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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는 바로 사자후獅子吼좌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 오르면은 마땅히 사자후를 토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자후는 지금 세번 때린 주장자 소리와 같이 이것은 말도 아니고 또는 생각도 아니고 모두를 다 떠난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냥 주장자만 치고 내려가도 사자후의 법문을 다 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이렇게 많은 우리 사부대중들이 모여썼으니 마땅히 사자후의 내용을 말씀을 드려야 쓰겠습니다.
사자후자결정설이라,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여래상주무유변역이라. 이것은 대체로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은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여래상주무유변역이라, 부처님은 어느 국부적으로 어느 부분적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여래상주如來常住라. 항시 계십니다. 우리 중생은 상대유한적인 안목에서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또는 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 점안한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그런 무수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은 도처에 어디에나 계십니다.
어디에나 계신다 하는 그 말도 오히려 상대적으로 대상적으로 계신다. 이렇게 느끼기가 쉬운 것인데, 그렇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시방삼세十方三世 모든 존재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시방여래十方如來(제불여래)는 바로 법계신法界身이라, (불설관무량수경 상관像觀) (모든 부처님은) 이 우주 온 법계를 몸으로 한다 말입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문수의 지혜, 또는 관음의 지혜, 또는 지장보살님의 그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시방세계 이대로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래상주如來常住의 뜻입니다. 여래상주라. 부처님은 항시 시공時空(시간성과 공간성)을 떠나서 언제나 계신다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냥 우턱거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본체에서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현상적인 상에서는 천차만별로 모든 중생을 나투지만은 본 성품자리에서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또 그와 동시에 부처님은 바로 생명의 실상, 생명의 본체이기 때문에 상견常見법문이라, 항시 법문을 하신다 말입니다. 부처님은 도처에 언제나 계시는 것이고, 또는 동시에 항시 무량법문無量法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보현의 그런 서원, 또는 지장보살님의 서원,(관음의 자비), 문수의 지혜 이러한 것이 없기 때문에 못 보고 있단 말입니다.
경주 땅의 돌맹이 한 개, 풀 한 포기, 삼천대천세계로 통해 있는 저 하늘의 그러한 공간, 모두가 다 신라 천년고도인 서라벌의 부처님 정기가 응집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경주에 와서 이렇게 법상에 올라 서니깐 아늑한 고향에 온 듯한 그러한 흐뭇한 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같이 동참해 주신 우리 사부대중도 역시 신라 때 틀림없이 부처님 법을 공부하신 도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은 돌고됩니다. 한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혼탁한 물질만능시대에 우리가 하필이면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서 불자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신라 때나 고려 때나 이조 때나 틀림없이 돌고 돌면서 부처님을 믿어 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은 굉장히 난해한 것이다, 어렵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범상한 생각, 범상한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두가 다 무상하다, 덧이 없다. 이런 뜻도 알 수가 없는 것이고, 그 재미있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지내고 이런 것을 우리 인생의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덧이 없다. 또는 본래 '나'라는 것이 없는 무아無我다, 따라서 내 소유도 없는 무소유無所有라,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본래 무아가 아닌데, 본래 '나'라 할 것이 없는 무아가 아닌데, 무아라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내 집이나 내 권속이나 또는 모두가 다 자기 소유인데, 자기가 사는 집이 자기 소유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 무소유라, 원래 소유가 없다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어렵고 무리가 됩니다. 그러나 아까 무아無我가 본래 무아이듯이, 무소유無所有도 본래가 무소유입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전제 밑에서 내 소유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내 소유도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지극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는 그렁저렁 불교를 믿을 때가 아닙니다. 그렁저렁 믿어서는 자기 마음도 항시 불안스럽고, 사회의 그런 불안도 해소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오늘 보현보살, 부처님 왼쪽에 계신 분이 보현보살, 오른쪽에 계신 분이 문수보살, 오른쪽 저 편에 가(끝)에 계신 분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관음보살) 이런 보살님들의 뜻을 우리 뜻으로 하지 않는다고 할 때는 불법은 참다운 불법이 못 됩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불법佛法이라는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반야바라밀이 있어야 불법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자기도 참다웁게 구제를 받고 만 중생을 구제한다고 생각할 때는 꼭! 반야바라밀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이 없으면 바로 자불구自不救?이라, 자기 스스로도 구제를 못한다 말입니다.(자불구자기自不救自己) 다른종교와 우리 불교와의 차이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다른 종교는 반야의 지혜 반야바라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 불법佛法만이 반야바라밀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도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봉독을 했습니다만, 대체로 어떤 것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인가. 반야의 지혜를 모르면 불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반야의 생명인데, 반야를 모르고서 불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반야의 지혜는 만법연기萬法緣起(진여연기眞如緣起)라, 만법연기라.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되었단 말입니다.
그 뭣이 원인이 되었기에 인연이 이루어지고 인연 따라서 뭣이 되고 할 것인가. 이것은 기신론起信論에 있는 법문과 마찬가지로 진여불성이라고 하는 본래 생명의 실상實相이 있단 말입니다. 생명의 성품이 있습니다. 천차만별로 인연을 따른다 하더라도 조금도 변동도 변질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그런 우주의 실체가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실체가 그냥 우주의 실체로 그냥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무량無量 성공덕性功德을 갖추어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성공덕性功德 그 자리에서 바로 산이요 냇이요. 은하계요 태양계요. 우리 중생이요. 이러한 인연이 나온다 말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 진여불성에 갖추어 있는 성품공덕 따라서 일체만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연법因緣法(연기법緣起法)을 알면 불법을 다 안단 말입니다. 인연법을 알아야만이 반야의 지혜입니다. 반야의 지혜. 본래가 모두가 다 어떠한 것이나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우주의 성품인데, 우주의 성품이 자기공덕 따라서 산이 되고 냇이되고 달이 되고, 별이 되고 사람이 되고 한단말입니다. 진여불성이라는 우주의 실상은 어떻게 인연 따라서 산이 되고 또는 별이 되고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양심이 별로 안 좋다 하더라도, 성품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석가모니나 달마스님이나 서산대사나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디에 걸려서 금생에 눈이 어두워서 성품을 미처 못본다는 그 차이뿐인것이지 본래의 자리에서는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석가모니에게 꿀릴 필요도 없고 예수한테도 꿀릴 필요가 없습니다. 황금으로 가락지를 만들고 또는 어떠한 패물을 만들고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황금의 성품은 조금도 변동이 없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물이 0도에서 얼음이 되고 또는 100도에서 수증기가 되고, 하늘에 올라가서 구름이 되고, 이렇다 하더라도 물의 성품은 조금도 변동이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우리 불성이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일체 만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는 조금도 변동이나 변질이 없습니다.
따라서 참선법문에 있어서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평상심 우리 마음 못된 생각도 하고 남 미워도 하고 남 좋아도 하고 그런 마음 이대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못된 고것은 부처가 안 되지요. 그러나 못된 생각도 하고 좋은 생각도 하고 그 마음, 마음 성품은 본래가 부처란 말입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어디서 꿔와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 그대로 '나'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고 욕심을 내고 그런 마음도, 마음 성품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이렇게로 느껴야 그래야 참선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느끼고 해야 참선이 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존재는 고유한 모습이 절대로 없습니다.
본래는 다 우주가 다 진여불성뿐인데,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바꾸어지고 저렇게 바꾸어졌다 하더라도 그 성품은 조금도 변동이 없는 것인데, 바꾸어진 상相 현상 이것은 조금도 고유한 모습이 없습니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이런 것은 고유한 '나'가 아닌가. 고유한 '너'가 아닌가 이렇게 우리가 자타를 구분할 것입니다만 이것도 사실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이런 것도 역시 하나의 순간적인 순간찰나의 상相에 불과합니다. 상相에 얽매이면 불법이 못됩니다. 상에 얽매이면 반야의 지혜가 못됩니다. 반야般若의 지혜智慧가 못되면 불법佛法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과거에 그렁저렁 할 때는 기독교도 이렇게 많이 들어가서 한 1,500만명 남짓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고 말입니다. 또는 유교 도교 무슨교 무슨교 일본 창가학회도 불교는 불교입니다만 한국 들어와서 벌써 130만 이상 수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종교가 좋은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만다라曼茶羅, 만다라 장엄이 됩니다. 그러나 나쁜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이라, 백귀야행이란 말입니다. 백이나 천이나 그런 귀신들이 갖다가 밤에 덤벙 들어서 소란을 피운다 말입니다. 나쁜쪽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런 면도 있습니다. 어째 그러는 것인가. 소란을 피우고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전달을 못하고, 또는 부처님 가르침만이 다른 종교는 모두가 다 반야般若의 지혜智慧를 모릅니다. 반야의 지혜를. 모두가 다 법계法界에서 진여법성眞如法性으로부터서 연기緣起했다는 인연법을 모른다 말입니다. 인연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잠시간 상相을 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저는 항시 어려운 쪽으로만 말씀을 드리니깐, 제 법문 듣는 사람들은 굉장히 난해하고 재미도 없다고 합니다만 재미가 있고 없고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을 드려야 쓰겠지요.
연기법緣起法을 인연법因緣法을 떠나서 불법佛法이 없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상을 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깐 무아無我라고 한단 말입니다. 내가 없단말입니다. 1초의 몇 억분의 일 동안도 같은 모습으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1초의 몇 억분의 일 동안도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보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중생들은 그 본바탕을 못 본다 말입니다. 바탕을 못 봐서 상相만 보기 때문에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밉다 곱다 하는 것이지, 본바탕에서 생각할 때는 조금도 그때는 있다고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진정으로 무아를 모르면 불법이 못 됩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무아無我) 내 소유가 어디가 있겠습니까. (무소유無所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 밑에서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이 있는 것이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권속이나 자기 재산이나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래서 남편된 도리를 소홀히 하고 또는 아내의 도리를 소홀히 해야 쓴다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마땅히 최선으로 옳은 남편 바른 아내가 되어야 쓰겠지요. 최선으로 자기 자녀간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쓰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본래 성품자리 본래 근본자리를 알아야만이 집착이 안 됩니다.
오늘 이와 같이 지금 삼존三尊 부처님佛을 모십니다만 보살지위에 오르면 다 부처님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신라의, 신라천년고도의 돌맹이 하나 또는 풀포기 하나 하나에도 천지우주의 신라천년의 그런 정기精氣뿐만 아니라 천지우주의 정기가 다 들어 있습니다. 비단 경주의 돌맹이 뿐이리오, 티끌 하나 어디에 있는 티끌하나 가운데에도 천지우주의 진리가 거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법성게), 다만 중생이 보현보살의 눈, 문수보살의 눈으로 못 보니깐 구분해서 보는 것이지, 문수의 눈으로 보고 반야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현대가 살기가 어려운 때 아닙니까. 그 무슨 주의, 무슨 학설 얼마나 복잡합니까. 이런 때는 우리가 도저히 반야의 지혜 문수의 지혜를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의 불안의식을 해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밤에 길을 가는데 등불도 없고, 또는 알맹이도 없이 간다고 생각할 때에 어떻게 우리 마음이 불안스럽지 않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세상은 혼란스럽고, 혼돈 무도無道한데, 이런 세상에서 '나'라는 것이 대체로 무엇이고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가 소중히 아끼는 그 재산은 무엇인가. 기왕이면 좋은 아파트에서 살고 싶고, 기왕이면 좋은 차를 타고 싶고 하겠지요.
그런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입니다. 또는 감투를 위해서는 자기 친구도 배신하고, 요즈음 대권大權 때문에 얼마나 소란스럽습니까. 그 권리(권력)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권리란. 이런 정체를 알아버려야 마음도 평안하고 시원스러운 것이지,
불법佛法은 평안스러운 공부입니다. 그러기에 불법은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부처님 가르침 보고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불자가 되어서 마음이 안심이 못되고 말입니다. 안락이 못되면 그때는 불자가 아직 못된 것입니다. 마음이 안락스럽고 안심이 있을라면 어떻게 되어야 쓰는 것인가. 내 본래면목은 대체로 무엇이고, 또는 내 상판, 나한테는 상판이 몇 만평이 있다, 그 상판, 그 상판은 무엇인고 말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권력이 무엇이고, 내가 사는 집은 무엇이고, 우리가 그런 존재의 본바탕을 알아야 쓴다(한다) 말입니다. 그래야 불안스럽지가 않습니다.
내 성품도 내내야 부처님 성품 진여불성眞如佛性인 것이고, 자연이나 일체존재의 모두가 성품도 똑같은 진여불성입니다. 진여불성은 여가(여기) 있고 저가(저기) 있고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우주에 틈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우주에 틈도 없이 충만한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나'라는 한 존재가 인연 따라서 태어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하더라도 불성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조금도 손해가 없습니다. 그러니깐 원래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원래 오염도 안 되고 더럽지도 않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이오 말입니다. 반야심경 도리 우리는 다 외웠습니다.
오늘 점안불사 때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이나 지장보살님을 저 대상적으로만 숭배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불법이 못 됩니다. 나한테 갖추어 있는 나의 지혜智慧의 본체가 바로 문수의 지혜고 말입니다. 나의 서원誓願이 바로 보현의 서원입니다. 또는 무불시대無佛時代 부처님께서 안 계실때에 만중생을 해탈로 인도하는 그런 서원이 또 지장보살님의 서원이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 영가들을 저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인도하는 서원 그것도 역시 지장보살의 서원입니다. 그러면 그 문수의 지혜, 또는 보현의 서원, 또는 지장보살님의 서원 그런 것이 뿔뿔이 있는 것인가. 내 마음의 자취도 없이 문수의 지혜나 아미타불의 무량공덕이나 관음공덕이나 다 갖추어 있듯이 말입니다. 문수의 지혜나 보현의 서원이나 지장의 서원이나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사 우리 불자님들이 오셔서 가운데 주세불主世佛한테다가 우리가 부전도 올리고 말입니다. 참배를 드리고 치성을 드리면은 그 옆에 있는 부처님이 섭섭하니깐 뭘 좀 드려야 되겠구나, 이렇게 않더라도 다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상통相通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옆에다 따로 뭘 좀 드려야만이 마음의 직성이 풀리고 말입니다. 이렇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불교가 다신교多神敎가 되는 것이지, 참다운 불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융무애라,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이거니 생각하면서 여기나 저기나 하시는 것은 그건 좋습니다. 저도 어제가 상당히 추워서 이렇게 누비옷을 입고 와서 좀 덥습니다. 여러분들도 점안식을 같이 동참하시니깐 좀 지루하실테니깐 제 말씀이 너무 길어지면 딱딱한 말 주변도 없는 말씀을, 그렇기 때문에 될수록 간추려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할 말씀을 또 드려야 저 같은 사람을 법상에 올려주신 주지스님 뜻에 보답이 되겠지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은 사람이고 냇이고, 하늘의 별이고, 어느 것이나 어느 존재나 조금도 본래 성품은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본래 성품을 못 보고 그냥 상相만 본단 말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거가(거기) 있습니다. 일반 성품을 보는 분들은 성자고 말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본체, 실상을 못 보고서 상相만 본단 말입니다. 상은 그것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상相은 있지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셔야 합니다.
잘 못 느끼시면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애쓰고 외우셔서 우리 마음이 딱 한군데 모아서 말입니다. 삼매三昧에 들면은 그때는 자기 몸도 자기 마음도 텅텅 비어온다 말입니다. 바깥 경계도 텅텅 비어오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또는 증도가證道歌에 있는 바와 같이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상만 보는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나 우리 인간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되듯이, 그러나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깨달은 뒤에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나 '너'나 지옥이나 모두가 그때는 다 없단 말입니다.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은 영생불멸永生不滅의 극락세계極樂世界, 청청무비淸淨無非한 진여불성眞如佛性 세계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청청무비한 진여불성 세계란 말입니다. 그것만이 실상적인 세계인 것이고, 그것만이 생명의 실상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헛것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헛것을 헛것으로 알아야지, 헛것을 실제로 있다 생각할 때는 자기한테 집착하고, 자기아내한테 집착하고, 또는 자기 재산에 집착하고, 권력에 우리가 구속을 받는다 말입니다.
소비에트가 73년만에 붕괴가 되었습니다만 그것도 그냥 애초에 동기는 나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그 모순을 없애고자 생겼다 말입니다. 불평등을 없애고자 해서 평등한 그런 것이 또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네들이 우리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이 바로 불성이다' 이렇게 알아야 존엄이 되는 것이지, 그냥 뭣좀 판단도 하고 그냥 사회활동을 하고 이러니깐 존엄이다 이렇게 해서는 존엄이 못 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것을, 자기 마음의 본체 우주의 본체가 진여불성이다 바로 부처님 성품이다,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참다운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가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알고서 레닌이나 소련이 했다고 생각할 때는 소비에트가 절대로 붕괴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물주의唯物主義라, 모두가 본래가 물질이다. 우리 마음도 내내야 물질이라는 우리 몸뚱아리나 우리 뇌의 반응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해서는 우리 인간의 참다운 자유와 참다운 평화를 이룩할 수가 없습니다.필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붕괴가 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도 잘못 생각해서 유물주의도 인간의 본체가 본래가 생명자체인 진여불성이다.또는 자연이나 모두가 하나의 돌맹이도 이것도 역시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모르고서 그냥 생산많이 하고 말입니다. 섬유질 많이 뽑아내어 가지고서 잘 쓰고 잘 먹고 잘 놀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필연적으로 붕괴가 되고 맙니다.
어떠한 사회제도가 된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본적인 그 철학관인 인생관이 부처님 사상 진여불성 이것이 본래의 성품이다 이렇게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빠르고 더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 붕괴가 되고 맙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우주는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 진여불성 따라서 이루어지고 진여불성 따라서 이것이 존재가 되었다가 진여불성으로 간단 말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이라는 그런 성품에 따라야지, 우주의 도리에 안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어느 것도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는 이렇게 마음을 먹어버려야 비로소 마음이 편합니다. 마음이. 죽어도 진여불성, 살아도 진여불성 그래야 생야전기행生也全機行(생야전기현?)이요 사야전기현死也全機現?이라 죽어도 조금도 손해가 한푼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살아도 조금도 (손해가) 한푼도 없고, 지금 당장에 암에 걸려서 내 목숨이 당장 끊어진다 하더라도 손해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세상 떠나면, 이 몸뚱아리 떠나면 몸뚱아리 해방되면 그냥 즉시에 또 우리가 지은대로 우리 업장대로 몸을 또 받는다 말입니다. 잘 살았으면 좋은데 받겠지요. 따라서 그 어중간한 사업 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원래 자취도 없는 국회의원 좀 안되었다고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가 서러워하고 비관할 아무런 까닭도 없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눈꼽만한 티끌 하나에도 무량공덕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문수의 지혜智慧, 또는 보현의 서원誓願 말입니다. 또 지장보살의 서원(본원) 그런 것이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아는 것이 이와 같이 우리가 점안식도 하고 부처님을 모시는 그런 참다운 뜻입니다. 대상적으로 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소승불교입니다. 그런씩의 가르침은 기독교나 유교나 다 있습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특징이 무엇인가, 이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문수의 지혜, 또는 보현의 서원 이것은 상相이 없는 서원이고 상이 없는 지혜입니다. 바로 이렇게 본질적으로 본 성품을 알아버려야 비로소 상이 안 되는 것이지, 본 성품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상을 내지 말아라, 상을 내면은 그때는 소승이고 그것은 때묻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 범부들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적인 깊은 철학, 본래적인 깊은 철학으로 해서 모두가 다 천지우주가 빈틈도 없이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알지 않으면 상相이 안 나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상을 내고서 남한테 베푼다고 하더라도 공은 공이 됩니다. 공은 공이 되나 그러나 그것은 때묻은 공입니다.(유주상보시) 그걸로 해서는 삼계육도三界六道를 못 떠납니다. 윤회의 구속을, 윤회의 사이클cycle을 못 떠난다 말입니다.
이렇게 알면은 아는데로, 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알기는 누구나가 알 수가 있습니다. 재주가 있고, 논리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은, 아 부처님께서 나오신지가 벌써 2,500년 이상 전이고 그 뒤에도 달마요, 누구요 무수한 도인들이 다 증명을 했고, 지금도 10억 인구가 믿고 있고, 이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내가 잘은 모르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틀림없이 옳구나 이런 것은 느낄수가 있겠지요. 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은 연기법緣起法이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부터 되었다 이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로 해서는 우리 행동이 상이 없는 행동으로 옮아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법은 아시는 바와 같이 정법正法이요, 상법像法이요, 말법末法이란 말입니다. 정법正法은 무엇인가. 정법은 알기도 알고 또는 진여불성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 실천수행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혼연일체가 되어서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어서 증명을 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교행증敎行證이라, 교리도 알기도 알고, 또는 우리 신구의身口意로 우리 몸으로나 우리 뜻으로나 우리 말로나 상相이 없는 행을 우리가 본받고 행해서 그런 수행도 하고 그렇게 해서 증명證明을 해버려야 비로소 정법이란 말입니다. 오늘날은 정법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보고 말법이라 하는 것은 그 소위가 어디가 있는고 하면 수행도 제대로 못하고 말이야 앵무새같이 좀 잘 배워놓으면 알겠지요. 수행도 제대로 못해서 불법을 말하는 분도 자기 스스로 행동을 못한다 말입니다. 행동을 못하거니 증명이 될 까닭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이 말법인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저 알기만 좀 안다 말입니다 알기만, 아는 것도 상대적인 방편법문만 좀 아는 것이지, 실상지혜實相實智를 모른다 말입니다. 다시 우리가 특히 신라, 신라의 천년고도인 서라벌(경주)에서는 꼭 정법이 다시 빛나야 합니다. 불교의 선구가 꼭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앎과 동시에 우리가 수행修行을 해야 한다 말입니다. 수행.
바로 알면은 참선 아님이 없습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을 염한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이 저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단순히 그때는 (방편)염불이지만은 자성관음自性觀音이라, 내 자성 자비도 관음이고, 부처님의 무량공덕이 나한테 갖추어있다, 이렇게 하고 염불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바로 염불念佛인 동시에 선禪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공연히 필요없이 자꾸만 갈라버립니다.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본래적으로 바로 회통會通이란 말입니다. 원통圓通입니다. 원래. 원통이 아니면 불법이 못된다 말입니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글고(아니고) 이렇게 생각할 때는 불법이 못된다 말입니다. 그러니깐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난 자리가 불법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참선하면은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화두만 의심하면 다 참선인 것이고, 또 염불이나 그런 것은 저 밑에 공부는 참선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상에 걸리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상을 떠나서 본체로 돌아가는 섭상귀체攝相歸體라. 본체에 돌아간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것도 참선 아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여태까지 믿어왔다고 생각할 때는 입으로는 하나님이 좋을테니깐 하나님을 불러도 좋지요. 그러나 생각자체는 아집과 법집을 떠나버린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님 덩어리다.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비록) 하나님을 외운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선禪입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이론을 배제하면 한말로 한다고 생각하면 본 성품자리를 안 놓치면 다 선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화가 하나로 종합적으로 통일되는 그런 시대란 말입니다. 공산주의도 또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또는 사회민주주의도 모두가 다 하나의 자리로 가야 한다 말입니다. 하나의 자리가 무엇인가.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로 가야 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안 가고서는 공산주의가 붕괴하듯이, 과거 인류 역사상 모든 주의나 정치제도가 다 붕괴하고 파멸되듯이 결국은 또 실패하고 만단 말입니다.
부처님 되는 공부 참 쉬운 공부입니다. 천지자연의 공부입니다. 천지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공부입니다. 내가 원래 부처이거니, 관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무슨보살이나 모두가 다 내 공덕을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부르는데 거기에 무슨 무리가 있습니까.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저 밖에서 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리가 생깁니다만 관음도 지장도 보현도 문수도 모두가 다 내 자성공덕自性功德이란 말입니다.
내 마음은 여러분이 지금 쓰고 있는 그 마음, 겉에 뜬 그 마음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범부가 쓰는 마음은 이것은 빙산의 일각도 못됩니다. 우리 마음의 저변은 바로 우주와 딱 닿아있단 말입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와 우리 마음의 저변과 지금 하나입니다. 우리는 업장 따라서 그런 광대무변한 마음의 바늘귀만한 끝으머리만 지금 쓰고서 강아무개 김아무개 박아무개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우리마음을 해방시키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해방시켜 드디어는 우리가 본래 부처이니깐 부처가 되어야 한다 말입니다. 부처가 못되면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부처가 못되면 또 사람으로 개로, 자기가 사는 업장 따라서 천만생 윤회한단 말입니다. 윤회는 절대로 이것은 방편설方便說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다 말입니다.(자업자득自業自得)
부처님 되는 공부 가장 행복스러운 공부입니다. 무상행복이 나한테 다 갖추어 있습니다.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말입니다. 어떠한 것도 다 구족된, 원만구족한 행복된 것이 우리 불성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믿어야 그래야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이것이 정견正見입니다. 바른 정견을 갔는다고 생각할 때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를 하면 화두선話頭禪이요, 염불을 하면 염불선念佛禪이요. 주문을 하면 주문선呪文禪이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부를때 하나님선이란 말입니다.
아 그렇더라도 공부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닌가. 공부하기가 가장 쉬운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계율도 욕을 하기 보다도 욕을 않기가 더 쉬운 것이고 말입니다. 음식을 더 많이 먹는 것보다 덜 먹기가 쉬운 것이고, 담배도 피우는 것보다 안 피우기가 쉬운 것이고 말입니다. 사실 어느것이나 제일 쉽단 말입니다. 제일 쉬우면서 돈도 덜 들고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고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눈동자에 가서 죽은 사람이 항상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에 그 원한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따라서 자기 몸뚱아리 사라질 때까지 내생에 생만 받을 때까지(생을 받아도) 사뭇 보복한다 말입니다. 개미 한마리 죽이면 개미 그 죽인 살생업 그것도 역시 우리한테 다 흔적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 말 한마디, 우리 행동하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에 흔적을 두는 것입니다.
금생에 우리가 부모님 연(인연) 만나서 사람으로 나올때까지 우리가 몸이 있었습니까. 몸이 아니란 말입니다. 일점혈육一點血肉이라, 하나의 업식業識뿐이란 말입니다. 업식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닌 것이 부모님 연緣 만나서 이와 같이 성장해서 사람이 되듯이 말입니다. 마음이라 하는 것은 자취가 없지만은 우리가 말 한마디 하면 그냥 거기다가 흔적을 둔다 말입니다.
무슨 병도 어떠한 병이나 우리 마음의 부조화不調和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원래 진여불성眞如佛性 가운데는 생사生死가 없거니 죽음이나 또는 아픔이나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완전무결한 것이 마음인데, 우리 중생들이 업장 따라서 잘못 생각하고 잘못 느끼고 잘못 행동하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병이 되고 또는 우리한테 모든 여러 가지 악조건이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선 부처님 믿는 분들은 꼭 바른 정견正見으로 해서 마음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훤히 풀어버려야 한다 말입니다.
풀어버리는 마음이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문수文殊의 지혜智慧입니다. 문수의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원수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러면 그렇게 되면 장사도 못하고 그러지 않는가. 설사 장사를 한다 하더라도 자기 고객들을 부처같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건 굉장히 번창하는 것입니다. 인상이 나쁘고 찌푸리고 해가지고 남이 안 따르는 것이지, 32상 갖춘 우리가 관세음보살님 같은 부처님 같은 모양을 해 보십시오. 누가 안 따를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그와 같이 모든 중생이 본래 하나다 생각하고서 독사를 대하나 범을 대하나 그와 같이 다 부처같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자비심에 놀래고 자비심에 두려워서 그 영악스러운 범도 우리한테 못 침범한다 말입니다. 꼭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공부하는 것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행복스러운 공부입니다. 가장 좋은 어버이가 되고, 가장 좋은 스승이 되고 가장 훌륭한 정치인들이 숭배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에게 가 있습니다만, 부처님 공부 자기가 하는대로 하시면 됩니다. 지장보살님을 외이시는 분들은 그렇게 외이시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무자화두 하시는 분들은 무자화두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자리다,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한 10년동안 하는 분에 대해서 자기가 지장보살님 한다고 그래가지고서 그거 그만두고 지장보살님 해야 한다. 이러면 불법佛法적인 혜택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둘이. 벌써 보살이라고 생각할 때는 문수보살이나 무슨보살이나 다 하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자리입니다. 다만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자리에서 자비를 위주를 할 때는 관세음보살인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원력을 위주로 할 때는 그때는 보현보살인 것이고, 또는 지혜를 위주로 할 때는 문수보살이란 말입니다. 또는 중생의 영혼을 인도해서 저 극락세계라던가 천상이나 그런데로 인도하는 그런 쪽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장보살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알으셔야 합니다.
원융무애한 무량공덕을 갖춘 부처님 지혜자리인데, 그런 공덕이 하도 무량공덕이니깐 한번에 다 말을 못하니깐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을 못하니깐. 자비를 위주할 때는 관세음보살, 또는 우리의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쪽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약사여래라 말입니다. 약사여래라. 이렇게 알으셔야 마음이 편합니다.
또는 저 불국사佛國寺 같은 장엄스러운 절에 가서 모신 부처님은 훨썩 더 영험이 있고, 이 자그마한 작은 데는 (부처님의) 영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벌써 불법佛法적인 혜택이 아닙니다. 작고 크고 대소시비大小是非를 떠난 것이 부처님 법 아니겠습니까. 대소시비는 우리 중생이 상相만봐서 붙힌 것이지, 본 성품에서는 그것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에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 이것이 최고다. 그래서 우리 불교인들도 더러는 잘 몰라가지고서 인본주의人本主義다. 따라서 인간이 최고다 하지만은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본래에서는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되겠습니다만, 석가와 둘이 아닌 것이니깐 분명히 천상천하유아독존이나, 현상적인 범부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상만도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이 되고자 해서 공부할 때는, 우리 마음이 부처님한테 한발 가까이 서면 가까이 선만치 우리 행복감도 더욱더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 구하는 것도 얻지 못했으니깐 불안스럽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한테 갖추어 있는 불안요소가 조금도 없는 그런 충만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생각하면서 진여불성자리에 걸음걸음 간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은 차근차근 충족이 옵니다. 충족이 와서 나중에는 그 충족이 도가 차근차근 깊어지면 그때는 있는 병도 사라지고 말입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 업장 때문에 금생에 받는 고난도 다 가시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약을 쓴다 하더라도 꼭 바른도리를 느끼고 약을 쓰십시오. 그러면 효험이 훨썩 빠른 것입니다. 바른도리를 느끼고 부처님공부를 바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왠만한 잔병은 즉시 물러간다 말입니다.
부처님공부하기 가장 쉽고 가장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정말로 천상에서 그 무량의 공덕을 갖춘 음악도 울려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만다라화曼茶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茶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이런 천상의 꽃도 우리한테 마치 비 오듯이 날리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있으면 그런 것이 도가 아니겠지만 우리 공부가 차근차근 나아가면 나아가진만치 천상공덕이 우리한테 온다 말입니다. 그러면 피로한 지도 모르고 세속적인 생각이 어디로 싹 가셔버린다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안 쉬고 안 쉬고 그런 상에 걸리지 않고 말입니다. 천상에서 그런 찬란스러운 꽃비나 천상에서 신묘한 음악소리에 들려오나 이런 것을 착着(집착)하면 또 공부가 안되는 것입니다. 착하지 말고서 그냥 부처님 자리만 일로지향一路志向해서 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우리마음은 차근차근 가벼워지고 더 지혜로와지고 건강과 모든 것이 다 차근차근 더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참 주지스님께서 여건이 이렇게 별로 안 좋으신 시중에서 단독주택도 아니고 여러모로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원력보살이십니다. 원력보살이 아니시면 저 큰절에 가서 편히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짐짓코 일부러 이러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이 우리 사부대중의 동참으로 해서 부처님을 모신 것도 모두가 다 참다운 반야(문수)의 지혜, 보현의 서원, 또는 지장보살님의 서원을 우리가 일반중생들한테 나타나 보이시기 위해서 이런법회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문수의 지혜, 보현보살, 또는 약사여래 모든 부처님의 그런 일체공덕이 나한테 원만히 갖추어있다. 이렇게 느끼셔야 점안불사에 참여하신 의의가 있습니다.
점안點眼은 꼭 뒤에 모시는 부처님한테 점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자성불自性佛에 점안을 하는 것입니다. 법회에 참여하실 때마다 꼭 자성불에 점안을 하셔야 합니다 ! 자기 부처에 경각을 시켜가지고서 그래가지고서 부처와 '나'와의 사이에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일자무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나 말입니다. 또는 박사학위를 가진 그 사람이나 부처와 자기하고 차이는 조금도 틀림없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뿐만 아니라, 이런 공간에도 역시 부처님, 부처님의 성품이 가득차 있습니다. 어디에나 언제나 충만해 있고,또는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고 말입니다. 모두가 다 갖추어 있기 때문에,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문수의 지혜로 보고, 또는 보현, (지장)의 서원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서원이 크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 괴로움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괴로움이) 어째 없는 것인가 ?
내가 괴로우면 괴로운 자체가 모두가 다 우리 업장業障을 빨리 녹인다 말입니다. 괴로움도 실패도 죽음도 모두가 다 업장을 녹이는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따라서 어떠한 것도 우리한테 손해가 안온다(없다) 말입니다. 자빠져도 행복이고, 넘어져도 행복이고, 죽어도 행복이란 말입니다. 이래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요, 시시시호시時時是好時라, 또는 시시時時 때때로 그때는是 호시好時 좋은 때란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때나 조금도 손해가 없습니다. 당장에 교통사고 만나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무 손해가 없습니다. 순간 바로 자기 업장 따라서 또 생生을 받는다 말입니다. 자기가 죽어지면 그냥 자기 업식業識은 죽어있는 자기 시체를 본다 말입니다. 내 몸뚱아리는 내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남하고 우리가 불화하고 분열하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상相을 여의어야 그래야 참다운 불법佛法입니다. 상을 여의는 공부가 불법이란 말입니다. 상相을 여의는 공부가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참다운 서원誓願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오늘 법회에 참여하신 공덕으로 꼭 금생에 자성불自性佛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49재를 맞이하신 경주후인 최OO영가이시여. 김명유인 김OO 영가이시여. 오늘 (삼존불 점안) 회향불사의 무량공덕으로 부디 극락왕생極樂往生 상품상생上品上生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19920419 청화큰스님 경주 고불선원 삼존불 점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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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큰스님께서 1992년 경주 고불선원 삼존불 점안식에서 법회를 하시고 흥륜사 3년결사 소참법문을 하시었습니다.
고불선원 법문이 큰스님의 주옥같은 법문입니다만 잘 알려지지 않은 법문입니다.
기존 텍스트가 없어 유튜브 영상작업으로 녹취하였습니다. 영상법문은 아침에 공개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스스로 우리 자성불自性佛에 점안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