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를 위한 변명 1- 그의 추모제에서
글이 길어져 두 번으로 나눕니다.
뭔가 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펜을 잡습니다. 요즈음은 컴퓨터 앞에 앉지요. 옛날 학술논문을 쓸 때도 그랬습니다. 쓰고 싶은 주제가 생각나면 일단 몇 달에 걸쳐 논문을 완성합니다. 그 다음, 연구비 나올만한 데를 찾습니다. 이후 1년 정도 스트레스 받지 않고 고치면서 시간을 보낸 뒤 제출합니다. 글방에 쓴 여행기 등 다른 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고청탁을 받은 글은 제약에 많아 가급적 피합니다.
오늘(6/25)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수운회관에서 김지하 49제가 열렸지요. 천도교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의 아호를 딴 수운(水雲)회관에서 가톨릭 신자인 지하의 불교식 49제가 열린 것만으로도 구경거리였지요. 한국사회가 종교적 관용이 넓어진 것인가요? 서로 이교도라 비난하고, 장승배기를 우상숭배라고 부숴버리는 등 종교적 편협성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걸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아니면 서양을 닮아가면서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색체가 퇴색되어 건가요? 오랜만에 감동적이고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였습니다. 나는 이런 모임에 가면 30분 이상 연사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데 오늘은 1시간 반 이상 자리를 지켰습니다. 나오는 길에 그에 대한 글을 쓰려고 참조할 만한 걸 찾아보니 입장 때 받은 프로그람 한 장 뿐이더군요. 발제자의 글들을 모운 게 있는 것 같았으나 먼저 온 분들이 모두 가져갔고 남은 게 없더군요. 주소를 남기면 보내 주겠다는데, 마음 흐르는 대로 쓰는 글은 이런 자료에 의존할 필요는 없지요.
왜 지하에게 끌렸을까요? 그가 대학생활을 오래하여 나와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니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습니다. 지하와 같은 강의를 들은 (아니 신청한) 친구들은 그가 강의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고 건들건들 다녔으나 순수했다고 하더군요. 지하는 미대에 입학했으나 미학과가 문리대로 옮겨오면서 문리대 분위기에 흠뻑 빠진 게 아닌가 합니다. 미대는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많았지요. 서울 출신 이쁜 여학생 속에서 숨이 막히다가 촌놈들이 들썩댄 문리대에 오니 해방감에서 들떴을 겁니다.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고 호가 ‘지하’라네요. ‘영일’이 싫어 그냥 ‘지하’라고 썼는데, 그리고 호를 地下라고 했는데 성을 붙여 ‘김지하’가 되었다고 하군요. 뒤에 좀 고상한 한자로 金芝河가 쓴답니다. 芝는 ‘지초’이니 꽃이 이쁜 우리나라 토종 풀이름으로 여자 이름에 종종 사용하기도 하지요. ‘나는 나인데, 아니 내가 누구인지 나도 모르는데 그래서 지하라고 했으면 그대로 불러 줄 것이지 왜 한자 이름을 만들고 호가 무엇이니 하면서 야단지랄이야’라고 호통 치는 것 같습니다. 옛날 친구가 소개한 무명씨 시조 하나가 생각나네요.
내라 내라 하니 내라 하니 내 뉘런고
내 내면 낸 줄을 내 모르랴
내라서 낸 줄을 내 모르니 낸동만동 하여라.
<로미오와 줄리엣> 2막 2장의 balcony scene에서 줄리엣이 중얼거리는 독백도 비슷한 여운을 남기군요.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이름에 뭐가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달콤한 향기엔 변화가 없을 것을.) 쉽게 말해 나는 나인데 이름을 뭐라 부르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질 않은가? 그냥 내가 쓰는 대로 불러다오 라는 것 같습니다.
잠간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국일보에 근무할 때 편집국에 나돌아 다니던 그의 시 ‘오적(五賊)’이 실린 <사상계>를 보았지요. 그 때 인상은 ‘아, 시원하다’면서도 ‘이게 무슨 시냐?’고 했던 게 선명하게 기억에 남군요. 서정적 시적 언어는 찾아보기 힘들고 거칠고 투박하고 육자배기 타령으로 욕하고 배설하듯 쏟아낸 게 ‘오적’이지요. 1980년대 대학 축제 때 반정부 시위로 민속놀이를 하는 걸 자주 보았는데 이게 바로 지하의 시에서 얻은 영감이 아니었던가요? 원래 육자배기나 민속탈은 양반을 조롱하는 저항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데 지하가 우리의 문화적 유산을 자신의 시에 접목하고 이것이 1980년대 저항의 한 양식으로 발전한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겁니다.
지하는 1960년대와 유신시대 지식인들이 감시와 탄압 속에 살아갈 때 저항의 수단으로 시를 썼지요. 정권은 무자비하게 대응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죽어나갔습니다. 지하 자신도 ‘죽기 밖에 더 하겠느냐.’는 심정으로 독기를 품으면서 육두문자로 쓴 것이 이 시대 그의 시가 아닌가 합니다. 이 시대를 표현한 것이지요. 그러나 거칠고 투박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순수한 인간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은 50년 전 한국일보 기자시절에 느꼈던 그의 이러한 심성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투사이기 이전에, 이를 시로 표현한 시인이기 이전에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친구같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친구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만 서로 가만히 처다 보기만 해도 그리고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기만 해도 좋지요. 이것이 지하에게 끌린 이유였을 겁니다.
연사나 청중 대부분이 자하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민주화 운동 투사들인 듯 했습니다. 50여 년 간 지하를 일본에 알리고 또 세계에 알려 그의 석방운동을 주도한 일본<중앙공론> 전 편집인 미야타 마리에라는 분도 지하와 나눈 부질없는, 그러나 감동적인 사담 몇 조각을 들려주었습니다. 이런 청중들 속에서 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내가 아는 얼굴은 찾을 수 없었지요. 여기에서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투사들만 모인 이번 추모제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일종의 한계(?) 같은 걸 느껴졌습니다. 왜 나 같은 문외한들도 참여할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모든 연사들이 그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찬양하면서 말년에 민주화 운동을 포기한 듯 비친 그의 글과 행동에 대해 서운함을 언급하더군요. 이 글을 추고하던 중 주최 측의 한 분이 이날 청중석 앞자리에 있던 나의 바로 옆에 대학 은사 김우창 선생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서로 마스크를 쓰고 있어 알아보지 못했는데 죄송할 따름입니다. 선생님도 반정부투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아 주최 측에서 부탁을 강연을 사양하고 청중석에 계셨던 겁니다.
1991년 5월 5일 어느 일간지에 실린 지하의 글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요. 지하의 민주화 투쟁 친구들에겐 청천벽력같이 느껴졌을 겁니다. 이 글을 계기로 그 이전의 지하와 그 이후의 지하로 나누기도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그의 공과(功過)를 모택동 식으로 평가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모택동으로부터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반동이라고 탄압받고 살아난 등소평은 모택동의 일생을 공산정권 수립이라는 공(功)이 7이고 문화혁명으로 가져 온 과실(過失)이 3이라고 평가하면서 10여년에 걸쳐 중국을 황폐화시킨 문화혁명에 대한 논쟁을 종결지었지요. 그런데 지하는 조그만 흠집 때문에 공과를 9 대 1이라고 하네요.(2022.7.6.)
(사진이 나오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