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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식 백과 사전 스크랩 역사일반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푸른날개(푸른샘) 추천 0 조회 55 14.05.20 16: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HD 역사스페셜]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1. 백두산정계비의 위치는(왜 간도인가?)?

 

나라 땅의 모든 산줄기가 비롯되는 곳. 백두산은 우리 영토 인식의 근원이다. 그리고 백두산 너머의 광활한 만주 땅. 이 땅은 간도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런 영토 인식의 한가운데는 백두산정계비가 있었다. 300여 년 전, 백두산 기슭에 세워졌던 정계비. 백두산정계비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6년 새해 HD 역사스페셜은 백두산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산입니다. 단군이 처음 이 땅에 처음 역사를 시작한 곳이 바로 백두산이며 나라 땅의 모든 산줄기 역시 백두산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과 아울러 우리 영토의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백두산 너머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땅도 우리 영토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의 한가운데는 백두산정계비가 있습니다. 300여 년 전 백두산 기슭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는 당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백두산정계비는 과연 무엇을 담고 있을까요? 과연 정계비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먼저 그 백두산정계비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백두산으로 가는 가장 일반적인 루트는 송화강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이다. 중국 땅을 거쳐 가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땅이 우리 영토 인식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백두산 입구에서 만나는 물줄기. 백두산에서 중국으로 흐르는 송화강의 상류이다. 송화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직접 발원하는 장백폭포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치 하늘로부터 거대한 물기둥이 내려오는 듯한 장백폭포. 광활한 대륙을 뒤로 하고 오르는 백두산 정상. 천지가 태고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제 모습을 보인다.

 

 

둘러선 16개의 봉우리들이 천지의 장엄함을 더한다. 천지는 해발 2,200미터의 분화구에서 생겨난 호수이다. 민족의 염원과 동경까지 함께 품고 있는 천지. 그러나 천지는 현실의 공간이다. 천지를 가로질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지나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천지 한가운데를 국경선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이 국경선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12년 바로 이 백두산 기슭에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던 것이다. 백두산정계비는 일제 강점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931년 7월, 이 백두산정계비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다.

 

신영길 명예회장, 한국장서가협회

"백두산정계비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사람은 29일 등산객들이 30일에 하산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중에는 사학자가 세 분이 있었던 걸로 생각이 되는데 그분들이 이 정계비는 단순한 정계비가 아닌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하나의 국경을 가르는 정계비니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찾도록 해달라.."

 

그렇다면 백두산정계비의 정확한 위치는 어딜까?

 

"1943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백두산사진집>입니다. 이 사진은 일본학자들이 백두산 등산로를 제작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만든 백두산 등산로 지도. 천지 동남쪽에 기슭에 정계비가 뚜렷이 표기되어 있다.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 최근 북한 지역을 통해 백두산을 답사한 <고구려연구재단>을 찾았다.

 

"뒤에 보이는 흰돌이 정계비 터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둔 표석입니다."

"바로 그 밑에 있는 곳이 백두산 밑에 주차장입니다. 주차장 한쪽 모퉁이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곳은 백두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그 중간에, 백두산 정상에서부터 한 2~3km 동남쪽에 차를 세우는 주차장이 있는데 아래에서 봐서 주차장 왼쪽 모퉁이에 정계비 터를 표시하는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 배성준 연구위원, 고구려연구재단

 

 

증언에 따르면 정계비는 천지 아래 북한에서 만든 주차장 왼쪽 모퉁이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은 북한이 세운 정계비 표지석만 서 있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위성사진을 활용하기로 했다. 확인된 정보를 위성사진과 대조하는 작업. 정계비의 위치는 천지로 올라가는 두 도로가 합쳐지는 바로 위쪽. 위성사진을 통해 도로와 주차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경 128.0, 북위 41.992. 백두산정계비의 정확한 좌표다. 1931년까지 중요한 국경비로 존재했던 정계비. 정계비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한 장의 지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08년에 제작된 <대한제국지도>. 이 지도에는 두만강 북쪽 간도땅이 조선의 영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3년후 1911년, 역시 조선총독부가 만든 또 다른 지도 <조선공업분포 및 상업개요도>는 조선의 영역을 두만강 이남으로만 표시하고 있다. 간도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불과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국회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의미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1909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맺어진 간도협약. 간도협약 전문에는 '청일 양국은 두만강을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삼는다'는 조항이 명기되어 있다.

 

"청일 양국은 도문강(두만강)이 선린의 호의에 비추어 조선과 청의 국경임을 서로 확인한다." - 간도협약 전문

 

 

당사자인 조선을 배제한 채 일본과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해버린 것이다. 같은 날 일본과 청나라는 이른바 동시에 만주협약(1909. 9. 4.)도 체결했다. 일본은 만주, 즉 간도 지역에 철도 부설권,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지역을 청의 영토로 인정해줬다.

 

"만주협약은 청나라가 일본에게 제공할 5가지 이권이고 간도협약은 그 대가로 일본이 청에게 인정해준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5가지와 뒤에 1가지는 일본이 제안한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청일 양국이 교묘하게 두 개로 체결한 것이기 때문에, 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보면 두 개의 조약은 불가분의 일치의 관계이고 상호 교환적인 성격을 가진 조약이기 때문에 크게 봐서 하나의 조약으로 봐야겠습니다." - 노영돈 교수, 인천대 법학과

 

천지 아래 세워졌던 한중 국경비, 백두산정계비. 정계비는 사라지고 간도협약에 의해 간도는 중국의 영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2. 정계비 건립을 주창한 청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사라진 정계비. 그러나 이 비석은 오랫동안 한중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 논란의 핵심은 간도였습니다. 이 정계비에 따라 간도가 누구의 땅인지 정해진다고 믿어왔기 때문인데요, 자, 그렇다면 간도는 도대체 어느 지역에 속할까요? 백두산을 기점으로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 두만강 이북을 동간도, 혹은 북간도라고 하는데요, 이를 통틀어 간도라고 합니다.

 

간도를 합치면 지금의 한반도보다 훨씬 넓은 땅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간도의 기준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백두산정계비인데요, 그런데 이 비석은 청나라의 주도로 세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왜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일까요?"

 

1712년. 압록 강변에서는 조선 측 관리와 청나라 관리들의 회동이 있었다. 양국 정부에서 파견한 대표단이었다. 조선 측 대표는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복. 청의 대표는 길림 지역을 다스리던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이었다. 청의 황제 강희제의 명에 따라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한 만남이었다.

 

 

1616년 후금이라는 이름으로 심양에 도읍했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까지 진출,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청의 황제는 4대 강희제, 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는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청의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1683년 타이완(대만)을 접수한데 이어 1689년 러시아와 국경선을 타결하고 1697년 서역의 신장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가 조선과의 국경 확정이었던 것이다. 양국 대표단은 백두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목극등은 조선 측 대표의 백두산 동행을 거부했다. 조선 대표들의 나이가 많아 배려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목극등은 자신의 일행과 조선의 하급관원 몇 명만 데리고 백두산을 올랐다. 조선 측 대표를 배제한 청나라 대표단만의 산행이었던 것이다. 백두산에 오른 목극등은 천지 주변의 물줄기를 살폈다. 그리고 압록강과 토문강의 분수령이라고 판단되는 곳에 하나의 비를 세운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국경비, 백두산정계비다.

 

그렇다면 당시 제 3자였던 서양은 조선과 청의 국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1735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중국전지(中國全誌)>는 중국의 역사와 인문지리를 담은 총서이다. 이 책안에 들어있는 한 장의 지도. 이 지도에는 청과 조선, 그리고 간도 지역의 국경이 점선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조선과 청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라 그 이북 지역에 표기하고 있다. 압록강 이북 지역까지 평안도라고 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8세기에 많은 서양 고지도들도 조선의 국경을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서 표기하고 있다.

 

"1750년에 제작된 보곤디 지도입니다. 압록강 이북의 봉금지대 이남이, 남만주가 우리 영역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는 1786년 지도인데요, 산내관이 여기 있구요, 요동반도 전체를 우리나라 영역으로 다 표시를 했어요. 1794년 윌킨슨의 지도를 보시면 여기 서간도가 우리 지역으로 표시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들 서양 지도들은 어떻게 제작되었을까?

 

"18세기 많은 서양 고지도들은 청의 강희제 때 1708년 됩니다. 프랑스 예수회 신부들이 중심이 되어 그분들에게 지시하여 지도를 제작하게 됩니다. 1716년에 지도 제작이 완료되고, 1718년에 최종적으로 강희제한테 전달이 되는데, <황여전람도>라고 하는데 여기에 분명히 압록강, 두만강 너머가 대한제국, 우리 영역으로 되어있고요, <황여전람도> 동판 41쪽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제작이 되거든요. 이 지도를 통해서 당시 청이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대한제국을 조선 영역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김우준 교수,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

 

정계비를 세우게 했던 강희제의 명령에 따라 제작한 서양 고지도에 따르면 백두산은 명백히 조선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청은 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려고 한 걸까?

 

 

천지연에서부터 동쪽으로 약 20킬로미터, 천녀욕궁지라고 하는 원지가 있다. 신비감마저 감도는 이 아름다운 원지를 청은 자신들의 조상의 발원지라 여겼다. 중원을 점령한 이후 청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차지하려는 정책을 폈다. 정묘호란 직후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 청의 만주 중시 정책을 볼 수 있다. 즉 만주 지역을 무인 지대화 하자고 청이 먼저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각각 자기 강역을 지켜 두 나라가 서로 편안하고 즐거워함이 대대로 이어져야 한다." - 인조실록

 

 

조선과 청이 서로 침범하지 않고 각자 지키자는 이른바 '각수봉강(各守封疆)'을 제안했는데이 무인지대를 '봉금지대'라 했다. 그렇다면 봉금지대는 어디였을까? 서양 고지도에 따르면 압록강, 두만강 그 이북의 일정한 지대, 혹은 그 이상의 지대로 추정한다. 이 봉금지대는 어떤 성격이었을까?

 

"일단 봉금지대는 중국 측에서 설정한 것이니까 사람이 살 수 없는 지대로 만들어놓고 그것을 우리는 흔히 '지대', 영어로 '존'이라고 합니다. 두만강, 압록강 이북 일정한 지역은 일종의 비무장 중립지대로 봐야 합니다. 그럼 그 당시 실제 국경의 역할을 했던 것이죠. 요즘 우리의 상황하고 비교를 한다면 남한과 북한의 휴전선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 그 사이의 어떤 일정한 지역, 그런 형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이성환 교수, 계명대 일본학과

 

봉금지대가 조선과 청의 중립지대였다면 백두산정계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때 당시 청이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의도는 우리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봉금지대로 알고 있는 압록강, 두만강 하향선을 중국의 국경선으로 하고 싶었고, 또 하나는 백두산 천지를 신성시 여겼으니 꼭 자기네 중국 영토로 넣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 의도에서 백두산 정상 남쪽 십 리, 거기에 부자연스럽게 정계비를 세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 이성환 교수, 계명대 일본학과

 

 

청의 주도로 세워진 백두산정계비. 그것은 봉금지대를 자신들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조선의 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제한하려는 청의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3. 정계비 무엇이 문제인가?

 

"백두산 정계비는 당시 중립지대였던 간도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려는 청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비석을 자세히 보실까요? 높이가 약 83cm, 폭 약 56cm, 크지 않은 이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82자, '대청(大淸)'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당시 비석 제작에 참여했던 오라총관 목극등의 이름도 보입니다. 이 비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여덟 글자.

 

'西爲鴨綠 東爲土門(서위압록, 동위토문)'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뜻인데요, 여기서 압록강은 그 경계가 명확한데 문제는 토문강이었습니다. 여기 지도를 보실까요? 여기 백두산이 있고, 백두산 서쪽 기슭에서 압록강이 발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 기슭에서는 두만강이 흐르고 천지에서 직접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이 있습니다. 논란의 핵심은 바로 이 두만강과 송화강! 조선은 송화강의 상류 중 한 지류를 토문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의 주장대로라면 송화강 이남이 조선 땅이 되는 것이죠. 반면 중국은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토문이 어딘가에 따라서 함경남북도만한 땅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정계비에 세워진 토문은 과연 어디일까요?"

 

 

1881년 두만강 이북 간도. 백두산에 정계비가 세워진 지 약 170여 년 후, 두만강 이북 간도땅에 살던 조선 백성들은 놀라운 일을 당하게 된다. 청나라 정부에서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포고문을 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두만강 이북 간도 땅에 살고 있는 조선 백성들은 모두 철수하라는 '조선인 쇄환령(1881년)'이었던 것이다. 조선 백성들에게는 모두 청천벽력과 같은 조치였다.

 

 

당시 간도 땅에는 이미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밭으로 일구며 간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1860년도 이후 대규모 간도 이주가 이루어져 곳곳에 마을을 이루고 자치 기구까지 세우고 있었다. 이들은 간도를 조선 땅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의 바탕엔 백두산정계비가 있었다. 정계비에 새겨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은 바로 그런 인식의 근거였다. 조선 백성들은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라고 믿고 있었다. 토문강이 어디냐에 따라 조선의 영역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게 된다. 즉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면 그 남쪽 영역만이 조선의 땅이 되는 반면, 토문강이 송화강이라면 드넓은 간도땅이 조선의 땅이 되는 것이다. 청의 주장은 달랐다. 토문(土門)과 도문(圖門)은 같은 발음이며 도문은 두만(豆漫)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 기록들은 토문을 어디로 보고 있을까?

 

용비어천가를 보면 토문은 두만강 북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토문과 두만을 다른 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토문은 지명이며 두만강의 북쪽에 있다." - 용비어천가

 

청나라보다 앞선 명나라 때 만든 <요동지(명대 지리서)>.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이며 송화강으로 흘러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중국도 토문과 두만은 다른 강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문강의 근원은 장백산 북쪽 송산에서 시작하며 동쪽으로 흘러서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 요동지(명대 지리서)

 

 

정계비 이후에 제작된 조선의 지도 <조선전도(18세기 말)>. 토문은 두만강과 다른 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지도, 관북도(19세기 초). 역시 토문강은 두만강 북쪽에 별개의 강으로 표시되어 있다.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정계비를 세운 후 토문강의 발원지까지 돌무더기와 목책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계비의 근처의 물줄기는 건천, 즉 마른 계곡이었다. 그래서 물줄기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석퇴를 쌓았던 것이다. 석퇴는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일본이 만든 사진첩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석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이 말하자면 정계비에서 이어지는 석퇴 사진인 거 같네요?"

"예. 정계석(定界石)이라고 되어있고요."

 

 

정계비 부근에 군데군데 쌓은 돌무더기가 보인다.

 

"토문강 있죠. 토문강 바로 옆을 따라서 석퇴를 쌓았습니다. 185개가 있습니다. 길이는 30리 가까이 돼요. 그 연안에 토퇴, 석퇴를 쭉 쌓은 것이죠." - 김득황(92세), 일제시대 백두산 3차례 답사

 

 

일본이 그린 백두산 약도. 정계비 옆에 석퇴, 토퇴가 그려져 있고 이들은 토문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토문강은 북쪽으로 흘려 송화강으로 합류하고 있다. 물줄기를 표시하기 위해 쌓은 돌무더기와 흙무더기. 이들은 정계비에서 시작하여 토문강 상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토문강. 토문강은 지금은 어떤 강으로 남아있을까?

 

"간도산업조사서(1910년)라는 일본이 간도에서 철수하면서 발행한 책이 있는데요, 이게 3편으로 나눠져 있는데 제2편에 지도가 있거든요. '백두산 부근지도 약도'라고 해가지고 자세히 되어있는데, 강은 파랑색 되어있는데, 여기 토문강이 뚜렷하게 보이죠. 여기 재밌는 건 천지를 용왕담이라고 했다는 거, 그리고 정계비가 있는 여기서부터 토문강이 굵게 쭉 표시되어 있습니다." - 이상태 박사,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에 따르면 토문강의 상류 지류는 삼도백하, 사도백하, 그리고 토문으로 되어있는데 토문은 바로 오도백하인 것이다.

 

"다른 지도들은 고지도인데 이 지도는 축적이 들어가 있거든요. 그렇다면 상당히 근대식 지도라는 것이죠. 그리고 근대식 지도라는 것은 그만큼 정확성을 의미하거든요. 토문강이 백두산 천지에서 나가고, 두만강과 별도로 송화강 쪽으로 나간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일본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이 지도에도 분명히 그렇게 표시하고 있는 것이죠." - 이상태 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취재진은 토문강, 즉 오도백하를 찾아 나섰다. 오도백하가 송화강과 합류하기 직전에 있는 마을 삼도. 토문강 탐사는 이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도로 사정이 오도백하가 송화강 최상류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강줄기를 따라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 올랐다. 점차 마을도 뜸해졌다.

 

"이 강을 뭐라고 하죠?"

"이 강은 이름이 없어요. 그냥 큰 강이라고 불러요."

 

 

현지에서 토문강은 이름조차 잊어버린 강이 되어있었다. 더 이상의 차량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강은 틀림없이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오도백하였다.

 

"이 강이 바로 오도백하죠. 이 강의 상류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토문강이고, 중국 사람들은 황하송도자하라고 불렀습니다. 이 토문강을 두고 청과 조선이 국경 분쟁을 일으켰고 토문강과 도문강, 두만강을 두고 여러 논쟁이 계속 되는 곳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 이일걸 박사, 간도학회 부회장

 

숱한 논쟁과 의문을 안은 채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송화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4. 영토를 위한 조건

 

"이것은 백두산 모형을 1만분의 1로 축소해서 그대로 만든 모형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천지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고요, 천지의 동남쪽 기슭에 백두산정계비가 서 있습니다. 백두산정계비에서 바로 남쪽으로 보이는 물줄기가 압록강입니다. 천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동쪽에서는 두만강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백두산정계비 동남쪽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송화강의 상류, 토문강이 됩니다.

 

조선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송화강 동쪽 땅이 모두 조선의 영토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아시다시피 지금 간도는 중국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조선은 간도영유권을 주장해왔고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논란 중인 한 지역이 특정 국가의 영토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양국의 합의가 중요합니다. 둘째로는 누가 실질적으로 그 땅을 점유하고 있느냐와 실제 행정권이 미치느냐 여부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렇다면 간도는 당시 어떠했을까요?"

 

압록강은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다. 압록강 하류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고구려 산성으로 유명한 봉황산 아래 봉성이 있다. 봉성의 옛 지명은 봉황성. 조선 시대, 중국으로 가던 사신들이 반드시 거쳐 가던 교통의 요충지다. 봉성에서 자동차로 약 10분을 가면 변문을 만날 수 있다. 변문은 국경을 뜻하는 지명이다. 이곳 변문의 기차역, 지금 이름은 일면산역(一面山驛).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사람은 매우 의미 있는 증언을 했다.

 

"예전에 이곳에 변문이 있었죠. 원래 고려문(高麗門)역이라 불렸는데 나중에 변문으로 바뀐 거예요. 또 나중에 다시 일면산이라고 바뀌었고 일면산으로 불려진 지는 한 20년 됐어요."

 

역 이름이 고려문이었다는 것은 조선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왜 고려문역이었을까? 정계비가 세워진 훨씬 후대 시기인 19세기 미국인 선교사가 펴낸 <조선소개서>. 이 책의 지도엔 봉성이 옛 조선의 국경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문역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가장 의문을 가지는 게 1712년 청의 목극등이 와서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어떤 서양 고지도에서 특정한 국경의 지점으로 재활용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백두산정계비보다는 봉황성을 중심으로 국경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들은 중국 지도를 비롯해 18세기, 19세기 한국과 중국을 방문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도 봉황성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 이돈수 박사, 한국해연구소 소장

 

'조선에 관한 지리적 고찰(1700년대 초)'. 황해전람도 제작에 참여했던 남긴 프랑스인 선교사 레지가 남긴 기록, 일명 '레지비망록'에는 더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봉황성 동쪽이 조선의 서쪽 경계선'이라는 것이다.

 

"봉황성 동쪽에 조선의 서쪽 경계선이 있다. 그 경계선은 지도에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국경선은 압록강, 두만강이 아니라 봉황성을 기점으로 훨씬 북쪽이 되는 것이다. '조선에 관한 지리적 고찰(1700년대 초)'. 일명 레지비망록. 조선 조정이 압록강 이북을 관할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영조는 압록강 이북의 봉황성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만강 이북은 어떤 상태였을까? <북관유적도>는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중기까지 북방 개척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화첩이다. 이 책에 있는 '첩경입비도'. 동북을 개척한 윤관이 고려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인데 '고려지경(高麗之境)' 네 글자가 뚜렷하다. 기록에 따르면 윤관의 국경비는 '선춘령(先春嶺)'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춘령은 어디일까?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18세기 중기)>에 보면 두만강 북쪽, 즉 지금의 간도땅인 것이다. 또한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두만강 이북에 영향력을 미친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정계비가 세워진 이후에도 조선왕은 두만강 이북의 청나라 사람들에게 철수를 명령하기도 했다.

 

"당시 의주와 봉황성 사이의 사신들의 왕래 경비를 우리 관병들이 담당했구요, 의주까지가 우리 영역이 아니어도 봉황성, 압록강 경비를 우리 대한제국이 경비를 담당했습니다. 또 중국 유민들이 봉금지대로 넘어온 적이 있거든요, 그걸 우리 관병들이 압록강을 넘어 출병해서 격퇴를 시킵니다. 이런 식으로 봉금지대 여러 시안을 우리 조선 관병들이 담당했기 때문에 봉금지대가 중립지대란 말도 있습니다만 우리 영역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우준 교수

 

지금도 만주 지역 곳곳엔 우리 민족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조선인 마을을 찾아 나섰다. 중국 심양 가까운 본계 마을. 이 마을의 이름은 박보촌. 박씨들의 집성촌이다. 현재까지도 50~60가구의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한 주민을 만났다.

 

"박씨 맞으세요?"

"네, 박씨 맞습니다."

"한국어 하실 줄 아세요?"

"못 합니다."

"몇 대째 살고 계신지요?"

"저까지 12대 째입니다. 제 밑으로 3대가 더 있어서 현재 15대까지 있지요."

 

15대, 400년 이상 이 마을에 살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박명해(朴明海)라고 했다. 그리고 가문의 돌림자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윗대는 문(文)자, 저는 명(明)자, 아들 대는 희(希)자 돌림입니다."

 

 

이들은 정계비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부터 간도에 뿌리박고 살았던 것이다. 조선인들의 간도 점유률을 확실히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고종 때 만들어진 간도 지역 사람들의 호적인 <변계호적안(邊界戶籍案>. 이 변계 작성자는 서변계 사무사 사상무, 즉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만든 것이었다. 내용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지명과 함께 실제 거주자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조선의 행정력이 간도에 미쳤음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영토 분쟁 지역에 있어서는 거주지민들의 의사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거주지민들이 당시 우리 동포였기 때문에 그들의 살고 있는 그 지역의 주민수 내지는 살고 있는 실태인 변계호적안은 지금 우리의 영토라는 것을 주장하는데는 필수적인 자료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양태진 소장,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

 

 

이러한 간도에 대한 영토 인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곳곳에 남아있다. 1622년, 당시 영의정 정태화는 차라리 압록강을 국경으로 정하자고 건의한다. 이에 현종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면 우리 영토가 청국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밝히며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간도. 이곳은 실제로 조선민들이 거주했고 조선의 행정력이 미쳤고 우리 영토라는 인식이 존재했던 우리 땅이었다.

 

 

5. 간도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이후도로 많은 조선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간도를 생활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이 사진들이 그 명백한 증거입니다. 농사도 짓고 마을도 이루고 있습니다. 1897년의 기록을 보면 청국인에 비해 조선인의 수가 약 10배 정도 된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간도 땅에 실제 점유자는 조선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간도는 조선과 청 양국 사이에 갈등의 땅이 되었습니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과 청은 1885년, 1887년 두 차례 걸쳐 간계회담 즉 국경회담을 열게 되는데요. 이때 조선의 대표가 당시 안변부사이던 이중하였습니다. 당시 청나라에 비해 열세한 입장에서 국경회담을 벌여야 했던 이중하는 "나의 목숨은 내놓을 수 있어도 나라의 땅은 한 치도 내놓을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로 회담에 임했습니다. 치열했던 두 차례의 국경 회담과 이후의 조선과 청, 두 나라의 협상과 조약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20여 년 전인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의 국경회담에 조선 측 대표였던 이중하의 후손을 만났다. 사진속의 이중하는 꼿꼿한 조선의 관리로 남아있다. 이중하는 조선 후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송덕비는 총 70여 개, 그 중에서 이중하의 송덕비가 무려 9개에 이른다. 이중하의 아들이 만든 <이아당집(이중하 문집)>에는 국경회담 당시 일화가 남아있다.

 

"백두산 답사하시면서 산막에서 같이 유숙을 하셨겠죠. 근데 하룻밤은 청국 대표가 복통이 심해서 비상으로 갖고 계셨던 환약을 주신 모양인데 그걸 먹고 복통이 더 심해졌다고 야단을 하고, 날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냐, 갖은 협박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 나머지 환약을 다 입에 털어 넣으셨죠. 독약이 아니란 걸 증명하느라 그러셨겠죠." - 이규청, 이중하 후손

 

첫 국경회담(을유감계회담)은 1885년 9월 회령에서 열렸다. 회담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시작되었다. 조선 측 대표였던 안변부사 이중하는 무거운 부담을 안고 회담에 임해야 했다.

 

"그 당시에 청국과 우리 조선은 종속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종주국으로써 속국인 우리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간섭이 심했다는 것은 인지하는 바이고..." - 노계현, 전 창원대총장

 

 

조선은 1882년에 임오군란과 1884년에 갑신정변에 청나라의 힘을 빌었다. 이에 조선은 이미 청나라 군대가 진출해 있었으며 원세개(조선주재 총리교섭 통상사의)가 고종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을 정도로 위세를 부리던 시기였다. 회담은 시작부터 난황을 겪었다.

 

이중하 - "백두산에는 이미 강희 황제가 세운 정계비가 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본다면 모든 게 명확해질 것이옵니다."

청측 관리 - "나는 도문강 경계를 조사하러 온 것이지, 비석을 조사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중하 - "정계비의 비문을 먼저 보고, 토문강의 수원이 어딘지 살펴본다면 조사는 쉽게 끝날 것이옵니다."

청측 관리 - "비석은 도문강 수원에 있다고 들었다. 도문강 하류에서 거슬러 올라가 비석이 서쪽에 있으면 '서위압록이요 동위도문'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이중하 - "비석에서 토문강 하류까지 석퇴가 쌓여 있습죠. 이것만 확인하면 토문강 남쪽의 영토는 조선의 영토라는 게 밝혀질 것이옵니다."

청측 관리 - "뭣이!~어찌하여 부사는 도문강을 놔두고 석비만 조사한다고 하는가!~"

이중하 - "정계비를 먼저 조사하지 않고는 모든 조사가 다 허사가 될 것이외다!~"

 

 

국경 조사를 어디서부터 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청은 두만강 하류부터 조사할 것을 주장했고 조선은 정계비부터 조사하자고 맞섰다. 결국 1차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청은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여겨 두만강 하류부터 거슬러 올라가자고 했다. 이는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반면 조선은 정계비에서 가장 가까운 물줄기를 찾아가자고 주장했다. 이는 정계비에서 토문강을 이어지는 경계를 국경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2년 후인 1887년(정해감계회담), 다시 국경회담이 열렸다. 청은 1차보다 훨씬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청측 - "조선은 임오년과 갑신년에 우리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은 바 적지 않다. 황제의 은덕을 어찌 갚으려는가?"

 

 

청나라 측 관리는 노골적으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론하며 이중하를 압박해왔다. 회담이 진행되던 도중 조선 측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회담에 임하는 청측의 기밀 문서를 입수하게 된다. 그것은 군기대신 리홍장이 직접 내린 회담에 임하는 훈령이었다. 그것은 서두수와 토문강 사이에서 국경을 정하라는 훈령이었다. 즉 두만강의 세 지류 중 가장 남쪽의 홍단수로 국경을 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청의 확고한 입장을 확인한 이중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이중하는 두만강의 가장 북쪽 지류인 홍토수로 국경을 정하기로 하고 회담에 임한다.

 

청측 관리 - "여러 소리 할 거 없다! 귀관은 어찌하여 홍토수 이외에는 거론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가!"

이중하 - "귀관이 주장하는 홍단수는 우리의 땅을 축소하려 하는 것인데 어찌 그것을 상의하겠습니까!~"

청측 관리 - "마땅히 홍단수로 정할 것이다!~"

이중하 - "난 그리 할 수 없습니다!~"

청측 관리 - "오늘 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는 이 산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분명히 하라!~"

이중하 - "나의 목을 내어줄 수는 있어도 나라 안의 경계는 한 치도 내어줄 수 없음이오!~"

 

목숨을 내건 이중하의 담판으로 결국 2차 회담도 결렬되고 만다.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으로 남는다. 이중하는 2차 회담에서 홍토수를 경계로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토문강을 포기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도 나라 땅을 지키겠다는 이중하. 그는 왜 토문강을 버리고 홍토수로 물러났던 것일까? 그런데 최근 이중하의 토문강 포기 이유에 대해 일본학자의 새로운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는 조선과 청의 외교 대표 사이에 비밀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중국 원세개와 조선의 김윤식 양자 간에 접촉과 교섭이 있었고 그것을 감안해 두만강 현지에서 이중하와 청측 대표 사이에 회담이 있었다. 이것이 정해회담이다. 따라서 이중하가 두만강의 경계에서 타협했다고 하는 것은 서울에서의 원세개와 김윤식 사이의 비밀회담의 결과를 감안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 아키즈키 노조미 교수, 메이지학원대학 국제학부

 

 

 

당시 조선과 청의 외교 수장이었던 원세개와 김윤식이었던 비밀회담은 무엇이었을까? <리홍장 전집>에 남아있는 원세개가 리홍장에게 보낸 '비밀 통신문'에 그 내용이 남아있다. 김윤식과 원세개의 비밀국경회담, 그 핵심은 '차지안민(借地安民)'이었다.

 

"차지안민(借地安民)이란, 국경문제에서는 청측의 주장에 타협하지만, 두만강 북쪽의 조선 이주민에 대한 조세권이나 재판관할권 등에 대해서는 조선측이 관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이다. 바꿔 말하면, 토지의 영유권과 사람에 대한 통치권을 별개로 생각한 것이다." - 아키즈키 노조미 교수, 메이지학원대학 국제학부

 

 

'차지안민'은 애초 원세개가 제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청 역시 간도에 대한 조선의 실질적인 점유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밀회담은 김윤식의 유배로 결렬되었고 이후 조선 정부는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즉 조선 정부는 이전의 모든 국경회담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조선과 청 양국은 간도에서 치열한 행정권 다툼을 벌인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간도로 진출했고 마침내 1909년 불법적인 간도협약으로 간도를 청에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지난 100여 년, 이 간도협약이 간도의 운명을 결정지어 온 것이다. 이중하의 회담 이후 한국과 중국 사이엔 단 한차례 국경회담도 열리지 않았다. 백두산 너머 간도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국경문제를 종결시키지 못한 채 미해결의 땅으로 남아있다.

 

"이중하의 회담이 결렬된 지 22년 후 간도는 당사자인 조선이 배제된 채 청과 일본의 회담으로 청나라에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하면 국제법상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합니다. 그 이후에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는 간도를 둘러싼 아무런 회담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난 1962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조중변계조약이 있었습니다만 이 조약은 유엔에 등록되지 않은 비밀조약입니다. 그나마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과 중국 사이 간도는 협상이나 조약으로 종결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간도는 잊혀진 고토가 현재 진행형인 미해결된 땅인 것입니다.

 

 

* 글의 내용과 이미지 저작권은 KBS <HD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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