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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1일 화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6,10-20
복 음 : 마르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풍요로운 우정으로 꽃피우는 하느님 사랑과 만남으로써,
또는 그 사랑과 새롭게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고립감과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 8항을 열쇠 삼아 오늘 복음의 문을 열어봅니다.
예수님게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급히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에 복음을 전하시러 가시는 길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크게 아프다는 전갈을 받으시고 서둘러 그를 찾아가시는 길일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가던 중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호호 불어먹기 시작합니다.
볕에 익어가는 밀 내음과 밀 이삭을 흔드는 산들바람!
간단하고 조촐하지만 주님이신 예수님 곁에서 이루어지는 근사한 안식일 식사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사실 구약의 율법은 매정한 법이 아닙니다.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 가서는 안 된다.
……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19-20)
따스함이 묻어있는 법입니다.
안식일 법도 일을 금하는 법이기에 앞서 돌봄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완고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자아도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안식일을 누려보면 어떨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우선하는 사람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이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저희에게 새 마음, 새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이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날
반영억 라파엘 신부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 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1248조1항).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예전에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한글도 모르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법보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생각하기보다 그 의미,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날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마음이 완고하고 오그라들어서
안식일 법을 확대해석하며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분으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그러므로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두 가지 덕목, 희망과 믿음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하느님과 더욱 깊이 연결되게 합니다.
희망은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기다리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절망에서 구해내며,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빛을 보게 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사람이 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낙관적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향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계획을 믿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이정표와 비슷합니다. 희망은 목표와 비슷합니다.
저의 희망은 교사나 군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제가 되었지만, 저의 희망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제의를 입습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믿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해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며 희망을 품었습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금 이루어지는 겁니다.
믿음은 희망이라는 이정표를 따라서 대상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믿음은 다분히 인격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믿고, 자녀를 믿습니다.
37년 전입니다. 저는 약속 시간을 깜빡 잊고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저를 믿어 주었던 친구는 어두운 다방 구석에서 저를 6시간씩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도착하니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올 줄 알았어요!’ 저를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기다려 주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서로 다르지만, 깊은 조화를 이룹니다.
희망은 미래를 향한 기대이며, 믿음은 지금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믿음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그분은 희망과 믿음의 완전한 조화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믿으며, 부활의 희망을 품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우리가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완벽한 모범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계신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연대하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희망과 믿음은 우리 신앙의 두 기둥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고,
믿음은 우리가 그 구원 안에 살아가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우리는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희망과 믿음은 사랑의 두 날개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품고 믿음을 실천하며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믿음의 은총을 간구하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온전히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인간이 노력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생명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답변이다.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이다.
법률 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
(참조: 마르 3,1-6; 루카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안식일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데,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적인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주일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농어촌 마을에서 살다 보니, 농촌 인구의 급감으로 인한 열악한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재배되고 있는 효자 농작물들이 있습니다.
쌀, 보리, 옥수수, 고추, 마늘, 양파, 고구마, 감자, 사과, 감, 배...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7대 주요 농작물이 있었는데,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대추야자를 꼽습니다.
그중에서도 밀은 유다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빵의 기본 재료로 가장 으뜸가는 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몇천 년 전부터 곡식을 경작해 왔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유적지나 예리코 등지에서 불에 탄 밀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주부들은 매일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구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 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 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 23,26)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두 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쪼잔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 있게 적용될 수 있고
용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안 지키는 것이 죄 입니다. 못 지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3-28)”
1)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배고픔’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마태 12,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배가 고팠을 때 했던 행동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의 배고픔’을 보지 않으면,
그것은 핵심을 놓치는 일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은
율법 실천을(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고,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2) 제자들도 자기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배가 고파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파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마태 8,20)
예수님만 그런 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또 뒤의 11장에 있는,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마르 11,12-13).” 라는 말도 연상됩니다.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제자들의 모습과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 열매가 있는지 살펴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비슷합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 몇 개를 뜯어서 먹은 일은,
결코 ‘근사한 안식일 식사’가 될 수 없습니다.
허기를 면할 수도 없는 그 몇 개의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자신들의 모습 때문에,
또 그런 일을 한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 때문에,
어쩌면 제자들의 심정은 더욱더 비참해졌을지도 모릅니다.>
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 상권 21장에 있습니다.
다윗이 한 일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일인데,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절박했던 상황을 생각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어떻든 유대인들은, 또는 바리사이들은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일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제자들의 일도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다윗은 왕이었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가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어서 문제를 삼는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고, 그 차별 자체가 죄입니다.>
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안식일’에 해도 되는 행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은 맞지만,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먼저 살펴보아라.”가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제자들은 안식일 율법을 안 지킨 사람들이 아니라 못 지킨 사람들입니다.
지킬 수 있는데도 안 지키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어서 못 지킨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그런 행동을 했다면,
바리사이들이 비난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에 적용되는, 또 종교 전반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입니다.
만일에 ‘자비와 사랑 없이’ 사람들을 억압하기만 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 집단입니다.
마찬가지로 계명과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키는 사람의 사정은
헤아려보지 않고, 꾸짖고 비난하고 단죄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거스르는 폭력일 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든 계명과 율법의 해석과 적용의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구원과 해방’이 율법 실천의,
또는 신앙생활의 기준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보다 위에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축제와 단식의 긴장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논쟁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논쟁은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동시에 반대자들의 생각까지 폭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논쟁을 즐기신다.
예수께서는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동시에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밝혀 드러내신다.
결국 논쟁은 예수님 자기 계시의 한 방편인 것이다.
에수님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이에 논쟁의 강도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다.
마르코복음을 따르면 예수님의 중풍 병자에 대한
죄사함의 발언(2,5-12)에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 식탁공동체(2,13-17)와 단식문제(2,18-22)를 통해서 불거져가고 있으며,
이제 두 번의 안식일 규정문제(2,23-28; 3,1-6)로 논쟁은 극에 치닫게 된다.
결국 안식일 논쟁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를 없애버리려는(3,6)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나타나서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만들기 위해 밀 이삭을 잘랐는지,
배가 고파서 먹기 위해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문맥상 後者의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평소 때라면, 이웃집 밭에 서 있는 곡식 이삭에 낫을 대지 않고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허용된다.(신명 23,26)
그러나 이 일도 안식일에는 금지된다.
이삭을 손으로 잘라 먹는 일이 안식일에 금지된 추수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항의에 예수께서는 세 가지의 답변을 시도하신다.
첫째는 굶주렸을 때 법을 지키지 않은 사례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법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가르침,
즉 人本위주의 법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셋째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 법의 주인이며 근본적으로 모든 법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 가지 답변을 분석한다면,
첫째는 유다인 계통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장일 것이고,
셋째는 이방인 계통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장일 수 있으며,
두 번째 답변이 예수님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에비아달 대사제 때에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파서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제단에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25-26절)고 했는데,
관련된 성서의 구절을 살펴보면(1사무 21,1-10) 당시 대사제는 에비아달이 아니라 아히멜렉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분명 잘못된 기록이다.
아무튼 논쟁의 핵심은 인본 위주의 법 해석이며, 예수께서 법의 주인이시며 법 위에 군림하신다는 것이다.
법은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법의 정신을 따라 법을 적용하는 것이 분명 더 중요한 일이다.
이제 예수님은 법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는 해석자로 등장하시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