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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히브 2,5-12
복 음 : 마르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가 이렇게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고백이지만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신앙고백으로 그 나름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멸망시키러 오셨는지를 묻는 이 말은 그 고백이, 그 앎이,
사실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상관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분 눈에 우리는 소중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멸망이 아닌 구원과 행복을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우리 사이에 들어오시려 한 것이지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화답송 시편의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한 관심과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한 형제가 되셨습니다.
전혀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기꺼이 그 길을 가셨다는 것이 오늘 독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관심 꺼라.‘ 하고
적대감을 드러내며 무관심을 내세우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우리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살다 보니
적대감과 무관심과 체념의 언어를 자신도 모르게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러한 속임수에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평화의 길로 모두 함께 나아 갑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연필을 어떻게 만들까요? 우선 용광로에서 만든 강철로 나무를 벱니다.
그리고 다시 잘라서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건조하고, 염색한 뒤에 또 말립니다.
작은 조각에 흠을 낸 뒤 서로 이어 붙여 고정합니다.
연필의 핵심인 연필심은 흑연에 흙, 동물성 지방과 황산으로 만든 화합물을 섞어서 만듭니다.
피마자 씨앗에서 추출한 피마자유로 만든 액체로
연필의 나무와 심을 코팅하고, 수지를 써서 라벨을 붙입니다.
연필 끝에는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놋쇠를 붙이고,
유채씨유, 염화황부터 황화카드뮴에 이르는
수많은 화학물을 사용해서 만든 지우개를 여기에 붙입니다.
이런 제조 과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연필 한 자루가 새롭게 보이지 않습니까?
만드는데 별로 어렵지 않은 간단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그러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혼자서는 연필 한 자루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함께’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우리도 함께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함께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에서도 함께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함께할 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입니다.
사실 악은 늘 우리와 함께하려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 곁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삶이 아닌 더러운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알립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악은 분열을 일으킬 따름입니다.
분명히 정답이지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정답인데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의심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수님 곁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과는 함께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고, 사랑 안에서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고 친 사건이었습니다.
복음은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고
네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22)
그런데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이’가 소리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이 ‘첫 번째 행적’으로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는 일’과
‘악마에 사로잡힌 이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첫 번째 행적’은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본래로 돌려놓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요, 구원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더러운 영’을 쫓아낼 뿐 죽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인간과 같이 영원불멸의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들은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고 밝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 신원에 대한 정보를 드러낼 뿐 신앙고백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앎’은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결정적인 때가 오기까지는 제지당하게 되고, ‘메시아 비밀사상’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마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악마가 추방된 사건’이라기보다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구마 치유는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직접 스스로 명령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지 않으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이 멈추게 되고,
어둠을 몰아내 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새로 나게 하소서.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권위를 가지고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마르1,21)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 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신호등’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제야 목적지를 정했지만 가려 한 날 막아서네.
난 갈 길이 먼데 새빨간 얼굴로 화를 냈던 친구가 생각나네.
이미 난 발걸음을 떼었지만 가려 한 날 재촉하네.
걷기도 힘든데 새파랗게 겁에 질려 도망간 친구가 뇌에 맴도네.
건반처럼 생긴 도로 위 수많은 동그라미 모두가 멈췄다 굴렀다.
말은 잘 들어 그건 나도 문제가 아냐
붉은색 푸른색 그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노란색 빛을 내는 저기 저 신호등이
내 머릿속을 텅 비워버려
내가 빠른지도 느린지도 모르겠어.
그저 눈앞이 샛노랄 뿐이야.”
경쾌한 멜로디가 좋았던 노래입니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신호등’이 필요해졌습니다.
신호등이 없으면 교통의 흐름이 막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교통사고의 위험이 더 커집니다.
이런 신호등도 가끔은 ‘수신호’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크게 났을 때는 경찰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합니다.
대통령이나 외교 사절이 이동할 때도 수신호로 차량을 유도합니다.
수학능력 시험처럼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도,
학생들의 이동 차량을 위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합니다.
신앙 안에서 ‘신호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정립하고,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가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빨간불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겁니다.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고, 부정한 행위를 하지 말고,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겁니다.
십계명의 파란불은 하느님을 섬기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겁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 이외에도 613개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신호등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 인도하고,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과 613개의 율법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구속하는 고삐와 같았습니다.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교회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단죄하기보다는 교회가 보듬어 안을 수 있도록 배려하자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호등과 수신호는 모두 사람을 위해 있는 겁니다.
다만 수신호가 필요한 때가 있기에 수신호를 통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겁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의 ‘수신호’입니다.
계명과 율법만 지키기에는 세상이 너무 타락했습니다.
계명과 율법만 지키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이 너무 컸습니다.
세상에는 계명과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계명과 새로운 질서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계명과 율법을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주교님 선택의 기준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제직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제직이 순명을 만나면, 사제직이 십자가를 만나면,
사제직이 겸손을 만나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권위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소리를 쳤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보지만 믿음이 없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베드로는 칭찬을 받았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루카 22,33)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올바른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권위가 있는 말엔 항상 이것이 섞여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와 같은 프로에 보면 아이들은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제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요?
부모의 말에 왜 권위가 사라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당신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성령이 말의 권위인데, 이 성령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기게 합니다.
이때 흐르는 피가 말과 섞을 때야 말에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젊은 스님이 수박을 사러 5일 장에 들렀습니다.
완벽하게 익은 수박을 조심스럽게 골라 값을 지불한 스님은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치고 가서 수박이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이보시오! 남의 수박을 깨뜨린 뒤 어떻게 그냥 가버릴 수가 있어요?”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백발의 노부인이 뒤를 돌아 스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중이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이 정도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가르침과도 같은 여인의 말은 스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 같았습니다.
“보살님, 어디 사십니까?” 스님이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다.”
스님은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노파는 막걸리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남 따라다닐 시간에 네 갈 길이나 가라.” 노파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남을 따라다니기만 했구나.”
노파의 말은 계속해서 가르침처럼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부인, 당신은 매우 현명해 보이는군요.
무엇을 공부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혜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23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군에 입대하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사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 눈물이 멈출 수가 없었어요. 먹고 자고 상관없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스님은 그녀의 말속에 담긴 깊은 고통을 깨닫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떨어지는 것을 보다 보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방울이 냇물이 되어 냇물이 바다가 됩니다. 바다가 다시 구름이 되고 물방울이 되죠.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돌아옵니다.
그 근원으로. 이것을 느끼고는 슬픔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노파의 말은 곧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이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은 말들은 내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들으신 말씀으로 당신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긴 사람의 말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신도 이기지 못한 말은 권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잔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가장 권위 있는 말은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자기를 이기신 말씀.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변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말에 피를 섞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말을 하고 싶거든 매일 성령으로 자기를 이기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영도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도자인 그분이 우리 구원을 위해 고난받으신 분이시고,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며 우리의 형제가 되신 분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그렇지요.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분의 형제라고 불리고,
우리 구원을 위해 영도자인 분이 고난을 받으십니까?
다만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일 뿐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은총을 누려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리 지르며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도자를 상관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며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아는,
더러운 영의 모순은 무엇이고 왜 이렇게 모순된 행동을 취합니까?
하느님의 구원이, 구원이 아니고 멸망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은총이 아니라 괴롭힘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더러운 영이 생각하는 구원이 주님의 구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안주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더러운 영 얘기가 5장에서도 나오는데
게라사 지방에 예수님께서 발을 내딛으시자 군대라는 더러운 영이 마중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역에 주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쫓아내시는 분으로 주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이란 자기가 살던 곳을 더럽게 집착하기에 더러운 영입니다.
죽게 되면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어떻게 해서든지 곧 더러운 돼지들 속에서라도 머무르려는 영입니다.
제 생각에 더러운 영이란 특별한 영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우리처럼 평범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더러운 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현재의 상태를 고집하며 안주하려고 들면 그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 그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입니다.
떠나지 않으려고 함,
현재에 안주하려고 함,
하느님께 가지 않으려고 함,
이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한 ‘악의 평범성’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