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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9;32-43, 룻다와 사론과 욥바. 2024. 3. 17.
먼저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32절에 때라는 표현으로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러면 어느 때일까요? 9;31절에,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바로 교회가 평안하며 든든히 서가고 주님을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수가 더 많아지던 때입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닙니다. 이유는 주 예수의 복음의 능력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룻다에 사는 주의 백성들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애니아는 중풍 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8년이 지났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마음이 아파서 에니아에게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 네 자리를 정돈하라. 중요한 말씀으로 선포를 합니다. 그랬더니 곧바로 그 선포와 함께 에니아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묶임에서 놓임을 받는 기적의 은혜 때문에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애니아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고침과 회복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영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룻다에 사는 에니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내용은 욥바에 사는 다비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또 베드로가 욥바로 갔습니다. 욥바는 룻다는 가까운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는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룻다에 계시는 베드로를 모셔오려고 두 사람을 룻다에 보냈습니다. 이유는 욥바에 사는 다비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때에 죽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룻다에서의 사건이 있었고 이때에 또한 욥바에서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사람들과 제자들이 베드로를 모시고 다락방에 올라갔습니다. 상황은 거기에 모인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이며 도르가인 그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사람을 다 그 방에서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일어난 다비다를 베드로가 손을 내밀일으키고 성도들과 모인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고 주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욥바에서도 이 기적의 광경을 본 사람과 온 욥바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고 주께로 돌아 왔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 여러 날 있었는데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 것이 본문의 배경과 내용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1. 때입니다. 여러분, 항상 때가 중요합니다. 은혜도 때가 있고 축복도 때가 있고 어려움과 고난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는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가 있습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입니다. 오늘도 룻다에 때가 있었고 욥바의 때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때에는 카이로스의 때가 있어야 은혜와 문제해결이 됩니다. 당시의 이 때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기적이 상식이 되는 시대이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신앙과 믿음이 회복된 사람들의 기도에 따라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고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감당해야할 사역은 언제나 변함없이 해냈던 사람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놀라운 말씀을 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로마에 복음을 전했고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베드로 전 후 서를 기록했는데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뒤에 자신의 몸을 감추고 복음만을 최선으로, 성실하게 전파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 이후에 베드로의 삶음 오직 예수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유대인들을 피신하고 나중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이에 베드로는 복음을 위하여 사방으로 두루 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 곳이 룻다이고, 욥바입니다. 이 때입니다. 때라는 표현을 통하여 베드로의 룻다 방문이 초대교회가 평화롭게 성장하고 있는 시기이었습니다. 8;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많아지던 때인데 이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러분, 항상 은혜와 충만은 또 다른 사건이 따라옵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을 때에 은혜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죽음이라는 절망과 낙심을 주는 사건이 발생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1-1. 은혜의 때와 부흥의 때에 그 때를 소멸시킬 수 있는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때가 있고 나쁜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호사다마란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좋은 일에는 흔히 방해되는 일이 많거나 그런 일이 많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방해되는 일과 방해 받는 일이 많이 발생됩니다. 오늘 룻다에서 8년동안 중풍으로 고생한 애니아라가 나타나고 욥바에서는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계속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회가 날마다 평안하고 든든히 세워져 가면 얼마나 기쁠까요? 평탄한 신앙생활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돌아오니까?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옵니다. 유대인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밤에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삶을 삽니다. 출애굽의 해방이 있고 가로막는 홍해가 있습니다. 환호성이 있으면 슬피 울 때가 있습니다. 이 것을 가리켜서 높은 산이 잇고 골짜기가 있다고 합니다. 평탄함이 있고 웅덩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베드로가 두루 다니고 살피게 됩니다. 여러분, 은혜와 부흥은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는 항상 주어지며 평안과 든든함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메임이나 죽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질병과 죽음은 평안 뒤에 뒤 따라 오고 질병과 죽음은 세워짐 뒤에 뒤 따라 옵니다. 언제나 은혜와 축복을 소멸시킬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상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알기 때문이고,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법과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무슨 반전일까요? 메인 것이 풀어지고 죽음이 떠나는 반전입니다. 그래서 눅5;3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케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일 뒤에 메인 것과 신앙의 삶 가운데 절망과 걱정이 있습니까? 곧은 것 뒤에 굽은 것이 있습니까? 주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반드시 놓임을 받고 자유 함을 얻고 승리케 되고 평탄케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때에 대한 첫 번째 해석입니다.
1-2. 부흥과 은혜의 때와 시험과 시련의 때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두루 다니며 살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피고 영적인 혜안으로 살펴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속적으로 살피고 은혜와 부흥을 생각합니다. 시련과 시험을 이겨내고 치료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점검을 합니다. 여러분, 신앙의 모든 일들 중에 믿음의 사람이 해야 할 일 중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지속적인 살핌과 지속적 돌봄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다녔습니다! 예방하기 위해서 다녔고 이미 일어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녔습니다. 그래서 8년이나 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치유의 역사를 드러냈습니다. 룻다와 욥바는 유대 중부지역으로 멀지 않은 지역입니다. 이곳에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초대교회의 전도를 통하여 많이 뿌리 내린 곳입니다. 그러면 룻다와 욥바에 어떻게 믿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사역 중에 룻다와 욥바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드렸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행8;40절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라에 이르니라. 빌립이 복음을 전한 아소도와 가이사라 중간에 룻다와 욥바가 있습니다. 빌립을 통하여 더욱 복음을 받아드리고 믿음을 확고히 했던 사람들이 룻다와 욥바에 살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룻다에 오기 전 이미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걸쳐서 왔습니다. 이방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방문하고 시찰을 했습니다. 행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두루 다니고, 살피고 관리를 합니다. 여러분, 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베풀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도와주고 거기까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피고 잘 되어 가는지? 잘 성장하는지? 잘 부흥이 되는지? 모자라는 것은 없는지? 더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무슨 방해되는 것이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두루 다녔습니다. 룻다는 오늘날 룻(Ludd)이며 예루살렘 북서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곳입니다. 지중해 해안도시 욥바로 부터 동쪽으로 약 17-18km에 위치한 비옥한 땅입니다. 욥바는 지중해 해안도시입니다. 지속적인 돌봄이고 지속적인 관심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도 지도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울 때 마다 한번만 그 곳에 간 것이 아닙니다. 세우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하게 세워질 때까지 찾고, 전하고 가르치고 실행했습니다. 사탄의 위협으로부터 구했습니다. 자신은 모든 위협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을 받고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런데 현재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고, 죽음의 위협이 보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과 삶을 지속적으로 점검을 하고 살피고 늘 새롭게 하시는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견고하게 세워지며 늘 승리가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이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드러나야 할까요? 예수님의 3가지 사역이 나타나야 합니다. preaching, teaching, healing입니다, 3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이 사역을 하시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역 중에 healing이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 자신의 문제를 풀어줍니다. 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먼저 오늘 여러분의 모든 문제가 힐링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힐링이 되어야 내 자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렇다면 애니아와 다비다는 어떻게 다시 일어날까요? 어떻게 힐링이 되고 살아날까요?
2-1. 룻다의 애니아입니다. 에니아에게 베드로가 선포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너를 일으키신다. 예수님께서 너를 치료하시고 일으키신다고 베드로는 믿고 이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자신이 낫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낫게 하심을 믿었습니다.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일으키시는 것과 낫게 하시는 주체는 주님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8년이나 누워있던 침상에서 스스로 일어나라고 외칩니다.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 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 년이라. 애니아는 칭찬받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애니아는 성도들 중 한 사람입니다. 팔 년 동안 중풍 병을 앓았지만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왜 8년을 강조할까요? 병의 햇수는 이웃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외롭게 살아온 날을 의미합니다. 행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40년 동안 힘들었습니다. 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나면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눅 13:11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8년 동안 괴롭힘을 받았습니다. 모두 고생을 하고 고통을 받았고 아픔을 겪었던 세월입니다. 애니아는 8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병상에 누워서 팔 년을 지냈습니다. 거동을 할 수 없는 중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8년의 멍에가 한 순간에 벗겨졌고, 고통의 8년을 한 순간에 벗어났습니다. 여러분, 메이고 속박을 받고 한스러운 지난 세월이 있습니까?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예배 가운데 말씀의 능력과 주의 은혜와 내 자신의 사모함으로 고난의 힘든 세월이 끝이 나고 답답함과 말 못함이 끝이 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낫게 하시고 치료하시고 고치십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선별하여 기록을 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요. 누가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누가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의사입니다. 의사는 진단을 하고 진단에 따라서 치료와 수술을 합니다. 그리고 살 수 있을까? 일어날 수가 있을까? 회복이 되고 치료가 되고 낫게 되는 것을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기록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주님께서 이 모두를 고쳤다고 합니다.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 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28: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나았다고 합니다. 눅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눅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모든 사람이 나았습니다. 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앓는 사람을 고쳤다고 합니다. 9;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고치실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9;42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낫게 하셨습니다. 14:4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고쳐서 보냅니다. 22: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만져서 고치셨습니다. 여러분,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의 능력으로 고쳐지지 않는 것을 예수님의 능력이 고쳤다고 선언합니다. 8년 된 그 불치병을 고쳐주신다는 베드로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선포에 응답하시고 완벽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 역사는 2000여 년 전이나 현재도 동일합니다.
베드로가 또 무엇이라 합니까? 자리를 정돈하라. 이는 일어나라는 뜻이고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자리에 대한 지난날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리를 정돈하라는 애니아에 대한 베드로의 지시는 중풍환자를 고치며 명령했던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마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여러분, 치료하고 회복을 시키더라도 끝까지 매듭을 지어 주어야 합니다. 애니아는 그 선언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스스로!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네 자리를 정돈하라! 오랜 세월 누워있던 자리, 무기력과 낙담으로 누워있던 자리를 스스로 정돈하고 정리하고 다시 일어나라! 마음도 정돈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애니아가 자리를 정돈하고, 베드로 앞에 앉습니다. 애니아는 인생이 치유가 되고, 마음이 치유가 되고 생각이 치유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리를 애니아처럼 정돈하셔서 인생이 치유가 되고 마음이 치유가 되고 생각이 치유가 되고 믿음이 치유가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다비다야 일어나라! Tabitha! get up! Arise! 베드로의 발걸음은 이제 룻다에서 16km떨어진 욥바로 옮겨집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들려온 한 여인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아람어는 다비다이고 헬라어는 도르가입니다. 베드로는 지체 하지 않고 그 곳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다락방으로 안내했고, 그 곳에는 많은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전 고인이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내어 보여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다비다는 심히 큰, 플레레스 full, 구제와 선행한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헬라어 이름, 도르가는 사슴이라는 뜻입니다. 사슴처럼 맑은 영혼의 눈입니다. 36-37,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그녀가 죽자, 그녀에게 사랑을 받았던 과부들이 마음이 너무 슬퍼 베드로 사도에게 왔습니다. 이미 사람은 죽었으나 위로받고 싶었고 장례식을 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녀의 생애는 따뜻한 생애이었습니다. 홀로 사는 여인들의 가난한 마음, 상한 마음, 찢긴 마음, 구겨진 마음을 펴주었던 다비다입니다. 아름답고 소중했던 생애입니다. 죽을 수 없었습니다. 죽을 수 없기에 베드로는 또 다시 외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Ταβειθά, ἀνάστηθι. 아나스테씨! 그런데 이 선포로 다비다는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다비다의 상황은 애니아의 상황보다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중풍병도 아니고 이미 이생에서의 삶이 끝나버린, 죽음을 맞이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기도하며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통해 주님께서는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려내시는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42, 온 욥바 사람들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끝이 난 인생도 살립니다.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Tabitha가 get up이 되고 Arise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건 속에서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죽음 뒤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36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다비다는 여제자입니다. 제자라는 뜻의 헬라어 마쎄트리아의 여성형 마쎄테스는 여성 제자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며 실천하는 삶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제자 됨이 선행과 구제라는 덕목으로 삶 속에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비다이었기에 죽음이후에도 사람들로부터 결코 잊혀 지지 않고, 룻다에 있던 베드로까지 달려오게 했습니다. 그녀는 결국 다시 소생하게 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그런 그녀를 통하여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오늘 죽음을 맞이했던 다비다처럼, 우리의 죽음 이후에 내려집니다. 진정한 주님의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기억되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보이는 선행과 구제의 상황을 외면하지 말고, 실천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헬라어 도르가는 가젤 영양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제자로 불렀습니다. 신약성경에 여선지자, 여 제자, 여 집사가 있습니다. 여선지자는 프로페티스 προφῆτις 안나입니다. 과부가 된지 84년 동안 성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나는 고상한, 은혜로운 뜻입니다. 여제자, 마쎄트리아 μαθήτρια는 다비다, 도르가인데 암사슴입니다. 가젤입니다. 여집사, 디아코노스 διάκονος, 뵈뵈 Phoebe는 빛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르가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바느질을 하는 사람입니다.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그녀는 섬기는 제자, 바느질하는 제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옷을 지어주었던 사람입니다. 죽었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 바늘 한 바늘 마음의 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상처 나고 찢어진 심령을 꿰매어 주었고, 누더기 된 감정과 쪼각난 마음을 꿰매어 주었고 구겨진 마음은 다려주고 더렵혀진 마음은 빨아준 도르가 입니다. 삶은 고달파도 영혼은 따뜻하고 가젤 양처럼 심령이 맑았던 제자이었습니다. 그런데 과부들의 눈물이 그녀를 살려냈고 베드로의 외침이 그녀를 살려냈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녀를 살려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자신에게 외칩니다! 내 속의 아름다움아, 깨어나라~~ 내 속의 순수함아 깨어나라~~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비다! 아나스테씨! 그러면 다비다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언어의 습관과 눈과 얼굴의 표정과 습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적인 표정과 언어와 눈빛이어야 합니다. 다비다의 마음과 도르가의 사슴의 눈입니다.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님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거룩한 아름다움이 일어나고 깨어나고, 사랑이 살아나고, 바느질 솜씨가 있어야합니다. 얼마나 힘들까? 걱정해주는 마음? 다비다의 마음입니다. 꿰매어주고 따뜻하게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는 바늘의 행함입니다. 찢어진 마음을 꿰매어 색동저고리로 만들어주는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속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이 다시 깨어나고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영광입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께 영광이 될까요? 나를 통해서 주님을 보게 하고 나를 통해서 주님께로 향하고,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면 이것이 주님께 돌리는 영광입니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 가니라. 사론은 남쪽 욥바와 북쪽 갈멜산 사이에 위치한 평야 지역입니다. 사 35: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 65:10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사론은 룻다와 욥바 근처의 한 성읍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대상 27:29 사론 사람 시드래는 사론에서 먹이는 소떼를 맡았고 아들래의 아들 사밧은 골짜기에 있는 소떼를 맡았고, 사 33: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 마르고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 갈멜은 목엽을 떨어치는도다. 사론의 아름다움, 사론의 양떼가 사론의 사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룻다와 사론 사람들이 다시 귀한 삶을 사는 애니아를 보면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온 욥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도르가를 보면서 주를 믿었습니다. 이 것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9:41-42,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회복과 치유와 다시 일어남으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주께 돌아오게 하시는 은혜가 항상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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