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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평택아름다운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agenda21
2001년 평택호 물줄기탐사 자료집
1.평택호 물줄기의 역사와 지리
신석기시대 이후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농경과 목축에 적합하고 생활조건이 우수한 삶의 터전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였다. 농경사회가 발달했던 근대 이전의 향촌사회가 대부분 장풍득수(掌風得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노력의 산물이다. 장풍득수(掌風得水)의 개념은 고대국가의 통치이념에도 반영되었다. 전 근대의 동양의 왕들에게 통치자의 덕목으로 중요시되었던 치산치수(治山治水)의 개념이 그것이다. 이 논리는 산을 다스리고, 물을 다스리는 능력이 곧 나라와 백성을 평안케 하는 능력이라는 말이었다. 치산치수(治山治水)에서 치수(治水)는 생활에 필요한 식수를 공급함과 더불어 농경(農耕)활동에 필요한 농수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 시대에 농경의 성공은 국가경제의 안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구조가 중앙집권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물은 농경의 필요성 뿐 아니라 세곡(稅穀)운송과, 인력과 물자의 운송수단으로 중요시되었다. 특히 중앙집권체제가 발달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운영에 있어서 내륙수로(水路)나 해로(海路)의 중요성이 더더욱 강조되었다. 그래서 조선은 전국의 해로(海路)와 수로(水路)를 개발에 힘을 쓰고, 조운(漕運)제도를 정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강과 하천에 나루(津)와 포구(浦)를 정비하였고, 강어귀에는 창(倉)을 설치하여 조세를 보관하고 운송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수로(水路)와 해로(海路)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철도와 도로 항공기에 밀려 중요성이 감소되었지만, 해로(海路)만큼은 아직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평택호는 안성천 하류에 위치한 호수로, 1973년 아산만 방조제가 1차 준공되고 1976년 최종적으로 완공 된 후 만들어진 담수호이다. 평택호에는 큰 하천으로 안성천, 진위천이 흘러들고, 작은 하천으로오산천, 황구지천, 통복천, 선원천, 청룡천, 홍경천, 입장천, 소사천 등 20여 개의 작은 하천이 흘러든다.
그 중에서 안성천은 안성군 삼죽면 내당리에서 발원하여 현덕면 권관리까지 총 연장 59.5Km(또는 66.4km)에 달하는 중급규모 이상의 하천이다. 이 하천은 여러 개의 지류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흐르다가, 오성면 창내리에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진위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흐른다. 안성천은 조선시대에 내천 또는 소사하(素沙河)라고 불렸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내천이라고 기록된 것이 보이며,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소사하라고 기록된 것이 근거이다. 이 하천은 1973년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 만해도 바닷물이 안성군 진사리 부근까지 역류하면서, 하천 주변에는 포(浦)와 나루(津)가 발달하였고, 풍부한 수산물을 바탕으로 상업도 발달했던 평택호의 가장 큰 물줄기였다.
진위천은 용인시 이동면 화산리의 시궁산에서 발원하여 평택시 고덕면 창내리에서 안성천과 합류하여 평택호로 흐르는 하천이다. 이 하천은 진위면 하북리 대정촌에서 오산천과 합류하며, 서탄면 회화리에서 황구지천과 합류한다. 진위천은 조선시대에 장호천이라고 불렸으며, 진위현의 세곡운송이나 물자교류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하천이었다. 그래서 하천 곳곳에는 나루와 포구 그리고 조창(租倉)이나 시장(市場)이 형성되었다.
황구지천은 수원 북쪽 수리산과 백운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장지천, 원천천, 수원천 등이 수원 대황교동에서 합류하여 형성된 하천이다. 총 길이는 32.50km의 비교적 작은 규모이지만 하류지역의 수량이 1400sec나 되는 규모 있는 하천이다. 황구지천은 서탄면 금각리에서 진위천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덕면 창내리에서 안성천과 합류한다.
이렇게 여러 하천이 모여 형성된 안성천은 1971년부터 시작된 평택지구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으로 1973년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평택호를 만들었다. 평택호의 물은 비옥한 평택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평택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대규모 국가공단 및 항만 등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평택호의 물줄기>
2.평택호의 나루와 포구들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기 전만 해도 평택호 물줄기에 속하는 안성천, 진위천, 황구지천 등에는 바닷물이 소사동 위쪽까지 역류하고, 하천 주변에는 포(浦)와 나루(津)가 발달하였다. 본래 포(浦)와 진(津)은 수로교통의 요충지로 이용되었던 촌락으로 지방 군(郡), 현(縣)의 하부 행정구역이었다. 안성천 변에 있던 포(浦)로는 군물(문)포(軍勿浦), 신덕포, 고잔포, 시포, 백석포, 편섭포, 둔포, 신흥포, 신성포, 황구포, 해창포 등이 있었고, 진위천 변에는 황구지천과 만나는 지점에 항곶포를 비롯하여 동청포, 오산부근의 위포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나루에는 동고리 부근의 이포진, 다라고비진, 계두진, 만호리의 대포진 등이 있었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세곡(稅穀)의 운송은 국가재정의 안정적 확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이 시대의 세곡 운송은 경기도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조운(漕運)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수운(水運)이 발달한 내륙이나 해운(海運)이 발달한 해안가에는 조창(租倉)을 짖고 세곡을 보관하였다가 세곡선을 이용하여 경창(京倉)으로 운반하였다. 그래서 안성천과 진위천 그리고 각 지류에는 조창(租倉)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0대 조창(租倉)을 두고 주변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으고 운반하도록 하였다. 그 중 하양창이라는 조창(租倉)이 팽성읍 노양리에 있었다. 그래서 노양리는 조선 초기까지 하양창을 관할하고 주변의 염전을 감독하기 위하여 경양현이라는 독립된 군현(郡縣)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하양창은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의 공세창으로 옮겨갔고, 하양창을 대신하여 공세창이 전국 8대 창(倉)의 하나로 충청도 지역의 세곡을 모으고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조창과 함께 각 지역에는 주변의 세곡을 모아 보관한 뒤 큰 조창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두었던 작은 창(倉)들이 설치되었다. 평택시 합정동 통미마을에 있었던 남창, 고덕면 해창리에 있던 해창(海倉), 현재의 둔포면 신남리에 있는 남창, 그리고 아산시 인주면에 있는 공진창 등이 그것이다. 이들 조창(租倉)에는 세곡(稅穀)을 달구지나 지게 등으로 운반해오는 사람들과, 세곡(稅穀) 운반을 위해 관선을 타고 온 선원들(사공이나 격군)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숙식과 상업활동을 하는 상인들이 몰려들어 북적거렸다. 특히 공진창(貢津倉)은 선박수가 12척에서 25척이나 되었고, 충청남도의 세곡을 이곳에 모아서 경창(京倉)으로 운반하였기 때문에 번화한 시가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①항곶진 :황구지천의 본래 이름은 항곶천이었다. 1899년 진위군 읍지(邑誌)에도 현(縣) 서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예전에는 항곶포(項串浦)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항곶진은 지금의 평택군 고덕면 황구지리에 있는 황구지나루를 말하는데, 이 말은 황구지천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황구지천은 수원지역에서는 진목천, 상류천, 하류천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서탄면 내천리에서는 내천으로 불리고, 황구지리 부근에 와서야 황구지천으로 불린다.
항곶포는 다리가 건설되기 전만해도 화성군 팔탄면과 양감면 사람들이 진위방면으로 건너가는 나루였다. 또 아산만 방조제 건설 이전만 해도 항곶진에서 북쪽으로 약 4km 위쪽에 위치한 내천리까지 바닷물이 역류하여, 해마다 봄, 가을이면 고깃배나 새우젓배들이 아산만을 통하여 항곶포나 내천리까지 들어와서 물물교환을 하였다고 한다.
②동청포 :고덕면 동청리는 조선 초까지만 해도 양성현 땅이었는데, 조선 태종 17년(1417)에 수원부에 내속되었다가, 18세기 경에는 진위현 고두면에 편성된 지역이다. 동청나루터는 지금의 동청교 아래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다리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
동청나루는 진위와 송탄방면에서 청북면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나루였으며, 경부선 철도가 건설된 뒤에는 서울이나 삼남지방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서정리역에서 내려 청북으로 건너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또 이 곳은 바닷불과 민물이 합류하는 지점이어서 붕어, 메기, 우여, 뱀장어, 바다새우 등 다양한 어종이 잡혔으며, 아산만을 거쳐 새우젓배, 조개젓배, 왕새기젓배가 들어와서 나루터 근처에는 장(場)이 서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동청나루 인근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부재지주나 일본인 지주들의 토지가 많았는데, 이들이 징수한 소작료도 이 곳 동청나루를 통하여 실어갔다.
③다라고비진 :다라고비진은 고덕면 궁리에서 신리로 넘어가는 지금의 궁안교 자리에 있던 나루였다. 지금도 이 지역 주민들은 소청나루 또는 다루지나루라고 부르는데, 다라고비진은 다루지나루의 옛 이름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래 다라고비진에서 북쪽에는 고덕면 해창리가 있는데, 조선시대 이곳에는 세곡(稅穀)을 보관하던 해창(海倉)이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해창리에도 해창나루가 있었지만 구한말 이곳에 소청목교가 만들어지면서 큰배가 드나들 수 없어서 해창나루는 기능을 상실하고 대신 다라고비진이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래서 다라고비진에는 덕적도 등 서해안의 주변 도서지역에서 조개젓, 새우젓, 소라젓배가 들어와서 어물과 곡식을 바꿔가는 물물교환을 하였다고 한다.
④이포진 :이포진은 안성천과 진위천이 합류하기 전인 고덕면 동고리 근처에 있었던 나루였다. 이 나루를 이 지역 사람들은 아래소청나루라고도 부르고, 아래 다루지나루라고도 부른다. 이포나루는 조선시대 충청도 땅인 평택현(현 팽성읍)의 석봉나루로 건너가는 나루였다.
⑤군문포 :평택시 군문동에 있었던 군문포는 본래 이름이 군물포(軍勿浦)였다. 그러던 것이 청일전쟁 때 청(淸)나라 군대가 이 곳을 통하여 들어와 주둔하면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온 곳이라고 하여 군문포(軍門浦)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군문포는 조선시대에 경기도 땅 진위현에서 충청도 땅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관문(關門)이었다. 1899년 진위군 읍지(邑誌)에도 “현(縣)의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대로(大路)가 충청도 땅으로 통한다“고 기록되었다. 본래 진위에서 평택현에 이르는 길은 삼남대로(三南大路)를 따라 내려오다가 갈원(현 칠원동)에서 동삭동 모산골을 지나 동삭교를 건너 통복개(동)를 지나오는 길이었는데, 이 길을 지나 군문포에서 배를 타야만 충청도 땅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 때는 통복동에 정미소가 있었는데, 오성면의 길음리나 당거리, 고덕면의 창내리, 팽성읍의 내리, 석봉리, 근내리 주민들이 배에다 벼를 싣고 이 포구로 들어와 쌀을 찧어갔다고 한다.
⑥신덕포 :신덕포는 평택시 통복동 삼성아파트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만 해도 안성천을 따라 고깃배가 드나들고, 새우젓배, 조깃배가 들어와 어물을 거래하던 포구였다. 그러나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배가 들어왔던 선착장은 없어지고 제방이 쌓이면서 부근이 농경지로 변하였다.
⑦신흥포 :현덕면 신왕리에 있는 나루로 일명 신왕리나루라고 부른다. 이 나루는 아산지방의 백석포나 팽성읍의 계양나루로 건너가는 나루였다. 이 나루는 북쪽으로 1.1km 지역의 덕목리에 고려시대 광덕현의 치소(治所)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보다는 고려시대에 나루로서의 역할이 컸으리라고 판단된다.
⑧계두진 :계두진은 현덕면 권관리 계두봉 아래에 있엇던 나루였다. 계두봉은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 배수갑문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대부분 깎여지고 지금은 정상부에 아산정이라는 정자만 남아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수원부 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수원에서 아산방면으로 갈 때 주로 사용했던 나루였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남양만으로 이어지는 해안교통로가 이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대단히 중요시되었던 나루였다.
⑨계양나루 :계양은 팽성읍 노양리를 말한다. 계양은 19세기 이전만 해도 직산현에 속하였고, 조선 초 이전에는 경양현이라는 독립된 현(縣)으로 존재하였던 지역이다. 고려시대 계양에는 전국 10대 조창(租倉)에 속하였던 하양창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상공업이 발달하여 수백 호가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다. 또 강 건너 현덕면 지역을 중심으로 어염(魚鹽)이 많이 생산되어 소금의 거래도 활발하였다. 이 시기 계양나루는 물자의 교환과 세곡(稅穀)의 운송을 담당하는 큰 포구였다. 그러나 조선 초 조창(租倉)이 건너편 공세리(貢稅里)로 옮겨가고, 어염의 수입도 줄어들면서 쇠퇴하였다.
3,평택호 물줄기와 역사적 사건들
강은 수로(水路) 교통에는 편리하지만 육로교통에는 커다란 장애였다. 특히 대규모 다리 등 토목공사가 어려웠던 전 근대에는 강은 절벽 이상의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은 강(江)과 산(山)이 경계였고, 국가 간의 경계도 강과 산을 경계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성천은 역사적으로 5세기 고구려와 백제, 6세기 백제와 신라 그리고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등 세 번의 큰 전란을 경험하였다.
5세기에는 한강유역에 중심을 둔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한성과 수원부근에서 고구려에게 패하여 한성과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안성천을 중심으로 아산, 평택, 진위, 충주부근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벌였던 최후의 전투가 안성천과 소사벌, 아산 등지에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6세기에는 청주, 진천, 죽산, 진위방면을 거쳐 한강하류방면으로 치고 올라가던 신라군과, 한강하류를 빼앗기 위하여 공주를 거쳐 천안, 평택, 안중방면으로 치고 올라가던 백제군이 안성천과 평택, 진위 안중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한양을 탈환하고 남하하다가 철갑기병 4천으로 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던 장소가 안성천과 소사벌이었다. 이 전투는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도 소상히 소개된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머물렀는데, 왜군이 전주를 공주를 거쳐 북상한다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양호는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한양까지 하루 낮, 이틀 밤 만에 도착한 후, 해생, 파귀, 새귀, 양등산 등에게 철갑기병 4천과 말을 탄 원숭이 수 백 마리를 주어 소사하 다리 밑, 들판이 끝나는 곳에 숨어있게 하였다. 그 때 왜군은 직산을 거쳐 북상하고 있었는데 모양이 숲 같이 보였다. 명나라 군사가 숨어있는 곳에서 백여 보 가까이 왜군이 다가왔을 때 말을 탄 원숭이를 먼저 풀어 놓았다. 말을 탄 원숭이가 채찍을 잡아 왜군의 진에 쳐들어가니 왜군은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짐승들이 달려오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원숭이들이 왜군의 진(陳)을 어지럽게 헤집고 다니는 틈을 타서 철갑기병으로 왜군을 무찌르니, 왜군은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를 전해들은 양호는 군대를 이끌고 경상도 바닷가까지 왜적을 쫒아 갔는데, 임진왜란 이후 이와 같은 승리가 없었다”
근대에는 동학농민전쟁의 진압을 명분 삼아 출병한 청, 일 양군이 조선침략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인 곳이 평택호와 안성천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군함으로 인천항에 상륙하여 북상하는 동학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걸고 수원을 거쳐 남하하였다.또한 청(淸)군은 군함으로 아산만으로 들어온 뒤 아산의 백석포 쪽으로 상륙하였고、일부 군대는 군문포 쪽으로 상륙하였다. 이들은 천안방면에서부터 평택 그리고 아산만 등에서 육군과 해군을 동원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는 대패를 하였고, 이후 조선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평택에는 청일전쟁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그 중에서 군문동(軍門洞)은 군문포로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망근다리라고 불리는 안성천을 가로지르는 철교(鐵橋)는 청군의 망군대(望軍臺)가 있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성환 부근에는 “몰왜보”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곳은 왜군이 몰사한 곳이라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평택사람들이 탄식할 때 쓰는 말 중에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우리의 주권을 유린하는 청(淸), 일(日) 양군의 싸움에 고통을 당하던 평택지방 민중들의 피맺힌 절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4.평택호 주변의 문화유산
1)이몽룡도 지나간 삼남대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9대로 또는 10대 간선로로 나누고, 대로(大路)와 연결된 중로(中路)와 소로(小路)를 두어 사람과 물자를 유통시켰다. 이와 같은 교통체계는 국토를 인체와 같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기고, 동맥에 해당하는 대로(大路)와 정맥에 해당하는 중로(中路), 소로(小路)로 나눈 것이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평택은 한양에서 수원을 거쳐 성환, 공주, 전주, 남원, 통영까지 이르는 6대로와, 소사원(소사동)에서 갈라져서 평택(지금의 팽성읍)을 거쳐 충남 해미, 홍성, 보령의 충청수영에 이르는 8대로(충청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 평택에 관한 사료에도 이 지역을 특징짓는 표현이 교통의 요지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는 삼남대로(三南大路)가 오산신점-청호역-진위-갈원-소사-아교천-성환역을 지난다고 되었으며, 김정호의 대동지지(大同地誌)도 중미현-오산점-대백치-갈원-가천-소사점-아교-홍경원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을 소개하였다.
삼남대로에 관한 이야기는 판소리 “춘향전”에도 나온다. 춘향전에는 한양으로 갔던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향하는 대목에, “지지대 올라서 참나무쟁이를 얼른 지나 교구정을 돌아들어 팔달문을 내닫는다. 상류천, 하류천, 대황교, 진겨골, 떡전거리에서 중화하고, 중밋오뫼, 진위, 칠원, 소새비들, 천안삼거리를 지나...”라는 내용이 소개된다. 여기서 진위, 칠원, 소새비들은 진위면 봉남리, 칠원동, 소사벌을 나타내는 지명이므로, 소설 속의 이몽룡이 평택을 지났음이 분명하다. 또 일설에는 남원에서 춘향이를 만난 이몽룡이 춘향이를 데리고 이 길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갔다고도 하는데, 평택시 도일동의 감주거리나, 송북동 우곡마을 근처의 주막거리, 진위면 봉남리 봉남교에 이들의 사연이 전해온다.
조선시대 대로(大路)에는 역(驛)과 원(院)을 두었다. 역(驛), 원(院)은 통상적으로 30리마다 두었으며, 역과 원을 연결하는 역도(驛道)와 보도(步道)가 정비되었다. 평택지방에는 진위면 청호리에 청호역이 있었으며, 팽성읍 추팔리에 화천역이 있었다. 또 주변지역인 원곡에는 가천역이 설치되었으며, 성환에는 성환역이 있었다. 원(院)으로는 진위면 갈곶리의 이방원, 신리의 장호원, 송탄 동막마을의 백현원, 칠원동의 갈원, 소사동의 소사원이 있었다. 역원이 설치된 지역에는 국가시설물이 있었으며, 찰방 등 관리들이 배치되었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2)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紀念碑)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있는 곳은 평택시 소사동이다. 소사동은 평택의 상징인 소사벌을 앞에 두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소사천을 건너는 소사교라는 다리가 있는 마을로도 유명하였다. 소사동은 조선시대 내내 양성현 땅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군 양성면 지역이 되었다가, 1981년 평택시로 편입된 지역이다.
소사동은 지리적으로 평택시와 안성시의 경계이기도 했지만, 남쪽으로는 안성천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천안시와 경계를 이룬다. 이 지역은 몇 년 전 행정구역 개편으로 천안시에 속하게 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직산현 땅이었기 때문에, 소사동은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관문(關門)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이곳으로 전국 10 대로(大路) 가운데 하나였던 삼남대로(三南大路)가 지났으며, 구간별로는 성환찰방의 관할구역이었다. 그래서 한양과 충청도나 전라도지방을 오가는 사람들의 이동이 잦았고, 물자의 유통도 빈번하였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소사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설치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점막과 시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은 조선시대에 성공한 개혁으로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건이다. 이 개혁은 조선 중기 농민생활을 피폐시켰던 공납(貢納)제도를 개혁한 것이었다. 양반 지주들과 대상인들의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는데 가장 공이 컸던 사람은 잠곡 김육(金堉, 1580-1658)이다. 김육은 관직에 나아간 후 정권의 요직에 있으면서 인재의 고른 등용, 동전의 전국적 유통, 시헌력의 사용 등 많은 치적을 쌓았는데, 그 중에서 그가 필생의 노력을 기울인 가장 큰 업적이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였다.
이 비(碑)는 1658년 김육이 죽은 후 충청도의 주민들이 충청도에 실시한 대동법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하여 돈을 모금하여 부조를 하였는데, 김육의 집안에서 받으려 하지 않자 나라에 건의하여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가는 이 곳에 선혜비를 세운 것이다.
3)심복사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심복사는 평택시 현덕면 덕목4리 고등산 자락에 있다. 이 절은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말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볼 때 조선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판단된다. 심복사에는 보물 565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121㎝이며, 연화좌대는 직경이 113㎝이다. 심복사에는 절의 창건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조선 명종4년(1549년) 파주 문산포에 사는 천을문이라는 어부가 같은 마을의 박씨, 문씨와 수원군 광덕면 덕목리 앞 바다에 고기잡이하러 왔다. 그런데 그물을 던져 올릴 때마다 큰 돌덩이가 걸려서 올라왔다. 다른 곳에 그물을 던져도 계속 돌덩이가 올라오자 이상하게 생각한 이들은 돌덩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돌덩이는 돌로 된 불상이었다. 평소 불심(佛心)이 지극했던 천을문은 부처님께 치성을 드리고 불상을 모실 곳을 고심하였다. 그 때 전날 밤의 꿈이 생각났다. 전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더니 “내가 머물 곳은 심복사다”라고 했던 것이다. 꿈속의 말에 따라 나루터에 내렸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상이 입을 열어 “나를 업고 심복사 터로 갈지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천을문은 용기를 내어서 불상을 업고 옛 절터가 있었던 광덕산(고등산) 기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현재의 절터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불상을 다시 업으려 하자 불상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곳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절터임을 직감한 천을문은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불상을 모셨다. 그러나 절을 세울 일이 큰 문제였다. 하루는 큰 풍랑이 일더니 그날 밤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내일 바닷가에 가면 임자 없는 소가 있을 것이니 파손된 배 조각을 가져다가 절을 짓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동트기를 기다려 천을문은 꿈에서 보았던 바닷가에 가보았다. 바닷가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배 두 척이 파손되어 있었고 임자 없는 검은 소 두 마리가 노닐고 있었다.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소 등 위에 나무를 실어다 문씨, 박씨와 함께 절을 지었다. 절을 짓는데 큰공을 세웠던 검은 소는 절이 창건되자 갑자기 죽었다. 사람들은 보살이 절을 세우기 위하여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라고 하여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이 설화를 볼 때 절의 창건시기를 15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창건시기를 이 때로는 보는 또 다른 근거로 1936년 중건불사 때 법당 기와에서 “萬曆三年三月日”이라는 명문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만력(萬曆)은 1575년(선조 8년)으로 설화에 나타난 창건연대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또 요사체 앞 돌기둥에도 “康熙四十四年乙酉三月日 石柱施主朴又玉....”이라고 기록되었고, 법당 대들보에도 乾隆三十二年丁亥三月十七日重建上樑“이라고 기록되어 이 시기에 중건되었음을 알려준다.
4)안정리 농성(農城)
팽성읍 안정리 서정자 마을 부근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경기도기념물 74호이다. 농성(農城)은 팽성읍 사무소로부터 서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으며, 안정리에서는 북쪽으로 약 300미터 지점이다. 일제시대 조선 총독부가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西面 西亭子, 農城 國有林, 平澤驛의 約1里 丘陵狀을 이룬 平地에..”라고 농성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데, 앞서 소개한 위치와 일치한다.
농성(農城)주변의 지형은 북쪽으로 안성천을 두고 있으며, 주변은 대부분 평지이고 해발 30m 내외의 구릉이 군데군데 있다. 강우량은 1년 평균 600-900m 정도로 우리나라의 연 평균 강우량에 못 미친다. 농성 옆에는 본래 마을이 없었으나 한국전쟁 후 이주민이 나타나면서 약 10여 호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농성(農城)의 축성(築城)시기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임진왜란 때로 다양한 설(說)이 제기되지만, 나말여초 평택(平澤) 임(林)씨의 시조(始祖)인 임팔급(林八及)이 당나라에서 건너온 후 쌓았다는 설(說)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안정리 농성은 우리나라 토성(土城)들 가운데 보존상태가 좋은 성(城)이다. 더욱이 1999년 평택시의 정비사업으로 성벽에 대한 성토(盛土)작업과 주변정비를 하여 성(城)의 내 외부가 깨끗하게 복원되었다.
5)덕목리 성(城)
현덕면 덕목리 원덕목 마을은 통일신라시대 수성군(水城郡)의 4영현 가운데 하나인 광덕현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16세기 전반에 간행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광덕폐현이 수원부(水原府)에서 60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현종9년에 수원부에 이속(移屬)되었다고 되어있다. 또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고려 현종 9년에 수주(水州)에서 90리 떨어져있으며 신라 경덕왕 때 광덕(廣德)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생겼다고 되어있다.
덕목리 성터는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으로 나눠져 있는 평지(平地) 토축성이다. 이 성(城)은 고려 초기의 광덕현의 읍성(邑城)으로 추측된다. 마을사람들은 (東城)을 중심으로 성 안쪽 마을을 “성안(城內)”, 성 바깥쪽을 “성밖(城外)”라고 불렀다. 또 성터주변 지역의 자연지명들도 관터, 사창, 나라땅이라고 불리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곳이 광덕현의 치소(治所)였을 가능성이 높다.
덕목리 성터의 주변 지형은 동남향으로 고등산(高等山, 해발 140m)이 인접해 있고 남향으로 마안산(馬安山, 112.8m)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서쪽으로는 밭과 논으로 형성된 송산들이 있으며, 건너편에는 기산리 산성(山城)이 있는 옥녀봉(玉女峰, 해발 83m)이 건너다 보인다. 고등산과 마안산 너머로는 안성천 하류와 평택호가 있고, 서남쪽 대안리의 작은박골, 구진나루 그리고 신왕리나루까지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조수(潮水)가 드나들었다.
덕목리 성터는 성안마을 방향으로 가는 길을 중심으로 동성(東城)과 서성(西城)이 약 60미터 간격으로 나란히 있다. 서성(西城)은 동벽과 서벽일부 남벽 전체가 80년대에 이루어진 경지정리 사업으로 파괴, 유실된 상태이지만, 북벽과 동벽의 일부 그리고 서벽의 일부 모두 127m가 남아있어 이전의 성(城)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동성(東城)의 경우는 마을(성안말)이 들어서 있어서 성벽의 일부 상태 외에는 형태나 규모를 확인하기가 어렵다.인근의 대안리 소외(작은박골)에 사는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서성(西城)은 30, 40년 전만 해도 어른 턱 높이의 성벽과 네모 반듯한 성(城)이 남아있었다고 하였다. 축성 시기는 출토된 토기류나 기와류, 자기류 등을 토대로 백제 말기 설(說), 신라 하대 설(說), 고려시대 설(說) 등으로 다양하게 제기되는데, 대체로 삼국시대에서 고려전기 사이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6)석정리 장성(長城)
석정리 장성(長城)은 포승면 성해리에서 석정리 감기마을까지 연결된 토성(土城)이다. 현재 이 성(城)의 성벽은 성해 2리 마을회관 못미처에서 시작하여 석정1리 감기마을에 이르는 약 3.5km가 남아있다. 이 장성(長城)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홍원마장에 사육했던 말과 소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성(城)이었다.
장성(長城)의 위치는 조선시대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할 때 바닷가와 인접한 감기마을에서 시작하여 바닷물이 들어왔던 해조마을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성(城)의 형태도 길게 나온 홍원리 반도 입구를 가로질러 말들이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횡으로 길게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 축성시기는 출토 유물로는 정확한 판단이 서질 않으나, 홍원리 마장(馬場)의 설치가 고려 중엽쯤이라고 짐작할 때, 이 시기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성(城)을 축성한 사람들은 마장(馬場) 주변에서 목부(牧夫)로 부역하는 백성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고려시대 포승면에는 포내미 부곡이라는 특수행정구역이 있었으므로 이들의 노동력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래 장성(長城)은 전에 쌓았던 옛성과 나중에 쌓은 새 성으로 구분되었다. 지금도 옛 성문 앞의 마을을 성문 앞이라고 부르고, 성해리 성외마을을 성밖마을로 부르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7)계두봉
현덕면 권관리에 있는 봉우리이다. 아산만 방조제 주변 유원지 가운데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301미터이다. 지역사람들은 닭이머리 또는 닭의 부리라고 부른다. 이 봉우리는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토정 이지함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 온다. 설화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토정 이지함이 아산 현감(영인 현감인 듯 함)으로 재임시 장차 아산과 현덕면 일대가 바다로 변할 것을 예견하고 돌아다니며 급히 피하라고 일러주고 돌아오는 길에 이 산곡대기에 앉아 물에 잠길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 때 한 등짐장수가 급히 산 위로 올라오다가 토정보다 낮은 자리에 지팡이를 뻗치고 앉았다. 토정이 급히 그를 부르며 빨리 더 올라 오시오라고 외치니,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며 “참 겁도 많으십니다”라며 그대로 있었다. 드디어 천둥 번개가 치며 물이 차 올라오는데, 물이 등짐장수가 팡이를 꼿은 곳까지 이르자 멈췄다. 토정이 급히 그에게 나아가 절을 하며 인사를 청하였더니, 등짐장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데 토정이 아무리 좇아가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이 봉우리는 3.1운동 때 권관리 부근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봉우리 아래쪽에는 조선시대에 계두진이라는 나루가 있었다.
8)아산만의 갯벌과 저녁 노을
아산만은 만(灣)이 깊고, 갯벌이 드넓게 발달한 아름다운 천연 포구이다. 아산만의 갯벌에는 다양한 어패류와 함께 흰머리도요와 같은 철새도래지이다. 또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이 만에는 고깃배가 떠 있고 철새들이 쉬어 가는 평화로운 모습만 있었다. 관광객들은 아산만 방조제에서 아름다운 갯벌과 바다를 감상하다가 횟집이나 식당에 들러 싱싱하고 값 싼 회와 매운탕을 맛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해가 뉘엿뉘엿 기울면 갯벌 너머 바닷물 속으로 떨어지는 붉은 저녁놀을 감상했다.
평택의 저녁놀은 문화방송에서 주최한 제1회 어린이 창작 동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노을”이라는 노래로 불려질 만큼 아름답다. 특히 늦가을에 지는 해는 크기와 붉기에서 다른 지역의 노을을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