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보나벤투라 보나벤투라(1218? - 1274년 7월 15일)는 로마 가톨릭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성인 중 한 사람입니다. 흔히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는 동시대인으로 경건하고 사랑이 흐르는 면에서 ‘세라핌적 박사’로 알려진 그는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쓴 모든 저서 중 어떤 것도 정성으로 드린 성모송 한 번만 못하다.” 그 말을 듣고 동료 수사 중의 한 사람이 말했지요. “이제 제대로 말하는구먼.” 성 보나벤투라의 생애 보나벤투라는 1217년 경 이탈리아 중부 바뇨레지오에서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자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아 조반니 디 피단자(Giovanni di Fidanza)로 불렸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거의 없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일화는 그가 이후에 편찬한 프란체스코 성인의 전기를 통해 전해집니다. 이 전기에 따르면 보나벤투라는 태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심한 중병을 앓았습니다. 이에 신앙심이 두터운 보나벤투라의 어머니는 앓고 있는 보나벤투라를 안고 성 프란치스코에게 장래에 수도원에 보내겠노라고 서약과 함께 탄원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응답으로 보나벤투라가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앓고 있는 보나벤투라를 보자마자 오, 좋은 일이여(O, bu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가 보나벤투라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1234-1235년경에 파리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 때 그는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헤일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1185년 경-1245)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보나벤투라가 로마 관구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오르비에토(Orvieto)가 아닌 파리에서 프란체스코회에 입회했고 대학과정의 수련을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거의 확실한 사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1250년부터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주석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1254년 이를 완성하면서 파리 대학에서 신학강의를 할 자격을 얻는 동시에 당시 프란치스코회에 할당된 파리대학 교수로서 활동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장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지 못합니다. 재속신학자들과 수도회신학자들 간의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전부터 파리대학에서 재속신학자와 수도회간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갈등은 보나벤투라가 신학강의자격을 얻어 파리대학 교수로 막 취임하려던 찰나에 생따무르의 기욤(Guillaume de St. Amour)이라는 인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두 수도회출신 교수들을 비롯하여 수도회 관계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갈등과 반목이 심화되고 이와 같은 양상이 3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속되며 파리대학의 정상적인 학사운영에 지장이 생긴 것을 우려한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파리대학에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라는 요청을 합니다. 이에 따라 가장 먼저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다음으로 보나벤투라의 동료 프란치스코 수도사였던 요크의 토마스가, 그리고 세 번째로 보나벤투라가 걸식수도회의 청빈과 생활방식을 옹호하는 동시에 기욤의 입장을 철저하게 반박하는 저서들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얻습니다. 그 결과 1256년 10월 5일 교황 알렉산더 4세는 기욤의 입장을 정죄하게 됨으로써 오랫동안 파리대학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문제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취임이 확정된 지 3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257년 8월 보나벤투라는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됩니다. 기욤의 공격에 함께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했으며, 또한 같은 해에 교수로 취임하게 된 이 두 사람은 함께 재임하던 시절은 물론 그 이후에도 서로 친구이자 동반자로서 때로는 서로 격려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중세 신학의 기반 확립에 전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위대한 두 신학자들의 학문적 성취와 인덕을 흠모하여 각국에서 젊은 학생들이 서로 앞 다투어 그들의 슬하에 운집하게 되었고, 그들의 명성은 13세기 파리대학은 물론 사상계를 압도하게 됩니다. 보나벤투라는 파리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교수로 취임 후 이미 그의 높은 학식과 성덕을 인정받아 프란치스코회 재8대 총장으로 뽑혔기 때문이지요. 적게는 30대 후반, 기껏해야 40대 초반의 다소 젊은 나이에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던 신생수도회의 총장으로서 취임한 보나벤투라가 맞닥뜨려야 했던 상황은 무척 어려웠어요. 보나벤투라가 승계한 총장직은 그의 전임자 지오반니 다 파르마(Giovanni da Parma)가 이단혐의로 프란치스코회를 위험에 처하게 할 것을 염려하여 자진해서 사임한 자리였습니다. 이것은 곧 그에게 대외적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인지시킬 책임이 그의 두 어깨에 걸려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더 나아가 피오레의 요하킴 이후로 표면화된 청빈규율을 둘러싼 갈등과 반목을 종식시키는데 진력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프란치스코회의 위기상황에서 총장직에 오른 보나벤투라는 엄청난 책임감과 그에 따른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쉼 없이 활동했습니다. 특히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가 만든 회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끔 수도자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프란치스코회의 첫 회헌 나르보나 회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동료수도사들로 하여금 프란치스코가 제정한 규율을 엄수하도록 하기 위해 친히 모범을 보이며 필설로써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각 수도원을 순방하며 시찰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보나벤투라의 노력은 프란치스코회의 대외적 위상의 안정과 36개의 분파로 나뉠 정도로 심각했던 프란치스코회의 내적갈등의 완화라는 결실을 이룹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회의 제2의 창설자였습니다. 특히 보나벤투라가 남긴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전기문입니다. 그 당시 수도회 창립자 프란체스코에 대해서는 이미 첼라노의 토마스(Tommaso da Celano)가 남긴 두 편과 스파이어의 율리아누스(Julianus von Speyer 혹은 Julianus Teutonicus)가 남긴 한편 전기문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편의 전기문의 내용은 프란치스코회의 초창기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변화한 정황 및 한층 더 성장한 프란치스코회의 분위기를 반영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나벤투라는 1260년 나르보나 총회의 위촉을 받아 기존의 전기문 및 민담과 전설들은 물론 성 프란치스코가 출생 및 선종, 그리고 활동했던 장소들을 실제로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한 후 예의 달필을 휘둘러 오늘날 《레겐다 마요르(Legenda Maior)》라 불리는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전》을 완성시킵니다. 그리고 이 새 전기문은 1266년 프란치스코회 총회에서 공인되어 모든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이 새 전기문의 사본을 최소한 한권 이상을 보유하게 되지요. 이 과정에서 프란치스코회 총회는 보나벤투라의 새로운 전기문 외에 이전에 편찬된 모든 전기문을 폐기할 것을 의결합니다. 이와 같은 조치는 프란치스코회 내부에서 프란치스코의 생애 및 그의 청빈을 둘러싼 논란을 종식시켜 종단 내의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합니다.《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치스코전》은 이제 700여년의 세월과 프란체스코회라는 종단을 넘어서 오늘날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독자들에게 프란체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삶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교회의 개혁과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조 그리고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을 재통합과 같은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1274년 5월 7일 제2차 리용 공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보나벤투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과거 교황 클레멘테 4세가 1265년 그를 요크(York)의 대주교로 임명했을 때처럼 이 직책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교회법의 정신에 따라 순명하였습니다. 추기경 임명장을 가지고 왔던 전달자는 부엌에서 식기를 씻고 있던 보나벤투라를 만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추기경이 된 보나벤투라는 공의회 참석 중 7월 15일 새벽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물론 다수의 동서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병환으로 선종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리용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군중들에 의해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다른 유골들과 함께 광장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고위 성직자 하나가 보나벤투라의 두개골을 수습하여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지만 이 성직자가 그 장소를 비밀로 남긴 채 목숨을 잃음으로써 결국 그의 유해는 되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시성은 그의 동료교수이자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도미니코회의 박사성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보다 훨씬 늦게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그의 사후 그가 생전에 그토록 해소하려고 노력했던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갈등이 다시 악화되어 그의 시성이 미루어졌기 때문이지요. 결국 보나벤투라는 1482년 4월 14일 프란치스코회 출신이었던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그리고 1588년 3월 14일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서 세라핌적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습니다. 축일은 선종일인 7월 15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