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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세기 전 동양인 최초 멜버른 심포니 종신 단원이 된 바이올리니스트 정승영(76)은
2004년 코리언 유스 오케스트라를 창단·지휘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호주 한인 음악 육성의 견인차 역할이 되고 있다.
HIGHLIGHTS
희수의 나이에 바이올린 활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호주 한인 음악계의 산 증인, 2004년 코리언 유스 오케스트라 창단
1975년 동양인 최초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종신 단원으로 입단
10월 22일, 우크라이나 어린이 돕기 자선 음악회 '아름다운 세상'
예술을 통해 주류사회와 소수민족의 간극을 좁히는 호주 내 한인 예술가를 조명하는
'이달의 예술가(Artist of the month)', 10월의 아티스트로 코리언 유스오케스트라의 정승영 단장을 만나봅니다.
유화정 PD(이하 진행자):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말러의 명언입니다.
호주와 동포사회에 클래식의 다리를 놓으며 음악을 삶으로 실천하고 계신 호주 한인 음악계의 산 증인
마에스트로 정승영 선생님 모셨습니다. 선생님 어서 나오세요. 안녕하셨어요?
정승영 단장(이하 정승영): 네 안녕하셨습니까.
부족한 저를 불러주셔서 귀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SBS 한국어 방송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호주 멜번에 살고 있는 정승영입니다.
진행자: 정승영 선생님은 저희 방송으로는 두 번째 뵙게 되죠. 지난해 한호 수교 60년 특집
'호주에서 꿈을 개척한 이민 1세대'로 소개를 드린 바 있는데요. 선생님 여전히 건강하시고 활동도 많으시죠?
정승영: 네 그렇지만 제가 만 76세 되기 때문에 외부의 오케스트라 연주나 그런 거는 거의 없습니다.
멜번 총영사관에서 가끔 의뢰하는 현악 사중주 연주 등을 소화하고 있고요. 집에서는 제 손주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치고 있고요.
또 얼마 전에는 아들과 함께 '생명의 양식(Panis Angelicus)'동영상을 만들어서 서울에 있는 조카 결혼식에
축가를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음악 안에서 즐겁게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10월 22일 멜번 한인 음악회 협회의 정기 공연을 앞두고 연주 준비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선생님 아주 다복하신 음악 과정을 이루고 계시네요. 부럽습니다.
지난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 및 한인 음악협회 결성 20주년 기념 공연이 아주 성대히 열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제목이었죠. 선생님께서는 협회 2대 회장을 역임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초창기 모임은 어떻게 시작이 됐습니까?
정승영: 1999년에 시작되는 이 음악인 협회는 우리나라 음악대학 졸업생들 19명을 주축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하우스 콘서트라고 했고요. 나중에는 향상음악회라고 붙여졌는데 음악회를 통한
화합과 자녀들의 음악적 향상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진행자: 그리고 5년 뒤인 2004년에는 한인 동포 자녀들로 구성된
코리안 유스 오케스트라(Korean Youth Orchestra Melbourne)가 창단이 되죠.
그런데 이 중심에 서신 분이 바로 우리 정승영 선생님이십니다. 어떻게 이런 구상을 하시게 됐나요?
정승영: 유스 오케스트라가 창단된 동기는 악기를 배우는 자녀들이 솔로곡만 집중적으로 배우다 보면은
초견 즉 Sight reading이 부족해 새로운 악보를 읽는 능력을 잘 못해요.
그래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함도 있고 또 다문화 가정으로 한인사회에 접근하기 쑥스러워하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들이 그 아이들을 한글을 열심히 가르치고 또 아울러서 음악도 열심히 하면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연주 때마다 아주 풍성한 음식도 준비해 주시고 또 한국을 알리는 데
앞장서서 열심히들 하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됐었습니다.
진행자: 유스 오케스트라, 매년 정기 연주회뿐만 아니라
호주 사회와 연관된 여러 자선 공연들도 활발히 펼쳐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승영: 네 코로나 팬데믹 전까지 양로원, 불우이웃 돕기 음악회, 자선 음악회 등 여러 곳에서
활발한 연주를 했었고요. 호주 Mental Health foundation의 부탁으로 Melbourne town hall에서도 연주를 했었습니다.
진행자: 오는월 22일 멜버른 한인 음악회 정기 공연에서는 어떤 연주를 선보이게 되나요?
정승영: 연주회의 그 목적이 지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로 해서요.
티켓 판 금액을 우크라이나로 보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연주할 곡들은 아름다운 세상, We are Australian (어린이 합창단과 함께) 등이고,
Youth Orchestra는 Beethoven Symphony No.1 첫째 악장과 Holst의 Jupiter, 또 Harry Porter 주제곡을 연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현악 4 중주곡으로는 그리운 금강산 아리랑 등을 연주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네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한 자선 공연으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이군요. 베토벤 교향곡부터 영화 음악,
우리 가곡까지 다채로운 무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유스 오케스트라가 2004년에 창단됐으니까 내후년이면 벌써 20년이 되는데요. 그동안 활동했던 꿈나무들 중에는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 같아요. 또 아니면 꼭 전공이 아니어도
유스 오케스트라에서의 활동을 큰 자부심으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정승영: 네 그렇습니다. 현재 Melbourne 대학에서 음악 전공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고요.
또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악기를 배운 친구들이 상대나 법대를 졸업해 취직한 친구들이 저희 정기 연주 때에는
도와주러 오기도 합니다. 또 유스 오케스트라 출신 중에는 Melbourne grammar 스쿨, Trinity 칼리지,
Scotch 칼리지 등에서 6년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것을 저희는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죠.
진행자: 선생님의 꿈나무 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해지는데요. 바이올린을 언제 처음,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정승영: 부산 피난 시절이었었어요. 제가 젓가락을 가지고 바이올린 하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을 보고
부모님이 시키시려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바이올린을 정식으로 배우게 될 거는 서울 수복해서 5학년 때부터였습니다.
좀 늦게 시작했죠.
진행자: 부산 피난 시절 한국전쟁 피난 시절에 접하시게 된 거예요?
정승영: 그렇죠.
진행자: 어떻게 당시에?
정승영: 모르겠어요. 제가 그냥 집에서 그냥 장난으로다 젓가락 가지고 흉내 냈던 거를
아버지 어머니께서 귀엽게 봐줘가지고 얘는 바이올린 시키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진행자: 부모님께서 혹시 음악 활동을 하셨었나요?
정승영: 음악 활동은 안 해도 저희 아버지는 숭실 학교 다니시면서 평양의 네 그렇게 바이올린을 혼자 독학하셨고,
저희 어머니는 세브란스에서 피아노를 배우셔서. 그런 아마추어죠 완전히 그렇게 했었습니다.
진행자: 그랬군요. 선생님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어떤 매력이 있나요?
정승영: 글쎄요. 바이올린이라는 것보다 음악에 대한 매력이 더 많아요.
베토벤은 이렇게 좋은 음악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그런 것처럼 그 음악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것 같고,
또 악기 중에서 가장 배우기 힘들고 소리 중에서 가장 여왕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올린 음악은
참 아름다운 거기 때문에 놀 수가 없죠. 잊을 수도 없고요.
진행자: 그런 바이올린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시고 이어 미국 유학으로 예술가의 미래를 창창히 여셨는데요.
기량을 한참 펼칠 때쯤 돌연 호주로 행선지를 바꾸셨어요. 당시 한국인 최초이자 동양인으로서도 최초로
호주 멜번 심포니 오케스트라 종신 단원이 되신 스토리는 전설처럼 지금도 유명한데요. 40년도 더 전 얘기죠?
정승영: 네 벌써 74년도에 제가 오디션을 했었으니까 48년 전이었네요.
미국에 있을 때 호주 방송국 ABC에 속해 있던 오케스트라의 오디션 광고를 보고 신청을 했는데
뉴욕에 있는 ABC에 테이프를 보낸 것이 받아들여져서
호주 바이올리니스트 Chris Kimber가 (당시 Boston Symphony Orchestra 악장,
이후 Sydney Conservatorium of Music 교수)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직접 들어보겠다고 해서
LA 살고 있던 제가 그곳에 들러 호텔방에서 다시 한번 오디션을 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오케스트라 취직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진행자: 그러면 그러고선 바로 호주로 들어오신 건가요? 가족과 함께?
정승영: 네 Chris Kimber가 accept, 이제 좋다고 그래 가지고 호주에 그러니까 취업 비자를 신청을 했던 거죠.
그게 거의 한 1년 걸렸습니다. 그래서 참 기다리는데 참 너무 지루했고요. 그렇지마는 와가지고 참 아주 좋았죠.
그런데 그때 올 때는 아직 우리 아들은 여기서 76년에 태어났고 75년도에 여기 오게 됐습니다.
진행자: 당시 그럼 멜번 심포니 오케스트라(MSO)에 입단하시고 연주 활동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 시절 얘기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승영: 멜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75년도에 왔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마는 멜번 심퍼니 오케스트라는 연주회가
1년에 150번이 넘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대학에서 오케스트라 악장도 했고요. 또 한국에서도 국립교향악단의 정단원으로 일도 했었지만
여기 150회가 넘는 그 음악회의 곡들이 너무 빨리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그걸 준비하느라고 정신없이 연습하면서 준비했었습니다.
그리고 MSO 당시 단원들로 구성되는 Philharmonia Chamber Orchestra연주를 National Gallery에서 매달 연주를 했었고요.
진행자: 선생님 초기 정착 시에는 연주 때마다 가족을 동반하셨다고
이전 인터뷰 ‘호주에서 꿈을 개척한 이민 1세대’ 특집에서 말씀을 주셨었는데요.
정승영: 네 멜본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방 연주가 많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이제 여러 군데를 같이 다니게 됐어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호주 지방에 있는 분들은 동양의 어린 아기를 처음 보는 건지 와가지고 이렇게 눈도 이렇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만져보고 또 하여간 신기해서 우리 아들을 아주 참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진행자: 네 어떤가요, 그렇게 매번 연주회에 데리고 다니시고 아버지의 연주하는 모습을 늘 보고 자란 것 아닙니까
혹시 아드님도 음악을 전공했나요?
정승영: 우리 아들이 음악은 전공 안 했는데요. 제가 멜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던 중
KBS(KBS교향악단)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가게 됐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가 아시안게임할 땐 데 가서 아시안게임도 보고 또 15년 동안 일한 후에 멜번에 다시 와서는
Whitehorse Orchestra에서 concert master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거기서 일을 하던 중
연주회 헨델의 Messiah의 Tenor Solo를 하시는 호주 성악가가 갑자기 못하겠다는 바람에 연주를 얼마 안 남기고
우리 아들이 거기의 테너 솔로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성악 전공은 안 했지만은
테너 솔로를 무사히 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었죠.
진행자:아 놀랄 정도가 아니었겠죠. 아드님이 몇 살 때였어요?
정승영: 우리 아들이 그때가 30대였는 것 같아요.
진행자: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대타로 무대에 올랐다 성공한 것으로 제가 들은 적이 있는데,
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물론 아드님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도 있었겠지만 연주회 따라다니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
또 산 공부가 되지 않았나 싶네요. 그런데 선생님, 호주와 한국뿐만 아니라
방콕, 몽골 등에서도 여러 활동을 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승영: 네 방콕에서는 Bangkok String Quartet의 리더로 일했었는데 동남아시아에 서양 음악을 보급하는
그 사절로 뽑히게 되어서 태국에 있는 방콕의 씰빠꼰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현악 사중주를 연주를 많이 했었습니다.
동남아시아 지방에 그래서 그때 그 연주할 때에 태국 정부와 록펠러 파운데이션, 케네디 파운데이션이 스폰서를 섰고요.
또 몽골에서는 6년 파송 선교사로 일했었는데 울란바토르 학교에서 현악기를 가르치고 서양음악을 강의했었습니다.
그리고 몽골 국립 교향 악단에는 초청 객원 지휘자로 매년 몇 번씩 연주 지휘 활동도 했었죠.
또 한국에서는 경희대, 성신여대, 추계예대 그런 예술대학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진행자: 그러셨군요. 선생님 그동안 가장 보람됐던 시간을 꼽는다면 언제였을까요? 또 앞으로의 어떤 바람이 있으신가요?
정승영: 네 뭐 자랑 같아서 쑥스럽지만은 멜번 이민 초창기에 이곳 교민들 자녀들한테 바이올린을 수업료 없이
몇 년 동안 가르친 것이 그게 참 좋은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다들 음악을 관심 있게 하게 하는데.
그리고 몽골에서는 음악인들에게 몽골 성경책을 여러분들께 나눠 줬었어요.
그게 잘못되면 추방되는 케이스였는데 운이 좋게 제가 그랬었죠.
그리고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은 수준 높은 Korean Chamber Orchestra를 만드는 것입니다.
진행자: 네 그러면 멜번 유스 오케스트라 꿈나무가 자라서 또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될 수도 있겠군요.
정승영: 네 그렇습니다. 애들이 그런데 바빠서. (웃음)
진행자: (웃음) 아 그렇게 그렇게 안타까운 일이.. 네 이 방송을 들으면서 다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선생님의 70년 음악
인생을 짧은 시간에 담기에는 불가항력이고요. 끝으로 차세대 호주 한인 동포 후학들에게 당부의 한 말씀을 주신다면요.
정승영: 좋은 음악을 사랑하면서 즐기는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악기를 실컷 열심히 배워놓고는 다들 손을 놓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 멜번에 계시는 그 변호사들, 의사들을 보면은
자기네들 취미 활동을 악기 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같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진행자: 네 선생님 오늘 귀한 시간 또 귀한 말씀 나눠주셔서 깊이 감사드리고요.
앞으로도 좋은 연주와 또 실천의 삶으로 귀감이 돼 주시리라 봅니다. 건강하십시오
정승영: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진행자: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유화정이었습니다.
첫댓글 이런 역사도있군요
한인의 섬세함이 호주를 압도하는 날 기다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