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회] 도적무리에 붙잡혀 위기 겪어
장준하 평전/[6장] 파촉령 넘어 중경 임시정부 도착 2008/11/11 08:00 김삼웅 행렬은 보통 하루 백 리 정도를 걸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4시경 일행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맥의 입구에 도달했다. 방향을 잘못 잡아 들어온 산길이었다. 낭떨어지 사이로 세워진 고성을 지나기 위해서는 이 성문을 통과하는 길밖에 없었다. 파수병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일행이 고성안으로 들어가자 파수병들은 성문을 닫아버렸다. 알고보니 꼼짝없이 성안에 감금된 것이다.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은 중국의 도적 떼였다.
장준하와 중국어를 아는 선우진이 나서 책임자 면담을 요청하고, 공한을 보여주면서 한국독립군이라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공한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였다. 일행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긴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이튿날 어렵게 수령을 만나 통사정을 했다. 다행히 어제와는 태도가 약간 달라진 듯 했다. 도적의 수령은 식량을 두고 가라고 요구했다.
한겨울에 허허벌판과 산속에서 식량을 빼앗기게 되면 굶주림과 동사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다. 하여 몇 차례 수령에게 매달리고 애원하였다. 다행히 마음이 바뀐 수령이 전원 풀어주도록 지시했다. 귀중품이 없고 초라한 군복차림이 생명을 구해준 것이다. 일행의 신분을 도적무리가 제대로 알았다면 일본군에 팔아넘겼을 것인데, 한국독립군이란 신분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도 살아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일행 모두가 무사히 풀려난 것은 천우신조였다.
호구(虎口)에서 풀려난 일행은 다시 걸었다. 중원 벌판에 눈이 내렸다. 눈을 밟으면서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다. 며칠만에 중앙군의 한 전구사령부가 있는 남양(南陽)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보급 관계로 2주일을 머물렀다. 일행은 중국인 마굿간이나 헛간에서 밀짚을 깔고 자느라 심한 피부병인 옴에 걸렸다. 일행 중에 의과대학 출신이 있어서 유황을 끓여 바르면 효과가 있다고 하여 이 일이 일과처럼 되었다. 신기하게도 장준하와 김준엽만 옴에서 피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바로 이곳이 제갈량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을을 둘러보면서 <삼국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이 주변은 바로 소동파가 중국 문학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적벽부'를 지은 곳이었지만 장준하는 아직 이를 알지 못했다.
일행 중에 여성이 6명이나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그 중에 세 쌍의 부부와 두 명의 위안부 출신, 그 사이에 낀 한 명의 여성…. 이 세 명의 여성을 둘러싸고 젊은 남성들 사이에 ‘동물적 욕망’이 굼틀거리며 암투가 벌어졌다. 특히 독신 여성에 대한 경쟁의식이 나타나면서 질서가 문란해졌다.
누구보다 모범이 돼야 하는 위치인 인솔책임자가 독신여성과 어울려 풍기를 문란시킨 것을 두고, 장준하는 이 사람을 불러 준엄하게 꾸짖고 체벌을 가하였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동지들 간에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취한 체벌이었다.
2주일이 되던 날에야 보급품을 받을 수 있었다.
노하구까지의 식량과 솜을 넣고 누빈 동복 군복, 외투 한 장씩을 받게 되었다. 영하의 날씨에 여름 군복으로 버텨 온 대원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장비였다.
노하구에는 한국광복군의 전방파견대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비록 다 헤어진 짚신을 신었지만 발걸음은 빨랐다. 남양을 떠난지 4일만에 노하구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 광복군의 파견요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전방파견대가 아니고 광복군 제 1지대의 분견대였다. 책임자는 출장을 가고 두 명의 요원이 나와서 극진하게 맞아주었다. 중경 임시정부 군무부장 겸 제 1지대장 김원봉 계열인 이들은 장준하 일행의 도착정보를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따뜻한 영접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동족애를 느끼며 모처럼 안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다. 양자강의 지류인 한수(漢水) 건너에서 야심에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직접 일군의 공습을 보기는 여기서 처음이었다. 공습은 여러 날 계속되었지만, 분견대가 자리 잡은 강 이쪽에는 중국군 부대가 없어서인지 폭격을 받지 않았다.
출장에서 돌아온 분견대장은 중경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남아 제 1지대를 보강하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일행의 중경행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중경까지 가는 길에는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넘어야 한다. 그 험준한 파촉령 눈보라 길을 맨발과 진배없는 낡은 짚신을 심고 넘는다는 것은 모험도 보통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식량도 크게 모자랐다.
김준엽이 중국군 제 5전구사령부 이종인 부대와 교섭을 벌이기로 했다.
그리고 머무는 동안 임천의 졸업 학예회에서 했던 연극을 다시 연습하여 이 지역 주민과 학생들을 상대로 공연하기로 했다. 주민들의 여론을 통해 이종인 대장을 움직여보려는 뜻이었다. 이 부대는 임천군관학교로부터 이미 연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잘 교섭하면 중경까지 가는데 필요한 보급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장준하의 연출로 준비한 순회연극은 학생들의 절찬을 받았고, 노하구 시민들의 화제가 되었다.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일군과 싸워 승리하는 연극의 내용이 중국인들의 정서에 와 닿았던 것이다. 주민들은 대원들의 열정적인 공연에서 감동을 받은 것이다.
장준하는 마지막 공연날, 무대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으로 옮겨 응급치료를 받고서야 깨어났다. 과로와 긴장이 풀리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공연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일행의 양말과 가죽구두를 한 켤레씩 사서 신었다. 장준하는 중국군 유격대원에게 빼앗긴 이래 안경이 없이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노하구에서 새로 안경을 하나 사서 끼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4시경 일행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맥의 입구에 도달했다. 방향을 잘못 잡아 들어온 산길이었다. 낭떨어지 사이로 세워진 고성을 지나기 위해서는 이 성문을 통과하는 길밖에 없었다. 파수병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일행이 고성안으로 들어가자 파수병들은 성문을 닫아버렸다. 알고보니 꼼짝없이 성안에 감금된 것이다.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은 중국의 도적 떼였다.
장준하와 중국어를 아는 선우진이 나서 책임자 면담을 요청하고, 공한을 보여주면서 한국독립군이라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공한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였다. 일행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긴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이튿날 어렵게 수령을 만나 통사정을 했다. 다행히 어제와는 태도가 약간 달라진 듯 했다. 도적의 수령은 식량을 두고 가라고 요구했다.
한겨울에 허허벌판과 산속에서 식량을 빼앗기게 되면 굶주림과 동사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다. 하여 몇 차례 수령에게 매달리고 애원하였다. 다행히 마음이 바뀐 수령이 전원 풀어주도록 지시했다. 귀중품이 없고 초라한 군복차림이 생명을 구해준 것이다. 일행의 신분을 도적무리가 제대로 알았다면 일본군에 팔아넘겼을 것인데, 한국독립군이란 신분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도 살아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일행 모두가 무사히 풀려난 것은 천우신조였다.
호구(虎口)에서 풀려난 일행은 다시 걸었다. 중원 벌판에 눈이 내렸다. 눈을 밟으면서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다. 며칠만에 중앙군의 한 전구사령부가 있는 남양(南陽)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보급 관계로 2주일을 머물렀다. 일행은 중국인 마굿간이나 헛간에서 밀짚을 깔고 자느라 심한 피부병인 옴에 걸렸다. 일행 중에 의과대학 출신이 있어서 유황을 끓여 바르면 효과가 있다고 하여 이 일이 일과처럼 되었다. 신기하게도 장준하와 김준엽만 옴에서 피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바로 이곳이 제갈량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을을 둘러보면서 <삼국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이 주변은 바로 소동파가 중국 문학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적벽부'를 지은 곳이었지만 장준하는 아직 이를 알지 못했다.
일행 중에 여성이 6명이나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그 중에 세 쌍의 부부와 두 명의 위안부 출신, 그 사이에 낀 한 명의 여성…. 이 세 명의 여성을 둘러싸고 젊은 남성들 사이에 ‘동물적 욕망’이 굼틀거리며 암투가 벌어졌다. 특히 독신 여성에 대한 경쟁의식이 나타나면서 질서가 문란해졌다.
누구보다 모범이 돼야 하는 위치인 인솔책임자가 독신여성과 어울려 풍기를 문란시킨 것을 두고, 장준하는 이 사람을 불러 준엄하게 꾸짖고 체벌을 가하였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동지들 간에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취한 체벌이었다.
2주일이 되던 날에야 보급품을 받을 수 있었다.
노하구까지의 식량과 솜을 넣고 누빈 동복 군복, 외투 한 장씩을 받게 되었다. 영하의 날씨에 여름 군복으로 버텨 온 대원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장비였다.
노하구에는 한국광복군의 전방파견대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비록 다 헤어진 짚신을 신었지만 발걸음은 빨랐다. 남양을 떠난지 4일만에 노하구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 광복군의 파견요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전방파견대가 아니고 광복군 제 1지대의 분견대였다. 책임자는 출장을 가고 두 명의 요원이 나와서 극진하게 맞아주었다. 중경 임시정부 군무부장 겸 제 1지대장 김원봉 계열인 이들은 장준하 일행의 도착정보를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따뜻한 영접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동족애를 느끼며 모처럼 안도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도 안전한 지역은 아니었다. 양자강의 지류인 한수(漢水) 건너에서 야심에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직접 일군의 공습을 보기는 여기서 처음이었다. 공습은 여러 날 계속되었지만, 분견대가 자리 잡은 강 이쪽에는 중국군 부대가 없어서인지 폭격을 받지 않았다.
출장에서 돌아온 분견대장은 중경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남아 제 1지대를 보강하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일행의 중경행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중경까지 가는 길에는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을 넘어야 한다. 그 험준한 파촉령 눈보라 길을 맨발과 진배없는 낡은 짚신을 심고 넘는다는 것은 모험도 보통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식량도 크게 모자랐다.
김준엽이 중국군 제 5전구사령부 이종인 부대와 교섭을 벌이기로 했다.
그리고 머무는 동안 임천의 졸업 학예회에서 했던 연극을 다시 연습하여 이 지역 주민과 학생들을 상대로 공연하기로 했다. 주민들의 여론을 통해 이종인 대장을 움직여보려는 뜻이었다. 이 부대는 임천군관학교로부터 이미 연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잘 교섭하면 중경까지 가는데 필요한 보급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장준하의 연출로 준비한 순회연극은 학생들의 절찬을 받았고, 노하구 시민들의 화제가 되었다.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일군과 싸워 승리하는 연극의 내용이 중국인들의 정서에 와 닿았던 것이다. 주민들은 대원들의 열정적인 공연에서 감동을 받은 것이다.
장준하는 마지막 공연날, 무대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으로 옮겨 응급치료를 받고서야 깨어났다. 과로와 긴장이 풀리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공연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일행의 양말과 가죽구두를 한 켤레씩 사서 신었다. 장준하는 중국군 유격대원에게 빼앗긴 이래 안경이 없이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노하구에서 새로 안경을 하나 사서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