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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7일 금요일[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4,1-5.11
복 음 : 마르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의 치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죄의 용서를 말씀하신 까닭은
그를 죄의 멍에에서 풀어주는 것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병이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요한 9,2 참조)
몸이 마비되어 이전에 누리던 자유를 빼앗긴 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자신의 병고를 조금은 동정해 주는 듯하면서도 죄인으로 낙인찍고
수군덕거리는 주변의 시선은 무시하려고 해도 점점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혐오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자신을 단죄한 이웃과
세상을 향한 미움과 분노도 심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들것에 싣고 와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
예수님 앞에 이르게 한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그 말씀과 행위로 당신께서는 신성모독자로 낙인찍히시면서도 그를 해방시키시어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네 사람은 중풍 병자를 구세주께 데려다주었고, 그는 몸과 마음을 회복 하였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다시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가족과 동료들,
새로 만나게 된 감사한 세상에 대한 구원의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추억과 은총을 빼앗기지 말고 삽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여행자가 마을 입구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묻습니다.
“이 마을 사정은 어떠합니까? 이곳 주민들은 어떤가요?”
노인은 “그대가 최근에 갔던 곳의 사정은 어떠했소?
그곳 주민은 어떠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여행자는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오.”
다음날, 다른 여행자가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노인은 마찬가지로
“그대가 최근에 갔던 곳의 사정은 어떠했소? 그곳 주민은 어떠했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여행자는 인상을 쓰면서,
“마을 전체가 끔찍했습니다.
하나같이 형편없는 사람이었고, 저한테 아주 못되게 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오.”
자기가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라집니다.
즉, 긍정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긍정적인 모습이 보이고,
부정적 마음으로 바라보면 부정적인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나’의 문제인데, 우리는 늘 ‘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향해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6)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율법 학자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놀라운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는 죄의 용서와 질병의 치유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시선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면서,
중풍 병자의 병을 치유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일이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감춰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일이 전혀 드러날 수 없는 법이지요.
오늘 복음의 놀라운 치유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율법 학자가 아닌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덕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간직하고 있나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
(탈출 37,4; 이사 43,25;44,22).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 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이는 ‘죄를 용서받은’ 우리들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죄를 용서 받고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당신의 자녀라는 표시로 영광의 그 상처로 지니고 다닙니다.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도 그 상처를 축복의 표시로 지니고 다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요, 구원의 표지요, 당신 자녀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 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렇습니다.
치유 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없앨 필요도, 매여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니듯, ‘상처’도 기꺼이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하느님의 집으로 데려가고 가야 할 일입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를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의 보혈로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믿음은 실행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는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병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5.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믿음은 실행하는 가운데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만납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수고와 땀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심판관 노릇을 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의 기쁨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을, 인생 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 병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한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 중앙에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라는 글귀를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제가 기도에 너무 소홀했다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사람의 아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어느 집에서 가르치시는 동안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2절)
그때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와서
그분 앞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군중 때문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젖어있으면, 우리가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세상의 잡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즉 말씀을 향하여 가야 한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다.
하느님 외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7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 주셨으니,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말씀이심이 분명하다.
그분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분이시다.
율법 학자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그들 신앙의 본질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발언이었다.
이러한 죄는 레위 24,16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죄에 해당하였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은 분개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도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9-11절) 하시자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요를 가지고 걸어 나갔다.
이 중풍 병자는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기보다
친구들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이웃의 도움을 통하여 갖게 된 예도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지붕을 벗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아픈 동료를 향한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이 간단한 표현 안에 한 가련한 인생의 길고 고통스럽고 슬픈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깊어질 대로 깊어졌습니다.
오랜 병고의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힘으로 걷기는커녕 몸도 일으키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다 보니 매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저도 몇 년 전 심각한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증세가 겹쳐 죽을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삶의 질이 그야말로 심각히 떨어지더군요.
평소 식은 죽 먹기던 샤워하는 일, 옷 입는 일, 걸어 다니는 일이 언제나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 양손을 들어 올리는 일조차 버거워서 정말이지 우울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서부터 화장실까지
불과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다녀오는데, 10분이 더 걸렸습니다.
그때 저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고 다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실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환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병세가 심각해지다 보니 돌아눕는 것조차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식사하는 일, 용변 보는 일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버겁고 참담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암담한 상태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그에게 하루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식입니다.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그분 옆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그 어떤 불치병 환자이든 상관없이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난다는 데...
그러나 그는 사지가 마비되어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그에게 벌어집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평소 그를 가엾이 여긴 네 사람이 그를 찾아옵니다.
네 사람은 즉석에서 그를 위한 간이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긴 막대기 두 개 사이에 천을 대고 묶었습니다.
들것 위에 환자를 눕힌 네 사람은 보조를 맞추어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환자와 함께 먼 길을 걸어온 네 사람이 현장에 도착해보니,
산 너머 산이라고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안팎은 그분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완장을 어깨에 차고 질서 유지를 하고 있던 사도들이 번호표를 나눠주었는데,
순번에 따르면 이박삼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안했습니다.
정문, 후문이 모두 봉쇄되었으니, 지붕 쪽을 공략하기로.
네 사람은 환자와 함께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다행히 유다인들 가옥의 지붕은 개폐식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공간의 지붕을 연 네 사람은
환자의 들것 네 귀퉁이에 긴 끈을 매달아 조심스럽게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해도해도 너무한 그들의 기상천외한 방법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향한 그들의 적극성과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네 사람은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환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 강한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네 의인이 지니고 있었던 아픈 동료 인간 존재를 향한
측은지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는 이웃을 어떻게 하면
치유시키고 구원으로 인도하고픈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반성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마르코 복음사가는 계속해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병 환자 치유에 이어 오늘은 중풍 병자 치유 이야기입니다.
나병 환자와 중풍 병자는 예수님의 치유기사의 단골 메뉴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가장 무섭고 힘든 병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이는 자기나 조상들의 죄 때문에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도 외면하는 공적인 죄인이었고,
하늘나라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천형(天刑)을 받는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치유가 곧 구원은 아니었습니다. 반쪽짜리 구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고 하십니다.
육신은 치유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 기쁠지는 몰라도
그는 여전히 천형을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심으로써
이제는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늘나라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배려요, 안배입니까?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병이 나아 걸어가라" 하면 이해하겠는데
"죄를 용서받았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할 수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의 목표는 단순히 육신의 병 치유가 아닙니다.
그분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쓰자"(히브 4,11)고 독려합니다.
"하느님의 안식처에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유효한데도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자"(히브4,1)고 강조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모두 들었는데, 그걸 믿고 확신하는 사람은 안식처로 들어가게 되고(히브 4,2-3참조),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은 그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느님 친히 맹세하셨다고 전해줍니다(히브 4,3. 5 참조).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 하시나요?
아직도 자신이 없으신가요? 왜요? 여러분이 지은 죄와 허물 때문입니까?
여러분이 더 많이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성질이 더러워서 혹은 성당에 잘 못 나가서 그렇습니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이 모든 죄와 허물과 악습을 덮지 못할 것으로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상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는 우리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늘나라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안식처에 가 닿습니다. 그래서 모든 과정이 소중합니다.
오르막길이건 내리막길이건 꽃길이건 가시밭길이건 진흙탕이건
이 과정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목임을 믿고 견딘다면,
모든 과정은 우리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지탱해 줄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히브 4,3)
여러분도 그러하시길 축원합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러 올 때 제 발로 걸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병이 워낙 사람의 일부분이나 전체를 마비시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니까요.
그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려는 벗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왔고,
예수님이 계시던 집에 이르러서는 지붕까지 올려졌다가
밑으로 달아서 내려지는 조마조마한 순간을 겪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 삶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해도 부지불식간에 벗들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난관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위험천만하게 들어 올려졌다가 달아 내려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모두의 노력을 가상히 보신 예수님 덕분에 치유받고 용서받습니다.
이제는 그동안 자기의 병을 상징했던 들것을 직접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나를 주님 앞으로 데려와 치유와 죄 사함의 은총을 받도록 도와준 벗님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당신의 자비로
하해와도 같은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하늘나라로 초대해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벗님들, 고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용서하려는 노력이 은총을 받는 지름길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보여주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를 치유한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나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항상 그렇게 한 일을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이익이 주어지지 않으면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일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하기 위해 매일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용서의 힘을 주심을 넘어서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도 주십니다.
용서는 마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고 일만 탈렌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일만 탈렌트가 생기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수백만 원을 탕감해 주고 수조 원을 버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오랜 자신과의 싸움을 전제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성령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성령의 힘으로 용서를 넘어서는 큰일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치고 이 용서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성령의 힘으로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존 프랜시스(John Francis)는 1971년 샌프란시스코만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 사고를 목격한 후,
환경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인간의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는 모터가 달린 교통수단 사용을 중단하고, 걷기를 통해 환경 보호를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갈등과 오해를 샀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싸우다가 결국 침묵하기로 합니다.
침묵은 용서를 위한 기초작업입니다. 그 침묵을 그는 무려 17년간을 했습니다.
이러한 침묵의 기간 동안 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를 깊이 숙고했습니다.
인간관계도 환경의 일종인데,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
또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침묵하면서 전 미국을 횡단하며 환경학 박사학위까지 땄습니다.
그리고 UN에서 일하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이제 모두를 용서하고 말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존 프랜시스의 이러한 경험은 용서가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치유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에서
이러한 내면의 여정과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환경 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며,
전 세계에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대목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요하고 짧은 기도에 용서라는 작은 주제가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우리가 평생 해나가야 할 것이고
그 용서를 통해 우리의 양식인 성령께서 활동하게 하심을 알고는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용서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먼저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행동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지 못할 일이 없는데,
성령을 얻는 방법에서 용서만큼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