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소정방 피살사건을 봤습니다.
소정방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명장이죠..그런 인물이 신라에서 피살되었다면 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요.
당나라 역사서인 당서에는 그냥 죽었다고만..어떻게 죽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은 되어 있지 않지만..
당의 속국이었던 신라도 자국의 생존문제가 걸리면 얌전히 물러서지 않고 대항하는 기개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저력이 없었다면 삼국 중 최후의 승자가 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예전에 어느 글에서 읽은 건데..소정방을 살해했던 김유신은 나중에 당나라 황제와 신라 문무왕(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 사이의 밀약으로 정치투쟁에서 밀려나 버렸다.
강경파인 김유신이 사라진 후 신라는 완전히 당의 속국으로 전락되었다고 하더군요.
문무왕은 평양의 당군을 몰아낸 김유신을 암살하여 당군의 남하를 막은 대신 북진노선을 포기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석문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김유신은 문무왕에게..패장은 화랑 정신에 따라 장렬하게 자살(?)해야 하는데..그렇지 못했던 아들 원술(삼국지의 원술이 아님..^^)을 처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문무왕은 원술이 부장에 불과하니 처형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문무왕의 속뜻은 석문 패전의 책임자는 바로 부장 원술이 아니라 대장군 김유신이라는 뜻이죠.
아버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는 원술은 산으로 숨었습니다.
당 고종이 문무왕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군을 파견합니다. 이 때 문무왕의 속마음을 눈치챈 강수(强首)가 김유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항복문서를 썼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는 문장이 뛰어난 문신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로써 왕권을 보장받은 문무왕은 김유신을 토사구팽시키고 강수에게 상을 주었다는 겁니다.
왕권이 소중해도 항복문서를 쓴 장수에게 상을 주고..공을 세운 장수를 내치다니..
문무왕 입장에서 자기 아버지의 최측근이던 김유신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두려워했을까..
삼국사기를 아무리 보아도..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패한 건 사실이나 문무왕이 김유신을 암살했다는 걸 암시하는 대목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인가?? 김유신 암살설은 신빙성이 없는 애기라고 봅니다.
'토사구팽'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정관정요'에서 위징이 당 태종에게 충신보다 양신이 되고 싶다고 했고..한 고조의 참모였던 장량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군주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오래 장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KBS역사스페셜 미스터리 추적 신라의 소정방 피살사건
동영상 http://cgi.kbs.co.kr/cgi/ram/hisspecial/991023.rm
첫댓글 차라리 동영상을 올리시는게..
너무 긴 대본 내용을 올려놔도 죄송~^^;;;
태대각간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엄청난 영향력의 사람이 과연 그럴까요....그리고 김유신의 후세들은 신라 후기까지 신라조정에 큰영향을 미치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김유신이라는 거목이 암살을 당하고 숙청(?)당했는데.. 그 후손들이 그러한 후광을 등에 업을수 있었을까요.. 조금 의문이군요..
김유신이 워낙에 호랑이아빠, 호랑이 시아버지여서 후손들도 싫어해가지고 문무왕이랑 끼리끼리 찹쌀떡 메밀묵 후루룩짭짭(탕-)
맞습니다. 또한 석문 전투는 김유신의 나이가 78세가 되는 해 672년에 일어났음.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늙어서 죽을 사람이니 암살할 필요가 없죠. 1년 후(673년)에 김유신이 사망했지만 79세까지 오래 살았고, 그의 후손들도 계속 부귀영화를 유지했다고 하니 권신 중의 권신이라고 할만 하군요.
소정방 피살론은 날구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74살까지 잘 살고 죽은뒤 좌효위대장군 유주도독의 칭호를 받습니다. 구당서에 나옵니다.
역사스페셜에서 당서(신당서?)에 소정방과 비슷한 공을 세운 다른 장수들에 대한 죽음과 예우, 무덤 위치도 기록되었으나 좌효위대장군 형국공이라는 소정방은 배장 사실도 거론하지 않았고 장례 대우도 제대로 없다고 현지인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함. 구당서에서 소정방의 무덤은 어디이고 어떻게 죽었다고 합니까?
永淳二年卒, 年七十. 贈左驍衛大將軍、幽州都督, 官給輿, 護喪還裏 신당서에 나오는 설인귀의 기록입니다. 영순 2년, 78살에 죽었고 증좌효위대장군 유주도독의 작위를 받았으며 환리(?)에 묻혔다 입니다. 소정방과 크게 다를게 없습니다.
일단 소정방의 기록은 乾封二年卒, 年七十六. 帝悼之, 責謂侍臣曰:“定方於國有功, 當褒贈, 若等不言, 何邪?”乃贈左驍衛大將軍、幽州都督, 諡曰莊 건봉 2년 76세 사망, 황제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좌효위대장군 유주도독과 장이라는 작위를 받습니다. 설인귀와 다른건 매장지일뿐 전혀 다를게 없습니다.
다음은 삼국유사의 기록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
묻은 곳이다."(<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년 고구려高句麗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戊辰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
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唐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
환리라구요?..그럼 당 고종의 건능에 다른 공신들처럼 함께 묻히지 않고 따로 묻혔다는 애기군요. 설인귀는 병으로 죽었다는 사인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는데..소정방의 죽음도 자연사인가요?
소정방이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 있던게 661년이고 사망년도는 667년이며, 이때는 토번 원정을 명받아 우리나라에 없었습니다. 김유신이 무슨 재주로 소정방을 암살하겠습니까?
자연사로 봅니다.
역사스페셜에 출현한 이도학 교수의 말이 엉터리군요. 소정방은 당시로서는 신라로 들어가는계립령을 넘어서, 당교지역에주둔했을 것이다. 당교라고 하는 것은 소백산맥 안에 들어서자나타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는데..김유신장군은 이 당교 근처에서 소정방을 살해하고 머리를 다리밑에 묻었다고 하네요..^^;;
환리에 묻혔다는 장수가 설인귀인데..소정방으로 착각했군요..소정방이 토번 원정 중에 병사했다면..지금의 티베트 땅에 그의 무덤이 있겠군요. 70대 노장이 되어서도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자세..비록 적장이지만 존경할 만하군요.
글쎄요. 구랄일 가능성이 99%. 김유신이 직접 치르는 전투는 평양을 공격하는 당에 식량을 대주기 위해 참가한 것 이후로는 없습니다. 김유신이 당에 식랼공급하는 것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당군은 수나라의 전철을 밣게 될 가능성이 컷는데... 게다가 당의 원군 방효태의 4만군대를 전멸시킨 상황이었거든요.
김유신... 정말 같은 민족으로서는 욕얻어먹을 행위였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했죠.
김유신.. 민족적측면으로 욕먹을행위라.. 그가 그런 희생을 했기에.. 어느때보다 더많은 세금을 떄고.. 더많은 부역을 갔던 농민들과 그외 하급계층들이 잠시나마 주름을 필수있었던게 아닐까요? 그리고.. 만주의 명맥은 발해가 그계통을 이어갔는데.. 구지 김유신 욕할바는 없다고봅니다;;
6ㅡ_-) 저도 욕은 많이해서 이말할 자격은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