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주방에서 대형 분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얼마쯤 조용하더니 “여보! 잠깐 나와봐요” 한다. 딱히 찾을 이유가 없는데 아내가 나를 부른다. 방에서 미적거리다 나간다. “손을 깨끗이 씻고 오시요” 한다. 영문도 모르고 손을 씻고 간다. 아내는 불린 찹쌀로 가루 만들어 반죽하고 있었다. 그 반죽을 조금씩 쟁반에 떼어 놓으면서 새알을 만들라고 한다. 아내가 새알 모양을 만들어 시범을 보여준다. 따라서 해보지만, 자꾸만 새알이 어그러진다. 아내는 손바닥에 힘을 좀 빼고 부드럽게 살살 새알을 굴리듯이 하라고 한다. 아내가 말하는 대로 하니 제법 새알이 만들어진다. 오늘은 애기 동지라며 팥떡을 먹어야 하지만 손쉬운 팥죽을 한다고 아내는 말한다. 간만에 팥죽 먹을 기대로 새알을 정성껏 만든다.
새알을 만들다 보니 아주 어린 시절 동짓날 생각이 난다. 동짓날이면 엄마는 방앗간에서 쌀가루를 찧어 와 반죽하고 형, 누나들을 불러 모아 새알을 만들게 하셨다. 둥근 상에 모여앉아 웃고 떠들며 만든 새알을 큰 쟁반에다 올려놓으면 큰 것, 작은 것, 구슬처럼 둥근 것, 찌그러진 것, 나만 먹게 떡처럼 만든 것 등 여러 가지였다. 엄마는 예쁘게 새알처럼 만들라고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힘을 주고 비비면 뭉그러지고, 많이 비비면 길쭉해져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팥죽이 다 되면 엄마는 제일 먼저 귀신을 쫓는다고 집 주위를 돌아가며 붉은 팥죽 국물을 집안 곳곳에 뿌렸다. 우리 집 주위 벽에는 팥죽 국물이 늘 묻어 있었다. 그리고 이웃에도 한 그릇씩 나눠주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팥죽에 넣은 새알을 돌리면서 동치미 한 사발과 함께 먹었던 그때의 팥죽은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형, 누나는 나이대로 새알을 먹어야 한다고 놀리며 내 팥죽에 몇 알 안 되는 새알을 넣어주어 울기도 했었다. 대청마루에는 다음날 먹기 위해 큰 양푼에 팥죽을 남겨둔 것이 얼어 있었다. 그것을 녹이느라 물을 붓고 끓인 그 팥죽에는 새알이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끓으면서 새알이 모두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나는 새알 찾느라 팥죽 냄비를 다 휘저어보았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동지는 본격적인 겨울이 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동지를 기점으로 겨울은 더 깊어져 가고, 밤은 조금씩 짧아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