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조선pub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내 페이스북에
내용이 재미있는 포스팅이 눈에 띄어서 조선pub 웹사이트에 칼럼방을 하나 개설할 테니 글을 올려 보라는 것이었다. 외교관을 하다가 우동집 사장이
된 특이하다면 특이한 경력이기는 하지만, 나같은 '보통사람'에게 올 제의가 아닌 것 같아 어리둥절했다.
워낙 지식이 짧고 경험이 일천하여 ‘내 주제에..’라는 생각에 사양할까 하다가, ‘세상에 든 사람, 난 사람만 떠들란 법 있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고 서로 소통하면서 배우고 깨닫는거지’라는 생각에 감히 용기를 내 해보겠다고 했다.
칼럼방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여서 고민이 많이 됐다. 나쁜 머리 굴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이름은 ‘신상목의 번번(飜飜)한 이야기’이다.
飜은 ‘뒤집을 번’자로 번역, 번복, 번안 등에 쓰이며, '날다. 뒤집다'의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翻자와 동자(同字)로,
뜻을 나타내는 날飛 部와 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反轉의 뜻을 가진 番(번)으로 이루어졌다. 풀이하면 ‘날아서 반전하다, 전(轉)하여 뒤엎다’의
뜻이다.
내 페이스북 포스팅이 외교관이었던 경험을 살려 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외부의 관점에서 보거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새로이
보이거나 달리 보이는 측면이 있음에 주목한 것들이 많아 ‘뒤집어 보고 거꾸로 본다’는 의미에서 '飜'을 키워드로 삼아 보았다.
거기에 우리말 '번번하다'는 번번한 집안, 번번한 학력 등에서와 같이 '수준이 있고 번듯한'의 의미가 있으니 뜻과 발음 양면에서 의미
있고 재미있는 제목이 되지 않을까 하여 지은 이름이다. 번번한 이야기일지 번번하지 못한 이야기일지는 독자들의 판단일 것이지만.. (처음에는
아뢸謁, 따질訟, 바로잡을撻, 칭송할頌자를 써서 세상일을 이리저리 따져본다는 의미에서 ‘신상목의 알송달송한 이야기’로 지을까 하다가 너무
생뚱맞아 포기했다.)
오늘은 첫 번째 이야기로 飜자에 어울리게 번역(飜譯)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항상 남의 언어를 우리 언어로
옮기거나 우리 언어를 남의 언어로 옮기는 것에 대해 흥미를 넘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떠한 단어 하나를 보아도 간단히 넘기지
못하고 정확한 뜻, 용례, 유래 등에 대해 민감한 편이었고, 일본 유학 및 근무 시절을 거치면서 근대화 이후 형성된 한국인의 현대 언어생활에
일본이 미친 영향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우리의 언어습관에 남아있는 일본의 영향은 지대하다. 바람직하지 않은 잔재, 바꿔야 할 찌꺼기들도 많지만, 지적 유산(遺産)으로서 의미가
있는 영향도 많다. 언어를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 발휘된 일본의 지적 역량이 좋건 싫건 한국으로 전수되었다. 이하 몇 가지 흥미로운 일본 근대화
시기의 번역 사례를 소개한다.
[번역의 묘미① - 느낌까지 살려라]
서양의 예술사조는 ‘Realism-사실주의, Impressionism-인상주의, Classicism-고전주의,
Abstractionism-추상주의, Romanticism-낭만주의’ 등으로 번역한다. 대부분의 번역이 원어를 그대로 옮긴 평이한 번역이나,
낭만주의는 사정이 좀 다르다.
'浪漫(낭만)'은 사실 기존에 있던 단어가 아니라, ‘romanticism’을 번역하기 위해 새로이 만들어진 말이다. 메이지시대에
일본의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조어한 것으로 알려진 이 단어의 매력은 어의와 발음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romanticism의 어원인 romantic은 중세에 유행한 기괴하고 세속적이며 욕망과 모험을 담고 있는 소설, 산문류인
로망(roman)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romanticism은 로망으로 상징되는 유려하고 자유분방하고 몽환적인 문화예술의 사조를 말한다.
나츠메 소세키는 이러한 romantic을 낭만(浪漫)으로 번역하였다. 낭만의 일본어 발음은 ‘로망(ろまん)’이다. romantic의
의미적 특징을 집어냄과 동시에 발음면에서도 원어의 뉘앙스가 살도록 한껏 멋을 부려 번역한 것이다. 번역의 묘미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같은
단어이지만, 한국에서 '낭만파'라 할 때와 일본에서 '浪漫派(로망파)'라 할 때의 어감의 차이가 역력하다.
[번역의 묘미②- 古典에서 취하라]
정부의 가장 중요한 핵심관료들의 모임을 내각(內閣)이라고 한다. 영어의 cabinet을 번역한 것이다.
cabinet은 cabin과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로, 사적인 비밀스런 작은 공간, 방을 의미한다. 17세기초 후계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왕권을 이어받은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의 정치에 익숙하지 않아 자신의 궁정방에 심복들을 불러 모아 내밀하게 정사를 논하고 보좌를 받은
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관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 생겼으며, 후에는 정식으로 총리 휘하의 Minister(장관, 대신)들로 이루어진 정치기구를
지칭하는 단어로 발전하였다.
막부말 영국식 정치체제를 공부하던 일본의 선각자들은 천황 밑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서구식 관료체제를 구상하면서, 이 cabinet을
어찌 번역하면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선각 지식인의 대부격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원문에 충실한 느낌으로 '王室(왕실)'을 사용하자고
하기도 하였다지만,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채택된 것은 ‘內閣(내각)’이다.
왜 하필 내각인가? 明의 永樂帝(영락제)는 궁정 안에 文淵閣(문연각)이라는 도서관 겸 공부방을 차려놓고, 이곳에 신진기예의 학자들을
모아 자신의 정사를 보좌하게 하였는데, 내각은 이 문연각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곳에서 황제를 보좌한 측근들을 閣臣(각신)이라고 불렀고, 내각은
점차 장소의 의미를 넘어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기구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일본의 선각자들은 이러한 중국 역사속의 정치체제에서 영감을 얻어 cabinet에 해당하는 단어를 내각으로 번역한 것이다. 역사적 연원,
기능 등을 생각해보면 찰떡처럼 들어맞는 번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일본의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적 허브 역할을 한 중국의 역사에
연원을 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한중일 어디에서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동아시아 공용어로서의 가치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 번역의 묘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할 수 있다.
內閣이라는 명칭이 정해지니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원어인 영어를 넘어서는 효율성이 생긴다. 閣자를 넣어 閣僚(각료), 閣議(각의),
入閣(입각), 改閣(개각), 組閣(조각) 등의 파생어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서양의 지적 자산이 일본의 지적 자산이 되고, 그것이 다시 동양의
지적 자산이 된 것이다.
[번역의 묘미③ - 없으면 만들어라]
분비선이라는 의학용어가 있다. 영어로는 gland라고 하는데, 신체기능에 필수적인 호르몬이나 생리물질을 생성시키는 조직 또는 기관으로
소화선이나 피지선 등의 외분비선, 갑상선, 부신 등의 내분비선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선자는 腺자를 쓰는데, 이것이 재미있는 한자이다. 원래부터 있던 문자가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낸 소위
‘和製漢字(화제한자)’이다. 18세기 난학(蘭學)의 연구붐 속에서 의학 분야에서 출중한 성과를 남긴 宇田川玄真(우타가와겐신)이 서양의 해부의학
용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한자인 것이다.
造字의 원리는 명약관화이다. 몸을 나타내는 月변에 샘을 나타내는 泉를 더하여 신체에 필요한 물질이 샘솟는 곳이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의학을 비롯한 과학 분야에서 이처럼 기존의 지식체계내 언어에서 빌려올 수 없는 개념들에 직면하였을 때 아예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생소한 개념을 내재화하는 창의성을 보인 것이다. 이후 腺자는 중국과 한국으로 건너와 常用되었고 심지어 중국자전에도
기본자로 수록될 정도로 한자체계에 완벽하게 편입되는 글자가 되었다. 元祖인 중국을 넘어서는 일본의 창조적 문자 활용 사례이다.
유사한 사례로 췌장의 膵자가 있다. 腺자와 마찬가지로 宇田川玄真이 만든 和製漢字이다. 일본발음은 '스이(すい)'이다. 췌장내에
랑거한스섬(islets of Langerhans)이라 불리는 하나하나의 세포가 분비작용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세포군이 있는데, 이러한 세포의
군집에서 영감을 얻어 月변에 모일 췌(萃- 일본 발음은 '스이')자를 의미부로 활용하여 조자한 것이라 한다. 이로 인해 췌장의 일본 발음은
'스이조'라는 평이한 발음이지만, 한국어발음은 '췌장'이라는 당‘췌’ 어려운 발음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한국인들에게 췌장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는 신비하고 미스테리한 이미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