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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가해 12월4일 (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청주] 품어 생각하면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이사 25, 6 - 10ㄱ
† 복음 : 마태 15, 29 - 37
★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쁨과 참생명의 산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메시아의 시대가 온다는 사실을 예고하는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머무르며 당신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군중에게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로
배불리 먹게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인물들은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입니다. 청소년들이 부르는 성가
중에 이러한 노랫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나에게 손을 두 개 준 것은 서로서로 도와주며 봉사하라고
주셨지./ 하느님이 나에게 발을 두 개 준 것은 하루 종일 부지런히 일을
하라고 주셨지./ 하느님이 나에게 예쁜 입을 준 것도 즐거웁게 찬미하며
기도하라고 주셨지.”
우리의 손과 발, 입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쓰여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손이 폭력을 휘두르는 도구로, 발이 헛된 곳으로 빠져드는
수단으로, 입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애인들은 바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적 장애를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는지 오늘 복음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장애인들은 주님께 다가가고자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 입이 제구실하려면 겸손한 자세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장애인들은 산에 오르는 수고를 합니다. 이들이 산에 오르는 데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 다가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배고픔을 이겨 내며 주님 곁에 머무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
곁에 머무르는 것이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보다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을 느껴야
합니다. 이러한 간절함이 우리의 영적 지체를 건강하게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품어 생각하면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마태오 15,29-37
품어 생각하면
이른 아침 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 하셨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
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하기도합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하신다 해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마음으로 변한 나를 도구삼아 나와함께 일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음식쓰레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도 여전히 넘쳐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저는 복지관에서
식사를 할 때 직원들의 식판을 자주 살펴봅니다. 그들이 음식을 남겨
버리는 것을 봅니다. 안타깝습니다. 어르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러려니 합니다만 직원들도 의식이 부족합니다. 먹을 수 있을 만큼
알맞게 가져가면 좋은데 잔뜩 가져가서는 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게 되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 덩어리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34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도 남에게 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남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영육으로 풍족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세상에는 사랑이 많이 부족합니다.
2013년 가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제가 학생 때 봤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납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개척교회의
가짜 목사 역할을 맡게 되어 교회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고 하지요. 물론
평생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람들의 의심도 받지만,
그는 신자들의 고민들을 해결해주고 가짜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 등으로
의심을 씻고 대신 오히려 아주 열렬한 지지를 받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치유와 계속된 놀라운 기적의 체험을 신자들에게 시켜주고서 요구하는
것은 ‘봉헌’이었지요.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많은
봉헌을 하지요.
실제로 많은 이단 교회가 이러한 행동들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곤
했습니다. 이단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하느님의 큰 은혜를
받았으니 하느님께 다시 봉헌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전 재산을 봉헌해서 쫄딱 망했다는 이야기도 예전에는
심심찮게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정말로 당신이 주신 은총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실까요? 서로 주고받음이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주기만 하실 뿐입니다. 이 모습을 복음에서 우리는 자주 접합니다.
오늘 복음만을 봐도 잘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사람, 다른 불구자들, 말 못하는 이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해주셨습니까?
눈먼 이는 보게 해주고, 다리 저는 사람은 제대로 걷게 해주시고, 다른
불구자들은 온전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또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 당시의 어떤 의사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치유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나에게 봉헌하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마 사람들은 다 싸들고 예수님 앞으로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전혀 하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이들이
배고프지 않을까 싶어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의 기적까지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 역시 당신의 모습을 닮아
끊임없이 주는 데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물론
내가 하나를 받았으니 하나를 다시 주님께 드리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나의 이웃들을 향해서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베푸는 사랑의 실천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빵의 기적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부인 일곱 개의 빵과 물고기를 봉헌함으로써 당신 기적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이 많이 부족합니다. 이 부족함을 이제 주님과 함께 바로
우리의 사랑으로 채우면서 주님의 일을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사랑할수록 우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 사랑은 친절을 낳고,
존경을 끌어내며,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하고 기쁨, 평화, 아름다움,
조화를 가져온다(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어제 특강을 했던 서울 신천동 성당. 정말로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왕 하는 말, 기분 좋은 말을 합시다.
어제 아침, 제 차를 가지고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오랜만에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택시 운전사가 욕을 하면서 운전을 합니다. 운전도
똑바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로로 나와서 힘들다고, 사람들이 신호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교통체계가 엉터리라고 계속된 불평불만을
욕과 함께 쏟아내는데 그 자리가 너무나 불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택시 운전수는 운전을 아주 모범적으로 할까요? 문제는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과속과 신호위반은 기본이고
위험한 끼어들기와 전혀 양보하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 제가 이렇게까지
말했다니까요.
“저 그렇게 급하지 않으니까 천천히 가도 돼요.”
제가 보기에는 이 운전수가 더 위험하게 운전을 합니다. 결국 자신이
뱉은 욕은 어쩌면 자신을 향한 욕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남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과 온갖 불평불만들. 그러나 그 모든 말들이
결국 내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게 돌아올 말이
긍정적이고 기분 좋은 말이 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내가 먼저 그러한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기분 좋은 말. 이러한 말들이 바로 사랑 실천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간 수요일
2013년 가해 12월4일
예전에 돌계단 틈으로 새싹을 보이는 민들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좋은 곳이 많은데 어쩌다 돌계단 틈으로 씨앗이 떨어진 것입니다.
단단한 돌에, 물도 없는 곳에서 싹을 내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힘들게 꽃을 피우려는 민들레가 애처롭게도 보였고, 작고 여린 줄기를
세상에 내보내려는 민들레가 대견하게도 보였습니다.
저는 1982년도에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199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친구는 2년 늦게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어떤 친구는 한국을 떠나서 멀리 타국에서 10년 늦게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 시간들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걱정이 늘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사제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지 수도 없이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어제는 한 젊은이가 성소국을 찾아왔습니다. 2006년도 신학교엘 다녔다고
합니다. 본인의 실수로 신학교에서 나왔지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서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신학교에 가기 위해서 추천서를 받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동창들은 이미 사제가 되었지만 그 친구는 앞으로 더 많은 시간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배워야 하고, 문화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될 것입니다.
사제의 길을 가려하는 그 친구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마치 돌계단 틈에서
힘들게 뿌리를 내리려하는 민들레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친구의 열정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시편 23장입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온 몸에 큰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씨는 시편 23장의 내용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나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움이 없네. 주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를 깊이 묵상했다고 합니다. 사고 전에 찍었던 사진은 앳되고
아름다운 여대생이었습니다. 40번을 넘게 수술을 한 지금의 얼굴은 많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지선 씨는 절망 중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홈페이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을 것입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을
것입니다. 동성고등학교의 예비 신학생반을 선발하였습니다. 그 학생들이
신학생이 되고, 사제가 되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시련의
가시밭길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본인의 잘못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억울한 일도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세상의 것들에 대한 유혹이 너무 강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다면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나눔 없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나눔 없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013년 가해 12월4일 대림 제 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많은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마태오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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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있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한다. 그 이유야 당연히 예수님을 통해서 불편한 부분을 치유 받고자
하는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애(障碍)란 무엇일까?
정상이라는 기준을 채우기에는 결핍이나 부족함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장애자란 정상적이라고 하는 이들에 비해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에 보다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태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존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우리 모두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먹는 것에서 입는 것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이다.
또한 우리의 육신과 마음도 완전히 건강한 상태를 이룰 수는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관계가 중요한 것이고, 그 안에서 희로애락이 만들어진다.
복음에서 소개된 장애를 가진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이
장애가 없는 건강한 사람들이라고 단정을 해서는 안 된다.
덜 불편한 사람이 더 불편한 사람을 도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
관계라는 것의 속을 들여다보면, 완전함과 불완전함의 만남이 아니다.
관계란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만들어가는
세상을 말한다. 좀 더 여건이 좋은 사람이 좀 더 불편한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관계라 보아야 한다. 관계 속에 애당초 완전함이란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직한 이해일지도 모른다.
사제가 강론대에서 “아름답게 삽시다!”라고 힘을 주어 말하는 것이, 그
사제가 반드시 아름답게 살고 있기에 하는 외침이 아니다. 사제도 다양한
추함 속에서 아픔을 체험하고 있지만, 분명 아름답게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흘간 당신을 쫓아다니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군중을 보시고 안타까워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마태오는 그리고 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해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 복음서(15,32-39)가 제자들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볼멘 소리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간결하게 7개의 빵과
조금의 생선으로 사천 명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빵 다섯 개와 두
마리의 생선으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마태오14,13-21:
마르코6,30-44: 루카9,10-17: 요한6,1-14)처럼, 이 이야기 역시 전하는
메시지는 같다.
‘세상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함께 나누는 것’
바로 이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그렇다.
우리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은 이기적인 신앙을 거부한다.
세상 논리처럼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는 더러운 논리가
아니라, 남도 행복할 수 있을 때 나도 행복해지고, 남이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진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복음적 신앙이다.
추운 겨울이 다가왔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추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어디선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우리였으면 한다.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예수님을 닮아갈 길
2013년 가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예수님을 닮아갈 길
아픈 곳은 고쳐야 하고 허기지면 먹어야하고 피곤하면 쉬어야지요.
육체가 그렇듯 마음도 그렇습니다. 또 우리 정신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인간의 조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와 함께 평생을 갑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는 모습은 그렇지가 않으니 이게 문제입니다.
빈부의 격차와 권력의 고하며 약육강식의 힘쓰기며 잘났고 못났고 합니다.
남을 고쳐주고 위로하고 베풀고 돕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갈 길일 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오 15,32)”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넉넉하면 모두가 넉넉해진다
2013년 가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
복음 : 마태오 15,29-37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예수
< 내가 넉넉하면 모두가 넉넉해진다 >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유리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실화입니다.
태수는 집을 나와 지하철에서 남의 지갑을 훔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년입니다. 그러나 가끔 남동생과 통화는 하고 지냈는데, 어느 날
남동생으로부터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도 병원 앞까지 와서는 막상 엄마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병원을 한 차례 올려다 보고는 그냥 병원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태수가 지하철역으로 향할 때 한 젊은 여자가 현금인출기에서 많은
돈을 뽑아 핸드백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은 다시 매섭게
변했고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하도 계단을 내려갈 때
뒤에서 부딪히는 척을 하며 핸드백을 순식간에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태수가 사람들의 얼굴을 째려보다가 싸움이 붙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게 모두 연행이 되었습니다. 태수는 결국 그들에게
합의금을 주어야만 풀려날 수 있었지만 당장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동생은 전화를 받고 곧바로
달려왔습니다.
“이런 일로 불러서 정말 미안하다. 합의금을 마련하지 않으면 형사
입건되거든. 너 말고는 연락할 데가 없었어.”
“형은 .... 왜 그 동안 엄마에게 한 번도 오질 않았어?”
“사실은 ... 전에 한 번 병원에 가긴 갔었어. 차마 들어갈 수 없어서 그냥
돌아왔지만... 엄마는 좀 어떠시냐?”
“놀라지마, 형... 엄마, 돌아가셨어. 장례식 끝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돼.”
“뭐? 왜 돌아가신 거야? 왜...?”
“왜는 왜야? 결국은 병원비 때문에 돌아가신 거지.”
“아니, 병원비 없다고 사람을 죽게 해? 그게 병원이야?”
“워낙에 많은 수술비가 들어서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나 봐. 그래도
병원 측에서 많이 도와줬어. 나중엔 할 수 없이 엄마를 집으로 모셔갔지
뭐. 그러고 나서 한 달도 못 돼서 돌아가셨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죽을 줄 알면서도 그대로 내친다는 게
말이 되냐?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딨어? 이러니까 내가 세상에 정 붙이지
못하고 벌레처럼 사는 거야. 아니 그렇게 돈 구할 데가 없었냐? 내게라도
연락을 했어야지.”
“언제 형이 나한테 연락처 같은 거 가르쳐준 일 있어? 형이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해? 얼마 전 내 여자 친구가 정말 어렵게 엄마 수술비를
마련했었어. 그런데 그걸 내게 갖다 주려고 병원으로 오다가 어떤 놈한테
소매치기 당했대.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놈을 잡지도 못했어.
그놈의 소매치기만 없었어도...”
태수는 갑자기 온 몸이 굳어짐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게 틀리기를
바라며 더듬더듬 물었습니다.
“그 돈... 어디에서 소매치기 당했어?”
“엄마 있던 병원 바로 앞에 있는 지하도 계단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십니다.
기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들이 가엾으니
굶겨서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수많은
사람을 먹일 양식을 어디 가서 찾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진 빵이 없느냐고 하지만 제자들은 조금밖에 없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 조금은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항상 ‘긍정’임을 볼 수 있고, 제자들은 ‘부정’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긍정이란 ‘주고 싶음’이고 부정이란 ‘줄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또 긍정이란 ‘있는 것’을 보는 반면, 부정이란 ‘없는 것’을
먼저 봄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만 보는데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긍정의 완성이 ‘감사’임을 당신 감사기도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결국 내가 감사함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풍족함을 줄 수
있고, 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세상 사람들도 부족해진다는 뜻입니다.
오늘 뉴스에서 특목고 시험에 떨어진 한 우등생 중학생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우등생이었는데도 자신이 그렇게 잘하는
것보다는 부족한 면을 전부인양 생각했기에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있는 것부터 감사할 수 있었다면 가족들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을
먹이는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태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인데, 결국 그것이 가족을 죽이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감사일기 하루 5가지에서 이젠 10가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결국 있는 것에 감사할 때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만족으로
금지된 열매에까지 손을 뻗쳐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면, 만족하여
감사한 삶이 죄짓기 이전의 나도 남도 풍요로운 삶일 것입니다. 먼저
있는 것에 감사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이사25,6-10ㄱ 마태15,29-37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기적의 힘은 간절함이었다는 어느 우승한
축구팀 주장의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함께 모여 치열하게 공부하는 어느 모임의 네 가지 목표도 신선합니다.
도심에서 유목(遊牧)하기,
세속에서 출가(出家)하기,
일상에서 혁명(革命)하기,
글쓰기로 수련(修練)하기,
그대로 수행자(修行者)의 정신이자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어제 힘들게 수도원을 찾았던 어느 자매의 간절한 호소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빛 속에서 살고 싶어요.”
하여 고해성사 후 지난 주 1독서의 말미에 나오는 말씀을 일부 바꿔
처방전으로 써 주었습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중 ‘야곱 집안’을 그 자매의 이름으로 바꿔 써드렸더니, “아 물질 축복과
치유 축복 두 가지 축복을 보태서 써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청에 다시,
‘( )야.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말씀에 추가하여 ‘주님, ( )에게
물질 축복과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기도문을 써드리고 강복을
드렸습니다. 간절함이 하느님 마음을 움직입니다.
물질축복과 치유축복, 아주 구체적이고 절실한 몸에 관한 간청입니다.
입맛과 살맛은 함께 갑니다. 몸이 건강해야 입맛도 살맛도 살아납니다.
입맛의 식욕이 사라지면 살맛의 의욕도 사라집니다.
먹어야 삽니다. 하여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청원입니다.
사는 것은 먹는 것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먹자고 하는 일인 데’ 라는 말도 있듯이 먹는 맛이 없으면 살맛도
없어집니다. 하여 잔치에는 필히 먹는 것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의 두 소주제,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사천 명을 먹이시다’
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1독서의 언젠가 하늘나라 잔치의 '그날'이 예수님을 통해, 또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고치시고 먹이시는 하느님입니다.
인간의 아주 구체적 욕구가 아프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이사야 예언자, 두 분 모두 간절히 하느님을 찾았던 분임을
깨닫습니다. 간절함에서 계시되는 하늘나라 잔치의 꿈이자 실현입니다.
“그 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이 산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바로 이게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어리석음과 온갖 환상, 허영의 너울과 덮개를
없애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입니다.
이런 하늘나라 잔치의 은총을 미리 맛보는 미사시간입니다.
미사의 위로와 치유는 그대로 하느님의 위로와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주께서 정녕 말씀하셨다.”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둔 내용이 미사경문에도 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감사기도 제3양식 중 위령미사 시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오늘 이사야의 간절한 꿈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시자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었고 온
군중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치유 기적에 대한 자연스런
응답이 하느님 찬양이지만 찬양이 하느님 기적을 일으킵니다.
인간의 특전이 하느님 찬양입니다. 새삼 하느님 찬양의 은총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아 하느님이 일으키신
기적들입니다. 몸들의 온전한 회복을 통해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을
깨닫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바로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연민의 마음이
기적의 시발점입니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들고 감사드리는 간절한
기도에 이은 기적이요 풍성한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합니다. 바로 넘치는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풍성함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색함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체험하여 닮을수록 인색한 마음은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변모합니다.
1독서의 이사야의 하늘나라 잔치의 비전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광야에서 실현됨으로 광야는 낙원이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인생광야는 인생낙원이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하늘나라 미사잔치를 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를 고치시고 먹이시며 우리를
가렸던 탐욕과 무지의 너울을 없애시고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십니다. 저절로 우리 입에서 나오는 이사야서의 고백입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미사 위에 머무르신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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