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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이 있어서 1회 정독하고 올립니다. 좀더 깊이 읽어볼까 합니다.
창조와 구원의 시간 Ⅱ
출처: http://theology.or.kr/WORK/x-file/23/%C6%AF%BA%B0%B1%E2%B0%ED.htm
창조와 구원의 시간 Ⅱ.
박순경 박사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Ⅱ. 1. 서 언
Ⅱ. 2.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통한 창조의 시간
1) 하나님의 창조의 원시간, 태초의 날
2) '無로부터의 창조'와 혼돈· 공허· 암흑
3) 빛의 창조와 날
4) 창조의 6일과 제7일
5) 우주창조와 시간성
6) 생물들과 인간생명의 창조와 시간성
「말씀과 교회」 1999년 봄호에 나의 글 "시간의 근원, 창조자 하나님의 영과 생명·역사·사회의 시간성"이 실려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시간성 문제를 생각해 왔으나, 그 글은 준비 없이 급하게 쓰여졌는데, 나는 당시 Karl Barth의 Kirchliche Dogmatik(「교회교의학」)Ⅰ/1의 번역을 끝내려고 서두르던 참이어서 시간론을 집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새 천년을 앞두고 「말씀과 교회」가 시간론을 다루어야 한다고 정권모 박사가 내 글을 요청했을 때, 그 요청이 내 오랜 계획을 시작하도록 촉발했으며 나는 그 요청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은혜로 받아들였으며 미비한 채 글을 썼던 것이다.
그 글의 근본적인 결함은 창조의 시간을, 또 타락과 시간상실의 문제를 먼저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나는 우선 창조의 시간을 다루고 타락문제를 구원의 시간성과 결부해서 차후에 다루고자 한다.
인간의 생명·역사·사회의 시간성 문제는 우주의 시간성과 결부해서 고려될 수밖에 없으므로, 나는 내 전문분야를 넘어서 물리학적인 시간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신학적인 시간론 집필을 미루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천체물리학적인 시간론이 고려되기는 했으나, 보다 더 깊은 고려는 과제로서 남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창조의 시간을 쓰려고 성서와 신학사전들을 들여다보니, 유럽신학자들의 성서연구의 너무도 엄청난 업적에 나는 옛날처럼 또 다시 압도감과 감탄 때문에 많이 시달렸으며 한국의 맥락에서 신학 한다는 일의 한계를 절감했으나, 부족한대로 이 글을 발표하는 바이다.
내가 시간과 역사문제에 집착하게 된 배경과 이유에 대해서 먼저 글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여기서 말하고 싶다. 내가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1943-45)에서 많은 시체들을 다루면서 또 1944-45년 부모님들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죽음과 인생의 허무의 문제와 씨름하게 되었으며, 죽음과 영혼들의 문제는 어릴적부터 목격한 무속적인 현상들과 결부되어 내 마음에서 온갖 환상들을 일으키곤 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내가 1945년 신학수업을 결정하게 한 요인들 중의 한가지였다. 죽음, 인생의 허무, 영혼 혹은 귀신은 다 존재와 시간의 문제, 역사와 존재의 문제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과거의 공허에로 사라지는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모르는 뭇사람들이 과거의 공허에 묻혀 있으며, 이들의 영상들이 내 마음의 공허 속에서 오락가락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내 현재의 존재의 그림자이며 또 운명이다.
무당들은 그들의 특유한 정신적 직관력으로 과거의 공허로부터 귀신들을 불러내어 이들과 현재의 사람들과의 좋고 나쁜 인연들을 점치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무속현상은 바로 우리의 존재와 시간문제를 말해준다.
과거의 공허와 시간과 존재문제는 나로 하여금 역사의 의미문제에 집착하게 했다. 모든 과거역사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다 나의 배후이고 운명이라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시간과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묻게 한 것이다.
그런데 신학도 철학도 처음 몇 년 동안에는 내게 오리무중이었으며, 도대체 아브라함, 모세, 출애굽, 예수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해답되지 않고는 내가 신학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았으며, 칸트의 이성인식의 한계란, 도덕적인 정언명령이란,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연속되는 질문들 때문에 나는 한없이 우울했다.
1948년 어느 날 내가 비원 밖의 거리를 걸을 때 '다 이루었다'(요한19:30)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말씀이 회상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면서 "이 말씀이다! 모든 역사가, 나의 존재 전체가 다 이루어졌다."라는 환성을 마음 속에서 외쳐댔다.
이것이 신학탐구에 대한 내 두 번째의 계기였던 것이다. 역사에 그러한 성취점이 있다면, 죽음과 허무, 과거라는 공허의 문제는 극복 될 수 있다는 직관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유한한 인생, 죽음과 허무, 영혼들의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종말적인 구원의 미래가 유일한 해답일 것이다. 종말적인 미래는 예수의 사건의 성취점에서 주어지는 시간의 차원이며, 이 성취점에서부터 태초의 시간이 포착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해질 수 있으니, 죽음과 허무는 극복되었다고, 부활이, 인간성과 세계변혁의 미래,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궁극적인 희망이라고 우리는 외칠 수 있어야 하리라.
요새 무엇을 하느냐고 내게 묻는 사람들에게, 삼위일체론에 비추어 시간론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하면,
신학 하는 사람들이나 통일운동권의 사람들이나 다 현실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매 주일마다 교회에서 목회자에 의해 행해지는 삼위일체론적인 축도가 진리라고 시인된다면, 바로 그 축도의 순간이 현재 과거 미래 모든 시간의 근원이라고 시인된다면, 시간이 주어지지 않고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시인된다면, 삼위일체론적 시간이해 없이 새 천년 새 세기라는 미래시간만을 설계하면 된다고 성급하게 생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도 미래시간이 주어지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다. 우리가 미래를 설계하지만 미래시간 자체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가 계속 주어져야 민족사회와 자본주의 세계의 변혁도 설계될 수 있다. 미래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것이 우리의 시간론의 주제이다. 시간의 삼위일체론적 근거는 신학적으로 아직 논해지지 않은 주제이다.
몰트만(J. Moltmann)과 보프(Boff)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인격적인 관계를 그들의 평등사회론의 근거로서 설명하기를 시도했으나, 시간론을 그렇게 다루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은 최초로 조직적인 역사신학(Civitas Dei,「신의 도시」)을 구축했고 또 인간의 하나님형상(Imago Dei)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했고 또 최초로 시간론을 다루었으나, 영원과 시간의 이원론적인 전제 때문에 그는 시간의 삼위일체론적 근거를 간과했다.
바르트의 방대한 삼위일체론적인「교회교의학」의 구조에는 시간의 삼위일체론적 근거가 함축되어 있으나 (예컨대 하나님의 초시간-"Ueberzeitlichkeit"공시간-"Mitzeitlichkeit",후시간-"Nachzeitlichkeit", K.D. Ⅱ/1이라는 개념들이 암시해주듯이), 피조물 인간의 시간의 삼위일체론적 근거가 주제적으로 취급되어 있지 않다.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철학이 영원과 시간, 시간과 역사의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가지는데, 즉 절대정신의 즉자존재(an sich Sein), 세계에로의 자아 객관화로서의 대자존재(für sich Sein), 즉자-대자존재의 통합이라는 역사적 과정은 삼위일체론을 반영하는 시간과 역사의 구조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절대자 혹은 절대정신이 인간의 이성이념과 동일한 것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이 궁극적인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화를 죽도록 비판한, 하나님과 인간 혹은 영원과 시간의 절대적인 구별을 주장한 키에르케고르에게 주목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의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영이 피조물의 모든 시간의 근원임을 주제로 한다.
창조의 시간을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창세기 1,2장의 창조설화들을 우리의 기본 텍스트로 삼고 그 해석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 현대의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1장 설화는 B.C. 6세기경의 문서자료로서 제사문서(Priestly Document)라고,
또 2장 설화는 B.C. 9세기경의 자료(Yahwist 혹은 Jehovist Document 즉 J문서)로 알려져 있는데, 이 두 설화들은 그 시대적인 배경에서 해석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구애를 거의 받지 않고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선 '설화'(Sage 혹은 Sagen)라는 개념의 의미가 밝혀져야 한다.
종교사학파의 한 대표적인 구약학자 궁켈(H. Gunkel)은 그의 대대적인 창세기연구 Genesis에서 주장하기를 창세기 전체가 "설화들의 수집"이라고 하며,
'설화'란 경험과 환상들의 "시적인 서술"(poetische Erzahlung)을 의미하는데, 그는 설화를 원시 신화들과 동일시한다.
물론 창세기의 신화적 설화들 속에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나, 창세기는 대체로 역사라기보다는 설화체로 씌어져있다고 한다. 성서에 대한 19세기 이래의 종교사적 혹은 역사과학적 연구학파에 입각한 해석은 궁켈의 그러한 견해를 대체로 공유한다.
바르트도 창조설화들,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의 부활보도들을 비롯해서 성서의 많은 부분들이 설화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서적 '설화'(Sage)와 '신화'(Mythos)를 구별한다. 양자가 다 시적인 상상적인 서술양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신화는 자연의 반복적인 순환현상들의 신적인 근원을 환상적으로 서술하는 무시간적인 성격을 가지는데 반하여,
성서적 설화는 시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근거한 서술로서 시간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성서적 설화와 신화를 구별해야 할 것 같다. 원시인들이 자연현상들의 신적인 근원을 환상적으로 서사시적으로 서술하는 신화들은 인간의 정신적인 직관력의 투사이며, 따라서 인간자신의 정신을 신격화시키는데 반하여, 성서적 설화들은 창조자 구원자 하나님을 피조물 우주나 인간과 엄격히 구별한다는 사실이며, 창조자 구원자 하나님과 피조물 세계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상상적인 언어로 서술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피조물 자연의 신격화가 아니다.
신화적 소재들과 설화체가 창조설화들에 포함되어 있으나, 이 설화들은 창조의 시간을 제시해주며 창조는 자연현상들의 투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고백되는 구원자 하나님이 바로 태초의 창조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종교사학파 혹은 역사학파에서처럼 창조설화들이 원시 근동의 신화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되는 데에 우리가 머물러있다면, 창조신앙은 물론이고 성서가 증언하는 구원사건이나 계시사건이란 인간의 "자기 객관화", "자기 투사"(L. Feuerbach)로서 인간에게로 환원되어버린 것이며, 창조의 시간의 실재성은 환상 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어떠한 근거에서 창조설화의 기자들은 태초의 창조를 엮을 수가 있었던가?
B.C. 6세기경의 기자이든, B.C. 9세기경의 기자이든, 오늘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태초의 창조, 태초의 시간을 알 수 없다. 우리는 태초의 실제시간(real time)을 소급해 되돌아가서 확정할 수 없다. 창조의 시간은 피조물의 모든 시간을 상정하고서, 횡적으로 과거에로 소급해서 상정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현재에서, 역사에서 우리가 창조자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영원히 그를 인식하지 못한다.
저 창조설화자들은 이스라엘 역사전체의 운명을 결정한 출애굽사건과 그 역사의 구원자 하나님의 현재적 임재에 대한 신앙에 입각해서 태초의 창조의 시간을 상정할 수 있었고 창조이야기들을 엮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영을 통해서 창조하신다는 명제는 이미 그 삼위일체론적인 성격을 암시한다. 우리는 신약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을 고찰하기 이전에 시간의 삼위일체론적 근거를 명시할 수는 없으나,
창세기 1,2장의 창조설화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와 그의 영의 관여가 관찰되므로 그러한 명제가 나올 수 있다.
말씀에 의한 창조는 1장 설화의 전반적인 특징이며,
영은 1:2에서 피조물의 생명의 탄생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나 우주와 생물들의 창조에 관여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2장 설화에서 묘사되는 인간창조에서는 하나님의 숨결에 의해서 인간생명이 탄생하는데, 하나님의 영은 숨결 혹은 바람을 의미한다. 숨결은 하나님의 생명력을, 바람은 그의 역동성을 암시하므로, 그의 영은 우주와 생명창조에 관여한다고 해석 될 수 있다.
그의 말씀도 우주와 생명창조의 능력이지만 특히 1장 설화에 있어서 피조물세계의 사물들의 구별과 질서의 신적 권능으로 나타난다.
말씀과 영이 다 피조물의 운동력과 생명력의, 따라서 운동과 생명의 시간성의 근원으로서 해석될 수 있지만,
영은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을 인간생명 내부에로 불어넣는 능력으로서 피조물 자체의 시간성의 근원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가 '태초에'-?????(be reishith, 버레이쉬트) 일어났다는, 창1:1의 '태초에'라는 말은 창조가 시간 안에서 (in tempore, in time)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2:4의 '그 날에'-????(bejom, 버욤) 천지창조가 이루어 졌다는 '그 날에'는 태초의 날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태초의 날은 하나님이 행동하는 시간이며 피조물의 시간을 앞서가는 또 열어주는 절대적인 시초, 원시간(Urzeit, primal time), 혹은 전시간(Vorzeit, pretime)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4절의 '그 날'-??? (욤)은 모든 날들의 근원으로서 모든 날들을 열어주는 날이며, 하나님의 날이다. 태초와 그 날은 하나님의 시간으로서 우주의 발생과 운동과 더불어 시작하는 우주의 시간이나 생물들의 발생시간의 일부분이 아니라, 이러한 피조물의 시간들의 절대적인 전제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과 영의 시간이며 그의 영원성과 동일하다. 이러한 영원한 "시간 안에서", 태초의 날에 창조가 이루어진다.
태초의 날은 피조물의 모든 시간을 앞서가는 시간이며 동시에 역사와 사회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praesens)이며 피조물의 모든 시간의 종말을 결정하는 종말시(Endzeit 혹은 Nachzeit, endtime)을 지닌다.
구약에 있어서의 '올람'-????(ancient)이라는 말은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고(시25:6; 90:2 등), 태초로부터의(잠 8:23; 사44:7) 창조자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 말은 오랜 역사를 가지는 이방 민족에게도 사용되고 있다(렘 5:15; 겔 26:20).
시25: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올람)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시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올람)부터 영원(올람)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8:23 만세전부터(올람),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44:7 내가 옛날(올람)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지어다
렘5: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올람)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겔26:20 내가 너로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올람)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로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적한 곳에 거하게 할지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올람'의 이러한 시간성은 태초의 원시간이 피조물의 모든 시간을 측정하는, 모든 시간을 열어주는 근원적인 시간성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우리가 그 창조의 원시간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에서 또 내일 주어지리라고 예상되는 시간에서 인지한다면, 창조의 원시간이 모든 시간의 근원이며, 모든 시간의 종말을 결정하는 종말시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 발생과 생명체들에 관한 무시간적인 원시 신화들과는 달리, 창조의 원시간은 우주와 생물들, 역사와 사회의 운동존속 관계의 근본적인 차원인 시간의 근원이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2마카비 7:28에 근거해서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해 왔는데,
창1:2에서 '혼돈과 공허'-???? ???(tohu와 bohu) 또 '암흑'-????(tehom)이라는 원시상태가 묘사되어 있으며,
'無로부터의 창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이러한 원시상태와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에 관한 해석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옛 신학은 '無로부터의 창조'를 견지하기 위해서 저 원시상태를 혼돈스러운 형태 없는 물질(materia informis), 말하자면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이것에서부터 질서 있는 형태 있는 피조물들이 창조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無로부터의 창조'는 창조 이전에 그러한 원시상태가 있었다고 해석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materia informis가 상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교사학파의 궁켈은 그의 책 Schöpfung und Chaos(「창조와 혼돈」)에서 처음으로 히브리시(詩)에 바빌론 창조신화의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 설화가 이스라엘이 바빌론 포로기의 문서자료라는 종교사적인 연구의 전제 아래서 '혼돈과 공허', 원시바다의 범람하는 물과 '암흑'과 같은 원시상태(Urstand)가 바빌론의 신화적 표상의 영향을 반영한다는 것이 대체로 현대의 해석자들의 입장이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 우주탄생에 관한 원시신화들과 창세기의 창조설화들의 동일한 선상에서 신화적으로 해석된다는 데에서 생기는 문제이다.
창1;2의 그러한 원시상태는 실제로 바빌론 신화의 영향을 반영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한 원시상태는 바빌론 신화에서나 1장의 창조설화에서 우주 탄생의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거기서는 그러한 원시상태가 우주 탄생의 소재이며 자연현상의 일부분인데 반하여, 여기서는 전혀 창조의 소재로서 쓰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창조에 대립되는 원시상태가 암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원시)상태가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無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을 한정하는 어떤 이원론적 상황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부정적인 원시상태가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떻게 해석되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바빌론 포로기를 경험한 예언자인 제2이사야는 하나님이 '혼돈'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역설하며(사 45:18),
이사야 34:11에 의하면 땅의 '혼란'과 '혼돈'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상태로서 묘사되어 있으며,
바빌론 포로기 직전의 남 유다 왕국이 직면한 땅의 '황폐화'와 '공허', 빛을 잃은 하늘의 암흑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상태로서 묘사되어 있다(렘 4:23).
궁켈은 창1:2의 원시상태가 이러한 예언서들에서 미래 혹은 종말시로 옮겨졌다고 해석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이러한 실제적인 역사의 상황이 태초에로 투사되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혼돈과 공허', '암흑'과 같은 원시상태는 태초의 창조 시부터 부정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창세기 1장 설화에 더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창조의 원시간이 열어주는 피조물의 시간이 '혼돈과 공허', 혼돈의 심연을 암시하는 공허와 '암흑'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될 수는 없다.
창1:3에서 말해지는 첫 번째의 피조물 '빛'이 '날'이라고 일컬어지며, 이 빛의 날이 우주의 빛과 시간의 원형이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태초의 시간에로 투사된 혼돈, 공허, 암흑은 창조에 의해서 부정된 어떤 것, '無로부터의 창조'에 있어서의 그 '無'(nihil)라는 것과 결부된 어떤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침멀리(W. Zimmerli)와 바르트의 해석을 주목한다.
침멀리에 의하면 1:2에 묘사되어 있는 혼돈과 암흑의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부정된 "아무 것도 아닌 것"(das Nichts, nothing)이라고 규정했는데,
바르트는, 차후에 논하겠지만, 침멀리의 그러한 해석과 '無'(das Nichts) 개념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2마키비 7:28에서 발단한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개념은 창세기 1장설화의 시기보다 훨씬 후기,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의 멸망을 경험한 시기에 속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죄악과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 아래 놓여있는 세계상황의 부정성이 태초에로 투사된 그 부정적인 원시상태의 無라는 상태, nihil에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無로부터의 창조' 에 있어서의 그 無를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無로부터의 창조'는 우선 피조물의 존재 운동 생명의 절대적인 시초를, 따라서 피조물을 한정하는 즉 피조물의 유한성을 의미하는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피조물의 존재, 운동, 생명의 시간적 유한성을 의미한다.
둘째로 피조물의 이러한 유한성이 인간의 역사사회의 범죄들에 의해서 '사망의 권세'로서, 피조물 세계의 파괴력의 기회로서 둔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둔갑해 왔다는 세계상황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에 의해서 떠오르는 '無', 혼돈과 암흑의 심연과 공허가 태초의 창조 시에로 투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無'는 피조물의 존재, 운동, 생명의 시간과 공간의 차원들의 긍정적인 차원이 아니며 부정적인 그늘로서 피조물세계의 등뒤에서 또 미래에서 드리워지고 위협한다.
오늘날 피조물의 유한성을 기화로 해서 작용하는 사망의 권세와 파괴세력이 지구촌에 퍼지고 있으며 우주의 공간을 침투해 들어갈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역사와 사회의 구원의 하나님이 태초의 창조자라는 창조신앙은 그가 피조물 세계를 '無'의 그러한 파괴세력에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존하고 지탱하는 근원이라고 고백하며, 이것이 창조설화들에 담겨있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창 1:3에서부터 개체들로서의 피조물들의 탄생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1:3). 이 빛이 첫 번째의 피조물인데, 빛들을 발하는 하늘궁창(1:15)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그 빛이 만들어졌으며, 그 빛은 '날'이라고 일컬어진다. '날'- ???(욤)은 바로 시간의 한 단위를 의미하며, 그 빛의 날은 태초의 날과 같은 창조자의 시간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빛은 밤이라고 규정되는 어둠으로부터 분리되는 날, 낮의 날(1:4) 즉 빛의 날이며, 피조물들의 하루는 밤과 낮이 교체하는, 밤과 낮을 합해서 정해지는 시간의 단위이다(1:5). 그 '빛'은 순전히 빛으로서의 날이며, 피조물의 하루는 밤이라는 그늘을 포함한다. 이 그늘은 빛에 의해서 규정되지만 그 순전한 빛과는 구별되는, 말하자면 피조물의 시간의 유한성 혹은 '無'의 그림자를 암시하는 것 같다.
잠언 8장에 의하면 '지혜'가 첫 번째의 피조물로서 땅의 창조 이전에 있었다고(22절), 하늘의 창조 때에 이미 그보다 앞서 있었다고(27절),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죽음을 사랑하는 자라고(36절) 말한다.
그 첫 번째의 피조물 '빛'은 그렇다면 '지혜'를 의미하며,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의 빛, 그 말씀의 지혜를 가리키는 형상이며, 피조물 천체들의 운동과 생물들의 시간질서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그 빛의 날은 태초의 날과 같이 피조물의 모든 시간의 신적인 척도임에 틀림없다.
창2:4 하반절에서 시작되는 2장 설화는 1장 설화와는 달리 창조의 시간질서를 명시해 준다. 1장 설화의 6일 창조는 피조물의 시간의 유한한 지속성을 말해준다. 6일 동안의 창조역사(Schöpfungsgeschichte, creation history)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창조역사의 시간성에 대한 해석들이 여기에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 세계가 한 순간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칼빈은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6일 창조의 역사성을 주장한다.
한순간의 창조라는 해석은 피조물의 시간의 지속성을 열어주는 창조역사를 이해할 수 없게 한다. 또 엄청난 창조역사가 한정된 시간 내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고 해서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 continuing creation)가 주장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해석은 제7일의 하나님의 휴식에 의한 피조물의 시간의 한정성을 도외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피조물 세계의 굴레에 얽매이게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 창조역사와 구원사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타락과 범죄가 여기서는 설명될 수 없으며, 구원의 시간이 피조물 자연의 차원에로 환원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6일 창조의 시간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 엄청난 세계창조가 어떻게 6일 동안에 정초 되고 완료되었다는 말인가?
베드로후서 3:8(시 90:4)에서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과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다'고 말해지는데, 이에 근거해서 어거스틴은 6일 창조를 6천년이라고, 피조물 세계의 전 시간이 6천년이라고 해석했다.
궁켈은 하루를 천년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창세기 1장 설화에의 "자의적인 주입"이라고, 하루는 문자 그대로 하루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6일 창조이든 6천년 창조이든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하다.
어거스틴의 6천년이라는 해석은 창조역사가 피조물의 모든 시간을 정초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와 같다'는 말은 우주의 나이가 100-200억 년이라고 추정되든, 태양계의 나이가 50-60억 년이라고 추정되든 피조물의 모든 시간이 그의 창조의 6일에서 정초 되었다는 말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상상적인 시간에로 빠져 들어가 헤맬 것이 아니라 창조의 6일을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서 그 시간성의 의미를 해석해내야 한다.
6일은 제7일 안식일에서 시작하고 이날을 목표로 하는 피조물의 날들 혹은 시간지속의 전형적인 단위이며 공간이다. 천체들이 순환하면서 생물들의 시간을 연장해 주듯이 6일은 순환하고 반복하면서 인간의 생명 역사 사회의 시간을 연장해 주는 공간의 시간이다.
6일 창조는 창조역사의 완료와 한정을, 따라서 피조물의 시간의 한정성 혹은 유한성을 정초하는 표식이다. 피조물의 6일의 시간은 제7일에 의해서 한정되듯이 태초의 원시간과 종말시, 알파와 오메가를 결정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시간이다.
옛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고 하는데, 6일과 제7일의 제도적 결정이 문화사의 과정에서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든, 그 날들은 오늘의 일주일의 원형이다. 그렇게 6일과 제7일이라는 단위를 천체들의 순환운동이 물리적으로 밑받침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새 천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천체들이 우리의 시간의 근원이 아니다. 그것들은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의 형상인 그 '빛', '날', 인간의 삶과 노동시간을 인간 지성에게 전달해 주는 물질적 매체들이다. 시간을 누가 측정하는가? 천체들의 운동에 의거해서 인간의 지성이 측정해 왔다.
이러한 '지혜'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빛'을 받는 천체의 빛들로부터 오지 않겠는가? 6일을 한정하는 제7일은 그 빛의 날, 태초의 날, 마지막 구원의 날과 같이 하나님의 날이다.
6일 창조를 끝내고 하나님이 제7일에 쉬시고 그 날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즉 6일과 구별했다고 창2:2f에서 말해지고 있다.
궁켈에 의하면 하나님의 휴식이란 피곤한 인간의 휴식처럼 너무도 의인론적인 표현(Anthropomorphismus, 擬人論)이라고, 안식일 제정은 유다 왕국의 붕괴와 바빌론 포로기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표식하기 위한 제정이라고, 여러 날들 중에서 한 날이 거룩한 날이라는 생각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는 제7일이 가지는 특수한 시간의 의미가 간과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제7일을 "완전한 날"이라고, "한 피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왜 이러한 날의 시간성을 그의 시간 개념에 포함시키지 않았는가? 포함시켰더라면 그는 그의 무시간적인 영원성 개념을 수정했었을 것이다. 제7일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 날이 하나님의 날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피조물의 6일을 한정할 뿐만 아니라 이 6일이 그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그 날에 휴식했다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그가 피조물 자연에 매어있는 원리가 아니라 피조물 자연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자유를 의미한다. 출애굽기 31:17에 하나님이 6일 창조 후 쉬시고 원기를 되찾았다는 묘사가 있는데, 바르트는 제7일을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회기 하여 새롭게 숨쉬는 ("Aufatmen"하는)날이라고, 그가 피조물과 자신을 표시 하는 날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그 휴식의 날이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관계의 표식인 안식일 계명에 의하면, 그 날에는 식솔들, 남종과 여종, 가축들, 나그네 된 식객들도 휴식하라는 것이다(출 20:8-11). 여기서 안식일 휴식은 해방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제7일 안식일은 안식년의 원형이며, 안식년은 '희년'(Jubilee, 레 25장)의 원형이다. 레위기 25장 희년법에 의하면 빚의 탕감, 노예해방, 이스라엘의 초기 계약사회 형성에서 분깃으로 받은 본래의 땅의 소유권 회복, 땅의 휴식과 해방을 포함하는 사회변혁의 해가 바로 '희년'이다. 이러한 연관에서 보자면 제7일은 구원의 날, 해방의 날이다. 그 날은 6일이라는 피조물의 시간과 역사의 목표이다.
오늘의 천체물리학적인 연구결과들에 관련해서 우주창조와 그 시간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내게 커다란 부담감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신학적인 시간성 개념에 대한 집필을 미루어왔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극히 제한된 지식의 한계 내에서 오늘의 천체물리학이 말하는 우주 발생론과 시간론을 고려하면서 우주창조의 시간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태초의 시간과 이 절대적 시간 안에서(in tempore, in time)의 우주창조 즉 우주발생의 절대적 시초는 천체물리학에 의해서 입증될 수도, 부정될 수도 없을 것이다. 뉴턴이나 라이프니치가 우주와 사물들의 절대적 시간의 시작을 가정한 것은 그들이 어거스틴처럼 창조자 하나님을 전제하고 생각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주의 또 생물들의 절대적인 발생시간의 시초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옛부터 '무한한 시간'(infinite, endless time)이 상정되어 오기도 했는데, '무한한 시간'이란 시간개념 자체에 모순된다. 시간이란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 절대적인 시작과 끝이 사변철학에 의해서나 자연과학에 의해서 입증될 수 없지만,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천체들의 순환운동과 사물들의 반복되는 소멸과 탄생에 비추어서 무한한 시간이 상정되기도 하고, 또 자연세계의 영원한 순환(eternal cicle), 따라서 영원한 자연이 스피노자(Spinoza)와 같은 철학자들과 힌두교에 의해서 상정되기도 한다.
우주와 자연세계의 영원한 순환운동은 물론 시간성을 내포하지만, 여기서 시간이란 영원한 자연의 운동양식 혹은 현상으로서 자연세계의 영원성에로 환원되어 버리는 그림자 혹은 가상(maya, shein)과 같은 것이다.
무한한 시간, 영원한 자연이란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 혹은 '생산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이라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힌두교의 一元論(일원론)적 우주관에도 깊이 내재해 있다.
이에 반하여 태초의 창조, 종말시를 함축하는 태초의 원시간은 우주와 자연사물의 유한성을 규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일원론적 범신론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의 천체물리학이 우주발생의 시초를 입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과학적 우주 발생론이 창조의 시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주의 유한성을 암시해준다는 점에서, 우주의 시간과 공간의 본래적인 동일성 혹은 상호관련성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신학이 우주창조의 시간을 말하면서 물리학이 말하는 우주론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이 두 학문들이 서로 일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열어두고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나는 여기서 오늘의 물리학자 S. 호킹의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Stephan Hawking, The Illustrated, A Brief History of Time, 김동광 역, 까치)가 말하는 우주의 '빅뱅'(big bang) 폭발→팽창설과 4차원 공간 즉 시간성을 가지는 공간 혹은 공간성을 가지는 시간개념을 살펴보면서, 그러한 물리학적 개념이 내가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해 온 역사와 사회의 시간개념, 공간성을 내포하는 시간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저 창조설화들은 전혀 물리학적으로 우주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전혀 물리학적 우주론과 비교될 수는 없으나 두 차원들의 상호접근의 가능성이 간취(看取) 된다. 이러한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가능성으로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으나, 저 창조설화들에서의 우주창조의 의미는 실제적인 우주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호킹의 물리학이 단편적으로나마 여기서 고려된다. 물리학 자체의 폭넓은 고려가 내게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극히 제한적으로 그의 책에 의거한다.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허블(Edwin Hubble, 1889-1953)의 관측에 의한 우주팽창설이 오늘의 천체물리학의 한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다고 하며, 우주의 시간측정의 거점을 제공하게 된 것 같다. 허블망원경을 통한 관측에 의하면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팽창하는 우주는 우주의 '빅뱅'에 의한 폭발과 팽창의 출발점의 시점과 시간을 추정할 수 있는 물리학적 근거들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약 100억 년에서 200억 년 전에 중력에 의한 무한대의 밀도, 무한대의 열기를 가진 우주의 빅뱅, 폭발에 의해서 엄청난 공간에 펼쳐지게 된 수 천억 개의 은하들이, 또 각각의 은하들이 수 천억 개의 은하 군을 거느리는 은하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태양계는 약 50억 년 전에 생겨났다. 물리학자들은 하늘의 어떤 별들의 빛은 태초를 암시하는 시간을 지니고 있다고도 말하는데, 그러한 별들이 실제로 관측된다고 해도 그 별들의 태초의 시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태초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추정된 태초의 별들이 창조의 원시간 안에서(in tempore)의 창조역사를 입증해줄 수 없으니, 태초의 원시간이 태초의 별들의 발생시간을 앞서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발생시초와 시간 혹은 시간성을 말할 수 있는 물리학적 관측이 주목되어야 한다.
1915년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을 수립했는데, 호킹에 의하면 그 일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을 통합해서 오늘의 물리학이 우주와 사물들, 시간과 공간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호킹은 갈릴레오와 뉴턴에게로 소급되는 중력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일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합해서 "양자 중력학"의 방법으로 우주와 사물들, 시간과 공간을 혹은 4차원 공간을 설명한다. 1915년까지도 물리학이 우주는 정지된 '우주 상수'(cosmological constant)라는 정지점을 전제하고 이에 우주론을 맞추어 생각했다고 하는데, 이제 우주의 그러한 정지점은 추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전에 상정되었던 정지된 공간이나 이 공간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되었던 시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상호 관련적으로 물체들 혹은 입자들의 운동과 파장의 관계에서, 이것들과 관측자들의 시공의 관계에서 측정되는 역동적인 차원들로서 즉 4차원으로서 파악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주의 시발점에서 동일한 것으로 파악된다. 물리적 운동에 있어서 시간이 공간에, 공간이 시간에 상호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오늘의 시간과 공간은 동역학적인 양으로 간주된다.
각각의 개별 입자나 행성들은 그것들(시공)이 움직이는 위치나 방법에 따라서 각기 고유한 시간척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의 그러한 역동적인 상호관련성과 상대성은 물체들의 상호관련, 운동과 파장의 상호관계에서 시공이라는 차원들이 생겨나는데, 어떤 절대적인 시공에 의해서 물체들의 상호관계와 운동이 설명될 수 없지만, 과연 그것들의 시공이 근원적으로 그것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물체들과 그것의 시공의 차원들의 근원적인 설명은 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우주의 빅뱅폭발에 의해서 엄청난 은하계가 펼쳐진 그 공간자체, 무한대로 상상되는 광대무변의 공간 자체가 어디로부터 주어졌던가?
그러한 근원적인 공간이 주어졌기에, 우주의 팽창운동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그 공간이 주어졌기에 시공의 근원적인 동일성이 추정될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물리학에서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한 시공은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구별의 관계에서 생겨나지 않겠는가? 어쨌든 물리학이 말하는 역동적인 시공개념이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성, 자유한 관계성을 암시해주는 것처럼 생각된다.
우주의 빅뱅과 팽창에 대한 관측에 의해서 우주의 시간의 시작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정된다면, 神의 개입(창조)을 인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암시된다고 해서, 그러한 빅뱅설에 반대하는 물리학자들은 물질의 '정상 상태 이론'(steady state theory)에 의해서 물질의 끊임없는 생성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호킹은 이러한 반론이 폐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69년 미국의 휠러(John Wheeler)의 관측에 의해서 말해지는 천체의 '검은 공동'(black hole)이론에 관련해서 호킹과 그의 공역자 펜로즈(Roger Penrose)는 1965년-70년 사이에 그 '검은 공동(블랙홀)' 속에서 무한한 밀도와 무한 시공의 곡률을 가지는 '특이점'(singularity)을 입증했다는 것이며,
이 특이점은 시간이 시작된 때의 빅뱅과 유사한 것으로서 중력붕괴에 의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우주의 빅뱅과 검은 공동의 그 특이점은 시간의 출발점, 흐름, 일련의 전개법칙들을 밝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특이점 이론은 "시간의 출발점의 밀도와 시공곡률(時空曲律)이 모두 무한대인 하나의 점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하나의 점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의 모든 법칙은 무너진다"는 것이며, 하나의 입자가 어느 특이점을 지나갈 때에 그 점을 지나가는 가능한 역사와 관련된 파동을 합하여 얻게 되므로, 그 파동의 크기와 위치가 법칙들에 의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측정될 수 있는 "실 시간"보다는 "허 시간"(imaginary time)에 의해서 무한한 과거에로 돌아가 "허 시간에서의 어느 특이점", 여기에서는 모든 과학법칙들이 해당되지 않는 특이점, 시간의 시초가 상정되는 혹은 시공이 하나로서 파악되는 특이점이 입증된다는 것이다.
우주의 상정된 빅뱅과 '검은 공동'에서 관측되는 특이점 혹은 특이점들에 근거해서, 이 특이점들을 부딪히고 지나가면서 그 특이점들을 앞서 부딪히고 지나간 모든 요인들을 흡수해 가지는 그 특이점들에 근거해서 우주발생의 시간의 시작이 상상적인 과거시간에로 소급되어 상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팽창하는 우주가 미래에 중력에 의하여 다시 무한대의 밀도에서 끝나는 특이점(big crunch)의 상태가 상정될 수 있다는 것이며, 우주의 시작과 끝은 동일하며 동일한 시공이 상정되고 있다. 그 끝의 특이점에서 우주가 다시 시작할 것인가? "신은 그 특이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호킹이 물리학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논증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호킹이 그리스도교적 맥락에 호응해서 그렇게 창조자의 자유한 선택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는 현재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관측되는 특이점들에 입각해서 우주의 빅뱅과 팽창의 까마득한 과거의 시초를 암시해 주는 특이점과 마찬가지로 까마득한 미래의 끝 시간의 특이점, 시작과 끝의 동일한 특이점을 상정할 뿐이다.
지금까지의 과학법칙 이론들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관측되는 특이점들, 모든 시공의 차원들을 지니고 있다고 상정된 특이점들에 입각해서 시초와 끝의 특이점, 무한도의 밀도와 중력에 의해서 처음에 빅뱅과 팽창운동을 시작했던, 다시 끝 시간의 특이점에서부터 우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호킹은 神의 선택의 행위를 상상적으로 말하는 것뿐이다.
저 창조설화들도 형식적으로 보자면 물체들에 대한 이러한 물리적 설명과 상상이 유사하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적 현재에서 미래의 구원을 성취시킬 구원자 하나님이 까마득한 과거시간의 시초에서의 창조자이라고 고백하는 창조신앙이, 그의 창조역사와 날들을 신화적 역사적 소재들을 동원하여 엮는 창조설화들이 그 종말시를 함축하고 있는 그 창조의 원시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호킹의 물리학이나 이 창조설화들이 태초의 시간과 종말시에서의 하나님의 자유한 행위를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의 시간의 시초와 종말이 물리학에서나 또 창조설화들에서 상상적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양자는 유사하다. 그런데 물체들의 시간의 시초가 물리학적으로 언젠가는 더 확실하게 입증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이 창조자 하나님의 원시간, 하나님의 시간성과 공간성이 물리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창조자·구원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현실적 관계의 현재에서 시인될 수 있는 것이며,
물리학자는 성서적 창조신앙에 비추어서 물리학적인 시간 혹은 시공의 신적인 근원을 시인할 수 있으며, 신학자는 물리학적인 연구결과들을 창조신앙에 비추어서 해석할 수 있으나, 이러한 해석의 시도는 시간의 과정에 있어서 잠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래의 새로운 관계와 해석에로 열려져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리학과 신학의 대화가 아직까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또 물리학도 신학도 시간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호킹이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으나 암시적으로 말하는 "무경계"(no boundary)의 시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관측되는 천체의 '검은 공동' 안에서의 수많은 특이점들에 의하여 호킹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특이점이나 경계 없는 유한한 4차원... 공간을 형성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언젠가 바티칸의 카톨릭 회의에 참석한 호킹은 "어쩌면 시간과 공간이..., 크기에서는 유한하지만 아무런 경계나 가장 자리도 가지지 않은 곡면(曲面) (4차원)을 형성하고 있을 지 모른다고 주장"을 했다고, "경계를 가지지 않으면서 유한할 것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고 한다. "크기에서는 유한하다"는 말은, 추측컨대 시작과 끝의 특이점의 실제적 공간과 그것의 운동의 실제적 시간 즉 팽창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말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 특이점들의 관측에 의해서 우주의 시초와 끝이 상정될 수 있다. 그러나 호킹에 있어서 중력에 의한 무한대의, 처음의 우주 자체 혹은 특이점은 "경계가 없는", 그러면서도 "유한한" 4차원, 즉 시공의 차원으로서 생각되고 있다. 우주와 그 시공이 경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무한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주의 사물들의 실제적인, 물리적으로 측정되는 시공은 이것들의 관계와 운동의 차원들로서 유한하다. 그러나 우주 자체의 시작과 끝을 상정할 때에 그것이 지니는 시공의 차원은 무경계, 따라서 무한하다고 상정되고 있다. 우주의 사물들의 존재와 관계의 차원으로서의 공간과 이것들의 관계를 발생시키는 운동의 차원으로서 시간은 유한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자체와 그 시공의 차원은 시초와 끝에 있어서 무경계라고 상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허블의 망원경을 통해서 우주와 그 시공의 경계가 관측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근원을 묻는 종교들이나 사상은 옛부터 우주의 무한한 순환(eternal cicle), 무한한 시간(endless time)을 상정해 왔다.
호킹의 "무경계"의 우주와 시공 개념도 그러한 순환의 방향에서는 원용될 수 있다. 또 그 무경계는 욕정과 번뇌, 탐욕과 지배욕, 권력과 착취가 판치는 역사, 사회, 세계의 사슬을 넘어서서, 생과 사의 무한한 굴레로서의 시간을 넘어서서, 참된 초월과 자유한, 영원한 존재가 실현되는 어떤 무(無)의 차원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無에로의 초월이 가능한가? 無라는 '공허'가 과연 존재의 차원인가? 아니다. 그 무경계의 무(無), 공허는 존재의 공간이 아니며, 존재와 시간의 부정이다. 우주와 시공의 유(有)를 부정하는 그 무경계의 無는 존재와 시간의 차원이 아니다. 그 無의 공허가 초월적 존재의 차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시공 안에서의 우주와 생명이 존속하기 때문이다.
유(有)는 무(無), 무(無)는 유(有)라는 도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화엄교의 양극의 동일화도, 주어지는 시공과 우주 안에서 가능한 논리이며 무의 공허에서 즉 창조의 시간 이전에서 성립하는 논리가 아니다. 그러한 논리는 사고의 한계를 넓히고 한정된 개체 사물들의 구별들을 넘어서는 자유를 의미하나, 생과 사의 존재의 궁극적인 유와 무를 종합하고 초월할 수 없다. 유와 무를 종합할 수 있다면 우리가 생사(生死)를, 우주의 존재와 종말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가?
'無로부터의 창조'는 우주의 시공의 무경계를 눈앞에 떠오르게 한다.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자면, 우주가 無의 공허에 걸려있는 것처럼 상상된다. 중력에 의해서 우주가 하나의 엄청난 그물 망과 같은 끈으로 이어져 움직이고 존속한다고 해도, 어떻게 우주가 공허에 걸려 있을 수 있는가? 無의 공허가 우주의 그러한 운동과 존속의 시공의 근원인가? 아니다. '無로부터의 창조'의 그 無는 피조물 우주의 유한성의 표식, 즉 부정성의 표식이며, 창조자 하나님이 우주와 시공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호킹이 말하는 우주의 시공의, 저 "무경계"는 바로 피조성의 표식으로서, 즉 우주의 한계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 무경계의 無가 인간이 그리로 초월할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의 차원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 무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별에 의해서 떠오르는 부정성의 심연, 거리이며, 동시에 이 구별에서 피조물 우주의 공간이, 공간과 더불어 존속의 시간이 주어진다.
호킹이 말하는 시공의 "무경계"라는 개념은 시공의 "유한성"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피조물의 시공이 창조자로부터 주어지고 그에 의해서 한정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는 우주의 시공이 무경계로 보일 것이다.
우리의 고찰은 창조설화들에 입각해서 인간생명의 창조와 시간성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나, 생물들에 관한 진화론적 보도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배척했으며, 지금도 진화론의 의의를 대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창조설화들에서 묘사되는 바 생물들과 인간창조는 진화론에 의해서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없는 의미를 가지지만, 진화론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
또 모든 생물들의 생명의 근원이 창조자 하나님이라는 창조설화들의 신앙이 마치 생물학적인 '창조론'이 주장하듯이 태초의 생명창조가 생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생물과학의 연구결과들이 생명의 근원과 시간성을 고찰함에 있어서 소재들로서 고려될 수 있다.
다만 나의 생물학적 지식의 한계 때문에 그 연구결과들이 여기서 충분히 고려될 수 없으나, 생물들의 존속의 시간들이 인간생명의 시간성 역사성 사회성을 고려함에 있어서 많은 암시점들을 제공해 준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의 생명 역사 사회가 모든 생물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생명의 창조와 시간성을 고찰할 수밖에 없다. 모든 생물들의 시간들이 인간생명의 출현과 시간성 속에 함축되어 있음에 틀림없으나, 우리는 그러한 생물들 일반의 시간들의 의미를 충분히 고찰할 수 없으나 대략 그 시간들의 길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우선 설정한다.
생명체들의 시간들에 대한 추정들이 오늘의 천체물리학이 추정하는 우주의 약 100-200억 년이라는 시간과 합일하지 않지만, 어쨌든 들어보자면, 종(種)들의 진화에 의하면 개미는 100억 년 전에, 흰개미는 300억 년 전에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으며, 중국에는 500억 년이나 된 유기체들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태양계가 약 50억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물리학에서 추정되는데, 저 생물체들이 태양계보다 먼저 나타났다는 추정이 과학적인 것이라고 생각될 수는 없으나 그러한 미물들의 생명의 존속이 놀랍게 여겨진다.
또 다른 보도에 의하면 생명역사의 6분의 5가 동물형태였으며, 모든 생물들은 단일한 기원을 가지는 후손들이라고 하며, 여러 번의 대량멸종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350만 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생물들이 동일한 생물체로부터 유래했다면, 인간생명은 수 억 년의 모든 동식물들의 유전자들과 시간들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생명의 분자들, 세포들, 유전자들이 결합하고 분화하고 재결합하는 오랜 생성과정에서 유기체들이 고차원적인 지성을 가진 인간 생명체가 대두하게 되었을 것이다.
생명의 그러한 생성과정이 진화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겠으나, 자유한 주체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와 우주와 생명의 근원을 묻는 인간,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며 자신의 유한성을 개탄하는 인간, 자신의 목표실현을 위하여 시간의 경륜을 설계하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자유한 인간, 나와 너의 사회관계를 건설하고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고 미래의 변혁을 시도하는 인간존재와 지성이 생명분자들, 세포들, 유전자들의 결합 분화 재결합에 의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규정될 수 있을까? 진화론이나 생물학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특유한 유기체적인 생물들과 특히 고차원의 지성과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인간생명의 출현이 규정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 같다.
어쨌든 생명의 6분의 5가 동물형태였다면, 이것들이 인간존재와 생명의 근원인가? 이것들의 화석들과 그 유전인자들의 분석을 통해서 생명의 과거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간다면 모든 생명의 근원이, 인간존재의 생명의 근원이 발견될 수 있을까?
아니다. 모든 생명의 분자들, 생명인자들과 유전인자들이 인간생명의 출현에 작용했고, 인간생명에 들어 있음에 틀림없으나, 그러한 생명체의 진화의 시간적 기원이 어느 정도 추정된다고 해도, 그러한 기원이 인간존재와 생명의 근원이라고, 인간의 자유와 지성의 근원이라고 여겨질 수 없다.
이승의 동물들과 인간들, 인간대 인간의 사회관계의 인연들의 연줄을 찾아 우리가 전생의 시간들 속으로 들어가 헤매인들, 그 인연들의 의미와 시간의 근원이 발견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전생을 상정한다는 것은 생명의 끝없는 윤회를 상정할 수밖에 없으나, 그러한 윤회는 괴롭고 무의미하다. 나도 어릴 적부터 이승의 인연들을 전생에로, 전생의 전생에로 이으려고 헤매다가 궤도를 잃고 내 상상을 포기해버린 적이 있으며, 지금도 나는 가끔 전생의 인연들을 상상해보곤 하며, 인간의 범죄와 실수로 못다 살고 죽어간 어린 생명들의 왕생(往生)을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나 자신은 무지와 무명, 착오와 방황의 삶을 다시 태어나 반복하지 않으련다. 현재의 인간생명이 그렇게도 오랜 연륜과 인연들을 지니고 있으니, 우리의 의식은 전생에로, 전생의 전생에로 그 인연들을 소급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커다란 공허, 사라져버린 시간들의 공허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인간생명의 시간적 근원과 의미는 그의 전생에서 해답되지 않는다. 생명의 윤회는 숙명론의 수레바퀴를 의미할 뿐이며, 역사의 시간의 의미를 변혁시킬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그 수레바퀴에 갇혀있을 수 없다.
우리 주제의 본문인 저 창조설화들은 천체물리학이나 진화론 혹은 생물학이 말해 줄 수 없는, 우주와 생물들의 근원과 시간을 말해준다. 그러나 성서적 창조신앙과 물리학이 무관하다고, 양립불가능 하다고 규정될 수 없듯이, 창조신앙과 진화론 혹은 생물학이 양립불가능 하다고 규정될 수 없다.
창조설화들의 서술양식은 우주발생과 운동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양식이나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설명양식과 다르다. 물론 저 창조 설화자들은 물리학이나 진화론적 생물학을 알리 없었다. 물리학이 우주의 발생과 팽창의 시간 과정을, 생물학이 생명의 진화과정을 어떻게 설명하든, 창조설화들은 그러한 설명양식들과는 다르게 우주와 생명의, 특히 인간생명과 존재의 근원과 시간성을 창조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해 준다. 그 설화들에서 묘사되는 인간존재는 B.C 6세기경 혹은 9세기경의 인간이며, 그의 육체적 형태와 지성, 열국들과의 관계에서의 정의에 대한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오늘의 우리와 같다.
이러한 인간이 진화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대두했든, 이러한 인간의 근원이 묘사되고 있다. 미생물들과 동물들이 인간의 생명의 조상들이라고 해도, 창조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삭감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존재의 생명을 탄생시키고 발전시키게 한 모든 동식물들과 시간을 연장시켜 준 우주의 순환운동은 창조자의 은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우주발생의 시초와 끝을 추리하는 지성, 생명의 분자들 세포들 유전인자들의 결합 분화 재결합에 의한 유기체들의 출현을 추리하는 지성, 우주와 생물들의 근원과 궁극적인 미래를 말하는 저 창조설화들의 지성은 도대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
천체들의 '빛'을 받으면서, 생명들의 유전인자들을 이어받으면서 출현하지 않았겠는가? 칸트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인간의 자유한 이성의 도덕적 명령의 소리를 들으면서 경탄하곤 했으며, 옛 현자,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찾아갔으며, 점성가들은 별들을 보고 시대의 징조를 알아냈다고 전해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빛들이, 인간의 지성이 창조의 역사(Schöfungsgeschichte)를 입증해주지 못한다. 창조자의 말씀을 역사의 현재에서 인간이 들을 때에, 그의 영이 인간의 귀를 열어줄 때에 그는 태초의 창조, 빛의 창조를 서술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설화에서는 땅의 동물들과 인간이 창조의 마지막 날인 제 6일에 창조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의 생명이 동일한 시간에 출현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창조에 집중해서 그 특수성과 시간성의 의미를 고찰한다. 2장 설화에서는 천지창조가 간략하게 전제된 다음 인간창조가 역시 특유하게 부각되어 있다.
1:26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와의 유사성에 따라 만들자 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우리'라는 복수형 대명사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대한 해석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한다. 옛 주석자들은 하나님의 '우리'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성령을 지칭하는 인격적 대명사로서 해석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을 곧장 여기에다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또 다른 해석은 그 '우리'는 '복수형 존엄성'(pluralis majestat)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옛 페르시아 통치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관습과 연관되어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 해석은 '엘로힘'(Elohim)이라는 1장 설화의 특징적인 복수형 하나님 명칭에 근거해서 저 '우리'를 해석하는데, 이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 다른 신적 존재들, 말하자면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의 "회의"를 암시하는 것으로 신화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다.
그런데 1장 설화(P문서)와는 다른 문서자료, 즉 2장 설화(J문서)에 속하는 3:22의 타락설화 맥락에서, 또 11:7의 바벨탑 설화에서 또 이사야 6:8등등의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복수형 대명사들이 사용되고 있다.
즉 '야흐웨' 하나님의 명칭과 관련된 '우리'는 1장 설화의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복수형 이름에 입각해서 해석될 수 없다. 딜만(A. Dillmann)은 '엘로힘' 복수명칭에 관계된다고 보여지는 '우리'가 "하늘의 회의"를 암시한다는 해석을 거부하고 이렇게 해석한다.
즉 그 '우리'는 "능력들과 권능들의 충만함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총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인 해석은 성서본문에 부적합하다고 일반적으로 비판되고 있다. 그 '우리'가 "하늘의 회의"를 가리킨다는 현대의 해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창조를 설명할 수 없고, 마치 인간이 하나님과 천상에 있는 다른 신적 존재들과의 합작품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가능성을 초래하고, 이러한 신화적인 해석은 구약의 창조신앙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본회퍼(D. Bonhoeffer)와 바르트의 해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바르트는 1:26에서의 하나님의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관계성으로 해석하는데, 관계성 개념이 본회퍼의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본회퍼는 '남자와 여자'로서 창조된 인간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인식의 유비(analagia)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유비"는 카톨릭적인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 개념을 대치시킨다.
바르트는 그 "관계의 유비"개념을 포착해서 저 신적인 '우리'를 해석하는 데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자신 안에서의 관계성,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특유하게 해석해 낸다. 저 '우리'는 하나님의 자유한 자아구별, 즉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구별하는 자아구별과 자신을 자신에게 관계시키는, "자유한 구별과 관계"(freie Unterscheidung und Beziehung), 하나님자신 내의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1:26f.에서 말해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하나님의 그 자아구별과 관계의 형상으로서 해석되고 있다.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과의 관계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자신의 그러한 자유한 자아구별과 관계에서 유래한다.
우리는 본회퍼와 바르트의 그러한 관계개념을 포착해서, 이들과는 달리 우리의 시간과 공간개념으로써 해석해나갈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구별과 관계에서 피조물의 존재의 공간이 주어지며, 그 관계가 바로 피조물의 시간을 열어준다. 시공이 본래 하나이며, 하나로서 두 차원들, 즉 피조물의 존재와 존속의 두 차원들이다. 저 태초의 날과 6일 창조 후의 제7일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별과 동시에 관계설정의 시초를 내포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인간과 인간의 자유한 관계에서 이들의 삶의 공간과 시간이 주어진다. 우주의 시공도 천체들, 물체들의 상호관계와 운동의 차원이 아닌가?
이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해석문제들을 검토하면서 시공의 의미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교부 암브로시우(Ambrose)는 인간의 하나님형상을 혼이라고 생각했으며, 어거스틴도 정신 혹은 혼으로서, 기억(memoria) 지성(intellectus), 의지의 차원인 사랑(amor)의 차원들을 가진 "합리적인 혼"으로서 해석했는데, 이러한 차원들은 다름아니라 삼위일체론에 관계해서 해석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의미한다.
인간의 하나님형상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동등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본성에 있어서 그에게 가깝다는 것이며, "합리적 혼의 불멸성"(immortality of the rational Soul)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그러한 정신개념은 희랍철학의 영향을 반영하는데,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정신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해석은 성서본문에 적합하지 않다.
닛사의 그레고리(Nyssa의 Gregory)나 크리소스톰(Chrisostom)과 같은 교부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1:26, 28에서 말해지는, 땅과 땅의 생물들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땅과 땅의 생물들에 대한 인간의 주재권이 하나님의 자유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는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인간대 인간의 관계를 말해주는 하나님 형상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비추어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온전성, 순결성, 의로움, 거룩성과 같은 인간의 윤리적 차원으로 해석했는데,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인"(justificatio)과 하나님의 영을 통한 "성화"(sanctificatio)에 의해서 인간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의"와 "거룩함"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며, 다시 말하자면 온전한 "지성"과 "올바름"의 합리적 정신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그리스도론에 입각해서 그렇게 확대해석 될 수는 있으나 그러한 해석은 성서본문의 맥락에 적합하지는 않다.
궁켈은 창세기 1장 설화의 계속인 5:3에서 아담의 아들 셋이 그의 아버지의 형상이라 말해진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인간의 하나님형상이 아버지와 아들의 유사성과 같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성서본문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신적 의미를 전혀 말해주지 않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말해지는 하나님 형상이 아담과 부자 셋 관계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헤겔은 그의 종교철학(Philosolohie der Religion)에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인간의 참된 영원한 존재의 차원으로서 해석했으며,
비더만(A.E. Biedermann)은 하나님형상이 신적인 절대적 삶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의 영적인 삶이라고 규정했으며,
트뢸취(E. Troeltsch)는 하나님 형상이 하나님과의 인간영혼의 유사성으로서 "완성을 향해 달리는 동경이며 따라서 역사적 발전의 원리"라고 주장했다.
헤겔, 비더만, 트뢸취의 해석들은 관념론적인 존재론과 관념론적인 역사발전의 원리를 말하는데, 과연 인간의 이성 혹은 지성 그 자체가 창조자와 인간의 관계로서의 하나님형상, 인간대 인간의 관계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형상을 입증해줄 수 있겠는가?
저 1장 설화는 전혀 그러한 관념론적 전제에서 이해될 수 없다. 앞에서 살펴 본 고대의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도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하나님과의 인간의 관계에서 해석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주로 정신의 차원에서 해석하며, 남자와 여자, 인간대 인간의 관계성의 의미를 간과했던 것이다. 하나님형상은 그러한 정신차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해석 될 수는 있으나, 우선적으로 관계성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자유한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되는 인간의 자유, 그 앞에서의 인간의 자유에서 성립되며,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서 성립한다. 이러한 관계는 남자와 여자, 인간대 인간의 관계의 원형이다. 자유와 의와 사랑이 없이는 그러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가 바로 인간사회의 원형, 하나님형상이 아니겠는가?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에서 공간이 주어지듯이, 인간의 사회공간이 출현한다. 이러한 관계의 시공이 바로 창조역사에서 열려진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인간의 사회관계의 원초적인 형상이다.
이제 우리는 창2:7,22 즉 2장 설화에서 묘사되는 인간창조, 에덴정원,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의 복종관계를 고려하고 근원적인 시공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2장 설화는 천지창조를 총괄적으로 언급한 다음 곧 인간창조와 에덴정원 이야기에 집중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지만, 땅이 황폐하고 나무도 풀도 자라지 못하고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는데 그가 비를 내려주고(2:5,6) 땅의 먼지로부터 인간을 만들고, 그의 코에 숨결을 불어넣으니, 땅의 인간 '아담'이 '생물', '살아있는 혼' 네페쉬(??? nephesh)로 되었다는 것이다(2:7).
여기서 황폐한 땅의 상태는 1:2에서의 '혼돈과 공허'의 상태에 비교될 수 있다. '아담'은 우선 땅을 갈고 나무와 풀을 가꾸어야 하는 신적인 뜻을 지니고 창조되었으며,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받은 특수한 피조물이다. 여기서 신적인 숨결은 하나님의 영(??? ruah)를 가리킨다.
'루아흐'는 구약에서 여러 의미들을 가지지만, 기본적인 의미로서 '숨결' 혹은 '바람'을 의미한다. 영의 숨결은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력, 피조물 인간의 '네페쉬'와는 구별된다. 그의 영에 의해서 인간의 코에 불어진 생명은 '생명의 바람'(LXX에서는 ???? ????로 번역됨), 인간의 '몸의 혼'(anima)으로서 땅의 먼지로부터 생겨난 인간의 몸이 그 영에 직결되는, 따라서 '영혼'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인간의 네페쉬의 근원이다.
어거스틴은 '네페쉬'를 인간의 영적인 차원으로서의 "합리적 혼"(rational soul)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1장 설화에서의 인간의 하나님형상에 대한 해석과 동일하다. 국제성서주석 창세기 (「I.C.C., Genesis」)에 의하면 대체로 해석들이 '네페쉬'를 인간의 "전적인 인격성", 육체와의 연합을 통한 "삶의 원리"등 정신적 차원으로서 생각한다. 그러나 '네페쉬'가 한편 그러한 정신적인 차원으로서 해석될 수 있으나, 인간의 생명과 존재의 관계성, 자체내적 관계, 땅과 우주자연, 다른 생물들과의 관계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 존재의 관계성이 바로 시공의 차원들이다.
바르트의 '네페쉬' 해석이 우리의 주제에 가깝기 때문에, 그의 해석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아담의 '네페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격적인, 특수한 숨결에 의해서 땅에서부터 "불러 일으켜진, 정초된, 보존된 혼"(이스라엘의 구원사적인 해석임), 다른 피조물로부터 구별되고 고양된 특수한 탁월성을 가지는 혼이다.
이러한 탁월성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이며, 인간자신은 땅으로부터 창조된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땅에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한,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영 자체와 구별되는 피조물이다.
그러한 인간창조는 두 가지 목표들을 담지 하는데, 즉 인간은 실로 메말라 있고 결실 없는 죽은 땅에 하나님이 심은 초목들을 심고 가꾸는 "땅의 경작자(Bauer)와 정원사(Gärtner)로서 종사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전 피조물의 희망", "생명의 약속", 땅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봉사와 노동을 위임받은 자의 존재"이며, 그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책임"을 지닌다.
이와 같이 바르트는 인간창조의 의의를 이스라엘의 구원사의 맥락에서부터 해석한다. 바르트가 이 구원사의 맥락에서 인간창조의 목표를 하나님과의 계약 상대자로서 또 전 피조물을 위한 봉사자로서 해석하는 그 관계성을 우리의 시간이라는 주제 아래서 우리는 피조물 일반의 의미에서 해명해야 한다.
아담창조는 그의 반려자 이브창조와 비교, 고려되어야 하므로, 우리는 인간생명과 존재의 관계성을 더 고찰하기 전에 이브창조를 생각해 본다.
창2:21f.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이브를 탄생시킨다. 이러한 묘사는 이브가 땅의 먼지로부터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나왔으니, 남자에게 소속되는 열등한 피조물이라든지, 남자보다 나중에 창조되었으니 서열상 저급하다든지 하는 해석은 부당하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 보다 나중에 창조되었다는 것이 인간의 열등성. 예속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피조물의 목표라는 의미를 지니듯이 여자는 남자의 반려자이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됨의 목표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남자는 여자창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자가 독자적인 피조물임을 말해준다. 남자의 갈비뼈에서부터 여자가 나왔다는 것은 이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지 여자의 열등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담이 이브를 만나자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환호한다는 묘사(2:23)는 오히려 여자가 남자됨의 성취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원초적인 관계가 바로 사회관계의 공간성이며 역사의 시초를 열어주는 시간성이다. 둘이 다 땅의 먼지로부터 생겨나서 하나님의 영의 숨결을 (불어넣어) 받은 '네페쉬'이다.
인간생명의 존재자체가 내적 관계성에서 성립한다.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받은 인간의 숨결은 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우주의 공기를 호흡하면서 생물체로 되는 즉, 우주와의 관계에서 존립한다.
이에서 인간에게 우주공간과 시간이 주어진다. 인간의 숨결은 몸과 혼의 통일성에 따라서 생명을 존속시킨다. 숨을 쉬면서 몸의 혼으로서의 '나'라는 혼의 주체, 즉 나의 몸에 대한 관계에서의 주체 또 인간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주체가 성립된다.
이 '나'라는 주체 안에 의미 내적인 공간이, 또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사회적 공간이, 또 우주와의 관계에서의 자연공간이 주어진다. 이러한 피조물 공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태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이 피조물을 자신으로부터 구별하는 시간적 표식으로서의 제7일에 의해서 주어지는 공간이다. 인간의 호흡하는 생명의 존속 그 자체가 공간성을 지니는 시간에서 가능하며, 사회와 역사를 만드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의 영은 피조물 생명, 역사, 사회의 시간성의 근원이다. 인간의 생명, 역사, 사회는 우주와 다른 생물들의 시간성의 운명과 의미를 담지 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창2:8∼17에서 묘사되는 에덴정원, 거기에 심어진 지혜의 나무, 인간에게 금지된 그 나무의 열매와 관련해서 복종이냐 불복종이냐 하는 선택의 계기를 열어주는 에덴정원의 의미를 검토해본다.
다음 타락, 범죄, 시간상실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에 에덴정원의 의미가 다시 고려되어야 하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다루기로 한다. '에덴'이라는 어의는 '기쁨'(Wonne, delight)을 의미한다고 한다. '에덴'은 한 구체적인 장소로서, 강이 흐르는 동쪽의 어느 특정한 장소로서 묘사되기 때문에, 옛 해석자들은 그 지점을 확인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지점은 확인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은 하나님이 자유로 임재 하는 공간, 그의 영원한 생명나무가 심어져있는 공간, 즉 하나님 자신의 현존의 공간이다. 1장 설화에서의 제7일이 그의 휴식의 날이듯이 (에덴은) 피조물 인간의 공간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이 피조물, 땅의 공간 가운데 세워졌다는 것은 피조물, 세계의 공간의 신적 근원,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공간의 신적 근원을 표식 하는 것 같다.
시공은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 정원의 지점이 확인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불복종과 타락에 의하여 그가 거기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에덴'에의 인간의 접근은 구원의 미래목표이며, 태초의 에덴은 종말시의 목표이라는 시간성을 가진다. 이러한 미래표상에서부터 '에덴'이 태초에로 투사되었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현재와 미래표상 없이 '에덴'이 과거에로 한없이 소급되어 투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흘러간 과거시간의 어느 '황금시기'(golden age)를 상정하거나 과거 어느 시대, 말하자면 복희(伏?)·신농(神農)의 시기를 이상화시켜서 역사의 어떤 패러다임과 같은 시대를 상정한다 해도, 그러한 과거가 세계의 현재와 미래의 시공을 열어준다고 해석 될 수는 없다. 역사에서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에 일어난다고 인식될 때에, 이 시점에서부터 시간의 근원이 물어질 수 있으며, 이스라엘은 구원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가 태초에 임재한 '에덴'을 투사했던 것이다.
인간은 에덴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들을 따먹어도 된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허락의 은혜아래 세워진다. 그러나 그는 선악을 아는 지혜의 나무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 아래 세워진다(2:17). '선악의 나무'에 대한 고찰은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지만, 이 명령은 우선 인간을 복종이냐 불복종이냐, 즉 선이냐 악이냐 하는 선택의 결단 앞에 세운다. 즉 그 명령은 인간의 자유를 일깨워주는 태초의 명령이다. 자유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인간은 자유하고 의롭고 선하라는 첫 계명 아래 선다. 그 명령에의 복종이 자유와 의와 선이며, 불복종이 악인 동시에 죽음을 가져오는 악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인간과 인간의, 인간사회와 우주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자유와 의와 선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그 태초의 계명 안에 포함되어 있다. 자유와 의와 선을 아는 지혜가 인간에게 금지된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불복종의 계기로, 악을 행하는 계기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그러한 지혜를 어떻게 습득하는가? 천체의 빛들과 순환운동을 통해서 역사의 시간을 측정하면서,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시간과정에서 우주와 생물들에 관한 지식이 습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와 역사의 불의 속에서 자유와 의와 선, 혹은 사랑의 명령이 들려지게 되었으며,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듣게 된다. 첫 번째의 피조물 '빛'이 '날'을 의미한다는 것은 시간의 지혜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 '빛'은 창조자의 말씀의 지혜이며, 인간의 '네페쉬', 창조자의 영의 숨결을 받은 영혼은 그 우주적 '빛'에 상응하는 인간존재 내의 빛으로서 주어져 있다. 숨쉬는 혼의 시간성은 그 우주적 빛에 상응하며 우주로부터 주어지는 시간에 의해서 존속성을 가지나 유한하다. 시간성은 유한성을 의미한다.
새 천년이 주어진다면, 인간들의 지혜는 이 새 천년을 어떠한 시간으로 만들 것인가, 죄악의 씨를 우주공간에로 퍼뜨릴 것인가, 유전공학으로 생명을 어떻게 조작해낼 것인가, 사람들은 지구와 물과 공기를 또 얼마나 오염시킬 것인가? 걱정스럽다. (천민)자본주의 세계는 세계도처에서 가난한 민중을 얼마나 더 산출해 낼 것인가? 새 천년에 자유와 의와 선이 지배하는 새 민족 새 사회 새 세계 창출을 위하여 민중들이 변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새 천년은 우리에게 이러한 물음들을 던져준다.
http://www.theology.or.kr/mal/special.html
창조와 구원의 시간(3)
창조와 구원의 시간(4)-1
창조와 구원의 시간(5)
창조와 구원의 시간(6)
첫댓글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발견했습니다. 1회 정독한 결과, 시간성을 통한 창조와 구원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현재 토론중인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서 소개합니다. 특히, <<시간의 현재에서, 역사에서 우리가 창조자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영원히 그를 인식하지 못한다. >>라는 말이 가슴이 와 닿습니다. 또한 창조설화들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그나저나 글을 이렇게 올려도 괜찮은지 모르겠네요..박순경박사님에 대해서 혹시 아시는 분 계십니까?
재밌는 글이군요. 그런데, 삼위일체론적 시간론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답하는 것 같습니까? 질문만 제기하고 답은 오리무중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혹시, 뒷부분이 남아있는 것인지....궁금합니다.
계속된 글이 있을것 같아 찾아서 끝부분에 제목과 싸이트만 올립니다. 3번은 텍스트가 읽혀지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미지 캡쳐 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 참고하십시요..^^
서론에서 어거스틴과 바르트의 시간관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삼위일체론적 시간관을 간과했다고 지적했는데 저도 홀리님의 지적처럼 이 글에서 삼위일체론적 시간관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거스틴과 바르트의 시간관을 저자가 너무 간단하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 제3권 2부 47절에서 인간본질을 시간성에서 규정하면서 시간과 영원에 관한 신학적 통찰을 집중적으로 표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시간론이 어거스틴의 시간과 영원론에 영향을 받고 그것을 계승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죠. 저도 하나로님의 관점에서 시간을 생각해보려고 이 두사람의 시간관을 찾아
보았는데 영원과 시간이라는 신학적 인사이트는 받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하나로님이 연구하시는 과학적인 측면에서 창1장의 해답을 주는 쪽으로는 힌트를 못얻었습니다. 저보다 영감이 뛰어나신 하나로님이 위에 올려놓으신 글에서 힌트를 얻어 발전시켜 나갈 논의가 정말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제가 몰랐던 부분이 님의 생각을 통해 열려지는 기쁨을 기다립니다.
그렇군요..저는 어거스틴이나 바르트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좀더 배워야 겠습니다. 기대하신다니..학생이 된 기분입니다 ^^ .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제가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단순하게 말하는 지구의 나이 6천년과 지금의 과학이 말하는 지구의 나이 45억년의 차이를 신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좁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 6천년을 믿고 있거든요...
별말씀을요..차이를 좁히는 문제는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사이 시간이 너무 없어서요..헌데, 제가 당면한 문제를 좀 정리하고자 합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것인데요..제 나름대로 뜻하는 바가 있어서, 최근에 이 부분을 다시 고민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삼위일체를 배우기 위해 어떤 것을 기준삼아 공부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현재 제가 보고 있는 책은 이종성-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삼위일체론 이고 , 조나단 에드워즈-삼위일체 , 몰트만-삼위일체 , 크리스토퍼 홀-삼위일체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홀리조이님이나 다른분들의 의견도 구합니다.