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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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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자유게시판 스크랩 나무아미타불 -500년간 문수동자상이 간직해온 비밀
날마다 좋은날^^ 추천 0 조회 299 10.01.12 16:1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상원사,그곳엔 500년전부터 내려오는 불상 하나가 있다.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천진한 얼굴
의 어린 동자상, 그것은 국내 유일의 문수동자상이다. 그런데 그 동자상의 뱃 속에서 이상한
유물이 한 점 발견됐다.피고름이 묻은 비단 속적삼-500년간 문수동자상이 간직해온 비밀,
피묻은 적삼의 사연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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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오대산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상원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24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절이죠.
그리고 625 전쟁 당시,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고 불태우려 하자 한암스님이라는 분이
법당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절을 지켰다는 그런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절에서 지난 84년 특이한 유물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그것도 한 동자상
의 뱃속에서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속옷 대신 입었던 속적삼인데요,
목깃 부분은 떨어져 나갔고 군데군데 이상한 얼룩까지 남아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옷을 상원사 불상에 넣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또 이 얼룩은 무엇일까요? 좀
이나 곰팡이가 핀 걸까요? 이 적삼은 발견된 이후 수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속적삼의 비밀, 오늘 그 의문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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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적삼의 얼룩은 피고름이다.

서른두개의 산봉우리와 서른한개의 계곡을 품고 있는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그 정상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상원사가 있다. 상원사는 신라시대 705년, 진여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됐다.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주존불로 모시는 오래된 절이다. 만가지 다른 형상으로
현세에 나타난다는 문수보살 - 특히 상원사에는 어린 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문수동자상이 있다.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소년의 모습이 완연합니다. 동자상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기법은 15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양식이다.

그런데 지난 84년,문수동자상을 다시 도금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복장유물이 발견됐다. 복장
유물이란 불상의 내부 빈 공간에 넣는 각종 유물들을 말한다. 사리,불경과 불서,오색실이나
오곡,의복, 다라니와 만다라,그리고 불상을 조성하면서 기원한 내용인 발원문이 복장된다.

문수동자상에서는 어떤 복장유물들이 발견됐을까? 상원사의 본사,월정사를 찾았다. 동자상
에서 나온 유물들은 그 곳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총 스물석점- 대부분은 다른 불상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일반적인 것들이다. 작은 유물들을 보관하는 원통과 수정구슬, 복장유물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사리 - 그리고 고려말에 간행된 목판본 화엄경을 비롯한 각종 불경과 불서
들이 십여권에 달한다.
 
특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유물은 두점의 의복이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이 저고리는 바깥에 입는 겉적삼이다. 저고리의 넓은 소매와 등면에 다라니경이
찍혀있다. 이 다라니경은 외부의 여러 가지 재난으로부터 지켜달라는 의미를 지닌다.또 하
나의 비단저고리,사람의 몸과 직접 닿는 속적삼이다.그런데 이 옷에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속적삼 전체에 좀먹은 자국이 수없이 남아있다. 사람의 분비물이 남았을 때 좀은 더욱 심해
진다. 특히 찌든 때가 남았던 쉬운 목부분은 아예 떨어져 나갔다. 이것은 누군가 오랫동안
입었다는 증거다. 더욱 이상한 것은 옷에 남아있는 얼룩이다. 속적삼 목깃 부분에 검은 반점
들이 보인다. 여러개의 반점들이 뭉쳐져 있는 형태의 얼룩, 그것은 옆구리와 목 부분에 집중
적으로 남아있고 저고리의 소매끝 부분에도 똑같은 형태의 얼룩이 보인다. 이것은 무엇일
까?
 
얼룩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부산대 의류학과 권영숙교수와 적삼을 자세히 살펴봤다.
권교수는 각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복식유물의 권위자다.고분이나 생활유적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복식유물들을 보존처리해온 권교수,다른 복식유물에서도 이런 얼룩이 발견된다고
한다.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얼룩의 정체는 혈흔이다. 7년전,속적삼이 복장유물로 발견됐을 당시
의 상태를 보자. 이 얼룩이 혈흔이라면 이것은 속적삼이 몸에 있는 어떤 상처에 반복적으로
닿아 생긴 흔적일 것이다. 발견당시에는 검붉은 반점같은 혈흔이 현재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혈흔의 작은 단위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중심색에 흰색을 띄는 다른
성질의 얼룩이 섞여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권영숙교수 인터뷰 / 피의 경우 단일한 색깔로 되는데 피고름이라 그런지 희끗희끗한
부분 사이에 붉은 기운이 있었거든요.피고름 부분과 피부분의 성분이 다르기 때문에 저는
피고름이 맞나보다 생각했었거든요,그냥 혈흔같으면 선명하게 같은 색깔로 될텐데.이것은
희끗희끗한 부분 안에 얼룩이 있었기 때문에 피와 고름이 엉겨있던 형상이 아닌가...
불상에 복장되기 전 누군가 이미 오랫동안 입었던 옷, 그 속적삼의 검은 얼룩들은 몸의
상처에서 반복되어 묻은 피고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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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삼에 묻어있던 이 얼룩들이 피고름이었군요.그러니까 이 적삼의 목깃,소매끝,그리고 옆
구리 부분에는 검은 반점같은 이상한 얼룩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피고름이라
는 겁니다.피고름이 묻은 속적삼을 복장유물로 넣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적삼과
함께 발견된 다른 유물들은 모두 불교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가령 사리는 불상에 부처가
살아있다는 의미에서 넣는 것이고, 다라니경 같은 경우는 번개나 폭풍, 화재 같은 것으로
부터 불상을 보호해 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유독 이 피고름 묻은 속적삼만 불교
와 전혀 상관없는, 너무나도 세속적인 유물입니다. 누군가 오랫동안 입었던 옷, 그것도 피
고름이 묻은 속적삼- 과연 누구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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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적삼은 누구의 옷인가?

품은 66cm.적삼의 주인공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옷의 크기를 쟀다.특히 목에서 소매 끝까
지의 길이인 화장은 옷의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단서다. 화장은
93센티미터였다.
권교수 대게 남자가 손이 길잖아요.화장길이가 여자평균이 70정도 됩니다.근데 이
옷은 93이잖아요.그러니까 화장에서 우선 팔이 기니까 속옷인데도. 남자옷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생각이 됩니다.
옷의 주인공은 남자,그럼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을까? 조선 전기 사대부의 속적삼으로 밝혀
진 백초회장 저고리와 비교해봤다.같은 시기,같은 용도의 옷과 직물 상태를 비교하면 신분
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직물 상태를 보다 자세히 보기 위해 미세촬영을 했다. 백초회
장저고리와 상원사 속적삼을 똑같은 정도로 확대해 촬영한 화면이다. 날실과 씨실 모두 상
원사 속적삼이 5배 정도 가늘며,천이 얼마나 섬세하게 짜여졌는지를 알 수 있는 밀도도 상
원사의 것이 두배 정도 높다.
권영숙교수 명주가 대표적인데... 섬세함의 정도가 얼마나 밀도가 치밀하고 가볍고
부드럽게 짜졌느냐에 따라 신분이 결정이 되기 때문에 일반인의 경우에 이렇게 고운 비단
은 못 입죠
상원사 속적삼은 사대부 신분으로서는 감히 입지 못하는 옷이다. 속적삼의 바느질 상태
또한 매우 섬세하다. 똑같은 방법으로 바느질을 해보기 위해 도안을 만들었다. 바늘땀의
길이가 1mm 밖에 되지 않는다. 몇십년 동안 전통의복을 다뤄온 권교수지만 상원사 속적
삼의 바느질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권영숙교수 정말 잘 하시는 궁중 바느질이 아니고서는 안나올 정도로 섬세한 바느질
입니다. 바느질이 정교하지 않으면 외형이 안나오기 때문에 정교한 점, 다른 어떤 저고리
보다도 정교하다는 점, 제가 보기엔 궁중의 옷이 아닌가
옷감의 상태와 바느질 솜씨로 볼 때,상원사에서 발견된 속적삼의 주인공은 왕실의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선조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그의 속적삼이 해인사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게 광해군 것이란 말이죠.../ 바느질이나 정교함이 거의 같았다

광해군의 옷과 바느질의 정교함이 같다면 상원사 속적삼의 주인공도 왕일 가능성이 높다.
속적삼과 함께 문수동자상에 복장됐던 발원문, 그곳에서 속적삼 주인공에 대한 단서를 찾
아봤다.발원문은 고급스러운 푸른 비단에 붉은 글씨로 쓰여졌다.그 첫머리에 발원문을 작
성한 이의 이름이 보인다. 정현조와 의숙공주, 그들은 누구일까?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 선
원록-그곳에서 두사람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의숙공주는 조선 7대왕 세조의 딸이며 정
현조는 의숙공주의 남편으로 세조의 사위다. 정현조와 의숙공주는 주상전하, 왕비전하,그
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불상을 조성한다고 발원문에 밝히고 있다. 발원문이 작
성된 해는 1466년,세조 12년이다.그해의 세조실록에서 상원사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봤다.
발원문과 함께 속적삼이 복장됐을 세조12년, 그해 세조가 상원사에 있었다.그렇다면 속적
삼의 주인공은 세조일까?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세조의 어첩을 살펴봤다.상원
사 중창이 결정됐던 세조10년, 신미대사와 세조가 주고받은 글이다. 그 첫장에는 불교를
믿는 조선국왕 이유라는 세조의 이름이 적혀있다.그리고 그 아래 세조의 친필 사인과 직인
이 보인다.

"발원문이 한문으로 나오고.. 필사본으로서의 한글 문서와"
신미대사는 상원사를 중창하는 이유가 세조의 만수무강을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옷을 줬다는 얘기 아닌가... 출어의약"
그리고 신미는 뒤이어 세조가 상원사에 어의 몇점을 하사했다고 한다.1464년 신미가 세조
를 위해 상원사를 중창하기로 결정했을 때,세조는 어첩과 함께 자신의 옷을 상원사에 보냈
던 것이다.
최복규교수 거기 보면 신미의 내용 속에 세조가 어의를 내리시어 하는게 나오 거든요.
그런 것은 분명히 다른 것도 아니고 세조가 친히 입었던 옷을 내렸다하는 것이 분명하거든
요.그러고 1466년 세조 12년에 상원사가 발원이 되어 만들어져요. 바로 그 당시 문수 동자
상 복장 유물로 집어 넣은거거든요. 그런걸로 봐서는 틀림없는 세조의 옷이다라고 밝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피고름으로 얼룩진 비단 속적삼-그것은 조선 7대왕 세조의 어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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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세조의 어의였군요.,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신라시대 때 창건됐던 상원사
를 당시 주지이던 신미대사가 세조의 만수무강을 위해 상원사를 중창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때가 1464년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세조가 중창에 보탬이 되고자 시주를 하며, 자신의
글과 신미대사의 글이 함께 담긴 어첩을 상원사에 보냅니다. 그 때 자신의 피고름 묻은 속
적삼을 함께 보낸것이죠.그리고 2년후,마침내 상원사 중창이 끝났습니다.세조가 상원사를
방문한 것도 그 때죠.새로 조성된 문수동자상이 법당에 모셔지면서 각종 유물들이 그 속에
복장됐는데,의숙공주와 정현조가 쓴 발원문과 함께 세조의 피묻은 적삼이 동자상에 들어
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피고름 얼룩이 남아있는 속적삼의 주인공이 세조란 것이 밝혀
졌습니다.그런데도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세조의 속적삼에 왜 피고름이
묻어 있냐는 겁니다.속적삼에 묻어있는 피고름의 위치를 기억해 보시죠.목과 손목,옆구리
부분이었습니다.그렇다면 세조는 그곳에 어떤 상처가 집중적으로 나있었고 반복적으로
계속 피고름이 흐르고 있었다는 뜻은 아닐까요? 도대체 어떤 병을 앓고 있었기에 세조의
몸에서 피고름이 났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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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왜 피묻은 적삼을 동자상에 넣었는가?

여기가 관대걸이 푯말입니다. 기념비랄까, 상원사로 오르는 길목에 작은 석조물 하나가
있다. 관대걸이- 세조가 상원사에 왔을 때 이곳에 의관을 걸어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상원사주지 입고있던 의관을 이곳에 걸어놓고 목욕을 했다해서 이곳을 관대걸이라고...
의관을 걸어났다해서 지금도 관대걸이라 그러고....
세조가 의관을 관대걸이에 벗어놓고 이 계곡에서 목욕을 했다는 것이다. 마침 그 곳에 한
사람이 들어가 목욕하기 좋은 장소가 있었다. 여기였을까? 세조는 목욕중 문수동자를 만
났다고 한다.

상원사주지 시중을 물리치고 혼자서 목욕을 했다 그러거든요. 그러는데 사미승이
지나가는데 등이나 밀어달라고.등을 밀고나니가 시원하더라는 거예요.세조가 사미승에게
임금님 등을 밀었다,등창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벌받을 수도 있고 민심도 안좋
을 수 있으니까 어디가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

전해지는 얘기대로 세조에게는 등창이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 CD롬으로 세조가 생전에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 검색해봤다.세조의 병환에 대해 언급된 기록은 마흔건 이상,하지
만 병명이나 증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세조 12년 10월에 세
조가 현호색을 가미한 칠기탕을 복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현호색이란 어떤 약재일까?
"현호색 이렇게 생겼습니다."

한약재로 쓰이는 것은 현호색 식물의 땅속 줄기 부분이다
약재상과장 심장에 통증을 느끼거나 기의 흐름이 원할하지 않을 때 쓰는 걸로 알고 있다.
칠기탕에 사용되는 약재는 인삼,계피,반하,그리고 감초와 생강이다.세조는 여기에 현호색
을 가미해 복용했다. 현호색을 칠기탕과 함께 먹는 것은 어떤 증세에 사용되는 처방일까?
동의대 한의학과 김훈 교수는 특이하게도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다.
김훈교수 칠기탕이라고 하는 것은 칠기라는 건 사람의 일곱가지 감정 상태..칠기탕은
감정적인 장애로 인체의 기가 뭉쳐질 때.그래서 세조는 많은 정신적 중압감이나 스트레스
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칠기병과 같이 화가 왕성한 병엔 창이 생긴다고 전한다. 창은 일종의
피부병이다. 실록에 세조가 피부병을 앓았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김훈교수는 세조가
자신의 병을 풍습병이라고 말한 기록에 주목했다. 풍습병이란 풍과 습에 의해 생긴 질병,
관절염, 두통, 요통, 피부병을 통칭하는 병명이다.

김훈교수 세조는 풍습병을 이야기할 때 온천욕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는데 조선시대
다양한 치료방법을 쓰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온천욕, 온천욕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이 사용하고 있던 방법. 세조가 온천욕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풍습병은 혹시 피부병을
의미하는 것인지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세조는 풍습병에 대해 말하기 한달전 온양 온천을 다녀온 바 있다.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조
가 세차례나 방문했다는 온양,이 곳에는 세조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이 신정비
도 세조가 발견했다는 찬 샘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다. 세조가 온양을 자주 찾은 이
유는 무엇일까?

문화원장 철분 성분이 많다. 알카리 성분이 많아 피부병, 관절염에 효험이 많다.
세조도 피부병 때문에 자주 온 것 같다.
세조의 속적삼에 남아있는 피고름 얼룩은 피부병 때문에 생긴 흔적으로 보인다.그런데 어
떤 피부병이었길래 피고름이 계속 흘렀던 것일까? 피부과 전문의와 함께 세조의 피부병
종류를 추정해봤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앓았을 법한 피부병만도 수십가지에 이른다. 함익
병 선생은 그 중 괴저성농피증이란 피부병을 지목했다.

함익병선생 저는 세조 임금이 이 병에 앓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연령대 4,50대에 많이
생기는 병입니다.보시다시피 피부에 큰 괴양이 많이 생기고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면서 완
전히 낫지도 않고 금방 죽지도 않고 대개 이 병은 내과적인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감염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자가면역질환이라는 병이 생기는건데 자가면역질환을 일
으키는데 가장 큰 질환중에 하나가 사회적 스트레스입니다.
세조의 병을 현대의학적으로 추정하면 괴저성농피증이라는 병일 수도 있다. 그 병은 정신
적인 압박과 사회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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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지독한 피부병을 없애고자 피고름 묻은 속적삼을 상원사에 보
냈던 것입니다.이것은 세조가 상원사에 내린 어첩입니다.여기에 보면 상원사를 중창할 때
세조가 하사한 물품들이 자세히 적혀있는데요, 한번 보실까요? 쌀 5백석,무명포와 정포가
각각 5백필,무명포라는 것은 면을 말하고 정포라는 것은 품질이 좋은 베를 말합니다.또 정
철이 만오천근, 정철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로 공사할 때 꼭 필요한 물품이죠.

그리고 사찰을 채색할 때 필요한 염료도 하사했습니다.정확한 수치가 기록되지 않은 채색
을 제외하고 나머지 쌀과 천과 철을 모두 면포의 가치로 계산하면 면포 만필에 해당하는
양입니다.면포 만필이라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데요, 여길 한번
보시죠,조선왕조실록 단종대 기록 중 하나입니다.단종이 세종의 딸,그러니까 자신의 고모
가 되겠군요, 정안옹주에게 거처할 집을 마련하라고 면포 600필을 하사합니다. 옹주라면 당대 최고의 신분이니까 집 또한 최고 수준이었을 겁니다.그런 집을 면포 600필이면 살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면포 만필이면 몇 채입니까? 당대 최고 수준의 저택을 열일곱
채나 살 수 있었습니다.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
던 나라였습니다.조선은 건국 이후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박탈하고, 전국의 사찰과 승려
수도 대폭 축소시켜 나갔습니다.심지어 유신들은 승려를 좀벌레보다 못하다고 취급하며
천민처럼 대우했죠.그런데 세조는 사찰 하나에 최고급 저택 열일곱 채를 살 수 있는 물품
을 시주한 것입니다.태조와 세종처럼 개인적으로 불교를 신봉하는 왕들도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이처럼 드러내놓고 불교를 후원한 왕은 없었습니다. 세조는 왜 불교를 이토록 후원
하게 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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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왜 호불국왕이 되었나?

강원도 강릉에 세조가 상원사에 하사한 땅이 있었다고 한다.강릉 신석동의 저수지 일대-
주민 =섬석천인데 예전에는 중어보라 그랬다. 중들이 세운 보다..
상원사 승려들이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었다는 중어보- 이곳이 상원사의 옛땅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그렇다면 세조가 당시 상원사에 하사한 땅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
이규대교수 기록에 의하면 세조가 산산저수지 일대를 상원사에 하사했다고 기록이
있고 이쪽 지방 유생들의 기록에 의하면 종자를 70석 종부를 이용할 만큼 큰 규모의 토지
를 상원사에서 관할했다고 기록이 돼있다. 그러니까 70석의 종자를 이용할 농토였다면 굉
장히 큰 규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석의 종자로 2천평의 농사를 지을수 있다고 한다. 종자 70석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라면 14만평에 달하는 땅이다.
동네주민 얘기 때 어떻게서 월정사 토지가 생겼냐 하니 고양이 밥으로 떼나줬다
이런 전설이죠.
고양이밥으로 떼줬다는 상원사의 땅-고양이와 상원사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상원사
법당앞- 오랜 세월이 지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마모된 한쌍의 동물 석상이 있다.이
것은 바로 고양이 석상이다.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양이 석상 -고양이가 상원사
법당 앞을 지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월정사주지스님 법당문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서 임금 옷을
뒤로 땡기더래요. 이 고양이 왜그래 하며 발로 차니 법당으로 쏙 들어가 탁자 밑에 쏙 들어
가거든요.그래 또 들어갈려고하면 또 나와서 밖으로 땡기고..또 탁자 밑에 들어가고 세 번
을 그랬다가 임금이 무사를 시켜 탁자 밑을 뒤져 보라하니 탁자 밑에 단종 계열의 무사가
세조가 참배를 하면 목을 치라고 칼을 쥐고 서 있더라는게요. 그래서 고양이 덕에 목숨을
구했다는 거예요.
세조는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잘 키워달라며 강릉 저수지 일대의 땅을 상원사에 하사했
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는 세조가 숭불정책을 펴게 된 배경이 들어있다.
최복규교수 자객이 나타났다는 건 실제 나타난 것은 희박한 것이고, 오히려 세조의
생각에 항상 주변에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어떤 사람이 있거나 적대시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았다는 것을 나타냈고...

세조는 피의 쿠테타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1453년, 세조는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했다. 역사는 이것을 계유정란이라 부른다.2년후,세조는 마침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 제7대왕으로 등극한다.그러나 피를 부른 왕위찬탈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456년, 세조는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 여섯명의
대신들을 참살했다.소위 사육신 사건이었다.즉위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왕위를 위협받았던
세조-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세자시절부터 불교를 믿었던 세조를 더욱 불교에 빠지게
하였다.

김상현교수 / 집권과정 자체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랬을 때 자기의 그 왕실의 권위라든지 자기의 왕권을 완성시키고 강화할려고 할 때는 오
히려 불교적인 그런 신앙과 이념에서 도움을 얻고자했던 그런 흔적이 보인다. 근데 석보상
절을 일찍이 지었다던지 이후에 월인석보를 편찬하는 등 이러한 노력들이 아마도 당시 자
기의 현안,정치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과 불교의 중흥이 연결돼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조는 월인석보 국역판을 손수 간행한 이후, 불교진흥정책의 일환으로 불경을 간행하고
한글로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세조 7년에는 아예 불경간행을 전담하는 기구를 만든다.
간경도감에서 간행되고 우리말로 해석된 불경만도 수백권에 달한다. 강력한 숭불정책을
내세운 세조 앞에서는 불교를 비난하는 어떠한 발언도 용서되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이
었던 서강이라는 사람은 술자리에서 불교를 비하해 처형까지 당했다

김상현교수 조선초기부터 많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하고 탄압하는데 앞장서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왕들 중에 행여나 불교를 일으킬까봐 크게 염려하고 했었는데,이상하
게도 세조실록을 보면 유학자들도 신하들이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가 거의 많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정치적으로 세조가 세력을 크게 잡고 있었던 거 같고 그리고 세조가 확실하
게 불교를 신앙함으로해서 신하들도 함부로 반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상원사에 보내졌던 세조의 어첩,세조는 왕실종친과 신하들에게 상원사 중창에 시주하라고
명했다. 어첩에는 자신들의 재물을 내놓으며 친필로 일일이 싸인을 남긴 종친과 신하들의
이름이 남아있다.종친이나 신하들 그 누구도 세조의 숭불정책에는 어떠한 반발도 하지 못
했다.세조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승려 우대 정책을 펼쳤다.충청남도 천안의
광덕사,이곳에 세조가 내린 교지가 소장돼 있다. "충청도 천안지 광덕사" 세조는 친필로 광
덕사 승려들의 잡역을 감해준다는 교지를 작성했다. 광덕사의 승려에게 뿐만 아니라 세조
는 전 승려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내렸다. "승려는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왕의 지시가 내려
오기 전까지는 구속하거나 심문할수 없다"는 법률까지 만든 것이다.세조는 왜 이토록 강력
한 숭불정책을 펼쳤던 것일까? 세조의 불교관에 큰 영향을 미쳤던 김수온의 글이다.

만민의 주인인 군주는 민생을 구제하니 출세의 차이는 있지만 중생을 구제한다는 점에서
왕과 부처가 동일하다고 말한다.부처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는 왕-
바로 그것이 불교의 대중화를 통해 세조가 얻고자 했던 점이다.

김상현교수 / 건국초기부터 유교사회를 표방해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반서민들 사이
에서는 불교가 온전해 있음을 설정해 볼 수 있음. 그런 상황에서 세조가 상원사를 찾아 온
과정에서 생기는 많은 설화들.예를 들면 문수동자가 세조의 등을 밀어줬다거나 법당에 숨
어든 자객을 고양이가 곤룡포를 당겨 막았다던가 하는 것이 아마도 군주인 세조가 부처님
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시사성이 는다고하면 여전히 불심이 남아있는 서민들에게는 특별
한 의미로 남지 않겠느냐.

불교를 대중화시켜 백성들에게 남아있는 민심을 확보할 때, 세조는 더 이상 정통성 없는
왕이 아니라 부처의 권위를 가지는 강력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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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세조는 스스로 대호불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불교를 매우 좋아하는 왕이라고 공언을 한
것이죠. 세조는 재위기간 14년 동안 그 이름에 걸맞는 호불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불교를
대중화시키기 위해 해인사의 대장경을 50부, 금강경, 법화경,능엄경 같은 불경은 100부씩
인쇄해 전국의 사찰에 소장시킵니다.심지어는 일본이나 유구에도 보냈습니다.세조는 사찰
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데요,상원사 뿐만 아니라 낙산사,유점사 등 8개의 사찰을 중
창하거나 창건했으며 정업원,복천사,원각사 등 십여개의 사찰에 많은 토지와 노비,그리고
각종 물품 등을 하사했습니다.흥천사와 용문사의 종도 세조가 만들어 주었죠.세조는 이러
한 불교의 대중화를 통해 어려운 유교보다는 여전히 불교와 가까운 백성들과 쉽게 만나려
고 했던 것입니다.특히 세조의 속적삼이 오늘날 상원사에서 발견돼서 그의 호불정책을 더
욱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앞서 보신대로,이 옷이 동자상에 복장될 때 세조는
상원사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의 상원사행에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실
록에 따르면 세조가 상원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5일이 걸렸는데 서울에서 상원사로 갈
때는 한달이나 걸렸다는 점입니다.세조는 서울을 출발해서 무엇을 했기에 이토록 많은 시
간이 걸렸을까요? 세조의 행차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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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가는길, 유람길 아니었다.

세조가 상원사에 도착한 것은 1466년 4월 17일,세조는 누구와 함께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왔
을까? 한달전 세조가 한양을 출발할 때의 기록이다. 왕세자, 내금위장 이윤손, 사장위장
정식이 세조와 동행했다. 그리고 정현조와 의숙공주등 왕실종친과 신숙주, 김수온,노사신
등이 그 뒤를 따랐다.하지만 왕이 도성밖을 행차할 때 주요인물들만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정조행차도에 따르면 말,의복,식사 등을 담당하는 시종들까지 약 천명 가까이 왕의 행차에
참여한다.

신병주교수 정부조직의 반이 이동한다는 의미를 지님,도성의 궁궐을 비우면서까지
왕의 대규모 행차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행차의 비중을 크게 둠, 세조의 행차는 당시 정부
조직의 캐비니쉬, 이동하는 모습을 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음
정부인사들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한 세조는 포천, 철원을 지나 단발령을 넘어 금강산으로
향하고 있었다.세조의 이번 행차는 강원도로 향한 순행이었다.
오상학 교수 세조는 조선시대 여타왕에 비해 굉장히 순행이 잦았던 왕이다.세조 6년에
북부지방과 세조 10년, 12년, 14년까지 4번에 걸쳐 순행, 이런 왕들의 순행은 조선시대에
흔치않다.

조선시대 왕 가운데 순행을 자주했다는 정조-하지만 그의 순행은 경기도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조의 순행은 그 범위가 상당히 넓다.세조 6년의 순행은 평양까지 다녀온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순행이었다. 세조 10년과 14년에는 충청도 일대를 순행했다. 남으
로는 진천,보은을 거쳐 청주를 지나 돌아왔다. 그리고 세조 12년에는 철원,김화를 지나 금
강산까지 다다랐다.동해를 끼고 돌아온 그 해 순행은 강원도를 둘러본 순행이었다.정조의
순행에 비해 세조의 순행은 그 범위가 상당히 넓다.

김문식교수 특이하게 보여지는 것은 상당히 먼거리까지 간 것입니다.대체로 왕이
궁을 떠나기 쉽지 않고 도성밖을 벗어나기 쉽지 않은데 비교적 조선후기 정조인 경우 비교
적 많이 다녔다지만 경기도 일대거든요. 다닌 지역이 지금 세조는 평안도,강원도, 한 때는
경상도까지 우리나라 전영역을 걸치는 것이다. 도성을 오랫동안 비워놓더라도 자신의 정
치는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안정기에 들어갔다고 과시하는 효과도 있을테고. 현지 방문
하는 곳에서도 내각 대부분의 사람이 옮겨왔을 때 보이는 왕의 위엄을 보이는걸 노린게
아닐까 생각한다.

역대 어느 왕보다 먼 지역까지 그것도 자주 순행을 떠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조12년 상
원사로 가던 세조의 일정을 쫓아가 보자.서울을 떠난 지 닷새만에 금강산에 도착한 세조-
도착 다음날 세조는 왕세자에게 매사냥을 시켰다. 사냥은 다른 어떤 순행에서도 빠지지
않았던 중요한 일정이다.

김문식교수 사냥이란 것은 일단 오락으로서의 기능..자기 취미생활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국가에서 대군이 동원된 이동중 사냥이란 것은 군사훈련의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세조는 각 지방을 순행할 때마다 관찰사와 수령을 만나 민원을 점검하고 농사작황을 살폈
다. 그것은 세조가 평소 농사의 어려움과 민생의 고통을 살피는 것이 순행이라고 말했던
바와 일치하는 일정이었다. 세조는 매 순행 때마다 각 지역에서 노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며 양로잔치를 열었다.이번 행차에서도 경기도 강원도의 70세 이상 노인에게 극진
한 대접을 했고 8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많은 선물까지 하사했다.

최정용교수 대민시책과 연관이 된다.직접 지방을 시찰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의 생활
상을 확인하고 살피고 직접 여론 일반 여론을 수렴하여 자신이 직접 해결해주는 현장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한 것이 순행이다.

순행을 통한 대민시책은 금강산을 떠나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중에도 계속됐다. 강릉에 도
착한 세조는 농민 중 농가를 잘 부르는 자들을 모아 노래자랑을 하게 했다. 그중 노래를
제일 잘한 동구리라는 노비에게 가마를 태우고 의복을 하사했다. 세조는 노비조차 순행의
일정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김문식교수 위민정치 중 하나,가령 천인이었던 사람이 노래를 잘해서 그 자리에서
양인을 만들어준다든가 무예가 출중한 군사를 그 자리에서 특채를 한다거나 이런 형식은
왕의 왕성이 아랫사람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보여주는 이벤트
세조가 상원사에 도착한 것은 꼬박 한달이 지나서였다. 상원사에 도착한 날,세조는 과거
시험을 열었다.당시 과거시험이 치뤄졌다고 전해지는 만과봉-과거를 보러 온 만명의 선비
들이 도포자락에 흙을 한 줌씩 넣어와 만과봉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복규교수 과거에 응시해 보지도 못하고 거기에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사나 여러
가지 벼슬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서 여기서 과거를 보겠다.알성시죠.그래서
주변에 있는 모든 선비들한테 통보를 했어요.일설에 의하면 만명이 시험을 보러왔다 그러
는데 뭐 만명까지는 되지 않죠.옛날에 만명이라는 것은 많다라는 의미거든요 아마 굉장히
많은 선비들이 와서 시험을 봤던 것 같습니다.

이번 과거시험에서는 문과에서 열여덟명,무과에서 서른 일곱명이 선발됐다.
신병주교수 왕의 행차가 결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이끌어 냈다,
그런 행사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조는 쿠테타로 집권을 한다. 그래서
자기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이라든가 반발세력에 대한 어떤 무마를 위해서 대규모 왕의 행
차를 기획하고 또 그 행차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자신의 정권획득이라든가 왕으로서 정당
성을 널리 홍보하고 그런 정치적 계산-까지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세조12년 상원사행-그것은 세조 자신의 안정된 정치기반을 온 백성들에게 알리고, 대민
시책을 통해 백성들의 신뢰와 민심을 얻으려는 세조의 고도로 계산된 정치 전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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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자신의 조카 단종을 폐하고 두 동생과 김종서,황보인,사육신들을 참살한 비도덕적인
왕이었습니다. 그의 불법적이고 많은 이들의 피를 부른 즉위 과정은 500년이 지난 오늘날
에도 분명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하지만 14년이라는 재위기간동안 그가 이룬 성과는 다시
평가돼야 할 것 같습니다. 세조는 어려운 범어나 한문으로 된 불서들을 한글로 손수 번역
하고,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가장 먼 지방까지 자주 순행을 다녀온 왕이었습니다.그것은
불교와 순행을 통해 백성들과 가까워지기 위한 세조의 위민정책이었습니다.이 피묻은 적
삼에는 세조의 인간적인 고민과 스트레스가 담겨있습니다. 정통성 없는 왕으로서 느꼈던
정신적인 억압과 그것을 만회하려는 과중한 업무가 세조가 병을 앓게된 원인이었습니다.
500년이 지나 발견된 이 한점의 적삼은 세조를 비도덕적인 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왕으로 다시 보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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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사 피묻은 적삼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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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창건: 신라 성덕왕 4년(705)

상원사의 문수동자상: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질병(종기)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문수보살상에서 나온 속적삼:
세조가 종기났을때 입었던 옷. 세조는 불심이 깊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숭유억불을 기치로 내세웠던 조선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상원사의 고양이
법당에 숨은 자객(단종 계열일 것임)의 암살을 막아줌.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 같다.

알다시피,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한 왕이다.
쿠데타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재위기간중 적잖이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불교의 힘을 빌려 위엄을 살리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계유정난(1453):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조정대신들을 죽이고 실권 장악
단종양위(1455):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앉음
사육신 사건(1456): 사육신이 중심이 되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발간되어 처형된 사건
 
세조,단종에 대해선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에는 각각 성삼문, 신숙주가 있었는데 이들은 원래 절친한 사이다.
하지만 단종폐위를 두고 각자 입장이 달라졌다. 성삼문은 대의명분을 위해 단종을 택하게 되고,
신숙주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찾아 세조를 택하게 된다. 성삼문은 죽고 신숙주는 살아남는다.
혹자는 이런 신숙주를 두고 숙주나물에 비유한다. 숙주나물은 쉬 상하는 나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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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7대왕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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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생애

 ▶ 세조의 휘(諱)는 유(啼), 자는 수지(粹之), 시호는 혜장(惠莊)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의 둘째아들로, 비(妃)는 윤번(尹 )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무예에 능하고 병서(兵書)에 밝았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진평대군(晉平大君)으로 불렀고, 1433년(세종 15년) 함평대군(咸平大君)으로 고쳤다가, 함양대군(咸陽大君) 또는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다시 고쳤으며, 1445년(세종 27년)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바꾸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 안에 불당(佛堂)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 그러나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만에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단종 1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즉 측근 심복인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 30여 인의 무인들을 이끌고 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하여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찬성 이양(李穰) 등을 궁궐 문 앞에서 죽이고 좌의정 정분 등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하였다. 일거에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병조판서(吏曹兵曹判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하면서 병마권을 장악하고, 좌의정에 정인지(鄭麟趾)·우의정에 한확(韓確)을 임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왕위에 오를 기반을 마련한 수양대군은 1455년(단종 3년) 윤6월 금성대군(錦城大君) 이 반란을 꾀한 것을 구실로, 단종을 강압하여 선위(禪位)하게 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 이와 같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오르는 등 세조의 집권 과정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14년의 재위 기간 동안 군제를 정비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토지제도 및 관제를 개혁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만년에는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번뇌로 불도에 귀의하여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고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여러 불경을 간행하였다. 세조는 병세가 악화되자 1468년 9월 7일 왕세자였던 예종(睿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이튿날 수강궁(壽康宮)에서 보령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광릉(光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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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와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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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제 7대 세조(수양대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로서 1425년 문종이 승하하고 왕위가 어린 조카 단종에게 돌아가자 측근인 한명회 · 권남 등의 권유에 의하여 1455년 마침내 김종서 · 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을 몰아 낸 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단종의 복위운동을 했다하여 성삼문 등 사육신을 무참하게 죽이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됐던 단종 마저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비인간적인 행동은 세인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왕권강화와 학문 장려 등의 정책을 펴 나갔지만 어린 조카와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으로 인하여 항상 불안감과 죄의식 속에서 생활하였다.
 
  어느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이며 문종의 아내되는 형수가 나타나서 세조를 호되게 꾸짖다가 "에이 못된 것! 어린 조카를 죽이다니! 조카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났더냐? 에이! 더러워라"하면서 세조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그 후 세조는 꿈 속에서 침에 맞은 곳에 종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온 몸에 퍼져서 결국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고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보고 각지의 온천과 약수를 찾아 다녀 보았으나 효과를 볼 수 없었던 차에 마침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면서 병치료와 속죄를 하게 되었다.
 
 세조는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기도하는 세조는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기 위하여 매일 계곡의 물에서 목욕을 하였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항시 시종을 멀리 하고 목욕을 하다보니 등을 씻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때마침 세조의 곁을 한 동자승이 지나가고 있었다. 세조는 그 동자를 불러 자신의 가려운 등을 씻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자승에게 "그대는 어딜가든지 왕의 몸을 씻어 주었노라고 말하지 말라."하니 동자가 다시 말하기를 "대왕은 어딜 가시던지 문수동자를 친견하였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한 뒤 보이지 않았다. 목욕을 마친 세조가 자기 몸을 살펴 본 즉 종기의 딱지가 씻은 듯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왕은 크게 기뻐하여 문수동자상을 조각토록 명하였지만 자신이 보았던 그 모습의 문수동자는 아니었다. 수심에 잠긴 세조의 앞에 한 사미승이 나타나 내가 조각해 보겠다고 하여 3일만에 자신이 보았던 동자와 똑같은 상을 조각하고는 상원사를 떠나 버렸다.
 
그러한 기적의 일이 있은 이듬해 세조는 다시 그 기적의 성지인 상원사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세조는 불전에 참배코자 법당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별안간 난데 없는 한 마리의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어 당겼다. 여러번 고양이를 쫓아도 계속 옷자락을 당기므로 순간 세조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병사를 시켜 법당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였다. 그러자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한 자객이 숨어 있었다. 아! 세조는 이 상원사에서 또 다시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리하여 오대산 상원사를 중심으로 한 사방 40리의 임야와 강릉 일대의 만석전답을 하사하고 묘전(猫田) 및 고양이 석상(石像)을 조성하였다. 또한 세조는 신미(信眉)대사와 상의하여 상원사를 크게 중창하였으며 안동에 가 있던 상원사의 대종을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 때가 서기 1466년(세조 12년)으로 동서로 나눈 대찰(大刹 : 큰 사찰) 형식의 낙성식에는 왕이 직접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멀고 먼 상원사에 행차하니 골짜기마다 스님들이 줄을 잇고 염불 소리가 메아리 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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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동자상에서 나온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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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의 뱃속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와 1984년 10월 이 유물을 일괄하여 보물로 지정하였다.
 
유물 내용은
 
의숙공주발원문(懿淑公主發願文) 장 2)
문수상 등 중수발원문(重修發願文) 1장 3)

백지묵서제진언(白紙墨書諸眞言)   1축 4)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권 28) 1권 1첩 5)
오대진언(五大眞言) 1책 6)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1∼3, 4~7) 7권 2책 7)
묘법연화경(권1∼7) 7권 1첩  8)
묘법연화경(권6·7) 2권 1책  9)
묘법연화경(권1∼3) 3권 1책 10)
묘법연화경(권5∼7) 3권 1책 11)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2권 1책 12)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권 상 ·중 ·하) 3권 1책 13)
육경합부(六經合部) 1책(99장) 14)
육경합부 1책(96장) 15)
육경합부 1책(75장) 16)
 
명주적삼   1점 17)
생명주적삼 1점 18)

황초폭자(黃幅子) 1점 19)
백색수정보병(白色水晶寶甁) 1점 20)
무공수정주(無孔水晶珠) 1점 21)

사리(舍利) 3점 22)
화수(火殊) 1점 23) 후령원통(喉鈴圓筒) 1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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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3.07 13:14

    첫댓글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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