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전기소설의 이야기 램프 -- 마광수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김성수(문학평론가, 연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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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일기(狂馬日記)>(행림출판, 1990, 개정판, 북리뷰, 2009)는 10가지의 에피소드를 연작 형태로 연결하여 각 작품 간에 유기적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배열한 소설이다. 마광수의 소설 <권태>가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도록 판타스틱한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라면, <광마일기>는 풍경화적 세태묘사에 곁들여 아울러 서사적 스토리텔링이 주는 속도감 넘치는 재미를 느끼도록 의도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힌다. 한번 쥐면 전혀 싫증내지 않고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어, 작가의 놀라운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래서 작가 역시 단숨에 써 내려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되는데, 그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여 음악적 리듬감을 살려나가면서, 토씨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가며 생생한 구어체의 문장을 만들어낸 꼼꼼하고 섬세한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광마일기>의 10가지 에피소드 가운데 ‘나’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얘기는 일곱 편이고 ‘나의 친구’가 주인공이 돼 있는 얘기는 세 편이다. 그리고 꽃의 요정, 처녀귀신, 신선 등 몽환적인 소재의 얘기가 세 편이고 현실적인 얘기가 일곱 편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열 편 모두 로맨틱한 사랑을 소재로 짙은 페이소스와 건강한 유머를 절묘하게 혼합시키는 기법을 쓰고 있다.
이 작품은 세 가지 면에서 작가의 창작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우선 이 소설은 우리의 전통소설 양식인 ‘전(傳)’ 형식을 실험적으로 채택하여 다루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몽환적인 얘기를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것은 전기소설적(傳奇小說的)인 흥취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체 줄거리와도 상관성이 있게 함으로써 소설에서의 ‘상상적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꽃의 요정이 나오는 얘기인 <꽃과 같이>의 무대는 설악산 백담사가 되었고, 내 친구가 선녀의 핏줄이었다는 모티프로 이루어진 꿈길에서 는 6.25 동란이 시대 배경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처녀 귀신 야희와의 연애담인 <달 가고 해 가면>에서는 연세대학교 뒷산인 무악산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광수, <내 소설 <광마일기>에 대하여>, <사라를 위한 변명>에 수록)>
작가가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광마일기>의 창작 의도는 “현실과 상상 속을 넘나들며 사소설 기법을 빌려 현대판 전기(傳奇)소설을 시도”해 보고자 한 것이며, “소설의 주된 정서로는 고급한 센티멘탈리즘을 위주로 하고 거기에 세련된 에로티시즘을 다소 가미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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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설문학의 흐름에서 볼 때 전기(傳奇)소설은 매우 광범위하고 뚜렷한 내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소설양식이다. 이가원 교수가 <이조전기소설연구(李朝傳奇小說硏究)>(<현대문학> 7, 8호)에서 지적했듯이,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전기적인 경향을 띠지 않는 작품이 없을 정도로 전기가 조선의 소설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교수가 분류하였듯이 조선의 전기소설(한문소설로서의)은 신괴(神怪), 염정(艶情), 우언(寓言), 호협(豪俠) 등의 유형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조선조 한글소설의 주제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전기소설은 서양 중세 기사들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는 로망스(Romance)와 같이 감미로운 연애, 현실을 떠난 꿈 같은 환상의 세계, 그리고 그 전형적인 인물들의 등장과 ‘해피엔딩’ 등의 특징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소설들이 서로 유사한 성격과 공통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광마일기>는 바로 이와 같은 소설의 전기성에 ‘고급한 센티멘탈리즘’과 ‘세련된 에로티시즘’을 가미하여 ‘현대판 전기소설’을 새롭게 다시 시도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광마일기> 열편의 에피소드 가운데 <꽃과 같이>, <꿈길에서>, 그리고 <달 가고 해 가면> 세 편은 꽃의 요정, 신선, 처녀귀신 등 몽환적인 소재의 이야기들이다. <꽃과 같이>는 주인공 ‘나’가 어느 여름날 설악산 백담사(白潭寺)에서 가졌던, 모란꽃의 요정 ‘강설(降雪)’과 인동덩굴의 요정 ‘향옥(香玉)’과의 짧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주제이며, <꿈길에서>는 '나'의 친구인 몽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의 형식을 통해서, 몽선의 부친인 오균(吳均)이 ‘백우옥(白愚沃)’이라는 신선과 교유하는 선계의 몽환적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달 가고 해 가면>은 연세대학교 뒷산의 봉원사(奉元寺) 근처 흉가에서 ‘나’와 고려 때 죽은 어떤 궁녀(宮女)인 여귀 ‘야희(野姬)’와 나누는 관능적이고 유현(幽玄)한 분위기의 러브스토리이다.
비현실성과 황당무계함을 내용으로 하는 전기소설의 특징은 그 유현성(幽玄性)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유현이란 현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적 세계, 환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양상을 인과와 전생의 업보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윤회사상이 동양 생활철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인생 자체는 이미 ‘꿈’으로 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불가지론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이 본질의 허상에 불과하다고 본 ‘그림자’는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꿈’과 동일한 의미에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규정이 필요한 개념이다. 동양의 소설이 갖고 있는 비사실성이나 환상성 등은 폐기되어야 할 항목이 아니라 다시 새롭게 복원시켜 오늘날의 이야기 문학에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서사미학의 정신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오늘날의 리얼리즘 개념은 공상이나 환상까지를 아우르는 전기적(傳奇的) 상상의 세계, 즉 전기적 낭만성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리얼리즘으로 발전돼야만 한다. <광마일기>의 소설정신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우리 소설문학에 매우 의미 있는 시사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또한 소설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허구성’, 즉 ‘그럴 듯한 거짓말’ 효과를 최대한도로 발휘하기 위하여 특히 ‘사소설 기법’을 빌려오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소설을 ‘거짓말이 많이 섞인 사소설(私小說)’ 형식으로 썼다. 그래서 남주인공이 꽃의 요정과 연애하기도 하고 고려 때 죽은 처녀 귀신과 연애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전기적(傳奇的) 성격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하더라도, 남주인공이 친구 부부와 부부 교환의 정사를 벌이거나, 또는 극장에서 자살을 기도한 정체불명의 여성과 연애하는 등 거의가 허구적 스토리로 되어 있다. (마광수, 위의 글)>
전기소설적 성격에 ‘사소설’ 형식을 활용한 것은 앞서의 <꽃과 같이>, <꿈길에서>, <달 가고 해 가면>을 비롯하여 <대학시절>, <서울야곡>, <어떤 크리스마스>, <연상의 여인> 등이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조선조의 <금오신화(金鰲新話)>나 <수성지(愁城誌)>, 그리고 <화사(花史)> 등이 주로 3인칭 시점인데 비해서 작가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소설’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물론 ‘사소설’은 작가가 직접 등장하는 소설로서 작가의 체험이 그대로 소재화된 소설을 가리킨다고 볼 때 <광마일기>가 전형적 사소설적 기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직접 등장하기는 하되 작가의 경험이 그대로 투영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사소설 기법을 채택한 이유는 바로 소설의 본질인 ‘그럴듯한 거짓말’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의도 때문이다.
<대학시절>은 주인공이 대학시절에 겪은 세 여인과의 로맨스를, <서울야곡>은 극장에서 자살하려던 여인과의 짧고 플라토닉한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어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난 여인과 하룻밤에 갖는 격렬하면서도 애조 띤 러브스토리를 그리고 있고, <연상의 여인>은 주인공이 총각시절에 겪은 유부녀와의 사랑과 이별을 심리묘사 위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그럴듯한 거짓말’은 모방론적 입장에서 볼 때 ‘개연성(Probability)'과 ‘박진성(Verisimilitude)'의 소설 미학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효용론적 입장에서는 ‘뿔 있는 암사슴’ 그림이 그림으로서만 잘 되어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사실에 위배된다고 해도 가치 있는 것이다. 플라톤과 달리 문학의 쾌락적 기능을 매우 중요하게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 최악의 경우 철학적 진리를 담고 있지 않다고 해도 문학적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면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문학이라고 본 반면, 그러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없을 때에는 아무리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해도 문학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플라톤처럼 예술적 처리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전혀 무시하고 오직 진리만 말하는 문학을 문학으로 인정하지조차 않았던 점을 생각할 때, 마광수가 말한 ‘그럴듯한 거짓말’은 사실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간(독자)의 상상력을 고취시키기 위한 ‘박진성’의 의도적 장치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러한 그의 의도가 사소설 형식을 통해 잘 형상화 된 작품이 <광마일기>의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스토리텔링(story telling) 면에서도 열편의 소설들은 구성력 있게 짜여 있어 마치 작가 자신의 실제 체험담을 듣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소설미학이 자리 잡고 있는 매우 중요한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고려 때 죽은 처녀 귀신인 궁녀(宮女) ‘야희’와 ‘나’의 애틋한 사랑을 고려가요 <쌍화점> 모티프와 절묘하게 연관시켜 그려낸 <달 가고 해 가면> 같은 것은 ‘전기성(傳奇性)’과 ‘그럴듯한 거짓말’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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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가벼움’의 소설 미학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의 현대 소설은 지금까지 대체로 <무거움의 미학>으로만 일관해 왔다. 나는 교훈주의를 바탕에 깐 경건주의가 우리 나라 현대 소설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거운 소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벼운 소설’을 경시하거나 폄하하면서 ‘무거운 소설’만을 소설의 본령(本領)으로 삼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광수, <가벼운 소설과 무거운 소설>, 위의 책에 수록)>
동양문학의 전통은 서구의 문학과는 달리 ‘가벼운 소설’에 그 정서적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마광수가 전기소설적 형식을 현대에 새롭게 시도한 태도는, 오늘의 한국 문학적 풍토가 지나치게 이념 일변도의 ‘무거운 주제’만을 ‘무겁게’ 다루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반동적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문학이론에 대한 입장, 즉 동양문학론에 기초한 문학의 이해방식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즉 그가 <상징시학>에서 강조한 대로, ‘재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 보다는 ‘표현적 입장’으로서의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 것과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광마일기>의 형식적 특징으로 지적한 전기성의 특징은 바로 이 세 번째 특징인 ‘가벼움’의 소설미학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가벼운 소설’은 또한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창작된다. ‘무거운 소설’이 다소 위선적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가벼운 소설’은 다소 위악적(僞惡的)인 태도를 밑바탕에 깔고서 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거운 소설은 작가가 철학자나 사제(司祭) 같은 태도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요, 가벼운 소설은 작가가 단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으로 창작에 임하는 것이다. (마광수, 위의 글)>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문학이 독자들에게 진리나 교훈을 주지 않더라도 미적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개연성 있고 박진감 있게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충분히 있다고 볼 때, 그가 ‘도덕적 당위성’이나 작가의 ‘도의적 책임’을 ‘무거운 소설’의 범주에 넣고, ‘작가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의 입장’을 ‘가벼운 소설’로 분류하고 있는 태도는 매우 중요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벼움이 경박함이나 천박함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고전소설, 특히 여러 전기소설 속에 나타나는 주제의 ‘가벼움’을 그가 <광마일기>를 통해 구현하고 있는 것은 소설미학과 정신의 면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실험적 시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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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마일기>의 세 번째 특징으로 지적한 ‘가벼움’의 소설미학은 다시 문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말에서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가 문체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문체는 그 형성 요인에 따라 네 가지 관점에서 통용될 수 있다. 즉 언어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문체개념, 주제, 장르, 기타 형식에 의해 형성되는 문체, 수신자나 수신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문체, 작가의 품성에 따라 형성되는 문체가 바로 그것이다. 문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작가가 선택하는 말의 문제이기 때문에 <광마일기>가 보여주는 소설미학의 세 번째 특징인 ‘가벼움의 소설미학’의 문제를 문체와 관련지어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권태>에서 손톱의 길이를 65센티미터로 길게 붙이게 하는 과장적 행위라든지, ‘나’가 ‘희수’에게 하는 상스러운 말, 그리고 중간 중간에 내뱉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대사들은, <권태>의 무거운 주제가 사변적이고 장황한 ‘나’와 ‘희수’의 대화에 의해 더 지루해질 수 있는 여지를 해소시켜 주는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마일기>에서도 역시 가볍고 구어적인 대사나 문장이 많이 나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어 가는데, 이는 우리나라 기존의 소설들이 주로 독자에게 무거운 부담감을 주도록 의도됨으로써 작가의 정신적 무게나 깊이를 과시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창작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법 역시 마광수 문학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인 ‘솔직성’에서 나온 것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 그때나 지금이나 난 정말 여자들에겐 ‘정 떨어지는 남자’인 것 같다. 어린애처럼 칭얼칭얼 보채대는 것까지는 귀엽게 봐줄만 한데, 여자를 포근하게 감싸주거나 보호해 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사디즘이 어떻고 마조히즘이 어떻고 하며, 곧 죽어도 남자라고 사디스트 짓을 하려고 드니 말이다. 내 가슴은 벌판 같은 가슴이 아니라 깔대기 같은 가슴이라서 여자를 푸근히 포옹해 줘 본 적도 없다. 어쩌다 의무적으로 드라마틱한 연출을 해가며 여자를 포옹할라치면, 그 여자의 가슴을 으스러지게 껴안아 주는 게 아니라,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가며 내 가슴이 먼저 으스러지게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만 한다.> (<대학시절> 에서)
<권태>에 비해 <광마일기>의 문체는 전기소설적 요소를 가미하였기 때문에 이 소설을 찬찬히 음미하여 읽어 본 독자라면 알 수 있듯이, 마치 3.4조나 4.4조의 산문시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본래 마광수의 문장이 길지 않은 호흡으로 쉽게 읽히면서도 경쾌한 독서 속도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도 이와 같은 내재적 율격이 그의 문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 가고 해 가면>은 이와 같은 그의 문장, 문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나’와 ‘야희’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삽입 시편들, 그리고 친구인 ‘우람해’와 ‘지저분’을 등장시켜 ‘야희’를 괴롭히는 ‘저승 남자’(털보사나이)와 투석(投石)과 엽총의 대결을 벌이게 하는 장면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전개 면에서 볼 때 매우 이질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상상을 왕래하는 작품 배경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는 예들이다.
<광마일기>에서 보이는 이상의 세 가지 소설 미학적 특징은, 그가 모든 문학 작품을 낭만적 자유정신에 토대한 ‘인공적인 꿈’이라고 보는 한에서, 우리는 앞의 여러 인용문에 나타난 그의 소설 미학적 진술을 매우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인공적인 꿈’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한 장치들이 구성의 절묘함과 함께 소설 전체의 유쾌한 재미성을 받쳐 주고 있는 것이다 (<광마일기>는 이야기의 흐름과 극적 반전 등 소설 구성 요소로서의 ‘이야기성’을 요즘 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확보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서구 문학이론의 눈으로 마광수의 소설을 볼 때, 구성의 입체성이나 갈등의 양상이 아예 없거나 약화되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은 동양문학의 전통과 작가의 독특한 소설 미학적 관심에 바탕을 둔 소설 양식을 의도적으로 실험하는 데서 나온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는 동양적 소설미학에 서구적 묘사법이 가미되어 동서양 문학의 상승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어 훨씬 폭넓은 재미와 박진감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광마일기>가 갖고 있는 탁월한 장점 중의 하나는, 이 소설 전편에 깔려있는 배경묘사, 풍속묘사 등이 치밀하고도 친근감 있게 읽혀진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1970년대의 서울 풍경을, 눈에 보이듯 생생하고 회화적인 묘사법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연상의 여인>에서 보이는 1970년대의 명동 풍경이라든가, <어떤 크리스마스>에서 보이는 회현동 주변의 소주 집 풍경 묘사와 70년대 호텔 디스코텍과 호텔 방의 분위기 묘사, 그리고 <서울야곡>에서 보이는 1970년대의 남산, 필동 등 서울거리의 풍경 묘사는 일품이다. 또한 [K씨의 행복한 생애]는 주인공의 직장동료인 K씨가 30년에 걸쳐 지속해나간 순수한 사랑과 그 결실을 그린 것으로 이 책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애절한 낭만적 러브스토리인데, 이 이야기에도 역시 195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학가의 분위기 묘사와 결혼식 장면 및 하객들의 심리묘사, 여성의 의상 묘사 등이 독자의 감흥을 상승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소설 미학적 관심과 형상화를 통해 작가 마광수가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다.
꿈과 환상은 우리들에게 정신적, 심리적 진정제, 즉 카타르시스의 구실을 한다. 제도적 금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 가령 폭력이나 마약에의 충동, 성적 욕망 등이 예술 작품이라는 상상적 세계를 통해서 상상적으로 충족되는 과정을 대리만족, 혹은 대리배설로서의 카타르시스로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예술 혹은 문학은 일종의 무위적(無爲的) 속성을 갖는다. 그런데 문학의 이 무위적 속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면 예술적 활동은 실질적 목적과 무관하다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무위성에서 예술은 유희, 즉 놀이와 통하는 것이다. 예술의 이 무위성은, 꿈이 현실에 대한 아무런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현실적 윤리와 억압에 대한 ‘일탈행위’를 보장해 주는 개념이다. <광마일기>의 소설미학의 한 가지 뚜렷한 거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