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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유안진 작가의 고향/임동 박실(한경희/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이장희 추천 0 조회 36 14.06.07 22: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안진 작가의 고향/임동 박실(한경희-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1.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이지만 늘 새롭다.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는 일처럼 그렇게 새로울 수 있어서 신춘을 누구나 즐겨 말하는 것 같다. 완연한 봄 날씨다. 그야말로 꽃들이 다투어 피는 춘삼월에 들어서니 하늘도 땅도 겨울과는 아주 멀어진 게 분명하다. 어디랄 것도 없이 그저 밖으로 나가기만해도 새로 돋은 풀과 얼굴 들어내는 꽃들이 가득해졌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숲으로 덮인 동네에도 곳곳에서 그 변화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리고 자그마한 몸에도 어엿하게 꽃을 피운 나무가 있고, 겨울 내내 따스한 손길 한번 스친 적 없는 꽃나무들이 봄의 포고문을 열었다. 물오르기 시작한 나무에서 푸른 기운이 감돌 무렵부터 땅 속 깊이 박힌 뿌리는 세상 밖으로 온갖 화려한 여행을 시작했던 것 같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일까. 언제나 살아있는 방향으로 지속되는 우리의 생명현상만큼 오랜 세월과 힘을 지속하는 것은 없지 싶다. 그러니 매년 돌아오는 봄날을 지겹도록 상찬해도 모자라는 것은 말잔치 탓일 거다.


오늘이 음력으로 삼월 일일이니 딱, 봄이다. 춘삼월 햇살을 따갑게 받으며 임동으로 길을 나선다. 안동에서 바다구경을 나갈 때 스쳐가는 지역이니 그리 낯선 곳도 길이 먼 곳도 아니다. 임동은 첩첩산을 안은 산골마을인데 이곳에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많은 마을이 물에 잠겼다. 임하댐 이정표를 벗어나면 푸른 물이 일렁이는 호수를 옆구리로 끼고 달릴 수 있는 길, 훤하게 펼쳐진 강물 위에 윈드서핑 풍경이라도 있다면 금상첨화 같기도 하다. 장엄한 수면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그런데 이 수면 밑으로 많은 마을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통이라 부를 여러 숨은 역사가 수장되어 버렸다.


임하댐으로 수몰된 마을들은 벌써 20여년이 흐른 이야기 속으로 잠수 중이다. 이미 지난 과거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수몰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아픈 상처일 것이다. 임동 박실출신인 유안진 작가의 고향을 찾아볼 요량으로 길을 들어섰다. 이젠 지도에도 없고 눈으로 도저히 확인 불가능한 고향을 둔 작가 유안진은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란 소설을 통해 고향의 역사와 조상들의 숨은 이야기를 의미 있게 가공한 적이 있다. 다시는 되돌릴 수도 없고 있었던 흔적 그것마저 확인할 수 없는 고향공간에 대한 가슴 안타까운 서사를 돌아보며 고향의 의미를 물어본다. 더구나 이 소설은 1998년에 문학사상사에서 69쇄를 찍은 엄청난 스테디셀러였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도대체 몇 쇄까지 찍은 소설이었을까?


 


2.
34번 국도를 따라 만날 수 있는 임동면은 참 많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첩첩산중으로 물길이 스며들었으니 그 물길마다 다리를 연결시켜 길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임하를 지나자 망천교가 나온다. 망천교를 건너 마리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니 망천 동네로 들어간다. 숲당마을 입구 도로에서는 공사 중이고, 밭에는 써래질로 밭을 가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다. 땅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 시간부터 부지런히 땅을 손질했던 모양인지 동네 밭은 온통 고운 흙을 뿌려놓은 듯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더욱이 군데군데 참꽃이 활짝 피어 봄맞이 손들이 놀라 반길 길이 산뜻하다.

망천을 나와 얼마 가지 않으면 박곡교를 건너게 된다. 박곡은 박실을 이르는 명칭이다. 박실마을은 유안진 작가의 출생지인데 완전히 수몰되었던 모양이다. 박곡교 다리 한가운데서 유유히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더러 사진도 찍으면서 저 물살 밑으로 잠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무엇이었고 어떤 동네였을까를 떠올려 보았다. 마을을 가득 채웠던 집들은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마을길은 얼마나 고불고불 했으며 귀신이라도 나올 무서운 밤길은 어디쯤에 있었을지 그 무서움이 그리운 수몰민들이 혹시 나처럼 이 박곡교 위를 서성거릴까를 생각했다. 다리 난간을 펜으로 두드리자 새소리만큼 청명한 울림이 오래 들린다. 모든 다리 난간은 다리가 지닌 공간의 여유로 맑은 소리를 내는 것인가 보다. 


물에 잠기기 전 임동 몇몇의 마을 폐허를 버스 안에서 우연히 바라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가장 높은 다리인 임동교를 건너면서 확 들어오던 풍경으로 기억하는데 그 넓은 마을의 집들은 모두 폭격을 맞은 듯 벽이 무너져 있었고 마을길도 고적하기 짝이 없었다. 아주 잠시 버스 차장 밖으로 펼쳐진 풍경이었으나 어떤 생명의 기미도 느낄 수 없었던 그때를 기억한다. 다만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이었던지 붉은 감 몇 개가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임을 증거라도 하고 있었다.


한들이라는 마을로 불리는 곳의 흔적은 대평교를 건너면서 느낄 수 있다. 역시 이 다리의 푸른 물결이 한들의 넓은 마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전주류씨종택이나 정재 유치명종택, 수애당 등이 몰려 있는 무실마을은 수곡교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 역시 봄날이 시작되다보니 고가에도 꽃들이 만발하다. 이건을 하다보니 조선의 건물답게 오랜 세월의 역사를 함께 한 나무가 보일 수는 없으나 간간히 붉고 고운 꽃들이 환하게 핀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특히 전주류씨종택 앞은 공원을 조성해두고 있어서 좀더 시간이 흐르면 나무도 더 자라나 임하호를 바라볼 정자에도 운치가 더해지지 싶었다. 대체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종택은 안으로 잠겨 있어서 밖으로 돌며 나지막한 담과 그 위에 얹힌 기와를 구경하거나, 대문 틈 사이로 집안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곡교 다리 난간에는 하회탈을 조형물로 장식하였는데 부러 그랬는지 검은색이 탁해 보였다. 수곡교 다리 중앙에서 임하호를 바라보면 그 유유한 물줄기의 흐름이 다시 새롭지만 이곳 역시 마을이 수장되었다는 생각을 하면 그 유장한 물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물색이야 하늘과 햇빛을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라 봄볕이 따뜻하고 맑은 하늘을 닮았으니 물색이야 어찌 곱지 않을까. 그저 물을 닮는다면 낮은대로 흐르면서 절대 흐름이 멈추는 법이 없으니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 좋아할 자연물이다. 임동 이곳의 계곡을 골골이 채우고 흐르는 물은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 다를 수 있는 물일 수도 있다.


임동면 사무소가 있는 소재지 중평리로 와보니 물을 마주하면서도 경사가 있어서 몇몇 집이 그 물길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아마도 이곳은 선착장이 있어서 제법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다. 쾌속선을 타는 사람이 간간히 보일 때가 있었던 걸 기억한다. 또 임동장도 이곳에서 열리니 임동의 중심마을인 셈이다. 아마 이곳 물길도 중평리이리라. 좀더 달려 임동교를 건너면 명성쉼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왼쪽으로 굽이쳐 들어가면 마령리와 만난다. 이 골골 깊이까지 물이 흐르고 있고 위동, 대곡으로 이어지는 길은 모두 물길과 함께 한다. 아마도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임하댐의 물길을 따라간다면 깊은 산곡과 골골이 물이 차고 들어선 물길과 만날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임하호의 물이 몇몇 골짜기를 따라 담긴 것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고 국도를 따라 놓인 다리를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호수의 넓이를 지켜 보았다. 34번 국도를 따라 가노라면 임동은 거의 임하호로 구성되어 있다는 착각을 한다. 임동면의 면적 구성비를 계산하면 그리 어려운 셈도 아니지 싶다. 혹시 임동면 전역이 산이거나 댐이거나 이 둘 하나로 정리되는 것은 아닐까. 동네는 물길을 피해 새로 이주를 하면서 구성된 듯하니 물의 고장이 되고만 셈이다. 이 임동을 고향으로 둔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나마 유안진이란 작가가 고향을 문제 삼아 소설을 써두지 않았다면 임하댐에 수장된 전주류씨 동족마을의 아름다운, 혹은 가슴 아픈 역사를 추측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싶다.



 

 


3.
현재 우리가 사는 주거환경은 산업구조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앞으로 안동에는 골프장도 들어서고, 아는 바 없으나 또 다른 많은 계획도 있을 것이다. 편리한 생활과 필요한 개발의 이 동거는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편리한 삶에 길들여진 우리들이 과연 좀더 수고로운 일을 하고자 애쓸 수 있을까. 우리들의 모든 국토개발은 경제적인 이익이란 큰 매력으로 진행된다. 이미 개발된 수많은 도로를 이용하면서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사실을 누가 인정하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개발논리는 공동선까지 이른 수준이다. 임하댐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요즘 한창 화젯거리인 운하개발을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혹시, 더 이상 희생을 치르는 개발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임하댐이 없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임동에 있었던 그들 마을은 얼마나 특별하게 가슴에 남은 고향일까. 전통적으로 고향에서 나서 누대를 고향에서 사는 일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수몰된 그들은 선산이나 영해 등의 윗대 조상들이 살던 마을로 집단이주를 하기도 했으니 그들에게 고향이란 의미는 뭔가 특별하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집, 고향의 의미란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집은 어제보다 넓은 평수로 옮기는 기준에 불과하다. 살던 집이 아니라, 넓은 집, 새 집의 의미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고, 고향이라는 공동체의식은 귀한 이야기가 되었다. 친인척으로 구성된 마을, 그래서 개인의 세계가 자유롭지 못한 구속적 문화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전통 한자리를 늘 부여잡으려고 하는 걸까. 다만, 당시 누구나 당연했던 거주의 조건이 오늘 우리에게 지혜로운 의미를 주는 대목이 있다는 사실이다. 집이란 것이 단순히 경제적인 수단으로 이해된 것만이 아니라 삶의 원래 의미도 함께 살아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용택 시인의 「아름다운 집」이란 시에서도 잘 드러나듯 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집, 동네 어른들이 함께 도와서 짓는 집, 여러 동물들이 함께 거주하는 집 등은 이미 개인의 소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작가도 소설에서 고향집에 대한 개인세계를 풀어쓰고 있었다. “고향이란 무엇이길래 다들 이리도 아까워할까? 우리는 고향을 빼앗기는 분함과 억울함과 슬픔에 모두 침통해졌다”고 하였다. 특히 지례 김원길 시인도 소설에 등장하는데 자신의 선산에 서당과 동네집을 옮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어느 동네 뉘집이라고 문패도 달아놓고 그 집 가족은 언제든지 와서 지낼 수 있다”는 이 말을 통해 수장되는 집, 고향, 마을을 두고 침통했던 상황이 짐작이 간다. 아마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이건을 했을테지만 조상들 대대로 살아온 평범한 가옥을 이건한다는 건 엄청난 경비가 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고향집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일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으니 얼마나 간절했던 계획이었을까.


동성마을을 이뤄 살던 이들에게 집안끼리 농담 비슷한 이야기는 구수하게 전해지고 있다. 당시만 해도 제사가 오늘 법질서를 지키는 예의보다 엄중했으니 제사를 두고 농이 만들어졌다. 아마 예의 가운데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제사가 아니었을까. 충과 효를 나누지 않았던 유교질서에서 살아있거나, 죽어서까지 그 질서를 공고하게 지킬 수 있는 규율이 제사가 아니었을까. 소설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지례 김씨 청년하고 봉실 류씨 청년이 장터에서 만나면 서로 놀리는데 제사상 다리에 배나무가지를 묶어 제사지내는 집이라거나, 어물차가 돌고개를 지나갈 때 제사상을 그리로 돌려놓고 절한다고 서로 농을 주고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 두 동성촌 간에 이런저런 갈등도 있을 법하고 반촌을 지킨 자존감을 서로 공유했던 아름다움도 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로 으뜸인 좌수 어른이야기는 아주 흥겹다. 진성이씨였으나 외톨이였던 이원탁이란 사람은 류씨, 김씨 동성촌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진성이씨도 고향 떠나면 상놈된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였다. 타성에게 항렬과 택호로 호칭이 되지 않아 이름을 부르는 게 보통이었다는 것이다. 한번은 군수를 모시고 잔치를 벌였는데 최고의 대접음식은 도연폭포의 물고기를 올리는 일이었다. 폭포가 워낙 깊고 험해서 누구도 물고기 잡는 일을 시도하지 않았으나 좌수어른이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새 군수의 잔치가 베풀어질 때마다 폭포의 물고기를 잡으면서 그는 폭포 물속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내곤 했다. 용궁, 선녀, 용왕이야기이며 물귀신 이야기까지 넉살좋은 이야기꾼도 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도연폭포에 수류탄을 던져 소쿠리로 고기를 건져가고 물 속의 어린 새끼고기까지 다 죽이는 일이 생기자, 차라리 좌수어른은 직접 폭포물고기를 다 죽이는 편이 마음이 덜 아프다는 판단을 하고 수류탄을 던지고자 했다. 그러나 도저히 던질 수 없어 다른 곳에 던진다는 것이 자신의 오른팔에 맞아 외팔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상이용사와 비슷한 상어용사(傷魚勇士)라고 부르라고 하고, 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자로 고을수령을 견제한 사람인 좌수(座首)를 떠올려 왼쪽손 뿐인 좌수(左手)어른으로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인물설정은 사실상 복잡한 동성마을의 체면과 위신의 내면을 담아내는 이야기들이다.


 


 

4.
신분의 상하가 엄하던 시절을 그린 고향이 무조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고향의 숨결을 함께 느껴보자. 특히 일제 식민지시절 문중을 지키던 많은 종손들이 독립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길을 갔고, 그 가족들의 무참한 인생은 아주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우리 전통이 일제의 의도대로 단절국면으로 접어드는 때라 집안을 책임진 종손들의 어려움이 많았을 때이다. 종손, 종녀들의 불행한 일생이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전근대적 권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양반들의 행패도 만만치 않았다. 종살이 부부는 상전(주인)의 호출에 아내가 응해야 하는 현실을 감당해야 했다. “예의란 것이 양반끼리 갖추는 것이지, 평범한 사람에게까지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그 현실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이러니 남색 종손도 등장하고, 겉으로야 이념갈등이지만 그 원한관계로 사람 죽이는 일까지 번졌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 아주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 종부 출거는 명문가문의 질서와 명분의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종부의 친정 오라비 친일이력이 독립운동을 하던 문중에 오명을 남기는 일이 되자, 문중은 회의를 통해 어린 딸이 있는 종부를 들판에 갖다 버린다. 가문의 이름, 명예에는 개인의 희생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고 더구나 그 대상이 여성이었다면 더욱 가벼워졌던 시대였다. 여성이 감당해야했던 차별적 현실은 조선시대가 마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습과 풍속의 이름으로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 노비, 타성바지 등은 언제나 주변에 놓인 존재였다.


이 대목에서 전통의 의미와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자. 고향의 이름을 떠올리면 마냥 아름다운 추억에 젖을 수 있겠으나 이 고향이 반인간적인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그 기준으로 예의를 만들어두고, 끼리끼리 그들만의 예의만을 지키는 고향이었다면 그리하여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면, 고향을 향해 고운 이야기만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가 쓴대로 “충성이 아닌 이기이며 엉뚱한 속죄양을 만들어 낸 위선이고 위충”으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안동사람들은 체면 지키는 일이 거의 자기검열 수준이라고 말하는 작가를 통해 정신 역시 유전되는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주요 모티프로 설정된 것이 임하댐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임동의 도연폭포를 댐으로 막는 건설부 계획이 논의되었던 모양이다. 원래 임하댐 건설의 계획은 아예 전무했고 임동에 있는 도연폭포의 목다리(목)을 막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건설부의 입장은 그랬다. 그러나 사상범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형기를 다 마쳐도 자기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으니 이들을 다시 감시할 기구가 필요했고 그때 만들어진 것이 청송보호감호소란 것이었다. 이때가 전두환 정권의 5공화국시절이었다. 그러니 도연댐은 두 정권을 거쳐 나란히 건설부의 주요 건설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청송보호감호소의 존재로 도연댐은 사라지고 임하댐이 새로운 계획으로 제출되었던 모양이다.
“법무부가 건설부 계획을 보니 재작년에 5억 돈 들여 지은 청송감호소가 도연댐으로 수몰이 되면 법무부 체면이 말이 아이제? 일이 년 앞도 못 내다보고 정부돈만 낭비한 게 안 되니껴? 그라이 법무부는 지 체면 살릴라꼬 사생결단하고 건설부 계획에 반대한 게재요. 결국에사 법무부 낯세워 주느라꼬 도연댐이 아이고, 그보다 훨씬 아래 반변천 모래밭을 막는 임하댐이 되뿌리는 거제”


도연댐이 만들어졌다면 무실, 박실, 한들이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도연댐의 존재는 농토를 옥토로 만드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저수지가 생기면 사시사철 풍족한 농수가 확보되니 얼마나 좋은 일이었을까. 마치 인류의 문명발생지가 사막이지만 그곳은 모두 오아시스였다는 걸 떠올려 봐도 토지와 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닌가. 일조량이 많으면서 물이 확보되는 곳에서 농사는 풍작을 이루게 된다. 당시 임하댐 건설의 타당성을 조사한 삼부토건은 “모래밭이라 댐을 막아도 물이 새버린다꼬, 공사 안 맡겠다고 나자빠졌부랐다”는 것이다. 임하댐으로 3개군 35개 마을이 수몰되었으니 어디 임동만을 두고 이야기하기에는 임하댐의 수몰사는 너무 넓고 깊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안동>

통권115호 - 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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