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1주년’의 의미와 우리의 과제
정부는 금년에도 예년처럼 8월15일 대한민국의 ‘광복’ 71주년을 경축하려 하고 있다. 한반도는 지금부터 71년 전인 1945년 8월15일 일본제국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측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됨에 따라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광복’ 문제는 단순치 않은 측면이 있어서 ‘광복절 71주년’을 ‘경축’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금년이 실제로 ‘광복 71주년’이기는 한 것이냐는 본질적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해야 할 근원적 문제를 떨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도대체 ‘광복’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먼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국어사전>[인터넷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과연 1945년 8월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는 1945년 8월15일자로 “잃었던 국권을 도로 찾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부정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1945년 8월15일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은 일본이 이날자로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여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모든 다른 나라의 영토와 주민을 포기하라는 연합군의 요구를 수용함에 따라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한반도는 ‘해방’과 동시에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단된 채 미·소 양국군에 의한 군사적 점령 지역이 되는 비운(悲運)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우리나라가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은 그로부터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면, 사전적 의미에 충실할 경우, 금년 8월15일은 결코 ‘제71주년 광복절’이 될 수 없다. 이 날은 ‘제71주년 해방절’이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나라와 주권의 회복'이 이루어진 날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48년 8월15일로, 이 같은 사실에 따른다면, 금년 8월15일은 동시에 ‘제68회 건국절’이 되어야 마땅하다.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이 같은 혼선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을 이룩한 것이 자력(自力)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데서 초래된 현상(現象)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45년의 ‘해방’과 1948년의 ‘독립’은 다 같이 자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자(前者)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戰後處理)의 일환으로, 그리고 후자(後者)는 전후처리가 아니라 유엔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로 강제 편입된 뒤 독립투사들에 의한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크게는 1919년 3월1일 전국적인 3·1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이어서 1926년에는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純宗)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의 강권통치 아래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6·10 만세운동이 끝이었다.
그 결과로, 독립투사들의 독립투쟁은 불가피하게 한반도 영역 밖의 해외에서 명멸(明滅)할 수밖에 없었다.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의 명맥(命脈)을 이어서 1919년 4월23일에는 중국 땅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기치를 내걸었다. 이를 전후하여 만주(滿洲)에서는 1920년 6월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봉오동(鳳梧洞) 전투,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청산리(靑山里) 전투 등 부분적인 승전보(勝戰譜)가 없지 않았지만 만주 지역에서도 일본군의 조직적인 소탕작전으로 인하여 독립 운동가들의 조직적인 무장 투쟁의 수명(壽命)은 오래 갈 수 없었다.
한국인들의 독립투쟁은 이제는 개별적인 거사(擧事)가 뒤를 이었다. 1919년9월2일 서울에서 발생한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사이토(齋藤實) 일본 총독 저격(狙擊) 시도, 1932년1월28일 도쿄(東京)에서 발생한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일본 천황이 탄 마차에 대한 폭탄 투척 사건 그리고 1932년 4월29일 샹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의 일본 천장절(天長節·천황 생일 기념일) 식장에서의 윤봉길(尹奉吉) 의사에 의한 폭탄 투척 사건이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상하이로부터 항저우(杭州), 진쟝(鎭江), 장샤(長沙), 광저우(廣州) 등지를 전전(輾轉)한 끝에 충칭(重慶)에서 해방을 맞이한 임시정부는 김구(金九)의 주도 아래 1945년 ‘광복군(光復軍)’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 군 조직에 착수했으나 ‘임시정부’ 자체가 국토와 국민 및 주권(국제적 인정)을 확보하지 못하여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이르지 못했고 ‘광복군’도 전쟁 참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편성 도중에 ‘해방’을 맞이하는 '이불 속 활개질'에 그쳐야 했다.
그 동안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에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라는 이름의 기구를 만들어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만주 산악지대에서는 한때 김일성(金日成)이 참가한 소규모 조선인 병력이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소속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족적(足跡)을 남겼지만 이들도 1941년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소탕작전에 쫓겨서 시베리아 소련 영토로 피신하여 소련 극동군(極東軍) 88경비여단에 편입된 상태로 1945년의 해방을 맞이한 것이 고작이었다.
이 같은 독립운동들은 너무나 힘이 미약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국의 일원이 되지 못했고 그 결과 일체의 전후처리 과정에 참가는커녕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다. 연합국 사이에서는 일본의 패전 전망이 어느 정도 드러난 1943년부터 전후처리 방안 마련의 테두리 안에서 한반도 처리 문제에 관한 국제적 협의가 시작되었다. 그 효시가 1943년 11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있었던 미국(프랭클린 루트벨트 대통령), 영국(윈스턴 처칠 수상) 및 중국(蔣介石 총통)이 참가한 3개국 정상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참가국 정상들은 한반도 문제에 관하여 전쟁이 종결되면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 of time)에 독립을 실현시켜 준다”는 원칙적인 합의를 이룩했다.
그 뒤 연합국 간에는 테헤란 회담(1943년 11월), 얄타 회담(1945년 2월) 및 포츠담 회담(1945년 7월) 등의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카이로 회담의 원칙적 합의가 반복하여 재확인되는데 머물렀다. 한반도 문제의 전후처리 문제는 미국이 1945년 8월6일과 9일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탄을 투하한 것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게 되자 갑자기 긴급한 국제적 현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당시 태평양 지역에서의 일본과의 전쟁을 거의 전담했던 미군은 겨우 오키나와(沖繩)에 상륙하여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한 상황인 반면 소련은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 다음 날인 8월8일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즉각 소련군이 두만강(豆滿江) 건너 북한 땅으로의 진격을 시작하여 자칫하면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한반도 전역을 소련군이 장악할 가능성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일본군이 항복한 날인 8월15일 트루먼 대통령이 스탈린 소련 수상 앞으로 보낸 전문(電文)을 통해 일본이 항복하면 한반도를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기 분할 진주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고 치안을 유지할 것을 제의했고 스탈린이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일단 군사적 남북분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38선이 생기고 한반도의 분단이 현실화되었다. 이 같은 경위는 분단의 1차적 책임이 당연히 38선에 의한 한반도 분할을 제안한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때 미국이 38선을 획정하여 한반도를 분단시키지 않았으면 한반도는 전역이 소련의 차지가 되어서 공산화의 길을 갔을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한반도의 절반과 한민족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38선 남쪽의 한국인들은 38선의 등장 때문에 공산독재의 치하에서 죽지 못해 사는 북한 주민들의 처지와 같아지는 것을 면했을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토대를 둔 대한민국 건국을 통하여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38선에 의한 국토분단의 의미를 이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음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의 일환으로 결정되지도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무섭게 윈스턴 처칠이 말한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세계지도를 양분하면서 미국과 소련을 양극(兩極)으로 하는 동서냉전(東西冷戰)이 격화되는 와중에 한반도 문제는 ‘전후처리’의 차원을 벗어나 버렸다. 한반도 문제 해결은 결국 1948년 유엔의 몫이 되어서, 유엔의 주선을 통하여, '한반도 상의 유일한 합법국가'(1948년12월12일자 유엔총회 결의 193-III호)인 대한민국의 탄생을 가져 왔으나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국가>라는 이름의 불법적인 분단국가가 출현하여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시킴으로써 이 나라의 ‘광복’은, 전국적 규모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완성’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 같은 해방 전후사(前後史)는 우리나라의 ‘광복절’을 정확하게 바로잡을 역사적 필요성을 제기한다. 금년 8월15일은 오직 ‘제71회 해방절’일 뿐이다. 동시에 8월15일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 이루어진 날이므로 대한민국의 ‘제68회 건국절’이나 ‘제68회 독림기념일’ 로 기념되는 것이 맞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광복절’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하면, 이 나라의 완전한 ‘광복’은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뿐 아니라 '잃었던 나라와 주권을 전국적 범위에서 되찾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8월15일이 과연 ‘건국절’과 ‘광복절’을 동시에 경축하는 2중의 ‘국경일’로 기념될 수 있을 것이냐의 여부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8월15일자로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될 문제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