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3부 13
난로가 지펴져서 따뜻해지자 차를 끓여 컵과 찻잔에 따라 하얀 밀크를 치고, 도넛과 갓 구운빵, 삶은 달걀, 버터, 송아지 머리와 다리 등을 늘어놓았다. 모두 식탁 대신 나무 침대에 모여들어 마시고 먹고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란체바는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차를 따라주었다. 모두 그녀 주위에 모여들었지만, 크릴초프만은 젖은 반외투를 벗고 마른 담요를 덮고는 자기 자리에 드러누운 채 네흘류도프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행군 중의 추위와 습기, 그리고 여기 도착했을 때 느꼈던 불결함과 난잡함, 이 모든 것을 정돈하기 위해 쏟은 숱한 노력,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난 뒤에야 식사와 뜨거운 차를 들고 나니 모두 이를 데 없이 즐겁고 기꺼운 기분이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형사범들의 말소리와 고함 소리와 욕지거리 따위는 그들을 에워싼 주변 환경을 상기해주기도 했지만, 반면에 훈훈한 마음을 더한층 강하게 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조그만 섬에라도 있는 듯이 자신들을 둘러싼 모욕과 고통을 잠시 잊음으로써 마음이 들뜬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모든 이야기를 다 했지만, 현재의 환경과 장차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젊은 남녀 사이에, 그것도 특히 이들처럼 강제로 함께 모여 있을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서로 의견이 맞는 이도 있고 맞지 않는 이도 있는 등 여러 가지로 얽힌 연애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도 있거니와 짝사랑도 있었다. 그들 거의 모두가 사랑을 했다. 노보드보로프는 언제나 웃음을 띠고 있는 그라베츠에게 반해 있었다. 그라베츠는 아직 젊은 여대생으로 무슨 일이나 거의 생각하는 일이 없었고, 혁명 문제에도 무관심했다. 그러나 시대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어 유형이 되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몸이었을 때 그녀의 주요한 흥미는 남자가 많이 따른다는 것이었는데, 그 점은 재판에서도, 옥중 생활에서도, 유형지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번 여행 중에도 노보드보로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위안으로 여기고 있었으나,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그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무척 잘 반하는 주제에 통 상대해주는 이가 없는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는 그래도 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리라 기대하면서 나바토프를 연모하기도 하고, 노보드보로프를 사랑하기도 했다. 그리고 크릴초프는 마리야 파블로브나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세상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했지만, 연애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특별히 상냥하게 병구완해주는 일에 대한 감사와 우정으로 자기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나바토프와 란체바는 매우 복잡한 연애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마리야 파블로브나가 아주 순결한 처녀인 것과 마찬가지로 란체바 역시 아주 정숙한 유부녀였다.
아직 열여섯의 여학생일 무렵 그녀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란체프라는 학생을 사랑하게 되고, 열아홉 살 때 아직 학생이던 그와 결혼했다. 그런데 4학년 때 학생운동에 휩슬린 남편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되어 혁명가가 되었다. 그녀는 청강하고 있던 의과 공부를 집어치우고 남편을 다라 여기 혁명가가 되었다. 가령 남펴닝 그녀의 눈으로 보아 이 세상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가장 훌륭한 인간으로 여겨질 만한 사내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을 테고 또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신념으로 보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남성을 사랑하고 결혼한 이상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 역시 인생과 그 목적을 세상에서 제일 총명하고 훌륭한 인간이 보듯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처음 한동안 인생이란 배우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그렇게 인생을 이해했다. 남편이 혁명가가 되자 그녀도 혁명가가 되었다. 그녀는 현행 제도를 그대로 허용할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의 의무는 이 질서와 싸워서 개성이 자유로이 발달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체제를 확립하는 일밖에 없다는 것 등을 아주 훌륭하게 논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만 남편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절대적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하나, 남편의 마음과 완전한 일치를 바라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만이 정치적 만족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 남편과 또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아이와의 이별은 그녀에게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괴로움도 남편을 위해서며, 또 남편이 거기에 몸 바치고 있는 보람 있고 진실한 사업 때문임을 알고 그녀는 이별의 괴로움을 꿋꿋이 용감하게 참아냈다. 그녀는 항상 마음속에서 남편과 함께했으므로, 전에도 다른 남자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듯 현재도 남편 말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바토프가 보내는 한결같은 맑은 애정은 그녀를 감동시키고 동요케 했다. 그는 의지가 강한 도덕적인 남자이고 남편의 친구이기도 했으므로 그녀를 누이처럼 여기려고 애쓰고는 있었으나,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 간혹 그 이상의 것이 얼굴을 내밀 적이 있어서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현재의 괴로운 그들의 생활을 아름답게 장식해주는 역할도 해주었다.
그래서 이 정치범 대열에서 연애 감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 사람은 마리야 파블로브나와 콘드라티예프 둘뿐이었다.
부활 3부 14
모두 함께하는 식사가 끝난 다음에 언제나처럼 카튜샤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네흘류도프는 크릴초프 곁에 앉아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틈에 네흘류도프는 마카르의 부탁과 그의 범죄 이야기 등을 크릴초프에게 들려주었다. 크릴초프는 번뜩이는 눈으로 네흘류도프를 바라보면서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는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주 이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과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이란 대체 누구일까요? 다름 아닌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그들을 알지못할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한편 그들은 한술 더 떠서 우리를 미워하고 적으로 봅니다. 무서운 일 아닙니까."
"아무것도 무서울 건 없어." 두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노보드보로프가 참견을 햇다. "대중이 숭배하는 것은 항상 권력뿐이야"하고 그는 특유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부가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그들은 정부를 우러러보고 우리를 미워하고 있지만, 내일이라도 우리가 권력을 쥐면 그자들을 우리를 따받들게 될 거야....."
이때 벽 저편에서 느닷없이 욕하는 소리와 여러 사람이 벽에 쾅쾅 부딪히는 소리, 쇠사슬 소리, 비명과 고함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두들겨 맞으며 외치고 있었다. "사람 살려!"
"봐라, 저게 바로 그들이다, 짐승 같은 놈들! 저런 놈들과 우리 사이에 대체 어떤 일치가 있을 수 있겠나!" 노보드보로프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자넨 짐승이라고 말했지만, 난 지금 네흘류도프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다네." 크릴초프는 화가난 오조로 말하고, 마카르가 동향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되면 짐승의 일은커녕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겠어."
"감상주의지!" 노보드보로프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자들의 감정이나 행동 동기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자네는 그것을 관대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혹시 거기에는 그 징역수에 대한 질투가 섞여 있는지도 알 수 없지."
"넌 어째서 남의 좋은 점을 보려고 하지 않지?"
별안간 마리야 파블로브나가 화를 내며 말했다(그녀는 아무에게나 흉허물 없이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볼 수는 없잖아."
"어째서 존재하지 않지? 한 인간이 무서운 죽음을 무릅스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 노보드로프가 말했다. "만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면, 이를 위한 첫째 조건은(콘드라티예프는 램프 옆에서 읽고 있던 책을 ㄴ호고 주의 깊게 선생의 의견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공상을 피해서 있는 그대로 사물을 봐야 하는 거야. 민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주고, 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민중이란 우리 운동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현재와 같이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한 우리의 협력자는 될 수 없어." 그는 마치 강의라도 하는 듯 얘기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발달의 과정, 그 발달 과정에 도달하기 전에 그들에게서 조력을 기대한다는 건 완전히 착각에 지나지 않아."
"발달 과정이란 무엇인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크릴초프가 말했다. "우리느 ㄴ언제나 전제와 독재에 반대한다고 공헌하고 있다. 그런데 자네의 이론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전제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니, 조금도 전제는 아니지"하고 노보드보로프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다만 민중이 나갈 길을 알고 있다는 것뿐이고, 또 그 길을 가르쳐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자네가 가르쳐주는 길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그것이 벌써 전제주의가 아니냐 말일세. 종교재판이나 대혁명 학살을 빚어낸 그 전체와 다름이 없지 않나? 그들 역시 그것은 학문적으로 유일한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거든."
"그들이 잘못했다는 것이 곧 내가 잘못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지. 그리고 관념론자의 헛소리와 실증적인 경제학 자료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까 말이야."
노보드보로프의 목소리는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지껄이는 것은 그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노상 토론들만 하는군요....."그가 잠깐 입을 다물었을 때 마리야 파블로브나가 말햇다.
"그럼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흘류도프는 마리야 파블로브나에게 물었다.
"난 크릴초프가 옳다고 생각해요. 민중에게 우리 견해를 강요할 수는 없어요."
"그럼 카튜샤, 당신은 어때요?" 네흘류도프는 웃으며 물었지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지나 않을까 싶어 속으로는 조마조마했다.
"전 민중이 구박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귓불까지 진홍빛이 되어서 그녀는 말했다. "민중은 그야말로 모질게 구박받고 있어요."
"옳아요, 카튜샤, 정말 옳아요." 나바토프가 외쳤다. "민중은 무척 학대받고 있어요. 그러니 그들을 학대받지 않도록 해주어야 해요.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 점에 있는 거야."
"혁명 과제로서는 기묘한 고찰이군그래." 노보드보로프는 이렇게 말하고 화가 난 듯이 잠자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저 사람하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거든." 크릴초프는 속삭이는 소리로 말하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차라리 말을 않는 게 훨씬 낫지요." 네흘류도프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