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 나루(나미화)
잉카 염전* / 나루
바람이 누웠던 빈 둑마다
산이 뱉어놓은 통증이 하얗게 널려있다
내 어미가 바다가 아닌 산 이라니
소금은, 몰래 다듬어온 은빛 칼날로
자신을 가두었던 산의 자궁을 찌르고 싶었다
적막이 달빛처럼 침식해 들어와
점점 빙하를 닮아가고 있었다
산을 벗어나는 법을 모르기에
정해진 몫만큼 매일 하늘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새들이 물고 온 파도냄새가 두려울 때마다
몸을 낮춰 바람과 관계를 맺었다
소금을 잉태하던 순간부터, 산은
빗물을 붙잡아두기 위해
다랑이 밭에 둑을 만들었다
의붓자식 같은 저것들,
그 안에서 구름 족속들과 뒹굴면
바다 따위는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쓰라려도 품지 않을 수 없는
단단한 고요를 깨뜨리기 위해
저희들끼리 엉기며 서로 핥아주어야 했다
바다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짜디짠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이 누웠던 잉카의 골짜기마다
억겁의 생채기가 눈보다 눈부시다
* 잉카문명이 남긴 유물로 해발 3천 미터 산 속에 계단밭으로 형성된 염전.
[당선소감] 문득 반가운 추억을 만난 듯
언제나 시작은 떨리고 어렵다.
묵은 빚을 갚아버린 듯한 홀가분함과 가슴 벅차게 솟아오르는 설렘과 막연한 긴장이 혼재된 감정을 안고
막상 시인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첫 발걸음은 떨리고 어렵다.
초등학교 3학년쯤 한 어린이신문에 동시가 실린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왠지 죽을 때까지 시를 써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운명 같은 느낌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시는 나에게서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자꾸 멀어지다가 서른 즈음엔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 후로 그것은, 아무리 달려도 발이 떨어지지 않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악몽이었다.
내 속에서 와글거리는 언어들은 시가 되지 못했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 시어들은
흰 개미떼가 되어서 내 감정을 파먹었다.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뒤이어 엄마까지 보내면서 내겐 위로가 필요했다.
어느 날 아이들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갔다가 내 눈이,
아니 너덜너덜하게 소멸되어버린 내 감정이 시집을 집어 들었다.
수십 권의 시집을 내 속에 담다가 어느 날부턴가 시는 울음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슬픔을 다 토하고 나니 다른 삶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시는 악몽이 아니었다.
마음먹으면 달릴 수 있었고 소리도 지를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득하게 들려오던 믿기지 않던 당선 소식!
낯선 곳을 헤매다가 문득 반가운 추억을 만난 듯 주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앉은뱅이 서랍 속에 가둬둔 아버지도,
내 머리카락에 유전인자로 남아있는 엄마도 와락 달려들어 축하를 해주시는 것 같다.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신 무등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바쁜 가운데서도 시의 끈을 놓지 않고 격려와 채찍을 아끼지 않으신 ‘시옷’ 동인들과
긴 시간 시를 보듬을 수 있게 해주신 이용헌 시인님께도 감사하다.
퇴근길에 보라색 꽃다발을 안겨준 남편과 뜨거운 포옹으로 축하해준 두 딸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짝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시가 내게 손을 내밀어주어서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심사평] 활달한 상상력과 참신성 높이 평가
신춘문예는 ‘새 봄의 문학’이다.
눈 속에 핀 매화처럼 혹한을 이기고 봄기운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이다.
그래서 참신하고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작품을 기대하며 응모작들을 읽었다.
이번에 선자에게 넘어온 응모작은 모두 500여 편이 조금 넘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문학적 열정은 높았지만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몇몇 작품들은 세월호 사건 등 우리 시대의 당면 문제를 다루고 있었으나
적절하지 못한 은유와 생경한 표현으로 독자의 공감을 얻기가 힘들었다.
또 응모 작품의 수준의 편차가 심해 한 편만을 선뜻 고르기가 어려운 작품도 있었다.
무엇보다 대상을 주의 깊게 보고 새롭게 표현하려고 하는 자세가 부족해 보였다.
시인이란 보이지 않은 것까지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진 자라고 한다.
그래서 좋은 시는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준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는
옥타비아 파스의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신인에게는 늘 창조적 상상력과 패기가 요구된다.
응모작 중에서 마지막까지 선자의 눈길을 붙잡은 작품은
'소금꽃'(황보림),
'고욤나무'(하상수),
'잉카 염전'(나미화) 등이었다.
이 세 분의 작품은 각각의 개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1%의 아쉬움 때문에 오랫동안 망설이게 했다.
'소금꽃'은 안정된 언어 구사력과 연륜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바다가 퉁퉁 불은 젖을 수유하고 있다”는
표현 등이 눈길을 끌었으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이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고욤나무'는 李목수의 신산한 삶을 고욤나무에 비유하여
“대팻날은 천성을 깎아 구불구불한 날들을 울컥울컥 토해냈다”고 표현할 만큼
생에 대한 깊은 시선은 느껴졌지만 전체적인 형상화 능력과 주제의식의 상투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잉카 염전'은 잉카의 유물 살리나스(Salinas)염전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참신한 시적 발상과 여성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소금을 ‘산이 뱉어놓은 통증’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여성적 삶의 운명적 고통이 느껴지고,
여성성의 상징인 바다와 자궁의 이미지가 ‘잉카 염전’으로 치환되면서
눈부신 ‘억겁의 생채기’로 빛나는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다만 화자의 시점이 흔들리고 대상과의 거리감이 불안정한 점 등이 눈에 띄었으나
오랜 고민 끝에 안정된 언어 구사나 주제의식보다 활달한 상상력과 참신성을
더 높이 평가하여 '잉카 염전'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이 부족한 점들을 충분히 극복하리라고 믿는다.
당선자는 부단히 정진하여 한국문학의 중추가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경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