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조승희와 다를 바 없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 난30 대에 겪었고, 조승희는 20대 초반에 겪었다는 것이다.
* 어릴 적에 형성된 자신감의 차.
* 난 가난했던 가정사를 한국에 버리고 왔고, 조승희는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 모든 것은 한 순간이다 라는 것을 인지하느냐 차이.
어릴 적 자신감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난 어릴 때 아주 기가 산 상태로 자랐다. 가난 했어도 아버지가 항상
“아버지가 병원비 책임 질 테니까, 맞고 오면 안되 !!!!” 라고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 하고 레슬링도 했다.
아버지는 항상 나의 박치기 한방, 날개 꺽기, 원, 투 , 쓰리 KO 페이다.
그리고 레슬링 선수 김일이 일본 선수를 박치기고 링 박으로 한방으로 보낼 때
온 가족이 기뻐하며 자랐다.
어릴 때, 고교 야구를 보며 우리 지역 고교 팀이 역전할 때 온 가족이 축제 분위기다.
우린 같은 사투리를 사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 이었다.
다시 미국 유학생활로 돌아와서, 조그마한 시골 대학 도시이다.
너무나 예산이 빠듯 했다.
1달러 잃어 버린 것에 대하여서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미국 와서 미국 감리교회에 가곤 했는데, 거기서 최소한의 사교 생활을 했다.
가끔 교인들 특히 젊은 아가씨들을 내가 주말에 아르바이트 하는 가계에서
만날 때 부끄럼을 느꼈든 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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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돈도 없고 갈 데도 없고, 호텔 시스템의 방에서 미칠 것 같아서 옆 방 인도 학생방문을
두들겨, 내가 지금 너무 미칠 것 같으니까, 10분만 이야기 해줄래 해서,
옆방 학생도 자기도 가끔 혼자서 말하는 경지에 이러렀다고 하면서 서로 위로한 적도 있다.
그 후 넓을 거실을 같이 쓰는 형태의 기숙사로 옮겨서는,
외로움이 무섭게 몰려 올 때 기숙사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주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미국 교회에 있는 몇 살 아래 한국인 싱글 여자 유학생에게
우리기숙사 방에서 오늘 같이 요리 하는 데 오지 않겠냐면서
여러 차례 제의를 했지만 모두 거부 당했다.
지금 생각에 그 아가씨가
한 번이라도 왔었다면, 그리고 그녀는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취업이 가능한 기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앗다면, 지금쯤 아마 내가 결혼 했을 것이다.
학교, 기숙사, 교회 몇몇 백인 아가씨 한 테 데이트제의 했는데, 모두 거부 당한 기억이 있다.
중국계 여학생과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역시 그들 기숙사안 그들 커뮤너티안에서 난 심심풀이로 말하는 상태에 불과 했다.
과정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 모른 척을 했다.
학위 과정 중 남자가 이렇게 외면 당 할 수도 있구나 하는 글을 뼈저리 느꼈다.
미국교회에서는 나에게 말 거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들이 전부 의도적으로 소외되
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작전적으로 접근 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교회 어떤 직원이 다른 사람에게 혼자 서있는 나에게 가서 말해라고 하는 것을
지시 하는 것을 목격 하기도 해서, 역겨움을 더 느꼇다.
지시 받은 사람은 나에게 와서 날씨 이야기 등등, 어느 나라에서 왔냐,
어디 여행 해 봤냐 등등, 억지로 이야기 하는 것이 자신의 비침함을 더증가 시켯다.
성경 공부 시간에 키가 나보다 훨신 큰 독일에서 온 독일어 선생이 있었는데
너무나 소심하였고 얼굴이 미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랑 음악회 같이 가자고 몇 번 제의 한적 있는데,
내가 키에 부담이 되어서 받아 들이지 못하였다.
그녀는 정말 순수 하였는데. 키에 대한 나의 열등감,
선입관, (남자는 여자보다 커야 한다)가 그녀를 차별 한 것 이다.
얼마 후 그녀의 소식은 영원히 끊어 졌다.
내가 사람들의 차별에 대하여 괴로워 했지만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 한 것이다.
지금 너무나 후회스럽다.
내가 유학 중 확신한 것은 모든 것은 한 순간 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깨 닿느냐 못하느냐 차이는 엄청나다.
내가 마지막 여름, 바로 업계 1위 뉴욕 사무실에 취업 비자스폰서 약속 받았을 때
공항에서 기숙사로 가지 않고 뒷동산에 가서
그 동안 인내를 주신 하나님 깨 비바람 속 에서 밤 12시 기도 한 기억이 난다.
기숙사 안에 나의 취업이 소문이 나자. 질문이 쇄도 했다.
나의 대답은, 그냥 운이 좋았다.
한국 여학생 도 믿을 수가 없던지 다급하게 멀리서 뛰어 와서는 대화를
가로 막으며 눈이 휘둥그래 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말 걸었을 때 그전에는 한마디 이상 대답 한적이 없었다.
과의 동료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교회 친구들도 나를 다시 본다고 모두 놀라와 했다.
그 당시 한국 유학생이 백인 미국인들과 경쟁해서 최고 직장에 오퍼를 받아 내어서,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약2 년 후 내가 학교를 인사차 방문 했을 시,
최근 졸업생 중 가상 성공한 경우라 미국 교수님이
학교광고 목적으로 글을 한편 쓰라고 권유도 했다.
내가 좋아 했든 백인 아가씨(독일 아가씨 제외)를 몇 명 다시 봤는데,
모두 초라하게 보였고 어떤 이는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모두 초라한 시골사람들로 보였다.
소문으로는 한국 여학생은 현지 취업에 시도하다가 비자 만기 직전 한국에 갔다.
이제 한국 가족들에게 까지 내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시 한번 놀란 것은:
외국 국적자중에서 미국 생활을 대학원 이상부터 시작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어릴 적 본국에서 자신감에 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회의 시간에도 나 포함 모두 당당하다. 그냥 안되면 자기나라 가면 된다.
초등학교 때 까지만, 아빠는 이세상 제일로 보여야 한다.
든든한 어른이어야 한다.
어린이가 아빠가 항상 가계에서 극히 제한된 사람만 만나고 학교에 오지 않고,
아빠가 영어를 못하고,
사회에 동참하지 못하는 나약한인간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우리 엄마 아빠는 다른 어른 들과는 달라요 “ 라는 인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
난 영주 권주관자 이지만, 자식 교육을 위해 한국에 간다.
남이 나에게 가까이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개연하지 말자.
나는 한국 미국에서 수많은 멸시를 받아왔다. 멸시는 어떤 조직 안에서 상대적인 것이다.
지금도 어떤 이는 마음속으로 나를 멸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 자유이다. 내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면 그만이다.
스위트룸에 있는 억만 장자와 호텔 청소부를 보자. 둘은 아무 관계도 없다.
부러워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멸시할 필요도 없다. 서로 직업이 다를 뿐이다.
TV를 집에 두지 말아라, 난 TV 없이사는데 아무를 지장이 없다.
TV가 당신의 영혼을 갈아 먹는다.
몇 개월만 TV 삼가고 대신 클래식 음악을 듣든지 그림을 그리든지 해보라.
다음에 TV 볼때 역겨움을느낀다.
전세계 관객 얼마 얼마 동원 이런 쓸데 없는 광고에 현혹되어 영화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해라.
기억해보니 난 지난 10년 동안 극장에 2번 간 것 같다.
고전음악을 항상 가까이 할것을 권유한다. 당신의 영혼을 치유한다.
수백년 동안 같은 음이 사람을 감동 시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삶에 의욕을 잃엇을때는 베토베의 교향곡을,
즐거운 마음을 유지 시키고 싶을때는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를 나는 듣는다.
누가 누구를 만나 결혼을 하든, 제 3자는 거액의 축하금을 주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같이 있어서 마음이 편한 사람과 만나서 살면 그만이다.
샤르트르가 노벨상을 거부할 때,
“웃기는 군, 당신들이 뭔데 나에게 잘했다고 상을 주는 것이요, 난 관심 없소” 이다
같은 학교 클라스, 직장사무실 안에서도 파티에 초대 받는 사람이 있고 못 받는 사람이 있다.
당신이그런 선택에 대하여 불만을 느낀다면 그건 스스로 당신을 멸시 하는 것 이다.
그리고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래서 도우면서도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첫댓글 공감가는 글이군요. 글속에 예수님을 언급하지 않아도 느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도끼니 개끼니인 우리들. 주님께만 매달리고 주위 지체들에게 관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