供出(공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곡을
정부가 국민들에게 할당하여 납품하게 하는 일, 양곡뿐만 아니라
기타 기물도 납품하게 하는 일을 공출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1937년 7울 7일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우리조선에 공출을
하게 했었습니다. 그때가 1939년인지 1940년인지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우선 쌀이었습니다. 농사 지어 수확을 하게 되면 자기가족이 먹을
만큼만 남기고 그 이상의 벼는 다 공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공출 양은 군청에서 결정하여 각 농민들에게 통지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확하고 공정하지 못해서 많이 공출해야할
사람이 적게 하고 적게 공출해야할 사람이 더 많이 하게 되는
일들이 있어서 군민들의 원성을 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공출 날자와 장소를 각 농가에 통지해 주면 그날 그 장소로 벼를
가지고 가서 공출 하는 것인데 군청직원들이 수량을 확인하고
금융조합직원이 전표를 끊어주었습니다. 진도에서는 벼라고 하지
않고 나락이라고 하지요. 전표는 기약 없는 먼 훗날 때가 되면
돈으로 환산해 준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믿는 사람도 없었지만
일본이 패망했기 때문에 쓸모없는 종이쪼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금융조합이란 지금의 농협인데 일제 때부터
625정쟁 때까지는 금융조합이라고 했으며 625전쟁이 끝난 후
지금의 농업협동조합이 된 것입니다. 공출은 했지만 군청에서
할당한 만큼 공출을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군청직원들과
면사무소직원들이 합동으로 그 집을 불의에 습격해서 수색했으며
그리하여 숨겨둔 벼가 나오면 몰수해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일제 때는 각 이(里)에 애국반이라고 하는 반이 있고 반장이 있었
습니다. 그 반장을 통해서 반별로 집집마다 일정한 양의 새끼를
꼬아서 공출하라고 했으며 볏 집도 공출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볏 집으로 이엉(진도에서는 마람이라고 하자요)을 엮어서
해마다 새로 지붕을 덮어야 하는데 그것도 어렵게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농사짓지 않는 집에는 새기 꼬라고 공출한 볏 집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새끼와 볏 집을 공출 했었지만 그것을
어디에 쓰기 위해서 공출 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집집마다 놋그릇, 놋수저, 놋젓가락도
디 공출 하라고 했으며 디만 놋수저만은 가족 수에 맞추어
그 수만큼은 남겨두게 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기를 항아리에 담아서 땅속에 묻어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 군수 부인이 회장이고 관공서 고위직
부인을 회원으로 하는 애국부인회가 있었는데 그 애국부인회가
각 가정의 부엌을 수색해서 공출하지 않은 놋그릇이나 놋수저
놋젓가락이 있으면 압수해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학교의 철탑으로 된 국기게양대도 잘라가고 나무게양대를 세우게
했었습니다. 공출이 있기 전에는 농가에서 쌀을 팔기도 하고
장날 시장에 가지고 나와서 곡식을 팔았었는데 공출이 있은
후부터는 곡식을 파는 일이 없어졌으며, 그래서 농사짓지 않는
사람들이 어려워 졌습니다. 그 때 배급제도가 생겼었습니다.
일본사람과 관공서 직원들은 배급량이 많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일반 서민들은 배급량이 적기 때문에 어려웠지요. 날이 갈수록
서민들의 배급량이 줄어들었습니다. 일본사람은 보리밥을 먹지
않았으며 우리 조선 사람들만 먹었는데 옛날에는 보리밥도
못사는 사람들이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리쌀도 그대로가
아닌 납작하게 누른 보리쌀을 배급해주었는데 밥을 해도 맛이
없었습니다. 기름을 짜낸 보리쌀이라고 했었습니다.
일제 때 배급소는 줄이 잘 닿는 사람이라야 그 권한을 따낼 수
있었으며 배급을 다 준 후에 가마니만 털어도 그 집 식구는 먹고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곡식을 볏 집으로 짠
가마니에 담았기 때문에 가마니에 쌀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안남, 지금의 베트남을 점령한 후 그곳에서 쌀을
가져와서 배급해 주었는데 그 쌀을 “안남미” 라고 했습니다.
진도사람들은 “알낭미”라고 했었지요. ‘안남미’도 일모작은 맛이
좋으며 이모작까지도 비교적 좋다 고합니다. 그런데 3모작 쌀을
가져와서 배급해 주었기 때문에 밥을 해도 먹을 수거 없었습니다.
기름기가 없기 때문에 입 바람으로 훅 불면 밥알이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大豆粕(대두박)까지 배급 주었는데 대두박은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이며 동물의 사료나 비료로 쓰든
것이었으며 직경은 60~70cm 정도이고 두께는 15cm 정도로
동그랗고 납작 했으며 그 대부분을 만주에서 가져왔었습니다.
그것도 오래 되어서 대부분이 곰팡이가 피어 있었으며 그런 것을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배급 주었든 것입니다.
그리고 각반별로 송탄유와 송근유를 내려서 공출하라고 했었습니다.
송탄유는 소나무 옹이를 그리고 송근유는 수나무 뿌리를 아래
부위에 구멍을 뚫은 드럼통에 담아서 돌 위에 올려놓고 불을 때면
기름이 나왔는데 그것을 송탄유 송근유라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각반별로 반원들이 송탄과 송근을 수집하러 다녔습니다.
전생이 이러나기 전에는 진도에서 수시로 소를 잡아서 팔았습니다.
지금의 고속버스 터미날 근처에 함석으로 지은 도살장이 있었으며
그 일대는 전부 논이고 인가라고는 전여 없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도 도살장 가까이에 오면 죽으러간다는 것을
알고 큰 소리로 운다고 했었습니다.
소 잡는 사람을 백정 놈이라고 해서 천대 했으며 어른들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 사람들에게 자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기 파는
곳은 읍에 두 군데가 있었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 점포가 아니고
판자로 만든 가건물로 고기를 팔 때만 문을 열고 평소에는 자물쇠로
문을 잠과 두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식용 소를 기르는
때가 아니어서 소 잡는 사람들이 농우를 사서 잡았기 때문에 고기
맛도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일제 말기가 되면서는 소 잡는 것도
통제가 되어서 아무 때나 소를 잡을 수가 업었으며 경찰서에서
정해주는 날에만 소를 잡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소 잡는 날에는
고기 사는 사람들이 줄을 서야만 했고 또 고기도 한사람에게 일정한
양 이상은 팔지도 못 했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서 심부름하는 사람은
줄을 서지 않고 맨 앞에 와서 고기 파는 사람에게 자! 하고 돈을
주면 그 돈에 해당하는 고기를 주었습니다. 일제 때는 삼부를 하는
사람을 소사(小使)일본말로는 “고쓰가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소 잡을 때는 언제나 순사(지금의 순경)이 반드시 입회 했었습니다.
이것은 공출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일제말기에는 휘발유가 귀하기
때문에 버스도 휘발유 대신 목탄을 피워서 다니게 되었었습니다.
사람 키만 한 목탄기를 버스 뒤에 부착 시키고 다녔으며 그래서
그 시절 운전기사나 조수들은 항상 시커맸었으며 버스가 재를 못
올라갈 때는 승객들이 내려서 밀고 올라갔었습니다.
그리고 또 적의 공습에 대비해서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라고까지
했었습니다. 일제 말기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살아가기가 힘들고
어려워져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애서 빼놓을 수 없는 공출과 관계된
일화를 하나 적어볼가 합니다.
모든 군수는 조선 사람이고 경찰서장은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수는 밀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이기 때문에 대체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밀에서 부터 올라온 사람을 일본말로는
‘니리아가리’라고 하지요.1942년 진도군수 역시‘나리아가리‘인데
이름은 金星煥(김성환)이며 창씨개명으로는‘가내고 세이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군수가 와서부터는 자기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공출을 너무나도 심하게 하기 때문에 군민들의 원상이
대단히 컸었습니다. 이때에 동외리에 사시든 朴允奎(뱍윤규) 선생
고군면 신리에서 사시든 郭斗仁(곽두인) 선생, 님동리에 사시든
金有培(김유배) 선생이 군민을 대표해서 군수실로 군수를 찾아가
따지다가 군수 뺨을 때리고 군수에게 잉크병을 던지는 일이 있어서
진도군이 떠들썩했었습니다. 그래서 세 선생님들이 광주
고등검사국으로 소환되어갔었지만 곧바로 나오셨으며 군수는 면직
되었었습니다. 곽두인 선생은 진도읍 싸정리에도 집이 있어서
쌍정리에서 살고 게셨으며 김유배 선생은 제주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검찰청을 일제 때는 검사국이라고 했었으며
광주에는 지방검사국과 고등검사국이 있었으며 목포 순천 장흥에
지방검사국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전남의 모든
군수들은 밑에서부터 올라온 군수들이었는데 1942년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24살 된 분이 해남군수로
부임해서 유명했었습니다. 이름은 尹吉重(윤길중)이며 일본 동경에
있는 일본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진도 군수가 면직되자 그 후임으로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한 32살된 분이 왔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文作之(문작지)
그리고 창씨 개명한 이름은 일본말로‘기요하라 사꾸시’(淸原 作之)
였으며 충북 청원 분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해서 바로 진도군수로 오게 된 갓입니다.
이 분은 성격이 대단히 괄괄한 분으로 출근해서 출근부를 보고
정리가 잘 안되었으면 그 지리에서 출근부를 총무과장에게 던지면서
이게 무어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종무과장은 일본 사람
이었지만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군수가
오기 전까지는 군청과 경찰서가 서로 상의할 일이 있을 때는 군청
직원이 경찰서로 가서 상의를 했었는데 이 군수가 와서 부터는
반대로 경찰서 직원을 군청으로 오라고 해서 상의를 했다고
합니다. 지위로 보아서는 서장이 군수보다는 아래이지만 서장은
일본 사람이고 군수는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그동안은 군청이
경찰서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든 것입니다. 문작지 군수가
1944년 말에 무안군수로 전근가게 되자 그 후임군수도 역시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 행적과에 합격해서 군수로
부임하는 26실의 절문 분이었으며 성격이 온화한 분으로 공출도
너그럽게 한다는 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대단히
관대하다는 좋은 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군수는 충님 보령
분이었으며 전 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경찰서가 군청에 끌려 다니게
했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金永善(김영선)이었으며 창씨 개명한
이름은 일본말로 ‘가나야마 애이젠’(金山 永善)이었습니다.
도청에서 군수회의가 있을 때는 해남군수, 무안군수, 진도군수.
이 세군수가 회의를 다한다는 말까지 나돌았었습니다.
여기에서 고등문관 시험에 대해서 잠간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등문관시험에는 사법과 행정과 외교과가 있었는데 사법과는
지금의 사법고사와 같으며 행정과는 지금의 행정고시와 같은
것입니다. 이분이 군수로 있을 때 815 해방이 왔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군에 따라서는 군수가 봉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 군수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환영을 받았었습니다. 해방을
기뻐하면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할 때 이 군수도
밀짚모자를 쓰고 모시한복에 집신을 신고 군중 속에 끼어서 함께
행진을 했었으며 진도군 청년단이 결성 되자 청연단장으로 추대
되었었습니다. 청년단장으로 있으면서 청년들에게 정치적 강의도
했으며 면으로 내랴가서 강연을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남도청 수산과장으로 전근하게 되었습니다.
이 군수가 진도를 떠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육교가 없었으므로
외지로 나가려면 쪼그마한 발동선을 타고 목포로 나가야 했으며
그 선착장은 고작굴인데 고작굴이라 하지 않고 해장이라고
했었습니다. 김군수가 진도를 떠나게 될 때 청년단원 들이 교동리
정의현씨 집에 모여서 송별 회을 했었으며 진도를 떠날 때는 손에
태극기를 들고 해창 까지 나가서 배 뜨는 것을 보면서 환송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는 나도 그 분을 존경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일제 때 일본군수를 했든 분이었는데 그런 분을
청년당장으로 추대 하고 진도를 떠날 때 송별회를 해주었으며 해창
까지 나가서 환송을 했다는 것은 진도 청년들이 좀 더 깊이 생각
했어야 할 알이 아니었는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부기]
김영선 선생은 1950년 국회의원선거 때 충남 보령 군에서 입후하시고
당선이 되어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419 때는 장면정권의 재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516후에는 한동안 공백
기간을 둔 후 통일원 장관과 주일 대사를 지내셨습니다.
2015년 4월 1일 은파 하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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