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 길에서 만난 시 두 편
召我 박정열
수필(2016 한국문학시대) 시(2018 호서문학) 대전아동문학회 대전문학회 아침의 문학회원
나는 지리산을 향하면서 먼저 경암敬菴 문동도文東道(조선숙종)의 시 「지리산」을 읽는다. 넓고 넓은 그 위에 또 겹쳐 광대한 모습/그렇게 아득히 세속먼지 벗어났네./꽃이 떨어져 계곡에는 비단 같은 물 흐르고/구름생기 나니 구렁에 자리를 펼쳤네./산과 시내에는 사람이 길을 찾으며/온 세상에 새들이 지저기는 봄이로구나./절경을 찾아서 시구를 쓰고자 하여/언덕에 의지해 서니 붓은 절로 흐르누나. 이 시구는 오도 잿마루, 입석에 새겨놓은 글이다.
지리산 둘레길 출발점은 상황上黃이라는 마을이다. 나는 탐방객을 위해 설치한 알림판에 먼저 시선을 집중한다. 행정구역상 위치는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이다. 본래 3개의 자연부락이던 이곳은 황치黃雉 또는 웃황치, 상황이라 불렀다 한다. 파평坡平윤씨 윤천옥尹天玉이 임진왜란 때 지리산으로 피난을 가던 중 등구치를 넘어가다가 영신암靈神岩이라는 바위굴속에 숨어 난을 피했다고 전해진다. 이 인연으로 굴에서부터 약 2km 떨어진 지금 이 곳으로 내려와 느티나무 숲에 터를 닦고 정착했다고 하는 마을이 생긴 유래이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뒤에 있는 백운산기슭에 황강사라는 절이 있었다. 북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는 꿩이 엎드려있는 형국이라 하여 복치혈伏雉穴이라는 굴이 있다. 황강사의 황黃자와 복치혈의 치雉자를 따서 황치라고 하였다. 이 마을 입구에는 버드나무숲이던 자리를 입증이라도 하듯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고 한다.
이 작은 마을 뒤로 오르막길이 나 있다. 잎사귀가 다 떨어진 늙고 왜소한 돌감나무의 앙상한 가지에는 노랗게 물든 감이 주저리로 열렸다. 나무의 중심에 까치집이 있어 아릿한 고향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파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감나무는 가을 풍치의 묘미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셔터를 누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풍광이다.
작은 시골 마을 뒷산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은 시멘트로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이제 시골의 환경은 결코 시골스럽지가 않다. 또 길가에 드문드문 가로등이 서 있다. 지리산자락에 펼쳐진 골짜기는 논과 밭 사이로 집이 하나 둘 흩어져 있다. 그 집들도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허름한 집이라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르막길섶 밭둑에는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두렁을 지키고 서 있다. 고사리를 밭에 심어 재배하고 있다. 여기 고사리는 더 이상 산채가 아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다. 봄에 종근을 심어 늦은 봄부터 초가을까지 수확한다고 한다. 이렇게 고사리를 재배되고 있었지만 시장에서는 고급산채로 대우가 톡톡하다. 시중에는 대부분 중국산 고사리가 판을 치고 있다. 또 북한산도 쉽게 눈에 띈다. 이제 지리산 깊은 산골짝도 문동도의 시속時俗의 풍경과는 참 많이 다른 듯하다.
우리는 오르막길 중간에 몇 호 안 되는 작은 부락에 다다랐다. 억새로 지붕을 엮은 농막에는 처마 끝에다 호두를 양파 망에 넣어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늙은 호박이며 감을 좌판에 놓고 팔고 있다. 큰 바위를 등진 좌판 대는 이 지역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아 팔았다. 군침이 싹 돌면서 입맛을 강하게 자극해 온다. 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포만감을 느끼며 돌아서야 했다. 한 잔 술과 시한수를 곁들여 볼만한 여흥인데도 말이다.
우린 다시 길을 오른다. 경사도가 적어도 15도는 될 성싶다. 그 비탈에다 논을 개간했다. 논둑의 높이는 족히 2m는 될 듯하다. 자연석으로 축조된 논둑은 반듯반듯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산간에도 수량水量이 꽤 풍부한 모양이다. 이런 풍경에 취해 오르다보니 어느 새 상황리가 저 멀리 아래로 보인다. 올려다 볼 때만 해도 제법 부담스러웠다. 포장길과 숲길로 갈리는 삼거리다,
건너 아득히 천왕봉이 하늘과 땅을 경계로 갈라놓고 있다. 길은 두 사람이 교행을 해도 서로 비켜가지 않으면 몸이 닿을 정도로 협소하다. 자연 수림은 원시림처럼 수목이 울창하다. 소나무보다 잡목이 많다. 숲은 햇볕마저 뚫기가 어려운지 어둑어둑한 기운을 흩뿌려 놓고 있다. 작은 늪인가 싶었는데 물을 가두는 못池이다. 수초에 덮인 물은 고작 수초의 아랫도리를 적실만 하다. 물길을 낸 것을 보면 농수가 분명하다. 숲길을 벗어나자 시멘트로 포장한 임간도로가 나타났다.
이 도로가 상황리로 연결되는 듯했다. 길옆에는 재 너머를 오르다 보았던 논처럼 대여섯 다락의 임간 논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의 오르막을 따라 억새며 산국이 예쁘게 손을 흔들며 탐방객을 맞는다. 높은 소나무에 기어오른 담쟁이가 빨갛게 물들어 햇볕에 빛나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햐! 하는 감탄사와 더불어 시한 수가 절로 터져 나올 법도 하다.
함양 쪽 지리산은 산양 삼을 많이 심는 가 보다. 산비탈을 깎고 산양삼가공시설이 조립식으로 들어서 있다. 단감나무인지 알 순 없지만 알이 아이주먹만한 둥시 감이 어린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영호남의 지붕인 지리산의 수려한 기운을 받아선지 감은 더 굵고 실해 보였다. 문동도의 시구처럼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내 가슴속이 확 트이는 느낌을 전해 온다.
얼마를 지나자, 수령이 족히 몇 백 년이 됐을 법한 둥구나무가 나타났다. 잎이 형형색색으로 물든 둥구나무아래 빨간 모형우체통이 서 있다. 그 옆으로 테라스를 설치하였다. 둥구나무주위는 대나무가 온통 숲을 이루었다. 대밭 가운데로 난 샛길이 지리산 연봉의 아름다운 풍치를 쏙 빨아들였다. 창원마을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마을로 가는 대숲터널이 내 마음을 매료시키고도 남았다.
이 마을은 내 고향마을에 온 것만 같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두 그루씩 서있다. 노란 감이 잎사귀 뒤에서 빠꿈이 고개를 빼 밀었다. 드문드문 호두나무도 서 있다. 마당가운데 솥 걸이에서 뿜는 연기는 시골 풍치를 한껏 돋웠다. 우리는 「창원산촌체험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섶이었다. 담 너머에는 백 년 전 면암勉菴선생이 찾은 그때인 듯 가지가 찢어지게 돌배가 조불조불 매달렸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세상에서나 볼 수 있는 멋스러운 풍경을 연출해 냈다. 길섶 얕은 가지에 홍시 두 개가 매달렸다. 그걸 따겠다고 나는 까치발을 디디고 온몸을 자 벌레처럼 길게 늘였다. 홍시는 옛날 그대로 달달한 그 맛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다.
동네를 벗어나자 아스팔트길이 우리를 반긴다. 아름드리 둥구나무군락이 나타났다. ‘우리 마을 이야기’라는 입간판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창원昌元리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토산품인 차와 약초를 세금으로 거두어 지게에 지고 오도재를 넘어 함양까지 날랐다한다. 아랫등구라하여 전북 남원군 산내면 중창리로 넘어가는 등구재와 백씨와 양씨가 살았다는 백양골이 있다. 마을입구에 조선중기 강개암선생이 수동효리에 들어와 시를 읊었다는 독무정(구송정)과 서당 양진제가 있다. 강개암선생의 관棺이 지금도 김해김씨 집에 보관돼 있다. 또 김종원의 처 완산최씨 지려도 있다. 조선 선조 때 고성이씨, 인조 때는 김해김씨와 거창유씨, 경종 때는 곡부공씨, 영조 때는 보성오씨가 정착하였다. 라고 마을의 내력來歷을 적어 놓았다.
창원마을을 뒤로하고 우리를 태운 차는 오도재를 올랐다. 잿마루에는 정자하나가 있다. 천왕봉(1915m)은 지산指山의 연봉들을 품어 안았다. 선인들이 찾았던 지리산은 그 때도 오늘처럼 고운 빛살을 품었을 것이다. 잿마루 입석에 새긴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시 「천왕봉」을 읽는다.
하늘과 땅이 그 어느 해에 처음 열려서/두류산을 준비하여 저 하늘을 떠받히는 가/층계 진 언덕 그늘에는 봄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에/산 아래 구름끼니 낮에도 잠을 자고 싶구나./해와 달을 우러르며 고개 돌려 얼굴을 찡그림이여/산과 물을 관할하니 모두가 내 앞에 엎드리누나./참 길을 찾고 있는데 어디 다른 길이 있을 손가/발원하는 데서부터 냇물이 따라가게 되어 있으리라
참 길이 어떤 길인지. 오늘도 우리는 참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차는 참 길을 찾아 가는 중인지 지리산자락 꼬불꼬불한 산골길을 저무는 비탈길로 구불구불 내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