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을 맞이하며/靑石 전성훈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처럼 3월이 계절적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다. 물론 2월이 다른 달에 비하여 기간이 짧은 탓도 있지만, 그 외에 심리적인 요인도 있는 것 같다. 3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보니 문득 입속에 맴도는 노래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삼일절을 앞두고 불렀던 그 노래, 정확한 노래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가사도 첫줄 만 떠오른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면 유관순 누나가 생각납니다.....”
중고교시절 이후 세월이 한참 흘러 3월이 내 삶에 크게 다가온 것은 직장생활 시절이었다. 제대하고 사회인이 되어 처음 다녔던 직장은 주위에서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부러워하던 회사였다. 약 2년 정도 다니던 직장이 경영진의 방만한 회사 운영으로 그룹이 산산조각이 되어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회사가 다른 회사에 합병되어 불가피하게 합병회사에서 두 번째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 회사에서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쓰라린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겪으면서 지냈다. 학벌 좋고 처세술이 뛰어나고 출중한 외국어 실력을 갖춘 사람을 제외하고는 합병되어 들어간 대부분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적성에 맞는 부서에 근무하는 것은 사치였고, 연고자가 아무도 없는 지방으로 발령받는 일도 있었다. 지방에서 거주할 집을 구하는 등 경제적 요인은 물론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할 수 없어 사표를 내는 사람도 생겼다. 본사인 서울에서 근무하여도 진급할 때가 되어 제때 승급하거나 승진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불행하게도 나 역시 제때 승진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회사마다 직급체계와 진급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연공서열을 기준으로 진급을 결정하던 시절이었다.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의 직위로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경력으로 근무하던 동료가 진급하는 데 나는 한 해 두 해 뒤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직위가 올라가는데 많은 좌절을 안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머금고 지내야 했다. 매년 3월 1일 기준으로 인사발령이 2월 말에 났다. 직원들은 인사발령지를 대자보라고 불렀다. 올해 진급이 안 되면 내년을 기약하며 한 해를, 또 한 해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린 게 심할 때는 6~7년을 기다린 때도 있었다. 한 번도 제때 진급한 적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세월을 한탄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가까운 수락산이나 불암산을 찾았다. 3월 1일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소리를 지르고 심할 때는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부족한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며 차가운 산 공기를 들여 마셨다. 20년 넘게 근무하였던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그때에도 산에서 마음의 다짐을 하였다. 회사에서 대규모 조직 변경과 인원 감축을 시행하면서 별별 괴상한 유언비어가 난무하던 분위기였다. ‘똥차 때문에 개고생한다’는 소리까지 나돌았던 끔찍한 시절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술 한잔하면서 살벌한 회사 분위기를 파악하고 어렵게 아내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아주 기쁜 일이 있었다. 딸아이가 목표로 하였던 대학에 합격하였던 것이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산 정상에서 딸의 전화를 받으면서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쏟았다.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쓰라렸던 마음을 기억하고 있다. 한동안 울분에 쌓여서 술에 절어서 지내기도 했고, 성당에서 성서 공부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새로운 삶을 열어가려고 노력하던, 그야말로 혼돈과 고독한 광야의 시절이었다고 여겨진다. 다시 3월을 맞이한다. 이제는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는다. 따사로움과 사랑을 전해주는 개나리처럼,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 그리고 2학년이 된 손녀의 밝은 표정에서 세상을 다시 바라본다. 하늘이 허락한 귀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간절히 기도드린다. (202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