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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7일 금요일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사도들과 원로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성령과 우리는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22-31
그 무렵 22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30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자,
그들은 안티오키아로 내려가 공동체를 모아 놓고 편지를 전하였다.
31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2-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일본에 파견되었던 한국인 신부님이 일본인 신학생을 한국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 신학생은 사제관에 머물며 식사하고, 신자들과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보좌 신부가 주임 신부 방에 들어가지 않으며, 약속하지 않고 찾아 가면 만나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 그는 한국의 ‘정 문화’를 불편해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일본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눈물을 글썽이며 한국 교구로 오고 싶다고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고 합니다.
친한 사람과 진정한 친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고기를 달라고 하였을 때 친한 사람은 물고기를 주고, 진정한 친구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친한 사람은 외모나 배경을 물어보고, 진정한 친구는 행복한지를 물어봅니다. 친한 사이라도 미리 연락을 하고 와야 마음이 편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불쑥 찾아와도 불편하기보다는 반가움이 앞섭니다. 진정한 친구란 서로 진심으로 걱정하고 자신의 삶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관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는 나의 친구가 된다. ……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살을 맞대고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 예수님께서는 우리라는 친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15,17). 그저 친한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고, 정을 나누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가 먼저 이웃에게 친구가 되어 줍시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 친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께서 얼마나 파격적이신지!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과거 종이나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전부였습니다. 생사여탈을 쥐고 있었으며 여차하면 마치 물건이나 동물처럼 매매나 양도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 시장이 서면 노예가 필요한 사람은 매물로 나온 노예를 샅샅이 훑어봅니다. 마치 물건을 고르듯이 말입니다. 입도 벌려서 치아 상태가 양호한지? 옷을 벗겨서 몸 상태는 괜찮은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분을 종에서 친구로 승격시켜주셨습니다. 죽을 운명을 지닌 비참한 존재에서 구세주 하느님의 친구로 영원한 생명을 확보한 위대한 존재로 우리 위치를 격상시켜주셨습니다.
‘친구’란 단어처럼 듣기 좋고 편안한 단어가 다시 또 있을까요? “친구란 내 기쁨을 두 배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하나 사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란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속마음을 다 알 수 있는 사람, 아무런 말없이 내 흐느낌을 오래도록 기다려주는 사람, 멀리 떨어져 다른 삶을 살아도 언제나 존재 자체로 큰 위로가 되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존재, 정말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때로 가족에게 하지 못할 말들도 친구이기에 속 시원히 털어놓습니다. 매일의 삶이 ‘연옥’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친구가 있기에 그래도 견디며 살아갑니다. 이 냉혹한 세상 친구마저 없다면 과연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하도 팍팍해지다 보니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어집니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친구,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갈 친구를 찾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는 게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구나!’ 하면서 홀로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정말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친구 먹자고 제안하신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분신이자 외아들이십니다. 아니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 결국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 먹자고 하신 것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친구 먹자고 하신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 낮춤이며 한없는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 나가는 유명인사 가운데 친구가 한 명 있다면 덩달아 어깨가 으쓱합니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크게 자랑합니다. “그거 알아? 모모 국회의원이 바로 내 초등학교 동창이야.” “이번에 임명된 그 장관 있잖아? 나하고 소꿉장난 친구였어!”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런 친구 두지 못한 것 하나도 섭섭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즉 하느님 아버지와 친구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며 감지덕지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거 보통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에 대한 큰 자긍심을 지니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4년 2월 13일에 뉴욕에서 달라스로 왔습니다. 직책도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지사장에서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본당 신부로 바뀌었습니다. 2027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몇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건축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건축 위원회에서는 사제관 신축, 친교실 확장과 같은 목표를 세웠습니다. 본당 교우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고, 사제관 신축과 친교실 확장이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친교실 확장은 관세로 인한 비용이 늘어나서 보류하고, 사제관 신축을 먼저 하기로 했습니다. 사제관은 성당 밖에 있는데 그것을 매각하면 비용을 충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 위원회 위원장이 타주로 직장을 옮겨야 해서 위원장직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다음에 선출된 위원장이 새롭게 사제관 신축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요구하는 상황을 파악하였고, 지금 사제관의 시세를 파악하였습니다. 이제 시티의 허락을 구하면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본당 설립 50주년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은총의 50년, 희망의 50년’이라는 주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고, 50주년을 맞으면서 본당의 역사를 담아낼 책자도 만들기로 했습니다. 비용 마련을 위해서 물품 판매도 준비하고 있고, 계좌를 새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50주년 준비 위원회 위원장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선출된 위원장이 의욕을 가지고 다시 50주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2024년 사목회를 구성하면서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기 위해서 임기를 2년이지만 3년으로 연장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열심히 해 준 사목회는 고심 끝에 일 년을 더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심에 감사드렸습니다. 함께해서 행복했다고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목회가 1년 더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 지녔던 율법과 계율이라는 의자를 과감하게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내린 결정은 당시 이방인들도 거부감 없이 지킬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에 전래된 교회는 많은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 천국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한국인들이 오랜 전통으로 이어왔던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였습니다. 우상숭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 금지는 한국의 초대교회가 박해받는 큰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훗날 교회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한국의 오랜 전통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좋은 글이 읽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친구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 줍니다. 참된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그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사귐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믿음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희망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사랑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기쁨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나눔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섬김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살림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처음부터
벗은 아닐지언정
사귐으로
우리 서로
벗이 되어요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Peter)
활동년도 : 1102-1175년
신분 : 주교
지역 : 타랑테즈(Tarentaise)
같은 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Petrus)는 프랑스 비엔(Vienne) 교외의 생모리스(Saint-Maurice) 태생으로 스무 살 경에 그의 두 형제와 아버지와 함께 본느보(Bonnevaux)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1132년에 그는 제네바(Geneva)와 사부아(Savoie) 사이 타랑테즈 산맥에 있는 타미(Tamie) 수도원의 첫 번째 원장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집을 지었다. 1142년에 그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타랑테즈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시토회의 규칙을 교구 개혁에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주요 사업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산맥을 넘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도움을 베푸는 일이었다. 그는 또한 수확 전 춘궁기에 가난한 농민들에게 빵과 수프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프랑스인들은 이를 '5월의 빵'이라고 불렀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지속되었다.
타랑테즈의 주교로서 13년이 지났을 때 그는 몰래 교구를 떠나 스위스에 있는 한 시토회 수도원에서 평수사로 지내고자 했으나 결국 다시 교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교황과 왕의 고문으로서 프랑스에서 교황권을 옹호하는데 힘썼다. 그는 1191년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타랑테즈의 베드로'로 불리는 유명한 두 사람 중 한 명으로 다른 한 명은 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5세(Innocentius V, 6월 22일)가 되었다.
성 보니파시오 4세(Boniface IV)
활동년도 : +615년
신분 : 교황
지역 :
같은 이름 :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요한이라 부르던 의사의 아들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이탈리아 아브루치(Abruzzi) 지방의 발레리아(Valeria) 에서 태어났으며,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지도를 받던 학생이었다.
그는 후일 로마(Roma)의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수도원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고, 교황청에 들어가서는 자선금과 교회재산의 사면관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608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방신들이 모셔진 로마 신전이나 로마의 판테온(Pantheon)을 그리스도교의 성전으로 전환하여 성모 마리아나 모든 성인들에게 봉헌하는 노력을 꾸준히 하였다. 또한 영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성 아가티오 (Agathius)
활동년도 : +303년
신분 : 백부장, 순교자
지역 :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같은 이름 : 아가띠오, 아가띠우스, 아가토, 아가투스, 아가티우스, 아카치오, 아카치우스, 아카키오, 아카키우스
성 아가티우스(또는 아가티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 사람으로 발칸 반도 동부 트라키아(Thracia)에 주둔해 있던 황제군의 백인대장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페린투스(Perinthus)에서 체포되어 신앙 때문에 피르무스(Firmus) 호민관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고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후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에 그를 기리는 성당을 세웠다. 그는 아카키우스(Acacius) 또는 아가투스(Agathus)로도 불린다.
성 미카엘 대천사 발현
Festum Apparitionis S. Michaelis Archang
Apparition of Saint Michael and Protector of Cornwall
Born:not applicable
Died:hasn’t
Canonized:Pre-Congregation
Name Meaning:Who is like God? (the battle cry of the heaven forces during the uprising)
남부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주에 갈가노라고 부르는 작은 산이 있다.
이 산은 아드리아 해에 돌출하여 말프레드니아 해만을 감싸주는 제일 뽀족한 끝을 이루며, 그 절벽은 지나가는 뱃사공들의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지만 산록 일대는 토박한 지대로서 농업과 목장을 업으로 삼고 있는 수많은 주민들은 누구나 가난하고 여려운 생활을 감수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5세기 말경 교황 젤라시오 1세 시대에 이 부근에 성 미카엘 대천사가 발현하여 이 자리에 성당을 세우도록 권했다고 한다.
그 후 이 말씀에 따라 건립되어 성 미카엘 대천사에게 봉헌된 성당에는 참배하러 오는 순례자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의 도움을 구했고, 특히 중세기에는 그 순례자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성 미카엘 대천사의 발현은 비단 그 때 그 지방에 국한 된 일이 아니다.
구약 성서를 보더라도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발현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만, 신약에 와서도 그의 주요한 발현이 세번 있었다.
첫째는 위와 같은 갈가노 산에 있어서의 발현, 둘째는 비잔틴에 있어서 콘스탄티노 대왕에게의 발현, 세번째는 로마에 있는 천사성에 있어서의 발현이다.
Statue of St. Michael defeating the dragon
이 마지막 세번째 발현에 대해 간단히 더듬어 보자.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 시대의 일이다.
로마에 페스트가 만연하여 나날이 수많은 희생자가 나게 되었다.
교황은 이를 무척 염려한 나머지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을 간청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명하여 시내 행진을 행하게 하고, 자기도 친히 이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시내를 돌고 아드리아노 황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城)이 있는 곳까지 오니 성벽 위에 성 미카엘이 나타나서 손에 들었던 창검을 칼집에 꽂는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이것은 시민들 위에 내려졌던 하느님의 노하심을 거두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후 그렇게까지도 극성을 부리던 질병도 깨끗이 자취를 감추어 모든 사람들은 그제서야 안도감을 느낄수 있었다고 한다.
위의 성벽이 천사성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때부터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천사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우선 첫째 이유는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시려고 하시는 것인데, 예컨대 성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와 사제인 즈가리아에게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이다.
성 미카엘 천사의 발현은 다소 이와 다르겠지만, 보통은 그 초월한 영적 힘으로써 사람들을 악마의 손아귀에서 보호하며 그에 대한 우려의 신뢰를 두텁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같이 생각된다.
천사의 발현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는 갈가노 산상에 있어서의 성 미카엘 대천사의 결과를 보더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성당을 참배한 이는 누구나 풍부한 은총을 받았는데, 그 중에도 팔레스티나로 출정하는 십자군의 장병들은 우선 이 성당을 방문하고 성 미카엘의 보호를 구하여 전쟁에서 그들을 보호하기를 기도하고 커다란 은혜를 받았다.
전 교회의 보호자로서 지금 이 대천사가 뭇사람의 커다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주로 위의 전투에 참가해 그의 새로운 보호를 받고 무사히 본국에 개선한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성 미카엘에 대한 신심을 선전했기 때문인데, 이를 보면 성 미카엘이 갈가노 산에 발현한 결과가 어떠했던가를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