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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8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일치 주간)
제1독서 : 히브 4,12-16
복 음 : 마르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일치 주간의 첫째 날 우연히도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의 소명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레위를 기꺼이 당신의 제자로 뽑으셨고,
이어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로 낙인찍히셔야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의 문턱은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신학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저는
막상 신학교 지원을 앞두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복음과 같았습니다.
복음이 봉독 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하는
말씀을 들을 순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체를 어떻게 하였는지, 미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있다가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일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마르코 복음 청년 성서 연수’에 참여하여
오늘 복음을 다시 만났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그럭저럭 넉넉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레위의 마음도 제 마음도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앞으로 불러서 숙제로 제출했던 저의 글을
직접 읽으라고 하셔서, 또박또박 그리고 큰 소리를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뒤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잘 썼다고 친구들 앞에서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읽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저 다음 다른 친구를 불러서 그 친구에게도 직접 쓴 글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글을 써서 단 한 번도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저였습니다.
그에 반해 제 다음에 발표했던 친구는 계속해서 상을 받았습니다.
이 친구는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글 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벌써 40년도 훨씬 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글을 잘 써서 상도 받고 칭찬도 받았던 그 친구는 뛰어난 작가로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글을 쓰지 않고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부가 된 후 20년 넘게 꾸준히 글을 쓰고 있고, 책도 여러 권 출판했습니다.
만약 선생님께 지적받은 것을 계속 기억해서 ‘나는 글재주가 없어.’라면서
글 쓰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재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재능보다 더 필요한 것은 꾸준함이 아닐까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로마제국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동포인 유다인들에게 매국노, 부도덕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가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면, 우리는 마태오 사도를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격 운운합니다.
때로는 성당에 나올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자격이 주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만 갖는다면,
지금과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전 인격을 동반한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 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 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에페 4,24)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차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요,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입니까?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부르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제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나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 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 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으며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단지 거기에 함께한 사람들끼리의 친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코 죄인들과는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뜻하는 식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식사 하셨고,
이 행위 자체가 그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신 행위였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을 차지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받는 겸손한 죄인과,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믿으며
자신이 실천한 외적인 의로운 행위로 상급이 마땅하다고 믿는 교만한 죄인”이 존재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오늘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모든 것을 보장해 주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의 인생 도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12,1)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대로 행하였고
오늘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충만한 자비를 주시고자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주님품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완고함이 문제 아닐까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종교가 다른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종교는 ‘진리’라는 바다로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이 진리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오만은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과신하거나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태도입니다.
편견은 충분한 이해 없이 내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입니다.
인류는 ‘오만과 편견’으로 소중한 이웃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거침없이 행하였습니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태입니다.
유럽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힘없는 우리의 이웃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있습니다.
아리안 인종 우월주의와 히틀러의 독재적 태도는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았습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을 열등하거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었습니다.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여성 억압과 성차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고 교육과 일자리에서 배제하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은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예전에 쓰던 모델은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모델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한 후에 하와를 창조하였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지만, 하와는 아담의 뼈로 만드셨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교리를 절대화하고 개인의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이단이나 마법을 행한다는 혐의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종교적 권력이 지나치게 오만해지면서 발생했던 비극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신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무슬림, 유대인, 심지어 동방 정교회 신자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의 종교적 갈등과 상호 불신이 생겼습니다.
종교적 오만과 편견이 평화를 해치고 많은 희생을 초래하였습니다.
종교 개혁과 분열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 그리고 개혁자들의 강경한 태도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상호 배척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류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나갑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 그리고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세리와 레위입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움은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표징과 권위는 마귀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만과 편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놀라운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 없이 풍족하게 살았던 부자는 죽어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껏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를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으로,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사가로 추정되는 세리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파격적이고 경이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72 제자단의 하나로 뽑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핵심 제자단이라고 할 수 있는 12사도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둘러서 있던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동시에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단은 희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라는 신분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직무상 벌어들이는 수입은 짭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로마 앞잡이, 수전노, 인간 말종...
이런 레위를 핵심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으시는
예수님의 처신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 같은 죄 많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신 예수님의 크신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성대한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동료 세리들과는 송별회를 겸한 잔치였습니다.
자연스레 그 잔치 자리에는 당대 뒷골목을 주름잡던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 앉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포도주 잔을 부딪치며 건배도 하시고, 맛나게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스캔들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가슴에는 성경과 율법서를 간직하고, 얼굴은 짐짓 거룩한 표정을 짓고,
늘 가방끈 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리나 죄인들과 태연하게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화가 단단히 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귀 밝기가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세상 구려 터진 생각과 마음들을 즉시 파악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귀가 번쩍 뜨이는 은총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당대 잘 나가는 고관대작들이나 주류 세력들이 아니라
어딜 가나 인간 대접 못 받던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죄에 갇혀 있지 않고 은총에로 나아가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 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생각게 합니다.
나는 진짜 하느님을 믿는가?
믿는다면 하느님을 어떤 하느님으로 믿는가?
왜 이런 생각을 또는 성찰을 하게 됐는가 하면
오늘 히브리서가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존재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겠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보다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존재하셔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믿는다고 해도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적절하게 드신 비유가 있습니다.
종들에게 각각 한 미나를 주고 떠난 주인이 다시 돌아와 셈을 합니다.
다른 종들은 그것을 열심히 활용해 주인이 돌아왔을 때 불려 되돌려드리는데
마지막 한 종은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드리고 왜 그랬느냐고 추궁을 당하자
주인이 주지도 않고 빼앗아 가는 냉혹한 분이라고 믿기에 그랬다고 답합니다.
결국 그 종은 믿음대로 냉혹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종은 은총의 어좌로 나간 것이 아니라
냉혹한 심판관의 어좌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 죄를 짓곤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만듭니다.
하느님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하느님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미성숙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죄에 갇힙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지은 다음 한 짓이고 그 후예인 우리가 이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성왕인 이유는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많이 죄지었지만 자기 죄에 갇히지 않고
그 죄를 가지고 늘 자비하신 하느님께 나아갔기 때문인데,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시편 ‘Miserere’가 바로 주님께 나아가며 바친 시편입니다.
그는 이 시편에서 “하느님 자비하시니”를 제일 먼저 입에 올리고,
자기 죄를 감추는 대신 오히려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아가
히솝의 채로 깨끗이 씻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합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씻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가 부르심을 받는 얘기도 이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하며 레위를 단죄하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를 제자로까지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을 제대로 받는 우리는
하느님 자비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믿읍시다.
그래서 자기 죄에 갇히지 말고 하느님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