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게 소속된 삶(남녀관계)
스스로 자기 존재가 부질없다고 여겨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하여 세상에 굴하지 않고 살겠다는 의연함을 지닌 사람이니까요. 세상 사람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천국(하늘)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을 향하는 삶이 아니라 하늘을 향하는 삶으로 사는 사람이 성교회의 신앙인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사는 사람을 만나 뵈면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사제는 위로의 자리에 늘 머뭅니다. 위로의 자리에는 늘 지친 몸이 있고 그 지친 몸 안에는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을 보게 됩니다. 노예의 잔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심으로 새로운 친교의 장을 맛본 세상에 소속된 사람들의 증언이 복음서입니다.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변경의 국경선을 넘어가게 하는 힘이 하늘이 주신 힘입니다. 하늘이 주신 힘으로 노예들이 힘을 얻어 새로운 삶이 되는 이야기가 출애굽기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은 하늘과 연결되고 서로에게 연결되게 합니다. “주님을 믿는 세계에서는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이 상대방에게 서로 속해 있습니다. In our life in the Lord, however, woman is not independent of man, nor is man independent of woman(1고린 11:11).”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주는 공동체가 우리들을 새로운 삶으로 안내해 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나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는 것이 나의 그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몸과 피로 채워져야 합니다. 특히 “안식일은 침묵을 받아들이고 감사가 깊어지는 시간이다.”는 유진 피터슨 Eugene H. Peterson(1932.12.6.- 2018.10.22.)장로교 목사님이 준 마음으로 주일예배에 참례하게 됩니다. 은혜가 풍성한 끝없는 영적양식이 넘치는 성교회의 제단을 향해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들이는 성체를 영할 때가 가장 신성합니다.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1고린 11:28).” 자신을 살피면 남을 기다릴 줄 알게 됩니다. 성교회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게 되면 약한 몸이 되고 병이 많고 죽은 자가 많게 됩니다. 남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려고 자신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그렇게 하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늘 살피며 남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 몸은 남을 위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내 몸이 성경의 창조물로 사는지를 질문하면 대답을 하기가 곤란합니다. 내 몸이 성경을 파괴하는 삶을 수시로 살기 때문입니다. 영국성공회를 거부하여 생긴 나라가 미국이고 영국성공회의 확장으로 생긴 나라가 카나다입니다. 현재 미국은 자본주의의 꽃의 나라가 되어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가 되었고 카나다는 공동체가 꽃을 피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국성공회를 거부한 미국의 청교도입니다. 한국은 미국의 청교도를 거부한 새로운 청청교도가 되었어야 미국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청교도를 거부하지 않고 심화시켰습니다. 카나다의 공동체가 강한 성교회가 한국에 와서 강화되었다면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다르게 한국사회의 비젼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Li-Young Lee 李立揚(1957. 8.19-)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신의 미국시인입니다. 증조부가 위안 스카이 Yuan Shikai(1881-1916; 중국 최초 대통령)였고 아버지는 모택동의 주치의였습니다. “설화석고 항아리 깨기:이리영과의 대화(2006). Breaking the Alabaster Jar: Conversations with Li-Young Lee.” “내가 사랑한 로체스터(1990). The City In Which I Love You. Rocheste.” “옷벗기. 뉴욕(2018). The Undressing. New York.” 등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다음은 “옷벗기. 뉴욕”의 작품 중의 시 “내가 태어나기 전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I Loved You Before I Was Born.”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던 것을 나는 알아요.
이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도 나는 알아요.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전에 나는 당신의 눈을 보았어요.
그리고 나는 그리움으로 살았어요.
그 이후로 당신을 보기 위해.
그 그리움이 이 몸에 시간으로 들어왔어요.
그리움은 왁스칠한 몸처럼 성장했어요.
그리고 그리움은 몸이 시들해지면서 커갔어요.
그리움은 이 몸보다 오래 갈 거예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던 것을 나는 알아요.
이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도 나는 알아요.
영원이 오기 훨씬 전에 나는 흘깃 보았어요.
당신의 목과 어깨, 당신의 발목과 발가락들을요.
그리고 나는 그 순간부터 당신을 위해 외로웠어요.
그 외로움은 이 몸처럼 지상에 나타났어요.
그리고 내가 시간을 공유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당신의 이름은 내가 명확하게 말하는 것보다 앞서 있어요.
나의 영원한 얼굴을 피하는 당신의 얼굴
입에 한번 단단하게 입맞춤하는 것을.
그리움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황홀하게 나답게 해요.
내 운명의 등불, 나의 빛을
숨기고 노래해요.
나는 나의 빈 가슴을 당신에게 줘요.
그것을 써 주셔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이 많습니다.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은 미국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가 궁금했는데 이리영의 시로 조금 이해를 해 보고자 합니다. 중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이민자로 사는 경계인일 수도 있지만 다민족이 사는 미국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이리영 시인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계 시인들도 많이 삽니다.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인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지 더 궁금해집니다. 하느님이 주신 은총만 채워지는 하늘의 시민으로 자신이 그려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