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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절 마지막 주일)
부활의 증인들
행1:6~14; 벧전4:12~14; 5:6~11; 요17:1~11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일곱 주간의 부활 시기를 보냈습니다. 우리 삶은 한 가지 층으로 되어 있지 않지요. 우리는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심지어 그렇게 귀중한 사랑 한 가지만으로도 살 수 없지요. 우리는 살면서 여러 층의 삶을 경험하게 되는데, 부활은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층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궁극적인 것까지 찾아 들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같은 절망의 시간에도,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마른 뼈와 같은 상황 속에도, 심지어는 냄새나는 무덤 앞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리아에게, 그런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그런 도마에게, 그런 바울에게,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기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육신의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라는,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 아우구스티누스도 부활시기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곳에서 안심하고 노래할 수 있도록, 아직은 걱정 많은 이 세상에서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외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걱정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년 부활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광야 같은 삶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광야 가운데서 노래하는 이유는,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비록 질그릇 같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우리의 삶이지만, 그 안에 보배 되시는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을 가지셨던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 살아계신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육신을 가지셨던 예수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부활의 능력을 가장 확실하게 알았는데, 깨지기 쉬운 자신의 육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으로 “우리가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의 온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사방으로 죄어드는 일도 있을 것이고, 답답한 일도 있을 것이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이런 일들이 완전히 사라짐으로 우리가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결국 우리를 굴복시키고, 우리의 삶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것들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들이 될 뿐입니다. “질그릇 같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우리의 삶에 보배 되시는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 이것이 바울이 경험한 부활의 능력이었고, 부활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분명히 알았던 이 능력을 우리는 왜 알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여전히 그저 질그릇으로만 살고 있을까요? 왜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할까요?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고 지적인 동의로 받아들인 이 ‘믿음’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진정 힘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의식을 변형시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시간은 양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간만 보낸다고 변형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자꾸 되새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수많은 삶의 역설과 모순을 지나, 믿음과 의심이 교차되며 자리 잡게 되는 의식의 변형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깊어지는 과정이며,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고,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우리가 좀 더 선명해지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좀 더 단순하게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신과 의식을 좀 더 넓게 확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보이지 않는 영의 활동에 좀 더 과감하게 문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만나는 모든 사건은 바로 이것에 반응하고 응답할 수 있는 좋은 연습장입니다. 계속 넘어질 것입니다. 계속 걸릴 것이고, 계속 붙잡힐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다시 한 가지 초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시는 “주님”으로 돌아갑니다. 내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또 다른 어떤 대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대상의 근원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향심기도를 하시는 분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은, 여러분이 뭔가에 걸려 넘어졌고, 뭔가에 계속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 깊이에서 주님, 하고 부르십시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지나가게 놓아두십시오. 평소 우리가 하는 일은 이렇게 우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현존이, 더 이상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오늘 사도행전 1장의 기사는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승천기사인데, 주님은 제자들(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라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를, 여러분은 예수님이 문자적으로 하늘 공간으로 들려 올라갔다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최종적인 변형의 모습으로, 더 이상 우리가 볼 수 없는 영의 영역으로 들어가셨다는 은유입니다. 사실, 구약 전승에 보면, 승천한 사람이 예수님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 모세도 승천했다고 했고, 에녹, 엘리야, 이사야 등 승천한 인물들이 몇 명 나옵니다. 그래서 모세 승천기, 엘리야 승천기, 이사야 승천기 같은 외경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들에게 승천은 이해하기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굴레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하늘 아버지의 존전으로 이동하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천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으로 승귀한 것인데,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하늘로 옮겨졌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그분과 멀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해 더 이상 예수님의 발현/현현을 볼 수 없이, 혼자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전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지 않는 어둠의 시간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감각으로는 더 이상 잡히지 않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감각의 밤”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멍하니 빈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전해준 이야기,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라는 전갈은 “하나님 부재의 시간”을 더욱 선명히 부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계속 읽고 있는 베드로전서는 오늘 말씀에서,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권고를 합니다.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이 불길이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전서는 초대 교회가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가던 시절, 교회는 주변의 이교도들로부터 질시를 받게 되고 점점 더 심한 편견과 적대와 멸시를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을 때 기록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는 로마에서는 네로 황제의 무서운 박해가 막 시작되던 때였습니다.(주후63년경)(어떤 학자들은 주후 96년 경.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소아시아에서 행하진 박해 시기라고도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는 실루아노의 손을 빌어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고난에 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적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그네와 같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미래는 지금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망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의 시대, 불투명하고 불안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현재의 고난을 넘어 희망 가운데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 지금 여기를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으로 온전히 살아가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전서를 받아 읽는 사람들의 상황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누리는 현재의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는 고난과 어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인 요한복음17장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갖는 만찬에서 긴 고별 연설(13장~16장)을 끝내고, 하나님께 남겨진 제자들을 부탁하는 긴 기도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 속에 제자들을 남겨두고 가시는 예수님의 절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이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해서, “대제사장의 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깊이 다가오는 말씀은 11절 말씀,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 속에, 세상 속에 남겨진 제자들이 경험해야 할 상황이 드러납니다.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런 본문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으로 누렸던 기쁨과 희망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시간, 하나님의 부재를 견뎌야 하는 시련과 시험의 시간, 하나님의 능력이 체험되지 않고 건조함과 어둠만 드리워진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작별하는, 오늘 사도행전1장의 장면과 평행되는 마태복음 본문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마28:16~17)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접하면서 어떤 제자들은 의심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심하다”라는 헬라 말의 본디 의미는 “주저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도마가 의심하였던 것처럼,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심하고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도 이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느 순간 뭔가 좀 잡히는 것 같다가도, 곧 이어서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막막함이 가로막습니다. 하루하루 우물에서 생수를 퍼 마시다가도 어느 순간 바싹 마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뭔가 미래가 좀 밝게 보이는 것 같다가 금방 어둠에 휩싸이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도 어둔 밤과 사막을 체험하고 지나왔습니다. 이런 역설과 모순 속에서 그들은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삶의 깊이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의심과 주저함은 신앙의 반대말이 아니라 신앙 그 자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린 완벽한 밀밭이 아니라 가라지와 함께 자라는 밀밭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가라지를 싹 없애버려야 완전할 것 같은데, 주님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십니다. 이 어정쩡한 동거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가 나는 족족 그것을 뽑아내려고 안달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자신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가라지를 두고 볼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가라지를 다 뽑지 않으면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가 어떻게 삶을 만족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완벽한 존재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밭에서는 오직 걱정에 가득 찬 밀들만 자라게 됩니다.
이들은 가라지가 있는 곳에는 주님의 현존은 있을 수 없다고, 주님의 은총은 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기뻐할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가라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주님은 그 가라지를 간직하고 잘 견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 묻는 종들에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지요.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17:29~30)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곁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더라도, 그 옆에서 자라는 밀에 마음을 두는 것이지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지 않는 시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시간, 시련과 시험의 시간은 우리의 생애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편안한 시간, 안전한 시간이 날줄이라면, 이런 부재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의 삶과 신앙의 씨줄이 되어 우리의 삶과 신앙을 엮어갈 것입니다. 가라지와 밀은 함께 자라는 법입니다. 이런 모순과 역설 속에서 우리 가장 깊은 곳에 그리스도가 발견되어 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 고난과 영광, 죄와 구원, 땅과 하늘이라는 역설 안에서 홀연히 드러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기분과 느낌으로,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우리 삶을 판단하지 않고 고요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로 느껴지는 그 시간을 가만히 만나다 보면 그 시간 자체는 고통스럽게 느껴지더라도 그 고통이 어쩌지 못하는 우리 존재의 더 깊은 부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고통스런 기분과 느낌에 매몰되지 않고, 또 그 기분과 느낌을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 느낌과 생각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 느낌들, 그 생각들이 우리 존재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더 기억할 것은 이 시간에도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증인은 내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증인은 입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이러한 시간들을 우리가 더불어 함께 견디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부재의 시간, 주님 승천의 시간에,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이 모든 일을 이루라고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으로 인해 질그릇 같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걱정을 맡기고(떠나보내고, letting go), 정신을 차리고(넵시), 깨어 있는 것! 이것이 오늘 여기서 우리가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