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엄마가 종로를 걷다 ㅡ
엄마는 나혜석이었다
나이차는 20년 되지만 엄마는 나혜석 후예다웠다 시대를 잘못 만났든지 시대가 그를 버렸을 것이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나혜석은 스스로 폐인의
길을 걸었지만, 엄마는 자살로 시대를 거부했다
ㅡ나혜석 자화상ㅡ
나혜석은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강요라 했다
잠 없이는 살 수 없다
달콤한 잠을 빼앗는 것이 자식이라 했다
자식은모체의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로 규정했다
모성애는 의무사항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나와 즉각 버려졌다
엄마의 초유를 먹지 못했다
나혜석은 외쳤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말며 당신들이 원할 때
방긋 웃는 인형을 원하는가?!
노리개이기를 거부한다
먼 훗날 나의 외침이 이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 나혜석을 기억하리라
세상은 그렇게 됐다
박원순 전서울시장이 나가떨어졌고
오거돈 전부산시장이 매장됐다
후예들은 애 안 낳는 세상이 됐다
ㅡ1950년대 엄마 아부지 , 50년대에
여성이 민소매 옷을 입는 것은 파격이다ㅡ
엄마는 판사의 딸이었다
당당함으로 태어났다
엄마는 시어머니께 밥을 차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진지상을 올렸다
할머니 오빠도 변호사였는데,할머니는 끗발
내세우지 않았다
엄마는 시집살이가 아니라 친정집의 딸처럼
살았다
시부모 앞에서 당당하게 외간남자와 사교춤을
추고 있었다. 파트너는 당대의 유명배우들이다
이민 ,조미령등이 집에 와서 춤을 췄다
엄마의 춤은 저항의 춤이었다
당대 환상의 댄스였다
그래서 최승희와 친했다
엄마에겐 시대가 마땅치 않다
엄마는 3번의 시도 끝에 수면제로 원하는대로
세상을 등졌다
나 초등학교 5년 때다
엄마는 30대 후반에 그렇게 갔다
엄마의 잠을 빼앗은 자식들은 허공에 떴다
아버지의 무기력과 함께 허공은 지옥이었다
나혜석의 아들은 한국은행 총재가 됐는데
엄마의 아들들은 밥도 못먹으며 거리를 헤맸다
첫댓글 부친의 모습에서
전두환 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이셨던
함병춘 선생님을 연상케 합니다.
두 분 모두 시대를 앞서간 분이시네요.
님 또한
그에 못지않은
출중한 분이십니다.
지금 제가 너무 충격이 커서
글을 읽는 내내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실제로 심선생님의 어머니가 나혜석 선생님이신가요?
아니면 양어머니?
제가 지금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근세 여성이십니다, 나혜석 선생님은.
나혜석 선생님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 한 번 해 봐야 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흥분하여 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선생님의 어머님께서도 나혜석선생님처럼 신여성이셨군요.
종로를 걷는 어머님의 모습이 참 단아합니다.
나혜석씨의 동생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두 분이 무척 닮으셨습니다.
심선생님의 어머님께서도
판사의 따님으로 태어나 참 특별한 삶을 살다가
가셨네요.
어머님 이야기.
그런 자유분방한, 좋은 집안 따님으로 지식층의 아내를 가진
심선생님의 아버님 고뇌.
심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넘넘 듣고 싶습니다.
제가 나혜석 선생님만큼 사랑하는 무용가 최승희 선생님.
어머니랑 친하셨다구요?
우와...... 심선생님의 이야기는
대하소설 50권 분량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혜석은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강요>라 했다.
언젠가 제가 어느 일본 영화를 보고
이와 관련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제 제목도 잊어 먹었는데,
<모성애는 본능인가, 교육적 결과인가>에 관하여
기자가
한 일본 여인의 행적을 짚어가는 내용이었죠.
그 영화에서 우리는 당연한 본능으로 알고 있는 모성애가
어떤 형태든 교육에 의해 습득되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조각가 소설가 수필가
시인 독립운동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일주여행가이며
선각자였지요
탤런트 나문희의 고모이며
이혼 후 사회의 냉대속에
파킨슨 관절염을 앓고
행려병자로 발견되었지요
한세기를 앞서간 선구자로서
사회의 냉대를 받으며
가시밭길을 걸어간
시대의 희생양 이었어요
고맙습니다
나혜석의 친자라면
엄청 늦동이인데
진짜 맞나요 ?
설마인데. 궁금합니다 .
어머님이나 나혜석이 지금 이시대에 사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너무나 변해버린 요즘 여자들 사고방식을 그리 좋아 하진 않았을거 같아요
그때는 여자들의 삶이 비참 했기에 반발을 하신거고 여성개혁에 앞장서신거죠.
모성애결핍 선생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심마니 화백님 심민섭 선생님을 길목 놀이터에서 접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심마니 화백님께서는 외조모 나혜석 선생님 재능의 끼가 흐르고 계셨던 것이네요.
범상치 않으신 나혜석 선생님은 한국 여성계의 한 획을 그으신 신 여성으로
그 시대에서는 이해와 수용이 어려웠던 기구한 운명이었죠.
그 피가 심마니 화백님 속에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기에 천재적인 만평으로
명성이 ......
그러나 젊음도, 명성도, 가문도 ... 다 지나가는 한 조각 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