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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4:1-2절) 신뢰의 테스트 17 어느 정도 자라서 청소년(靑少年)기가 되면, 친구(親舊)를 아주 좋아하게 됩니다. 그래서 친구 집에 가서 같이 공부하기도 하고, 또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자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친구 사이에는 비밀(秘密)도 없기 때문에 어떤 때는 자기 속에 있는 비밀(秘密)을 친구에게 다 말하기도 합니다. 즉 좋아하는 남자 이야기라든지, 여자이야기 같은 것도 친구에게는 말합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서는 정말 죽을 수 있을 것 같고, 친구와의 우정(友情)은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습디다. 그러나 각자 나이가 들어가면, 생각과 진로(進路)가 달라지면서 조금씩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격적(人格的)으로 만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옛날 친구와는 더 잘 만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진로(進路)도 많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주로 교회(敎會)에서 예배나 교회 봉사를 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므로 믿지 않는 친구와는 거의 공감(共感)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만나게 되면, 서로가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북한(北韓)에 억류되어 종신(終身)노동 형을 받은 캐나다 국적의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캐나다에서 3천명이 넘는 큰 교회를 목회했습니다. 그는 편안하게 목회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북한(北韓)의 동포(同胞)들을 불쌍히 여겨서 20년 전부터 북한(北韓)에 가서 양로원(養老院)을 짓고, 고아원(孤兒院)을 짓고, 빵공장을 지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宣敎師)모임에서 북한(北韓)지도자를 비판한 동영상이 북한당국에 입수되어서 교인(敎人)들이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북한(北韓)에 갔다가 체포되고, 결국 종신형(終身刑)을 살게 되었습니다. 영화(映畫)〈미션〉을 보면, 처음에 남미(南美) 과라니족에게 선교(宣敎)하러 갔던 선교사(宣敎師)가 붙들려서 나무 십자가에 묶여 폭포(瀑布)에 산채로 떨어져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후에 그들을 파송(派送)한 선교회(宣敎會)에서 그를 땅에 묻고, 누가 저기에 다시 올라갈 것인가? 의논하는데, 나이 든 신부(神父)가 자기가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사람을 보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올라가는데, 그 역시 선교(仙敎)하다가 죽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끝까지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를 믿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면서 남을 끝까지 신뢰(信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럴 수만 있다면, 주님의 가장 중요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에서 작은 자 하나를 실족(失足)시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Ⅰ.요셉의 테스트 요셉의 형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왔다가 엄청난 성공(成功)을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總理)는 베냐민을 본 후, 별 트집을 잡지 않았습니다. 또 그동안 감옥(監獄)에 갇혔던 시므온도 풀려났고, 어렵게 데리고 왔던 막내 베냐민도 함께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너무나도 성공적(成功的)으로 이번 임무(任務)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기분이 매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마지막 함정(陷穽)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44:1-2절)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어귀에 넣고” 요셉은 형들이 필요한 만큼 산 자루에 곡식(穀食)을 다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들이 가져온 돈과 이번에 곡식(穀食)을 구입했던 돈도 도로 다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 요셉이 쓰는 은잔(銀盞)을 몰래 집어넣고, 해가 뜰 때, 집으로 돌아가도록 보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점은 왜 하필이면, 요셉이 베냐민을 겨냥 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베냐민이 그 형제들 중에서 가장 약(弱)한 자였고, 베냐민의 모든 조건이 요셉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문제점은 배(胚)가 다른 여러 형제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요셉이 자가들과 배(胚)가 다른 형제였고,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냐민은 모든 조건이 요셉과 비슷했고‘미니’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곧 이것이었습니다. 베냐민을 옛날에 자신이 빠졌던 것과 비슷한 처지에 빠지게 하면, 과연 형들이 베냐민을 지키려고 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즉 베냐민이 곤경(困境)에 빠진 것을 보고, 이번에도 베냐민을 버리고 달아난다면, 형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형들이 베냐민이 곤경(困境)에 처한 것을 보고, 도망치려고 하지 않고, 책임을 지려고 한다면, 형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요셉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히 형들이 과거(過去)의 죄를 회개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들에게 다시 내 영혼(靈魂)을 맡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청지기(steward)는 요셉의 지시에 따라 이 형제들을 보낸 후에 곧 뒤따라가서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요셉의 청지기(steward)는 지금 양식(糧食)도 구하고, 형제도 구해서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요셉의 형들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리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인(主人)이 당신들에게 호의(好意)를 베풀어서 잘 보내었는데, 왜 우리 주인(主人)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点)치는 은잔(銀盞)을 훔쳐 가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요셉이 은잔(銀盞)을 가지고 형제들을 붙들었을까? 그것은 우선 은잔(銀盞)의 크기가 작아서 감추기가 좋았을 뿐 아니라, 큰 효과(效果)를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셉은 은잔(銀盞)으로 점(点)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주술사(呪術師)들은 은잔(銀盞)으로 점(点)을 쳤기 때문에 은잔(銀盞)은 그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훔쳐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은혜(恩惠)를 배신(背信)하는 것이며, 가장 파렴치(破廉恥)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소설(小說)<레미제라블>을 보면, 교도소(矯導所) 출신이라고 해서 아무도 먹여주지 않고, 재워주지 않는 장발장을 그 도시에 있는 주교(主敎)가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빵 하나 훔치고, 감옥(監獄)에서 19년을 살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증오심(憎惡心)으로 가득차서 그 주교(主敎)의 집에 있는 은(銀)접시를 훔쳐서 도망가다가 경찰(警察)에게 붙들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주교(主敎)는 자기 은혜(恩惠)를 배반(背反)하고, 접시까지 도둑질하다가, 잡힌 장발장에게 자기가 은(銀)촛대까지 줬는데, 이것은 빼놓고, 안 가져갔다고 하면서 장발장의 보따리에 도로 넣어줍니다. 결국 이 사랑이 장발장을 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청지기(steward)는 요셉의 형들에게‘너희가 어떻게 악으로 선을 갚느냐?’고 하면서 책망했습니다. 이는 총리(總理)가 모처럼 너희들을 믿고, 너희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해서 보내었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총리(總理)가 가장 아끼는 물건(物件)을 도둑질해서 우리 총리(總理)를 업신여기느냐? 는 뜻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형제들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 오려는 계책(戒責)이었습니다. 44:15절)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요셉의 이 말은 자기는 점(点)을 잘 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안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믿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반드시 확인(確因)해 보아야만 실패(失敗)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형들과 화해(和解)하는 것은 자기 영혼(靈魂)을 다시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되는데, 과연 이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을 해보려는 것입니다.
Ⅱ.형들의 반응 요셉의 청지기(steward)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왜 주인(主人)의 은잔(銀盞)을 도둑질했느냐? 고 따졌을 때,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사람의 돈이나, 물건(物件)에 손을 대는 자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44:7절)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든지 은금(銀金)이 나오면, 그는 죽을 것이요, 자기들은 모두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도덕성(道德性)하나만큼은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과거를 보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도둑질 같은 것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殺人)이라든지, 간음(姦淫)같은 큰 죄(罪)는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남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것은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분노(忿怒)가 폭발할 때에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종교(宗敎)를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도덕성(道德性)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도덕성(道德性)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죄(罪)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많은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은 목회(牧會)자의 비도덕성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이라든지, 남의 돈을 훔치지 않지만, 성적(性的)인 죄(罪)라든지, 큰 금전적(金錢的)인 비리(非理)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律法)의 아주 작은 세세한 부분은 잘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든지, 시간 약속을 지킨다든지, 남의 돈을 돌려준다든지, 하는 소소한 것은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큰 믿음을 저버렸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성전(聖殿)을 장사하는 자들의 소굴(巢窟)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律法)적인 지식(知識)만으로는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힘으로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정욕(情慾)의 충동(衝動)을 받게 되면, 지금까지 지켰던 것들이 한 순간에 모두 다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파이프(pipe)가 낡아서 여기저기 새는 것을 임시로 때워서 사용하다가 한순간에 전체가 폭발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意志)로는 율법(律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44:12-13절)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 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그들이 옷올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그들은 처음에 웬지 모든 일이 너무 잘 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애굽 총리(總理)의 도둑맞은 은잔(銀盞)이 베냐민의 짐 보따리에서 나오고 만 것입니다. 그 형들은 모두 너무나도 기가 막혀서 옷을 찢고, 결국 보따리를 다시 다 챙겨서 애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베냐민은 총리(總理)의 물건(物件)을 도둑질한 죄(罪)로 붙들려서 감옥(監獄)에 가든지, 종으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형들의 눈앞에서 총리(總理)의 종들은 베냐민을 밧줄로 묶어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때 유다는 형제들을 대변(代辨)해서 이제 은잔(銀盞)이 발견이 되어서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되었으나, 우리 모두가 공동(共同)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14:16절)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사실 우리는 이 은잔을 훔치지 않았는데. 은잔이 이렇게 나온 것은 이번 사건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옛날 우리의 죄를 드러내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자기들은 오래 전에 어떤 죄(罪)를 짓고, 은폐(銀幣)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죄악(罪惡)때문에 자기들을 이번 일로 걸려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때 천주교(天主敎)에서는‘내 탓이요’라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주위 사람들이 잘못하기 때문에 일이 꼬이고, 잘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하는 이유는‘내 탓이라’것을 모르고 자꾸 다른 사람들만 탓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철저하게 회개한다면,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결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Ⅲ.누가 남을 것인가? 요셉의 형들은 아무래도 옛날 자기들이 지은 죄(罪)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으니까 자기들 모두가 책임을 지고, 남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대하여 요셉은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하면서 은잔(銀盞)이 나온 그 사람만 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44:17절)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여기서 드디어 아버지 야곱과 형들이 그렇게 우려했던 일이 터지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아버지가 그렇게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한 베냐민만 애굽에 인질(人質)로 붙들리게 되고, 형들은 모두 무혐의(無嫌疑)로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선택(選擇)은 모두 다 노예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베냐민 한 명만 인질(人質)로 남고, 나머지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숫자적으로 보면, 베냐민 한 사람이 노예로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유리한 결정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 때문에 형제 모두 다 희생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자칫 잘못해서 공동(共同)책임을 지면, 한 명을 위해서 모두 다 붙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미련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작은 자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잃어버렸을 때,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나선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택(選擇)해야 하는 것은 어린 아이 한 명을 희생시키고, 나머지 열 명을 살리느냐? 하는 것과 어린 아이 한 명을 자기 전체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전체 모두를 회생시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옛날 정의(正義)의 문제가 한창 논란(論難)이 되었을 때 일입L다. 정의(正義)는 소수를 희생시켜서 다수(多數)를 살리는 것이냐? 아니면 소수(少數)나 다수(多數)나 모두 다 똑같이 고통을 받고, 회생되는 것이냐 ? 하는 것을 놓고, 논란(論難)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正義)는 너무나도 미련한 정의(正義)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숫자적으로 생각을 하면, 베냐민 한 명 때문에 모든 형제가 다 노예(奴隸)로 남는 것은 모두 다 죽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형제들이 돌아가지 못하면, 집에 남는 식구들도 모두 굶어죽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차라리 형들은 이번에도 베냐민을 희생시키고, 자기들은 양식(糧食)을 가지고 돌아가서 나머지 가족을 살리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지금 그들에게는 20년 전의 일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20년 전에 형들은 요셉을 시기(猜忌)해서 쉽게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자기들은 가족이 많기 때문에 요셉 한 명이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 한 사람을 종으로 팔고 난 후에 20년 동안 너무나도 큰 양심의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생각하고, 행동에 옮긴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양심을 속이고는 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일이 기왕 이렇게 된 것, 우리가 다 종이 되어서 20년 전의 죄(罪)를 다 갚고, 이제는 새 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기회에 다 함께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안 된다’고 했습니다. 오직 은잔(銀盞)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이 되면 되고, 나머지는 다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린 아이 한 명입니다. 즉 아직 어린 베냐민을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試驗)해보시는 과제(課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종교(宗敎) 지도자들 중에서 자신의 야망(野望)이나, 비전을 위해서 큰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국(外國)에 가서 양식(糧食)을 구해오고, 열 명의 형제들을 구(求)해오는 큰일을 서로 하려고 힘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른 구실도 하지 못하고, 나이도 어린 베냐민을 위해서 희생(犧牲)하려는 작은 일에는 그 누구도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유다는 자기가 베냐민 대신에 남아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여기서 유다가 하는 말을 들으면, 참으로 진지(盡智)하고, 진실(眞實)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 총리(總理)께서 아우가 있느냐? 묻기에 우리가 아우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노인(老人)이신 아버지가 한 분 계신데, 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은 죽었고, 오직 이 동생 하나만 남았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이의 형 대신으로 이 동생을 그렇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총리(總理)께서 아우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곡식(穀食)을 주지 않겠고, 우리를 스파이로 의심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를 설득해서 아우를 데려오기는 했지만, 이 아이의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어서 이 아이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죽게 되고, 우리 모든 가정이 망(亡)하게 됩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유다는 누가 우리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이 아이의 짐 안에 총리(總理)의 은잔(銀盞)을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며, 우리 집안 전체(全體)를 망(亡)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우리 집 전체(全體)가 망(亡)하지 않으려고 하면, 이 아이가 살아서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 아이의 생명을 담보(擔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44:32절)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 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유다는 이 아이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자기가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이 아이 대신 자신이 노예로 잡혀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요셉을 잃고 난 후, 요셉의 형들은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시기(猜忌)심 때문에 이런 약(弱)한 아이가 희생(犧牲)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하면, 자기들이 희생(犧牲)해서라도 이런 일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인간의 태도를 보십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의 무죄(無罪)한 죽음을 보고, 크게 깨닫고, 자기 죄(罪)를 뉘우칠 때, 하나님은 아들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은 모두 다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는데도 전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자기 욕심(慾心)을 따라 사는 사람은 구원(救援)받을 가치(價値)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알고는 자기 욕심(慾心)을 버리고, 자기보다 약(弱)한 자를 책임지려고 하는 자들이 제대로 회개(悔改)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이 마치 우리 전체(全體)의 일인 것처럼, 책임지고, 나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敎會)가 너무나도 대형화(大型化)하고, 발전(發展)하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敎會)나 목회(牧會)자가 너무 유명해지려고 하는 동안 베냐민 같은 사람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자기 동생을 위하여 단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통당하는 형제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15:13절)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사랑이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제사(祭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靈)들을 분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떤 교회(敎會)가 유명(有名)하고, 많이 모인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죄(罪)를 인정할 수 있는 공동체(共同體)가 올바른 공동체(共同體)입니다. 그리고 작은 자 한 사람이 실족(失足)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의 자유(自由)와 야망(野望)을 포기하고 기꺼이 종살이 할 수 있는 자들이 많아야 믿을 수 있는 공통(共通)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靈魂)을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유명(有名)해지려고 하는 모든 야망(野望)이나, 욕심(慾心)을 버리고, 작은 자 한 사람이 실족(失足)하지 않도록 지키는 교회(敎會)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42장 *구주 예수 의지함이* 씨 뿌리는 자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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