팅. 11시 40분쯤 헬스클럽에서 운동. 12시 50분쯤 점심식사. 사무실로 올라와 맛있는 식후 끽연 한차례와 이빨 닦고 책상 앞에 앉으면 대략 1시 30분쯤. 또 다시 업무 시작. 6시 10분쯤 저녁식사를 끝낸 후 하루 업무 마감과 퇴근 준비. 7시쯤 서류가방 매고 “빠이빠이. 오늘 수고들 했어요 내일 봐요.” 집에 도착하면 8시 반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그러나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런 일상적인 모습보다도 어느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돈문제, 말안 듣는 아이에 대한 짜증, 부부간의 싸움, 친구의 배신 등 이죠. 봄날 꽃밭사이를 아무 생각없이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벌들의 생활이 우리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아닌가 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버즈는 아주 평범한 그리고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일과 삶에 대한 회의, 이 두 가지 갈등과 동시에 싸우면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에 사로 잡혀 있는 일벌입니다.
벌 세계에서 여왕벌의 위치는 하늘과 같은 몸. 여왕벌은 일벌을 모아놓고 자주 일장연설을 합니다. “일벌들이여. 우리는 작은 영토에 의존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한층 더 열심히 일해서 저 꿀통을 넘치도록 채워버립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의 꿀통이 채워지면 또 다른 빈 꿀통을 채워야 했고, 그 일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벌들이 바라보는 인생, 아니 벌생이라고 해야 맞겠네요, 일의 가치관은 너무나 완벽하게 세뇌되어 있어 버즈와 같은 사색과 고뇌하는 일벌은 이 사회에서 받아 들여지기 어려운 상태였죠. 한 지도자 벌은 버즈에게 자신들은 개미보다 무척 진화된 존재이고, 개미들이 가지지 못한, 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자랑합니다.
“젊은이 우리는 보금자리 공사를 할 때 어떤 영역을 맡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고 어떤 꽃에서 꿀을 채취할 것인지, 오갈 때 어떤 길을 따라 비행할 것인지, 어떤 유충을 먹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잖은가? 더 이상 어떤 자유가 필요하겠나?”
이런 상황에서 버즈의 마지막 희망은 아직 가보지 않은 계곡 넘어 또 다른 세계였습니다. 물론 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높은 산, 인간에게는 에베레스트산과 같은, 산을 넘어야만 하지만. 그러나 노인벌 버트는 새로운 곳을 찾겠다는 버즈에게 세상을 버리거나 바꾸려고 하지 말고 세상 그대로를 끌어 안으라고 충고합니다. 일이란 삶의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에 일과 개인생활을 분리하고 약간의 정신적 여유와 탐구심을 일상생활에 적당히 섞어보라는 거죠. 버즈의 지금 상황은 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 상태가 문제라고 타이릅니다. 여기서 버트는 버즈가 산 속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일벌입니다.
그러나 버트의 충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버즈. 결국 벌의 생리적인 구조상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산을 향해 출발합니다. 목적지는 그 산의 정상입니다. 산 넘어 있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죠. 예상대로 그 산은 무척 가혹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던 돌풍, 얇은 날개를 얼린 정도로 추운 영하의 온도, 먹을 것 하나 없는 돌산. 버즈는 결국 극한상황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버즈에게 떠 오른 것은 떠나 온 계곡의 살근거리는 바람, 포근한 벌통, 달콤한 꿀 등. 그러나 이미 돌아가기엔 늦은 상태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산 정상에 올라 산 넘어 세상을 보는 순간, 버즈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바로 자신이 싫다고 떠나온 산 아래 계곡과 거의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버즈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정상을 넘어 자신이 꿈꾸던 다른 세계로 건너갈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 왔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지. 여기서 버즈는 ‘To Bee or Not To Bee’라고 외친 것 같습니다. 과거 유럽의 한 왕자가 무시무시한 칼 한 자루를 움켜 쥔 채 하늘을 향해 저주하듯이 자신의 목숨을 흥정한 그 때의 의미와는 달리, 자신이 살아 왔던 그 모습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것인지의 의미일 것입니다.
결국 버즈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산 넘어 계곡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지, 자신이 살던 고향을 버리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게다가 산 넘어 에 있는 것은 자신이 살던 곳과 별반 차이가 없는 계곡과 평야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버즈가 목숨을 걸고 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것이 헛수고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소중한, 정말 소중한 2가지를 얻었으니까요.
버즈가 얻은 2가지 중 하나는 세상이 너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세상은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의 오차도 없이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세상 안에서는 싸움도 있고, 죽음과 고통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은 세상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일 뿐이지,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죠. 예전에 버트는 버즈에게 신이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그가 생각함으로써 만들어 진 이 세상도 완전한 것이고, 거기에서 살고 죽고 고뇌하고 슬퍼하는 이 모든 것은 완전함을 이루기 위한 일부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과거에는 답답하게 살아가는 것 같았던 동료 벌들이 무척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버즈는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 나가는 가운데에서 주변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버즈의 눈에 동료들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곳의 모든 것이 정겹고 사랑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버즈가 산 정상에 갔다 오는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동료들이 버즈가 떠난 것이 가슴이 아파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을까요? 고향의 날씨와 기온이 더욱 따뜻해 졌나요? 변한 것은 단 하나. 버즈의 태도와 마음가짐뿐입니다. 세상은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미래에도 신이 창조한 그 모습 그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며 완전함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고 이 속에서 마음이 평화와 그 완전함을 느끼는 정도는 바로 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그 하나의 변화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버즈는 일상생활로 돌아와 동료 일벌들과 열심히 일하며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끔 조용한 숲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과거 노인벌 버트는 사색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행복하냐고 묻는 버즈의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해 주었습니다. “자네가 본 것의 대부분은 행복이 아니라 평안인 걸세. 이 계곡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바라볼 때 얻게 되는 내적 평안 말이세. 내가 경험하는 행복은 부차적인 결과물이야. 행복은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선물 같은 것이야.”
버트의 이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인생이란 나에게서 시작되어 우리로 가는 긴 여정이라네. (중략) 모든 기준은 상대적인 거야. 자네가 하나의 조건을 규정하는 순간 자넨 이미 반대급부를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없네. 어떻게 뜨거움이 뭔지 모르고 차가움을 알 수 있겠나. 어떻게 내리막이 없는 오르막이나 슬픔 없는 행복이 있을 수 있겠나?”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내가 만난 名문장, 요한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심혜경 번역가·‘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 저자), 동아일보 2022년 05월 23일(월)〉, 일열의 독서경영포럼, Daum, Naver지식백과, 인터넷 교보문고/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감사합니다 ~
고봉산 정현욱 님
존 펜버티의 인생(To bee or Not to bee)
직역하면 '벌이냐 아니냐에 따라' 라고 할까요?
버즈와 버트의 대화체로 쓴 문장이 신선한 느낌을 주고 벌들의 삶을 인생으로 바꾸면 바로 우리의 이야가가 된다는 그의 지성과 감성에 감탄을 금할수가 없네요
오늘도 좋은 공부 한과목 떼운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삶은 소풍이다
ㅡ갈 때 쉬고
ㅡ올 때 쉬고
ㅡ또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고
장자 사상의 중요한 특징은 인생을 바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하루하루의 삶을 그 자체로서 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지, 하루하루를 마치 무슨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기계적 소모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인생에 있어서 ‘일’을 권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풍’을 권한 사람이다.
우리는 ‘일’하러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성공’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다 부차적이고 수단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 생에 무엇을 잘했는지 모르지만, 하늘로부터 삶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이 우주에는 아직 삶을 선물로 받지 못한 억조창생의 ‘대기조’들이 우주의 커다란 다락방에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당신과 나는 이 삶을 하늘로부터 선물 받아 이렇게 지금 지구에 와 있지 않은가!
삶을 수단시하지 마라.
삶 자체가 목적임을 알라. 이 삶이라는 여행은 무슨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여 이 여행 자체를 즐겨라.
그러니 그대여 이 여행 자체를 즐겨라.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인생이란 소풍이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소풍을 보내면서 단지 열흘짜리 휴가증을 끊어 주신 건데, 하느님이 사는 중심 우주와 우리가 사는 외곽 우주가 서로 흐르는 시간대가 달라 그것이 백 년이 된 것뿐이다.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에는 글자 어디를 뜯어봐도 바쁘거나 조급한 흔적이 눈곱만큼도 없다 ‘소(逍)’자는 소풍간다는 뜻이고, ‘요(遙)’자는 멀리간다는 뜻이며, 유(遊)자는 노닌다는 뜻이다.
즉, ‘소요유’는 ‘멀리 소풍가서 노는 이야기이다.
‘소요유(逍遙遊)’는 묘하게도 글자 세 개가 모두 책받침 변(辶으)로 되어 있다.
책받침 변(辶)은 원래 ‘착(辵)’에서 온 글자인데, ‘착’이란 그 뜻이 ‘쉬엄쉬엄 갈 착(辵)’이다.
그러니 ‘소요유’를 제대로 하려면 내리 세 번을 쉬어야 한다.
갈 때 쉬고,
올 때 쉬고,
또 중간에 틈나는 대로 쉬고!
참 기막힌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장자, 영혼의 치유자>
중에서
https://m.youtube.com/watch?v=Bn6voP6KK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