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복음묵상
우리의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절대 아닙니다!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의 어린 시절은 요즘으로 치면 ‘엄친아’였습니다.
그는 요즘도 큰 도시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규모면에서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나폴리의 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머리까지 비상해서 16세 나이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젊고 유능한 불패(不敗)의 변호사로서 세간에 이름을 날리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는데, 한번은 자신이 맡은 한 사건이 사소한 실수로 패소하는 쓰라림을 체험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세상의 쓴맛을 본 후 허망해하고 있던 차 그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제부터 세상을 떠나 나를 따라오라.’
그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세속 변호사의 길을 접고 주님의 변호사로 탈바꿈합니다.
172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된 알폰소는 우연히 나폴리의 뒷골목,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 통계에 따르면 나폴리 인구 100명당 1명이 사제 신분을 지니고 있어 사제 과잉 현상이 있었답니다.
수많은 사제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대도시의 뒷골목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제들이 안락한 대도시에서 부자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는 도시의 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이면 법학, 신학이면 신학, 학문에 있어서 큰 성취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끝에 서 있던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강론은 단순했으나 기도생활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저술은 깊은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썼습니다.
알폰소는 당시 교회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에 맞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결코 두려운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찾아갈 때 마다 언제나 환대하시고 무조건 용서하사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두려워하기보다는 안심하십시오.
고해소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대리자가 앉아계십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은 후 죄질이 안 좋다고 여겨지면 사죄경을 낭독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고해소 안에서 항상 너그럽고 관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고해사제 알폰소를 통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극단적 경건주의로 인해 훼손된 고해성사의 원래 가치를 복원시켰습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고해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알폰소의 자취가 남아있는 성화들을 보면 성인의 고개가 똑바로 서있지 않고 약간 삐딱합니다.
대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그분의 한 평생은 참으로 혹독했더군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71세 되던 해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심하게 굽어버렸습니다.
후에 각도가 조금 완화가 되기는 했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굽은 목 때문에 턱이 가슴을 눌러 항상 상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한 평생은 다양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힘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도회 설립자로서 이런 저런 고민꺼리가 많았던 그는 만성 두통에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집필을 계속했습니다.
얼마나 두통이 심했으면 왼손으로는 차가운 대리석 조각으로 두통부위를 마사지하며 오른 손으로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대성인이자 교회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폰소도 우리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을
겪으셨다는 것, 수시로 와 닿는 깊은 상처에 속수무책이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만사 제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욱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그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탁월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성모님께서도 많은 중재와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장수했습니다.
그는 자주 성모님과 깊이 통교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생활성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복음 묵상글을 옮겨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