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과 희롱을 당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7 : 32 – 44
빌라도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예수님께서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희롱하며 괴롭히는 자들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치 무능한 자처럼 모욕과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로부터 어떤 ‘희롱’과 ‘모욕’을 받으셨는가를 복음서에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희롱’과 ‘모욕’을 당하셔야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일 먼저 로마 총독의 군대가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27-31)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넘겨준 예수님을 로마 군병들이 관정 안으로 데리고 가서 온 군대가 모여 옷을 벗기고 희롱했습니다.
‘희롱하다’는 말은 계급이 있거나 권력이 있는 남성이 부하 여성에게 성적인 행위와 농담을 하며 비웃고 놀리며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하 여성은 상사로부터 성적인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참고 견딜 수가 없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침 뱉고 머리를 치고 놀리며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왕들이 입었던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웠습니다. ‘훌’을 대신하여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절하며 비웃고 즐기며 희롱했습니다.
이방인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놀리며 웃고 즐기며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렇게 희롱당하는 예수님에게는 참고 견디기 어려운 모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희롱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눈이라도 치켜들고 희롱하는 군인들을 째려보았다면 가장 용감하다고 자랑하는 로마 총독의 군대라 할지라도 그들은 순식간에 두려워 떨며 도망했을 것입니다.
‘희롱을 다 한 후’(31)라는 말씀은 군인들 몇 사람이 희롱하며 즐긴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의 관정의 치안을 맡은 군대 전부가 예수님에게 침 뱉고 머리를 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비웃고 즐기며 희롱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 이적을 베푸셨다는 소문을 그들은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능력있는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머리를 치며 희롱해도 당하기만 하니까 마치 유대인의 왕을 잡아 굴복시키고 승리한 것처럼 로마 군인들은 그날 밤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입을 여시지 않고 희롱을 당하기만 하셔야만 했습니다.
다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모욕’하였습니다.(39) ‘모욕’은 말이나 행동으로 더럽게 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서민적인 사람으로서 듣기 거북한 저질적인 욕을 했다고 이해가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헤롯 왕이 짓는 성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성전을 가리켜 보이며 자랑했습니다.(마24:1)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된 자기 육체가 죽음에서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요2:19-22) 이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자들은 구속사적인 중요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고 모욕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39) ‘모욕’은 ‘희롱’과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희롱’은 비웃고 놀리며 즐기는 것이지만 ‘모욕’은 진리의 말씀을 비난하고 욕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머리를 흔들며’ 더러운 말로 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무어라고 할 말씀이 없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입을 여시고 무엇이라고 한마디 말씀을 하셨다면 그들은 혼비백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다음으로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41) 유대 종교의 최고의 지도자로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고 섬기며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하며 비웃으며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고 하며 말하며 희롱했습니다.(43) 앞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했지만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까지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내려주지 않는다고 하며 희롱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라고 무섭게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그렇게도 무서운 책망을 들었던 그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도 믿겠노라고 비웃으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놀리며 희롱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이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44). ‘욕하다’는 말은 흉악범들이 사용하는 아주 상스러운 욕을 했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23: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들은 죽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니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고 욕하며 희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욕을 듣고서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되셨습니까? 온갖 저주와 모욕을 듣고서도 마땅히 당해야 할 죄인처럼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무능력하기 때문입니까? 채찍이 두려워서입니까? 왜 입을 열지 않으시고 참으셔야만 했습니까? 더 무서운 희롱과 욕을 들을 것이 두려워서 입니까?
우리는 듣지 못할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참고 참다가도 참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참고 참으시다가 더 참을 수가 없어서 눈이라도 치켜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어라고 말이라도 한마디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욕하고 희롱하는 그들에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성난 바다와 파도를 향하여 ‘잠잠하라’고 외쳤을 때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던 그 기백은 어디 갔습니까? 쇠사슬로도 결박할 수 없었던 귀신 들린 청년을 향하여 ‘귀신아 나오라’고 외치므로 군대 귀신을 쫓아 내 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무덤에 장사 된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는 말씀을 듣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게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능력이 어디 갔습니까? 왜 아무 말씀도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당하고만 계셨습니까?
불과 며칠 전에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향하여 채찍으로 때리고 상을 엎으시고 쫓아내셨던 그 당당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모욕하며 희롱하는 그들에게 입도 열지 않으시고 당하고만 계시는 것입니까?
지난 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찬의 떼시고 잔을 마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떡을 떼시고 잔을 마시면서 십자가를 지실 결심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너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까?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인간의 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십자가만을 피해 달라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은 ‘십자가를 지든지, 지지 않는 것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죄인의 구원을 이루지 말든지, 십자가를 지고 죄인을 구원하든지, 네 맘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힘들면 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기 위해서 일어나 그곳을 피하실 수도 있습니다. 칼과 몽치를 가지고 잡으러 온 군인들과 싸우고 잡히지 않을 능력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뜻은 물거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26:39)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라는 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원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원을 포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잡으러 온 군인들에게 순순히 잡히시고 끌려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올라 가셔서 흉악범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눈물을 흘렸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사랑하기 때문에 말없이 썩어지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없이 모욕과 희롱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이 변질 되는 것입니다. 할말 다하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사랑하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침 뱉음도, 머리를 치며 희롱하는 것도 참고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참사랑, 아가페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욕과 희롱을 당하시면서 입을 열지 않으시고 참고 견디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었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옥 불 속에 던져져야 마땅한 존재가 속죄함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욕과 희롱을 당하셔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시고 견디어 내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립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영원히 섬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