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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해전 : 그 마지막 이야기 - 트라팔가 해전생생海 2011. 2. 12. 09:55
벌써 세계 4대해전 마지막 이야기를 쓸 차례가 왔네요^^
이번에 소개해 드릴 해전은 20세기 이전까지 영국의 해양 패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트라팔가 해전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해군 제독인 넬슨 제독의 승리로 더욱 유명한 해전이죠^^
그럼 트라팔가 해전 당시의 역사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바스티유 감옥이 폭도들에 의해 불타고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그 왕비인 마리 앙뜨와네뜨... 그 당시 배고픈 군중들이 ‘빵을 달라’라고 외쳤을 때,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말로 곤욕을 치뤘죠. 요즘같이 어록이 이슈가 되는 사회였다면 각종 챠트 1위에 올랐을 것이라는...^^;)
그리하여 프랑스 절대 왕정은 무너지게 되고 공화국이 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왕정을 실시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혁명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죠. 자신들의 백성들도 들고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곧 그들은 연합하여서 프랑스에서 다시 절대 왕정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고, 1792년부터 젊은 프랑스 공화당원과 왕정국가들의 군대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 과정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서 해군 장교는 특히나 존경을 받았습니다.(왕족과 귀족들의 자제만이 해군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나폴레옹도 원래는 원래 해군장교가 되고자 했으나, 신분상의 제약으로 포병장교가 되어야 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20살에 불과했으나 1793년의 영국과의 전투, 1795년의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의 혁혁한 공으로 순식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할양하게 되었고 그 후 영국 제패라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797년에 프랑스인들을 설득하여 영국왕정이 반드시 자신들에 의하여 무너져야 전 유럽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이렇게 전쟁명분을 만들어가며, 그는 영국 침략을 위한 해군을 세우는데 공을 들입니다. 그 당시 영국 해군은 넬슨 제독과 함께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미앵조약(Treaty of Amiens : 영국과 프랑스간의 화평을 목적으로 맺은 조약)이 1802년에 조인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약 14개월 동안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강력한 권력을 쌓아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1804년 12월 2일에 스스로 나폴레옹 1세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죠. 황제가 된 후, 나폴레옹은 제국을 더 넓히고픈 야망에 영국을 점령하고자 다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영국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영국은 프랑스의 침략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영국의 항구에 도착하는 순간 영국의 운명은 겪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 섬나라였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바다를 지배하는 중요성을 어떤 나라보다 잘 알고 있었고,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함대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지상군에서는 프랑스의 군이 훨씬 우세하였으나 해군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1804년 말 스페인과 연합하여 영국을 침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스페인의 함대가 나폴레옹의 손안에 쥐어지게 된 것이죠. 나폴레옹은 영국 침략을 위해 2000여 척의 배와 90,000명의 군대를 준비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들은 프랑스의 해안으로 집결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주 목적은 해전에서의 승리보다는 나폴레옹의 지상군이 바다를 건너 영국에 도착할 동안 영국함대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1805년 초, 프랑스 함대는 영국의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를 약탈하고, 무역을 방해하여 일단의 혼돈을 가져다주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같은해 8월, 나폴레옹은 해군의 각 제독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마음을 다졌습니다. 내용인즉, ‘프-스 연합함대가 힘을 합친다면 영국을 충분히 물리치고 그간의 치욕을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자 독려의 메시지였지만 대부분의 제독들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프랑스 항구에 정박중인 나폴레옹의 함대는 모두 2,000여척, 그리고 90,000여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막강한 영국의 해군력에 의해 거의 모든 항구가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메시지는 전함대를 카디즈(Cadiz) 80km 동쪽 지점에 위치한 트라팔가 곶(Cape Trafalgar)으로 집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구에 응하기 위해 프랑스의 빌레누브(Pierre de Villeneuve, 1763-1806)제독은 20척의 함대를 거느린 스페인의 그라비나(Don Frederico Gravina)제독과 합류하기 위해 영국 해군제독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의 봉쇄를 뚫고 마르티니크 섬(Martinique I.)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스페인(Franco-Spanish)함대는 피니스테레 곶(Cape Finisterre)에서 18척의 영국함대와 교전으로 2척의 전함을 잃고 카디즈(Cadiz)로 퇴각했습니다.
그 당시 나폴레옹의 함대는 프랑스의 브레스트, 로쉐포트, 툴롱항과 스페인의 카디즈, 페롤에 흩어져 있었고, 영국 함대는 이들 항구 길목에서 프랑스 함대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캐러비안 해에서 연합하기로 했는데, 이는 영국해협을 건너는 동안 영국 함대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죠.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의 총 지휘관이었던 빌레뉴브의 제독의 함대는 툴롱항에 있었으며, 이를 넬슨 제독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빌레뉴브 함대는 1805년 3월 30일에 마침내 툴롱에서 넬슨을 따돌리고 출항하여 대서양으로 향하였고, 넬슨제독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빌레뉴브 함대가 지중해로 갔다고 여겨 이집트 근처로 함대를 움직입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빌레뉴브 함대를 뒤쫓기 시작하고, 카디즈항에 있던 스페인 함대는 항을 빠져나와 빌레뉴브 함대와 연합하게 됩니다.
빌레뉴브함대가 캐러비안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에 도착했을 때, 빌레뉴브 제독은 페롤항에 있던 함대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빌레뉴브 제독은 나폴레옹 황제가 그가 영국해협으로 와서 영국함대로부터 막아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페롤항으로 가서 남아있는 프랑스함대를 이끌고 북진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페롤항으로 가는 길에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로버트 캘더 제독의 함대와 부딪히게 되었으나 캘더 제독을 따돌리고 페롤 바로 밑에 있는 항구인 비고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5개월 동안 영국 침략에 전력을 쏟으며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연합하여서 프랑스를 침략하려고 하였습니다. 어쩔수 없이 나폴레옹은 영국침략을 포기하고 군대를 움직여서 독일로 향하게 되고 빌레뉴브함대에게 지중해로 들어와서 프랑스 지상군을 도우라고 명하였습니다.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10월 18일에 황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 카디즈를 떠났습니다. 넬슨 제독은 카디즈에 9월 말에 도착하여서 프랑스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휘하 장수들과 회의를 열었습니다. 넬슨 제독의 전투 전략은 프랑스 함대가 카디즈를 떠나기 전에 함대를 나누어서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해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되어 지고 있었습니다.
10월 21일에 넬슨의 영국함대는 스페인연안의 트라팔가곶에서 빌레뉴브 함대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넬슨 제독은 자신의 함대를 웨더와 리 분대로 나누고 그는 웨더 분대를 이끌고 콜링우드 제독으로 하여금 리 분대를 이끌게 하였습니다.
넬슨 제독과 그의 기함인 빅토리아 함입니다^^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로 접근해 오자 빌레뉴브 제독은 카디즈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명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함대는 북에서 남으로 길게 늘어뜨린 전법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와 같은 전법 형태는 가장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전선의 양쪽 뱃전을 적으로 향하게 해야 함포 사격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넬슨제독의 계획에 따라 영국 함대는 서쪽으로부터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중간 부분을 끊고 들어갔습니다. 넬슨제독은 풍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때문에 영국 함대는 빠른 속도로 전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넬슨은 그 당시 바람 방향을 예측하여 미리 풍상(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위치하여 있었습니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웨더 분대는 빌레뉴브제독의 배인 부상테어 앞을 끊고 들어갔으며 콜링우드 분대는 더 남쪽을 끊고 들어갔습니다.
콜링우드 분대의 목표는 스페인 사령관의 배를 부수고 넬슨의 공격으로 흩어진 전선들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넬슨의 분대 중 두 척은 본대가 방향을 바꾸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공격을 시작하자, 빌레뉴브의 배보다 앞에서 전진하고 있던 배들을 공격했고, 콜링우드 분대는 뒤 쫓고 있던 스페인 함대의 분대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교전이 무르익을 즘인 1시 경 넬슨제독이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았습니다. 넬슨의 웨더분대는 프랑스 함대의 중간부분에 있던 배들을 격침시켰고 일찍이 분대에서 떨어져 나가서 싸우고 있던 2척이 있던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들과 교전 중이던 프랑스 함대의 분대는 넬슨의 웨더 분대가 자신들에게 향해오자 퇴각하였고, 승리의 소식을 전해들은 넬슨제독은 희미한 목소리로 '나는 20살의 약속을 지켰다. 나는 나의 의무를 다했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라는 말을 마친후, 그의 기함 빅토리호에서 그의 선장인 토마스 하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4시 30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많은 해군을 잃었으며 21척의 전선은 영국함대에 포획되었 습니다. 사상자는 프랑스군 해군 2,218명이 사망, 1,155명이 부상을 당했고 스페인 해군은 1,025명 사망, 1,383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7천여명은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반면 영국함대는 배를 한 척도 잃지 않았으며, 넬슨 제독을 비롯한 449명의 해군이 죽었고 1,246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14,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모두 괴멸되었고, 해군제독 빌레누브는 영국해군에 의해 사로 잡혔고, 프랑스-스페인 함대 중 그라비나 제독이 이끈 스페인 함선 11척만이 카디즈로 회항했습니다. 빌레누브는 영국으로 끌려가 다음해 자살하게 됩니다.
트라팔가르 해전이 끝난 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압승을 거두고 오스트리아에게 프레스버그조약(Treat of Pressburg :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맺은 평화조약)에 사인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더 많은 땅을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함대로는 강력한 영국 해군을 이길 수 없다고 여기고 그의 영국 침략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대신 나폴레옹은 영국의 대유럽대륙 무역을 막아서 영국의 경제적 힘을 축소시키려는 방안으로 1806년 11월 21일에 그는 모든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선언하였 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막아서 고립시키려고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책은 그를 고립되게 만들었으며 그의 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륙봉쇄령은 그의 제국과 제국 내 유럽 국가들 간의 분쟁을 초래했고, 1810년에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의 무역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군대를 파견했는데, 대 러시아 군사적 전략이 실패하자 그의 권세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들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승리를 수백년동안 축하해 왔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석상중 하나는 이 해전을 승리를 이끌었던 넬슨의 석상으로 영국의 수도 런던에 있는 트라팔가르 광장에 있습니다.
트라팔가 광장의 모습
2005년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200주년을 맞아서 영국 해군은 세계해군함대 전시, 루미나리에 축제 등과 같은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고 우리 해군 순양훈련단대도 참가하였습니다.
출처: https://blue-paper.tistory.com/584 [Blu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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