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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 히브 5,1-10
복 음 : 마르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의 복음과 내용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이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과방장을 감탄하게 하신 ‘좋은 포도주’이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1항에서
구약을 뛰어넘는 신약의 새로움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산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한 사건’은 나와 온 우주를 뒤흔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은 이제 우리네 인간의 노력이기보다는
자신이 만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에 화답하듯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항 첫 시작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는지를 분명히 맑혀 주셨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를 다시 활기차게 하신
‘차고 흘러넘치는’ 충만한 포도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우리는 모두 ‘사랑의 취객’입니다.
감사와 찬미를 그분께 바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빛을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 ‘사랑받았다’라고 느끼며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쓸모 있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
그리고 도움 되는 사람, 도움 되지 않는 사람 등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쓸모 있고, 도움 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만 보게 되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사랑,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사랑받고 있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일까요?
많은 봉헌과 거창한 희생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웃으며 인사만 잘 해도 상대는 어느 정도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사랑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서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유다교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있음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단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단식을 언제 하고 언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도 바로 사랑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식해야지,
그냥 막연한 전통을 따르기 위한 단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그 안에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잊어버리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된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일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을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기준이 ‘사랑’에 있듯이, 우리도 ‘사랑’에 기준을 두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인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신랑인 그리스도의 때’가 열렸음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29-31)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새로운 단식입니다.
그래서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되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 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곡곡,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요즘 여야의 정치 논리를 보며 잇속 챙기기에 바쁜 많은 정치인이
거짓말을 밥을 먹듯이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정한 원칙과 신뢰는 사라지고 자기 이득만 앞세웁니다.
그들을 백성을 위하는 대변자로 뽑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듭니다.
그 백성에 그 지도자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어느 세월에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가져올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망정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정신을 망각한 과거에로의 회귀는 퇴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식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새 가르침을 주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의식을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그리고 이웃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내용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밥을 할 때 ‘뜸’을 들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뜸’을 들여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밀당’을 하기도 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흥정’을 합니다.
너무 싸게 사려하지 않으면 주인도, 손님도 적당한 가격으로 흥정합니다.
‘뜸, 밀당, 흥정’은 어쩌면 사람 사는 재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친한 사이에는 ‘농담’도 합니다.
가끔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들어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농담은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부부가 헤어지려고 이혼 법정으로 가면 판사가 이야기를 경청한 다음
판결 내리기 전에 ‘숙려기간’을 줍니다.
이제 헤어지면 남이 되기에 잠시 서로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시간을 줍니다.
이런 숙려기간을 통해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용서하며
다시 부부의 인연을 이어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마치 흥정하듯이,
밀고 당기듯이, 뜸을 들이듯이, 숙려기간을 주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명쾌하게 정리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왼손과 오른손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른손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은 멜로디이기에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합니다.
왼손은 머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리듬을 맞추면서 오른손이 가는 길을 밀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당에는 두 개의 조직이 있습니다.
두 개의 조직이 본당 사제를 도와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합니다.
하나는 사목 평의회입니다. 다른 하나는 재정 평의회입니다.
사목 평의회는 마치 오른손과 같습니다. 각 분과는 1년 동안 해야 할 행사를 기획합니다.
본당의 행사는 전례의 주기에 맞추어서 진행됩니다. 멜로디와 같습니다.
한쪽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너무 모자라서도 안 됩니다.
재정 평의회는 왼손과 같습니다.
본당의 행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예산의 범위를 정합니다.
예산이 부족하면 행사를 줄이도록 요청하기도 합니다.
꼭 필요한 행사라면 필요한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사목자는 사목 평의회와 재정 평의회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친교와 사랑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듯이,
사목 평의회와 재정 평의회 그리고 사목자는
공동체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합니다.
국가의 기능도 3개의 헌법기관이 있습니다.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입니다. 사법부는 법과 원직에 따라서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군사 독재 시절에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처럼 판단했던 오욕의 역사가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법의 이름으로 감옥으로 갔고, 죽었습니다. 양심수가 생겼습니다.
행정부는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나라는 행정부가 소수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집니다. 국가의 질서가 무너져 내립니다.
부실 공사로 아파트가 붕괴하기도 하고, 멀쩡하게 보이는 다리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인사말이 되기도 합니다.
입법부는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당리당략에 의해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뒤로하는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됩니다.
입법부는 토론과 대화를 충분히 거쳐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당제를 받아들입니다.
1당의 입법부는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을 만들 수 있습니다.
2025년 대한민국은 ‘뜸, 밀당, 흥정, 숙려기간’을 겪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행정부에서 선포한 ‘비상계엄’입니다.
집단 지성이 발휘 되어서 헌정질서가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들은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생활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 아래 왔다가,
금세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난과 겸손이 주는 기쁨을 알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소중한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을 알기에
언제나 주님의 깃발 아래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합니다.
2025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조욱현 토마 신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이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일어난다.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의 의미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새것과 낡은 것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즉,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는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우리는 분명 의미있는 고통, 가치있는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젊은 시절, 어울려서 운동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휴일이면 오후 내내 운동하는 것도 부족해서, 밤늦게까지 축구를 하고 농구를 했습니다.
다른 수도회 형제들과 시합이라도 있으면 내기를 걸었습니다.
이기면 삼겹살 무한 리필, 지면 수도원 돌아가서 라면에 찬밥.
형제들은 목숨을 걸고 공을 찼습니다.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던 라이벌 팀에 시원하게 대승을 거둔 저녁이었습니다.
배도 고프겠다, 고기 뷔페집에 들어가서 원 없이 삼겹살을 구워 먹었습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소맥도 제조해 마시고, 거기다 마무리로 철판 볶음밥까지 만들어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승합차 안에서 끝 기도도 바치고 묵주기도도 바치기로 했었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도 오락가락 혼미해지고,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핍이 필요하다는 진리.
사실 제대로 된 단식은 인간을 기도로 안내합니다.
단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단식은 인간을 약하게도 만들지만 강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단식을 통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과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스레 인간의 마음과 영혼, 감각과 오감들이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식을 통해 기도할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단식과 기도는 언제나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단식하는 날은 곧 기도하는 날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단식하고 있다면 ‘지금 기도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단식할 때가 있다면, 단식을 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활동하시던 그 순간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기쁨의 잔치요 축제의 잔치입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육화로 인해 시작된 공생활 기간은
일반 혼인 잔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대한 기쁨과 구원의 축제였습니다.
구원과 은총의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만끽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잔칫상에 올라온 맛갈진 음식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갓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내온 새 포도주를
큰 잔에 콸콸 부어 서로 건배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중요시한 것은 부정한 것에 대한 단호한 기피였습니다.
율법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며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그저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외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내적 태도, 영혼의 상태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의 때에 합당한 근본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는 언제나 청춘이시며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고,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늘 새롭게 탄생해야 마땅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각자가 들고 있는 부대의 상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저기 구멍 나고 헤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우리 백성은 사상 초유의 대혼란을 겪고 있고,
하루하루 안갯속같이 불투명한 길을 걷고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고통, 의미 있는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성숙하고 더 건강한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을 통해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도
분명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 하시리라 굳게 믿습니다.
같아지셨으니 같아지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히브리서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이고,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셨으니, 우리도 주님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같아지심 중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유혹받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받으셨다는 것이며,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혹과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고, 유한하기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고통이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이란 것이 본래 내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그 반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굶주림은 본성상 인간이 너무도 싫어하고 원치 않는 것이며,
반대로 먹는 것은 즐거운 것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기에 식도락이란 것이 있지요.
그러니 굶주림 또는 먹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어렸을 때의 고통은 굶주림의 고통이었고
이 고통과 비교하면 다른 고통은 사치스러운 고통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고통은 이렇게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요,
반대로 원하지 않는 것,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곧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원치 않는 곧 하기 싫은 것을 다 피할 수 있다면
나는 늘 즐거울 것이고 고통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고 인간은 유한하기에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고통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이렇게 인간의 조건인 측면도 있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내 원하는 대로 되게 하고 원치 않는 것은 피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 나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눈을 돌리면
그래서 주님처럼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게 되면 영적인 고통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얘기하듯 주님도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셨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심으로
당신의 고통이 영적인 고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고통은 우선 시선 돌림입니다.
고통에 갇히지 않고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고 이것이 실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린 고통에 신음만 할 뿐 기도로 바꾸는 데 얼마나 자주 실패합니까?
그러므로 고통스럽기에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그런 관상적인 기도를 우린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기에 고통을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어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인 기도의 더 높은 차원입니다.
시선을 고통으로부터 하느님께 돌릴 뿐 아니라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 따르기를
한 번 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주님을 본받아 이런 영적인 고통을 받고 사랑의 순종을 산 분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순종의 근본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도 근본에서 본을 받는 사람이 되고 성인이 되라고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축제와 단식의 긴장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 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시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이 땅 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될 것인가?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된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레위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마르 2,16)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준다.
斷食(fasting)은 일정기간 동안 종교 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 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長生不死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의 Ramadan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술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 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1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루카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신다.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 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은 그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구원과 축제의 현재만 있으므로 단식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안 계신 동안에 제자들은 신랑을 빼앗긴 신부처럼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슬퍼하며 단식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의 시대를
기뻐하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 있으면서
축제와 단식의 긴장 속에서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